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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들의 기쁨

날짜 : 2011.12.18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목자들의 기쁨
성경본문 : 누가복음 2장 1-2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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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Norma) 라는 여자 아이가 있었습니다. 이 아이는 어릴 때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나서 남의 집에 입양되어 살아 갑니다. 어느 수양 가정에서 살게 되었는데 8살이 되었을 때입니다. 그 집에 하숙하는 하숙생에게 성폭행을 당합니다. 그 하숙생은 노마에게 5센트를 주면서 말합니다.
“자, 가져. 대신 이 일을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노마는 수양어머니에게 그 일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도리어 늘씬 얻어맞습니다. 수양어머니는 노마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 하숙생은 하숙비를 꼬박꼬박 잘 내는 사람이야. 다시는 그 사람에 대해 나쁜 말을 하지 마!”
노마는 마음의 상처와 외로움을 표현하려 했다가 매를 맞았습니다. 노마는 8살에 사람을 믿을 수 없는 그 고통이 얼마나 큰지를 배워야 했습니다. 결국 노마는 할리우드로 도망을 갑니다. 할리우드에서 이름을 바꿉니다. 마릴린 몬로(Marilyn Monroe).
한편 할리우드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몬로를 하나 같이 미워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제작진들을 몇 시간씩 기다리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제작진들은 몬로가 몸치장하느라고 늦는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몬로는 모든 것이 너무 무서워 분장실에서 토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의 미모로 인해 아무도 그의 고통을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는 세번 결혼을 했으며 매번 물었다고 합니다.
“당신은 나를 하나의 인간으로 보았나요?”
몬로는 서른 다섯의 젊은 나이로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몬로가 세상을 떠난지 거의 50년이 되어 갑니다. 몬로는 그래도 세기적인 스타이기에 그의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몬로의 아픔을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몬로이니 그분의 아픔이 알려지기 시작했지, 몬로처럼 자신의 어두움과 두려움 가운데 수많은 사람들이 그동안 살아 왔고 또 지금도 이 땅 위에 살고 있지 않을까요?
이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본인이 원하지 않은 채 삶의 희생자가 되어서 살고 있는데, 이들에게 크리스마스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크리스마스 장식은 이들에게 깊은 상처만을 더해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 대강절 네번째 주일로 지킵니다. Advent wreath의 촛불이 네개 다 켜졌습니다. 아기예수를 기다리는 마음이 이번 주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주에는 아기예수를 상징하는 하얀 촛불이 켜집니다.
지금 이대로 우리는 다음 주일에 하얀 촛불을 킬수 있을까요? 일주일이 지났다고 말입니다. 아직도 우리 이웃에는 많은 사람들이 말 못할 상처를 안고 시름하고 있는데요. 마지막 남은 한 주를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말씀을 상고하며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크게 두 이야기로 나뉘어 집니다. 첫 이야기는 요셉 가정이 가이사의 명령으로 호적하러 베들레헴으로 내려 간 때에 아기예수가 탄생한 기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는 제일 먼저 아기 예수를 찾아가 뵌 목자들의 이야기가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 두 이야기는 너무도 잘 알려진 이야기지만, 읽을 때마다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면이 있습니다.
첫 번째 이야기에는 왜 아기 예수가 먼 여행 중에 탄생할 수밖에 없었는지 질문이 생깁니다. 말구유에 태어나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더라면 집안에 다른 일이 생기게 해서라도 말구유에 태어나게 하실 수 있었을텐데 말입니다. 두 번째 이야기에도 한 가지 질문이 듭니다. 천사들이 왜 제일 먼저 목자에게 나타났는지 질문이 생깁니다. 목자들 앞에서 천사들이 대공연을 펼치지 않았습니까? 신학자들은 그들이 소외된 자들이었다고 말씀들 하시지만 소외된 자들이 그들뿐이었겠습니까? 그러면 먼저 두 번째 질문부터 살펴볼까요? 10-12절을 보면 질문에 대한 실마리를 찾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목자들이 첫번째 목격자가 될 것을 천사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 첫 목격자의 출현이 얼마나 소중했던지를 우리는 다음 귀절을 통해 쉽게 알 있습니다. 13, 14절 말씀입니다.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천사들은 지금 메시야의 탄생을 축하하며 축하 공연을 펼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공연을 위해서 만세전부터 준비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멋진 공연을 보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불과 몇 명의 목자들입니다. 불과 몇 명만 보기에는 너무도 아까운 공연입니다. 지난번 저희 교회에서 Ruth 뮤지칼을 공연했는데 백여명이 와서 관람하셨지만 그래도 더 많은 분들이 보지 못한 것에 많은 아쉬움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천사들의 대 합창과 비교하면 극히 소규모의 공연이었는데도 말입니다. 왜 이처럼 대공연을 소수의 목자들에게만 보여주셨을까요? 15절 말씀입니다.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천사들은 놀라운 우주적 쇼를 마치고 떠나 갔습니다. 초원에는 다시 적막이 찾아 왔습니다. 목자들은 ‘베들레헴으로 가서 이루어진 일을 보자’ 말하며 베들레헴으로 들어갑니다. 적막이 찾아 왔지만 이들은 밤에 움직이는 것에도 익숙해 있던차라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낮이건 밤이건 풀을 찾아 다니곤 하던 이들은 아무 두려움 없이 베들레헴으로 들어갑니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낮에 아니면 최소한 새벽빛이 비추기 시작할 때 베들레헴으로 들어 가려고 했을 것입니다. 어두운 밤을 피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목자들은 떠나는데 늘 익숙해 있던 사람들입니다. 떠나는데는 시간에 구애를 받지 않습니다. 언제든지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면 깜깜한 밤에도 떠나는 사람들입니다. 맹수가 가까이 오는 것 같으면 양 떼를 몰고 떠납니다. 꼴이 많은 초원을 따라서 이 동네 저 동네로 떠납니다. 이들은 이 놀라운 우주적 공연을 보고 안 떠날리가 있겠습니까?
사실 목자들은 가난하고 고된 삶을 살던 사람들입니다. 밤에 양을 친다는 자체가 얼마나 삶의 시름이 많았겠습니까? 그러나 이들은 그 고된 삶을 통해서 한 가지 마스터한 것이 있었는데 바로 언제나 떠날줄 아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떠날줄 아는 목자들을 택해서 첫번째 목격자로 삼으신 것이 아닐까요? 떠날줄 알기에 목격자가 되게 하셨고 그러기에 이들 앞에서 최고의 쇼를 펼치게 하신 것이 아닐까요?

