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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 시편 121: 1-8 (01/16/2022)

예쁜 아가씨와 할머니가 과일가게에 들렸습니다. 아가씨는 생글생글 웃으며 가게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아저씨, 이 사과 한 개에 얼마예요?”

“사과 한 개 정도는 뽀뽀 한 번 해주면 그냥 줄수도 있어요.”

“좋아요. 그럼 다섯개 주세요.”

가게 주인은 얼른 사과 다섯개를 주면서 아가씨에게 말합니다.

“자, 이제 뽀뽀 다섯번 해줘요.”

그러자 아가씨가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계산은 저의 할머니가 하실거예요.”

 

오늘 새해 세번째 예배를 드리는데 어떤 의도로 이런 이야기로 설교 말씀을 시작하시나 궁금하실줄 압니다. 새해도 두 주가 지나고 오늘부터 세번째 주간을 맞이 하는데 올해 하나님께서 저희를 실망시키실까요?

사실 이 이야기를 차분히 살펴 보면 모든 것의 시작은 아저씨에게 있었습니다. 사과 한 개 정도는 뽀뽀 한 번 해주면 그냥 줄수 있다고 말을 먼저 건 것입니다. 그리고는 된통 실망한 것입니다. 스스로 실망거리를 자초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한 해를 시작해야 할까요? 말씀을 상고하며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1, 2절 말씀입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시편을 해석할 때 제일 중요한 것은, 물론 일반적으로 시를 해석할 때 중요한 점과 같을줄 압니다만, 시에 나오는 이미지를 먼저 찾는 것입니다.

시인은 지금 산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왜 산을 바라 보고 있을까요? 이 시는 예루살렘으로 순례의 길을 떠난 사람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자주 자주 자주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일년에 세차례 예루살렘으로 순례의 길을 떠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지키지 않았습니다. 극소수의 사람들만 지켰습니다. 오늘의 주인공인 시인은 그 극소수 곧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극소수에 해당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 순례자는 먼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순례의 길을 떠난다고 누가 밥먹여 주는 것도 아닙니다. 일하던 일손을 놓고 떠날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순례자들에게는 두 가지 어려움이 늘 있었습니다. 길에서 만나는 강도의 위험, 그리고 일을 당분간 하지 못하는 경제적 부담.

그런데 이를 일년에 몇번? 세 차례…,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 세 차례를 지켜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오면서 이런 노래를 부를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두려움이 생길 때마다 산을 바라 봅니다. 산을 바라 보면서 산을 지으신 하나님을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산을 바라 보면서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은 좋은데 산을 바라 보다 보면 어떤 문제가 생기죠? 언젠가 읽은 글이 있는데 아마도 세계여행을 많이 한 한비야씨 글인듯 합니다. 그는 말하기를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 것은 산이 아니라 작은 흙더미’라고 말했습니다.

 

시인의 눈은 먼 산을 바라 봅니다. 먼 산을 바라 볼 때마다 산의 신비를 느끼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보통 때는 흙더미에 걸려 넘어지곤 했는데 순례의 길을 가는 동안 넘어지지 않습니다. 이에 시인은 고백합니다. 3, 4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하나님께서는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는 분이라는 체험을 아무나 할까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순례의 길을 떠나는 자들에게 주어진 특권이 아닐까요? 이와 같은 맥락에서 영성가 크랄 힐티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모든 존재 및 생성의 근원으로서의 신은 설명할 수도, 증명할 수도 없다. 또한 그래야 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선 신을 믿고, 그 다음에 몸으로 경험해야 한다. 이것은 거듭 확실하게 말해두지 않으면 안 될 명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실제로 몸으로 경험하게 하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례의 길을 가기를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는 분임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뿐일까요? 이들에게는 더 놀라운 경험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5절 말씀,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하나님을 찬양하지만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꼼짝 못하게 올가미를 씌우고 있는듯 합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그림자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권능을 상징하는 오른편의 그림자. 그런데 그늘이 생기려면 무엇이 필요하죠? 6절 말씀,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지구가 최고의 신비로운 행성이 되어 있고 지구에 저희가 살면서 늘 지구의 아름다움을 경탄하며 지냅니다. 그런데 지구가 지구되게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태양과 달 아닙니까?  이 둘은 우리가 필요한 빛을 주는 것 이외에도 밀물 썰물을 일으켜서 지구의 신비를 헤아릴수 없게 만들고 있습니다.

