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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팬데믹IX: 여호와의 말씀을 두려워 하는 자들은…” 출애굽기 9장 13-35절 (09/19/2021)

기원전 280년의 일입니다. 그리스왕이었던 에피루스의 피로스 왕이 있었는데 지중해 연안의 패권을 쟁취하기 위해서 로마와 싸워야 했습니다. 2만5천명의 군대와 유명한 코끼리 부대를 이끌고  쳐들어 갔습니다. 로마 연합군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지리한 공방이 계속 됐지만 결국 피로스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전투에는 승리했지만 피해도 적지 않았습니다.

다시 다음 해에 이번에는 서쪽으로 침공을 해서 로마 연합군과 싸웁니다. 치열한 난전이 이틀 동안 계속됐습니다. 또 다시 승리를 거뒀습니다. 그러나 이 때도 1만5천명의 전사를 잃었습니다. 이들은 정예 병력들이었습니다. 결국 피로스 왕은 부하들에게 말합니다.

“이런 식의 승리를 한 번 더 하게 되면 우리는 완전히 망하고 만다.” 그리고는 이탈리아 패권을 포기하게 됩니다. 이처럼 승리했지만 실속이 없는 승리 곧 패배와 다름 없는 승리를 ‘피로스의 승리’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그런데 피로스의 승리라는 말이 나오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다는 것입니다. 한글판 위키피디아에서는 이런 피로스의 승리를 임진왜란을 비롯 28개를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이중에는 당연히 베트남 전쟁과 아프간 전쟁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뿐 아니라 요즘은 재판에서 법적인 승리를 거둔 경우도 많은 경우 피로스의 승리로 마치게 되는 기사를 쓰신 분도 있습니다.

 

곧 피로스의 승리는 오늘까지 인류 역사 한복판에 어젓이 자리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 승리를 한 것 같지만 결국은 승리로 가장한 패배의 삶은 늘 우리들 삶에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피로스의 승리를 처절하게 경험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4천년 전 애굽에서 있었습니다. 모세와 이스라엘민족입니다. 의아하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궁금한 마음으로 계속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피로스는 두 번 승리하고는 백기를 들었습니다. 더 이상 로마를 공략하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그러면 모세와 이스라엘은 어떠했을까요?

 

오늘 출팬데믹 아홉번째 말씀을 나눕니다. 오늘은 일곱번째 재앙 곧 우박의 재앙 이야기를 나눕니다. 지난 여섯가지 재앙을 살펴 보면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번째 두번째 재앙은 바로에게 모세가 “내 백성을 보내라” 라고 말하면서 바로 앞에서 재앙을 내립니다. 그런데 세번째 재앙은 바로가 없는데서 내리게 하십니다. 곧 바로에게 “내 백성을 보내라” 말하지 않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네번째 다섯번째 재앙도 바로 앞에서 “내 백성을 보내라” 말하면서 재앙을 내립니다. 그런데 여섯번째 재앙은 바로의 목전에서 행하긴 하지만 “내 백성을 보내라” 전하지 않습니다.

한편 오늘은 일곱번째 재앙인데 일곱번째 재앙과 여덟번째 재앙은 바로가 보는 앞에서 “내 백성을 보내라” 외침과 함께 재앙을 내립니다. 반면 아홉번째 재앙은 바로가 없는데서 내리게 하십니다. 곧 “내 백성을 보내라” 말하지 않은 것입니다.

저나름대로 재미있는 현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제가 저나름대로라고 표현하는 것은 주석가들은 이에 대해 아무 언급을 안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냥 넘어가기는 너무 우연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운 것 같아서 말씀드립니다.

 

그래서 저는 피로스의 승리의 개념과 함께 열 재앙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피로스의 승리의 특징은 두번 승리한 후 포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왜 포기하느냐 이기긴 했어도 남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첫째 두째 재앙으로 모세는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나일강물을 피가 되게 하였고 개구리를 온 애굽땅에 가득채웠습니다. 그러나 바로는 꿈쩍하지 않습니다. 이겼지만 진 것입니다. “내 백성을 보내라” 라는 말이 무색해진 것입니다.

한편 세번째는 티끌을 이가 되게 하는 재앙인데 이번에는 바로에게 “내 백성을 보내라” 말하지 않고 도리어 바로가 없는 곳에서 재앙을 일으키게 하십니다.

 

마찬가지로 네번째 파리떼 재앙과 다섯번째 가축 전염병 재앙은 바로 앞에서 “내 백성을 보내라” 라는 말과 함께 행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그 다음으로는 지난 주 나누었던 여섯번째 악성종기 재앙은 “내 백성을 보내라” 말씀은 없이 바로 앞에서 재 두 움큼을 던집니다. 애굽인들에게 악성종기가 생겼습니다. 바로는 꿈쩍 안 합니다. 피로스의 승리의 두 싸이클이 마쳤습니다. 이제 일곱번째 재앙은 다음과 같이 시작됩니다. 13절 말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바로 앞에 서서 그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이번에는 다시 “내 백성을 보내라” 외치게 하십니다. 두 차례 피로스의 좌절감에 젖어 있는 모세와 이스라엘민족에게 또다시 피로스의 피곤한 승리에 동참시키려는 것 같습니다. 어쩔수 없이 모세는 명령대로 행합니다. 19절 말씀,

“이제 사람을 보내어 네 가축과 네 들에 있는 것을 다 모으라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릇 들에 있어서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들에게는 우박이 그 위에 내리리니 그것들이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

그런데 이번에는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납니다. 20절 말씀,

“바로의 신하 중에 여호와의 말씀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그 종들과 가축을 집으로 피하여 들였으나.”