이처럼 떠남의 관점에서 오늘 본문 말씀을 살펴보면 정말 떠남과 주님과의 관계는 끊을래야 끊을 수 없음을 쉽게 할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첫 장면도 떠남의 관점에서 이해하면 훨씬 이해가 잘 됩니다. 가이사 아구스도의 명령으로 천하로 다 호적하라고 하였기에 요셉은 떠나야 했습니다. 떠남의 과정 가운데서 아기예수가 탄생한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과 마리아만 떠난 것이 아닙니다. 아기 예수도 하늘나라를 떠나서 이 땅에 내려 오셨습니다. 또한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하여 천사들도 잠시 하늘나라를 떠났습니다. 또한 천사들의 멧세지를 받은 목자들도 놀라운 대합창을 들은 후 양들을 초원에 남겨두고 베들레헴으로 떠났습니다. 그리스도의 소식은 곧 떠남의 사건입니다.

교우 여러분, 그동안 우리는 대강절은 기다림의 시간이라고 여기고 기다림의 소중함을 깊게 묵상하였습니다. 그런데 기다림과 떠남은 뗄레야 뗄 수 없는 연쇄적 사건입니다. 수천년간 메시야의 탄생을 기다렸다는 것은 메시야가 하늘 나라를 떠나 인간세계로 오실 것을 기다린 것입니다. 주님의 떠남을 기다린 것입니다. 앞으로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린다는 것은 주님이 하나님 보좌 우편을 떠나 다시 인간 역사에 찾아오시는 것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곧 기다림은 떠나는 사람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제일 잘 기다리겠습니까? 떠남의 아픔을 아는 자들이 아닐까요? 떠날줄 아는 사람이 기다릴줄 압니다. 떠남을 모르는 기다림은 참 기다림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 뿐 아니라, 성경은 떠남과 기다림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구약도 매한가지 입니다. 출애굽사건으로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 민족은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가나안 땅에 들어갑니다. 그 후 가나안 땅에서는 떠남이 없었을까요? 그런데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서 새로운 떠남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세 절기를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 이 절기에는 모든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 예루살렘에 와서 제사를 지내게 되어 있었습니다. 일년에 세번 떠난다는 것은 돌아서면 떠나고 돌아서면 떠나곤 하는 삶을 산 것입니다. 물론 이 명령을 잘 지켰는냐? 그렇게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거의 이 명령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떠남의 삶을 살도록 하나님은 명령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 땅에서 떠남을 거부했었기에 바벨론 포로가 되어서 떠나게 되었습니다. 도리어 그곳에서 최고의 삶을 누리게 됩니다. 떠날줄 알던 사람들만 최고의 삶을 누립니다.