 

뜨거운 햇빛을 오래 쏘이면 위험합니다. 일사병의 위험이 있습니다. 달도 매한 가지입니다. 밤의 달빛은 사람의 정신을 혼미하게 한다고 해서 달을 뜻하는 lunar에서 정신이 돈 사람 곧 lunatic이라는 말도 생긴 것 아닙니까?

 

곧 순례의 길을 가다보면 해와 달빛의 신세를 지고 또 지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일사병의 위험이나 정신적인 혼미가 올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아무 염려 없습니다. 해와 달이 비칠 때마다 오른편에는 하나님께서 그림자가 되셔서 함께 하시니 말입니다. 순례자의 길을 가는 자들은 세상이 주는 축복과 저주의 양면성에서도 염려할 필요가 없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어두움의 그늘의 자리에 축복의 그늘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놀라운 깨달음과 함께 어느덧 예루살렘에 도착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으로 오르면서 노래를 마감합니다. 7, 8절 말씀.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그는 이번에도 처음에 순례의 길을 떠날 때는 많이 망설이고 망설였지만 담대히 떠나 온 것을 잘 했다고 생각합니다. 영혼의 쇄신을 순례의 길을 통해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더욱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가벼운 마음으로 귀가한 후 다음 순례의 길을 기대하게 됩니다.

자기만 다음번의 순례의 길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동료들에게도 재촉하는 것입니다. 너무도 값진 체험을….

그런데 그 순례의 길은 코 앞에 또 다가와 있습니다. 일년에 세번 가야하니…. 이는 곧 일년내내의 삶이 곧 순례자의 삶이었던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올 한해가 이런 멋진 한 해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희 교회 첨탑에 시계가 있습니다. 물론 요즘은 하루에 두번씩 맞는 시계입니다. 멈춰져 있다는 뜻이죠. 요즘은 모르겠는데 얼마전까지만 해도 가끔 지나가던 사람이 교회에 들어 와서 시계가 틀린다고 고치라고 하는 분들이 계셨습니다.

시계가 하나가 아니고 사방으로 네개로 되어 있어서 수리비가 너무 많이 들어서 엄두도 못 내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다행히 요즘은 모두 디지털 시계를 갖고 있어서 더 이상 교회 첨탑을 보고 시간을 체크하는 사람은 없어진 것 같습니다.

 

한편 최근에 왜 교회 첨탑에 시계를 달게 되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저의 추측도 많이 들어간 생각이긴 합니다. 일단 이 건물을 지을 당시는 디지털 시대가 아니기에 그럴수도 있었겠지만 실은 이 교회 건물이 1960년대 지어졌는데 그 때만 해도 많은 사람들은 손시계를 차고 있을 때였습니다. 저도 그 때 중학생이었는데 시계를 차고 다녔으니 미국사람들은 더 말할 나위 없었으리라 봅니다. 그러면 왜 첨탑에 시계를 만들어 놓았을까요?

 

최근 이런 글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시간과 계절을 측정하고 이를 백성에게 널리 알려 사용하도록 하는 것이 왕이나 황제의 권한이자 임무였다. 시간은 하늘의 뜻이며 이 세상의 질서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조선 시절 궁궐에서 물시계인 자격루, 해시계인 앙부일구로 시간을 재어 큰 종과 북으로 백성들에게 알렸다고 한다. 따라서 시계는 왕권의 상징인 셈이다.”

 

그러면 이런 상상도 가능하다고 봅니다. 세상 사람들은 시간을 알기 위해서 교회 첨탑을 바라 보았습니다. 그들은 교회 첨탑을 바라 보면서 첨탑 제일 위에 있는 십자가를 보게 되었을 것입니다. 왕의 왕이 달리셨던 십자가를…. 이런 의미에서 십자가 아래 시계탑을 넣은 것은 놀라운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시인이 순례길에서 높은 산을 바라보다가 하나님을 생각하게 된 것처럼….