 

그동안 피로스 콤플렉스에 있었는데 역사는 보이지 않게 진행이 되고 있었습니다. 여섯번의 재앙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 하는 자들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종들과 가축을 집으로 피하여 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는 자들은 들에 그대로 두었습니다. 이에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기다립니다. 22절 말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하늘을 향하여 손을 들어 애굽 전국에 우박이 애굽 땅의 사람과 짐승과 밭의 모든 채소에 내리게 하라.”

모세가 기다렸다는듯이 지팡이를 하늘을 향하여 듭니다. 25, 26절 말씀,

“우박이 애굽 온 땅에서 사람과 짐승을 막론하고 밭에 있는 모든 것을 쳤으며 우박이 또 밭의 모든 채소를 치고 들의 모든 나무를 꺾었으되. 이스라엘 자손들이 있는 그 곳 고센 땅에는 우박이 없었더라.”

 

모세는 놀라운 경험을 합니다. 고센 땅에는 예상된대로 우박이 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기대된 바였습니다. 기대하지 않았던 것은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믿는 자들이 생긴 것입니다. 구원이 애굽인들에게도 임한 것입니다.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이 열려 있는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놀라운 깨달음을 주는 사건입니다.

 

한편 혹시가 또 역시 바로는 다시 마음을 완고하게 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로스의 위장한 승리가 아니었습니다. 피로스의 승리가 아니라 여호와의 참 승리를 맛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사람들이 생겼으니 말입니다.

이는 놀라운 싸인입니다. ‘싸인’ 하니 생각나는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탄식을 하면서 이 세대에게 줄 싸인은 요나의 싸인이라고 하셨습니다.

 

요나의 싸인에 대해서 죠나단 에드워드는 다음과 같은 설교를 합니다.

“고래가 요나를 삼켰듯 사탄은 그리스도를 삼켰다. 하지만 마치 독을 삼킨 것처럼, 그리스도는 사탄의 배 속에서 치명타를 날렸다. 사탄은 곧 자기가 삼킨 것 때문에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고통스러운 고래가 요나를 뱉을 수밖에 없었듯이 사탄도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다. 사탄은 먹잇감으로 생각하고 삼킨 것 때문에 지금도 몸서리치고 있다.”

 

사실 바로는 제 아무리 재앙이 내려도 자기 허락 없이는 이스라엘민족이 떠날수 없음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통쾌해 하지 않았을까요? 아니 겉으로는 신하들과 백성들 앞에서 더 뻐게지 않았을까요? 이 정도로는 까딱 안 한다고…. 그러나 이미 고래가 요나로 인해 몸서리치듯이 바로의 몸서리는 벌써 시작이 되었던 것입니다.

고래가 요나를 삼켰듯이 바로는 모세의 재앙을 일곱번 삼켰습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바로의 몸서리는 매번 제곱으로 더해졌을줄 압니다.

 

사실 저도 이번 팬데믹 기간 피로스의 콤플렉스에 잠시 빠졌었습니다. 여러분 모두도 그러시겠지만 팬데믹 기간 매일 관심있게 보는 통계가 있습니다. 확진자 수와 사망자 수입니다. 백신을 맞게 되면서 확진자 수가 나날이 줄었습니다.

매사츄세츠 주의 통계를 늘 보아 왔는데 어느 날 보니 33명이 되었습니다. 이제 좀 있으면 거의 제로가 되겠구나 하면서 큰 기대에 부풀었었습니다. 그런데 델타변이로 인해서 갑자기 통계숫자가 나날이 높아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야말로 피로스의 콤플렉스를 느꼈습니다. 백신으로 인한 기쁨도 잠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안감이 다시 몰려 왔습니다.

 

한편 지난주 우박에 대한 말씀을 준비하면서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통계숫치가 올라가면 갈수록 사탄이 승리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따라 생각해 보면 사탄의 몸서리는 더욱 심해지는 것입니다. 승리하는 것 같지만 질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한 증거가 오늘 본문 말씀 31, 32절 말씀입니다.

“그 때에 보리는 이삭이 나왔고 삼은 꽃이 피었으므로 삼과 보리가 상하였으나 그러나 밀과 쌀보리는 자라지 아니한 고로 상하지 아니하였더라.”

삼과 보리는 이미 자라서 상했지만 밀과 쌀보리는 아직 자라지 않아서 상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박을 보내셔도 이 모든 것을 고려하시면서 보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크게는 애굽인들을 위해서 곡식을 남기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사탄이 어떻게 이기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여섯번의 재앙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 애굽인들을 심어 놓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애굽인들을 향한 사랑의 시작이고 보이지 않는 승리였습니다. 한편 일곱번째 재앙을 통해서는 밀과 쌀보리는 남겨 두셨습니다. 우박을 피하게 하셨습니다. 아직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애굽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승리였던 것입니다.