우리 안에 거위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우리는 지붕이 없는 우리입니다. 언제나 마음만 먹으면 날라갈수 있는 우리입니다. 하늘을 날던 거위가 우리 안에 살고 있는 거위들을 보았습니다. 우리 안에 거위들에게 내려와 말합니다.
“우리 밖에는 더 멋진 세계가 있어. 바다와 산과 강 그리고 넓은 초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 나와 함께 우리 밖으로 나가서 바깥 세상을 즐기자.”
우리 안에 거위들은 고개를 끄덕 끄덕만 합니다. 그러나 움직이지 않습니다. 우리 안을 떠나기를 거부합니다.

미국에 사는 저희는 떠나 본 사람들입니다. 고국을 떠나 왔습니다. 떠남의 아픔이 있습니다. 그런데 미국에 오래 살게 되면서 어느덧 정착민의 피가 우리들 안에 흐르게 되지 않았습니까? 이 땅에서 안주하며 가장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자들이 되지 않았습니까? 우리 안에 거위가 되지 않았습니까? 일 년에 한번 대강절을 맞이할 때면 주님을 기다린다는 노래를 입술로만 부르고 있지 않습니까?
물론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을 당장 다 내려 놓으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있는 곳에서 떠날 준비를 하지 않고는 진정한 기다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대강절 네번째 주일예배를 드리는데 우리는 떠날 준비를 마무리 해야 할줄 압니다. 우리가 가장 귀하게 여기고 있는 이 땅의 삶에서 떠날 준비가 되지 않고는 결코 주님을 기다리는 삶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떠남의 주님이시기에 떠날줄 아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떠날줄 아는 사람들을 당신의 오심의 목격자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처음 마릴린 몬로의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그 분이 왜 그처럼 비극적 인생의 길을 갈수 밖에 없었을 까요? 몬로가 어릴 때 받은 상처로 괴로워하고 있을 때 주위에서는 도리어 최고의 배우가 될 것을 권유했습니다. 미모로 삶의 승부를 걸 것을 권유한 것입니다. 결국 미모의 노예가 됩니다. 어두움의 노예가 됩니다. 평생 무서움 가운데 살아간 것입니다.
오늘도 몬로와 같은 수많은 사람들이 공포와 두려움 가운데서 하루 하루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과연 누구를 필요로 할까요? 세상에서 성공할 수 있는 지혜를 주는 사람일까요? 그렇다면 더 큰 우리에 가두어 놓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몬로처럼 말입니다.
세상이 절하는 사람은 목자와 같은 사람들이 아닐까요? 떠날줄 아는 사람입니다. 두려움을 놓고 떠나고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것을 놓고 떠나고, 메시야를 기다리며 언제든지 떠날 준비가 된 사람들 말입니다.
어느 유목민족의 장군의 묘비에 다음과 같은 글이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성을 쌓고 사는 자는 반드시 망할 것이고 끊임없이 이동하는 자만이 살아남을 것이다.”
그러므로 대강절은 우리를 붙잡아 매어 놓은 것에서 떠남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를 묶어 놓고 있는 두려움과 공포에서 떠날줄 알아야 합니다. 아울러 우리 스스로를 위해서 쌓아 놓은 성에서 떠날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을 떠나는 자들을 찾아오십니다. 그들과 함께 하십니다. 두려움과 고통가운데 있는 자들을 도우기 위해 떠나는 자들을 찾아오십니다. 그 주님을 기다리십시다.

말씀을 거둡니다. 그러나 떠나는 삶에 대해서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실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독일 뮌헨에 사시는 한국인 작가 김영희씨가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어느날 뮌헨 한복판에서 촛불시위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독일인들이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외국인을 사랑하자.’
‘우리도 외국에 나가면 외국인이다.’
‘외국인을 미워하는 어느 집단도 절대 반대다.’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외국인들이 국가의 세금을 축낸다고 하면서 외국인들을 몰아내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었을 때였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뜻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외국인 보호에 앞장을 섰고 촛불시위를 벌인 것입니다. 그것도 작은 숫자가 아닌 35만 명이 참여하였다고 합니다. 외국인으로 살고 있는 김영희씨는 촛불 시위를 보면서 뮌헨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글을 썼습니다.

촛불시위에 참여한 35만 명은 바로 이웃을 위하여 떠날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작은 떠남이 모여서 세계를 밝게 만드는 것입니다. 35만개의 촛불은 바로 이 세상을 밝히는 우주적 쇼가 되지 않았을까요? 그들은 뮌헨이란 서안에 살면서 한편 그 성을 떠날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아기예수가 하늘나라를 떠나셨습니다. 우리도 우리들의 마음을 우리들의 성에서 떠나게 하십시다. 그 마음을 안고 아기 예수를 맞으러 목자들의 뒤를 따라 가십시다. 마음의 상처로 고통가운데 있는 자들을 위하여 촛불 시위를 하십시다. 우주적 쇼에 동참하십시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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