 

물론 교회가 이와 같은 맥락에서 왕권을 이어받아서 첨탑에 시계를 설치한 것은 아닐줄 압니다. 순수히 주민들에게 시간을 알리고자 설치했을줄 압니다. 한편 시간을 넘어서 시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한 생각도 늘 스쳐지나가곤 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이젠 좋은 시절은 다 지나갔습니다. 더 이상 시간을 알기 위해 아무도 교회 첨탑을 보지 않습니다. 모두 훨씬 정확한 디지털 시계를 갖고 있습니다. 대신 세상 사람들은 자기들이 필요한 것들만 보면서 하루 하루를 지내고 있습니다. 올 한 해도 어떤 것들을 보면서 지낼지 세상 사람들은 다 정해 놓은채 한해를 시작한 것입니다. 빠진 것이 있다면 교회입니다. 교회 첨탑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때에 교회 첨탑의 역할을 할 자들이 누구일까요?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교회첨탑을 통해서 창조주의 그림자를 그동안 보아 왔던 세상 사람들에게 바로 매해 순례의 길을 가는 자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그림자를 보게 해 주시지 않으실까요?

 

실은 하나님께서 세 차례 순례의 길을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시기 오래 전에 이 순례의 길을 모범적으로 가셨던 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온 세상에 첨탑이 되신 분입니다. 바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이 헤브론에서 아내 사라 그리고 이삭과 함께 재미있게 살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22:2절에 보면 갑자기 하나님께서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리아 산이 후에 예루살렘이 됩니다. 삼일 길을 헤브론에서 걸어서 모리아 땅까지 순례의 길을 간 것입니다. 누구를 제물로 바치려고?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후에 순례의 길을 가는 사람들은 그냥 걷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들이 가기 오래 전에 이미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과 함께 갔던 그 길을 걸어가곤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에 탄복하고 탄복하면서…. 아브라함의 이 믿음을 탄복했던 사도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로마서 4: 17절,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바울은 아브라함이 삼일길의 순례의 길을 갈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이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심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곧 바울이 상상한 아브라함의 순례자의 모습은 이러지 않았을까요?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하나님.”

 

한편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에서 죽었던 이삭이 다시 사는 놀라운 체험을 한 것입니다. 이삭 대신에 하나님께서 여호와 이레의 어린 양을 준비시켜 놓으신 것입니다. 순례자의 최고의 경지를 체험한 것입니다.

올해 순례의 길을 가는 자들에게 이런 축복이 임할 것입니다. 아울러 이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셨듯이…. 이들이 바로 시계탑과 같은 자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당대에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누렸나요? Yes & No. 이삭은 다시 주셨지만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땅의 모래와 같이 많게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자녀의 축복은 주시지 않으시고 그나마 백세에 겨우 얻은 이삭도 바치라고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뽀뽀를 받은 것이 아니라 뺨따귀를 맞은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지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그 증거입니다. 우리가 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자손들이 되었고 이제는 우리가 시계탑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아브라함은 당대에 그 축복을 볼수 없었을까요? 아브라함이 사는 삶의 환경은 너무 좁아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수가 없었습니다. 수천년에 걸쳐서만 완성되는 약속을 어떻게 가나안 땅이라는 좁은 땅에서 이루실수 있으셨겠습니까?

 

아브라함이 있는 땅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기에는 좁은 땅이었습니다. 약속을 믿기에는 완벽한 땅이었습니다. 아니 약속을 받기에는 넓은 땅이었습니다. 이삭의 ‘르호봇의 신비’ ‘넓다의 신비’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곧 우리의 삶의 현장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지고 르호봇의 노래를 부르기에는 충분한 땅인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올해 표어를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 “주여 주는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정하고 순례의 길을 힘차게 떠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의 축복은 올 한 해라는 시간과 공간에서 이루어지기에는 너무도 거대하기 때문입니다. 그 약속은 수년에 걸쳐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함께 올해의 말씀을 외치며 순례의 길을 힘차게 떠나십시다.

“주여 주는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위대한 약속은 오고 가는 세대 가운데서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다시금 세상을 위한 교회 첨탑의 역할을 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순례의 길에서 지칠 때마다 아브라함의 고백을 하십시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우리들의 그늘이 되실 것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실뱅 테송은 ’여행의 기쁨’이란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여행은 여행자가 외부 세계에 감행하는 습격이며, 여행자는 언젠가 노획물을 잔뜩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약탈자다.”

 

아브라함도 약탈자였습니다. 시인도 약탈자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약탈하였습니다. 순례의 길을 감으로…. 하나님을 자기들의 그림자로 약탈하였습니다. 올해는 우리가 약탈자가 되십시다.

 

약탈자는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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