 

하여튼 이처럼 우박 재앙은 모세와 이스라엘민족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게 됩니다. 모세는 그 후 물론 광야에서 우박을 또 만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박을 만나게 된다면 좋은 추억거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우박은 이스라엘과 애굽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승리의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우박은 저희 교회와도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오래 되신 제직분들은 잘 아실줄 압니다. 저희 교회가 교육관 건축을 마치고 매달 만여불에 해당하는 몰기지를 내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본당 지붕이 바람에 날라가기 시작했습니다.

지붕도 고쳐야 하는데 여러가지로 재정적으로 부담이 많았습니다.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는데 어느날 지붕 수리하는 회사에서 이 지역에 우박이 지나 간 것을 알고 드론으로 저희 교회도 우박의 피해를 본 것을 확인해 주었습니다.

보험회사에서 큰 수리비를 받아서 지붕을 다 고치고 남은 돈은 일단 예비비로 저금해 놓을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자라지 아니한 밀과 쌀보리는 남겨 두신 것입니다.

건축후 피로스의 콤플렉스에 제가 좀 걸려 있었는데 큰 위로가 되었고 물론 요즘 코로나로 인해서 교회 재정이 여유롭지는 못해도 필요할 때 우박을 내리신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가끔 찾아오는 피로스의 콤플렉스를 극복하곤 합니다.

 

그러나 온전한 우박의 축복은 이웃 안에서 완성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를 통해서 이웃이 복을 받을 때 진정한 우리에게 주신 우박의 축복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세상적인 승리는 우리에게 피로스의 승리를 가져다 줍니다. 결국은 이겼지만 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재앙 안에는 놀라운 축복이 숨겨져 있습니다. 패한 것 같지만 이기는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의 승리는 결코 피로스의 승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승리는 때로는 열매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 놀라운 열매가 담겨져 있습니다.  믿는 자들을 위한 열매와 함께 안 믿는 자들을 위한 사랑의 열매가 신비스럽게 담겨져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출팬데믹은 피로스 콤플렉스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실패 같지만 승리가 담겨져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 여정은 영원한 승리를 향한 놀라운 걸음거리인 것입니다. 이 축복을 누리고 또 누리십시다.

 

말씀을 거둡니다.

하나님의 승전가를 부르며 한국을 위해 평생을 바치신 마포삼열 선교사님이 계십니다. 1890년 미국 북장로교 파송 선교사로 조선에 입국합니다. 이 때 나이는 26세. 그는 72세 미국에 돌아갈 때까지 46년을 한국 선교를 위해 일생을 바칩니다. 이 때가 1936년.

그는 모든 조선 선교가 서울에 집중되어 있을 때 지방 선교의 중요성을 깨닫고 평양에 신학교를 자신의 사랑방에서 시작합니다. 이 평양 신학교가 요즘 장신대의 전신이 됩니다.

마포 삼열 선교사님은 신학 교육뿐만 아니라 사회 정의에도 눈을 뜬 선교사였습니다. 그 당시 미국 선교사는 미국 정부의 정책에 따라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했습니다. 그래서 일제의 만행에 대해 발언할 수 없었지만 그는 침묵하기를 거부합니다. 마포삼열 선교사님의 이러한 분명한 정의감은 일제의 신사참배와 정면 충돌하게 됩니다.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하다가 결국 그는 추방을 눈앞에 두게 되는데 가열되는 일제의 압박 속에 ‘곧 돌아오리라’는 기약을 남기로 1936년 한국 땅을 떠납니다. 아쉽게도 그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3년 후인 1939년 마포삼열은 캘리포니아의 한 시골 마을에서 외롭게 삶을 마감합니다. 사실 지인의 차고를 개조한 임시 처소에서 생애의 마지막을 외롭게 맞이 한 것입니다. 그는 피로스의 콤플렉스로 인해 세상을 하직했을까요?

그러나 그의 유해가 다시 한국 땅으로 돌아 왔습니다. 2006년 한국을 떠난 지 70년만에 장신대 개교 105주년을 맞아 아내 루시아의 유해와 함께 장신대 교정 앞에 안장되었습니다.

 

그리고 장신대를 통해서 얼마나 놀라운 주의 종들이 탄생되었는지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결코 피로스의 승리가 아님을 알수 있습니다. 그는 애굽과 같은 조선 땅에 와서 조선인들을 위한 우박이 된 것입니다.

아울러 그 결과가 바로 오늘 보스톤에서도 주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사는 우리들입니다. 사탄의 몸부림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그 증거입니다.

 

남은 팬데믹 기간 실패의 시간으로 생각하며 아파했던 우리의 모습에서 벗어나 도리어 때로는 실패로 보였던 시간 안에 주님의 승리가 담겨 있음을 체험하는 놀라운 출팬데믹의 나날을 보내십시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바로의 신하 중에 여호와의 말씀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그 종들과 가축을 집으로 피하여 들였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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