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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단과 다윗” 사무엘상 20:30-42 (01/23/2022)

 

잘 아시는 함석헌 선생님의 ‘얼굴’이라는 시를 소개해 드립니다.

 

얼굴

 

함석헌

 

우리가 세상에 뭐하려고 왔나?

 

얼굴 하나 볼라고 왔지

세상에 나돌아다니는

찌그러진 얼굴

 

근심 많은 얼굴

남을 괴롭히는 얼굴 별의별 얼굴이 다 있는데

참 평화로운 얼굴은 볼 수가 없구나

 

그 얼굴만 보면 세상을 잊고

그 얼굴만 보면 나를 잊고

시간이 오는지 가는지 모르고

 

밥을 먹었는지 아니 먹었는지 모르는 얼굴

그 얼굴만 대하면 키가 하늘에 닿은 듯하고

그 얼굴만 대하면 가슴이 큰 바다 같애

 

남을 위해 주고 싶은 맘 파도처럼 일어나고

가슴이 그저 시원한 그저 마주앉아

바라만 보고 싶은

 

참 아름다운 얼굴은 없단 말이냐?

 

 

이 시를 통해서 시인은 성공한 삶은 어떤 삶인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 얼굴을 보았다면 이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입니다. 세상도 잊고 나도 잊게 하는 얼굴을 본 이는 성공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마 시인은 더 깊은 뜻을 안고 이 시를 쓰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얼굴을 볼수가 없다면 그 얼굴을 소유한 사람이 되라고 애타게 권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렇지 않으면 괜히 왔다가 가는 삶이 되고 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새해도 네번째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저희는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밟기를 원했던 2022년도의 시간의 축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 한 해의 축복을 누리려면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시인은 은연 중 말하고 있습니다. “그 얼굴을 보아라. 볼수 없다면 그 얼굴을 소유한 자로서 살아라.” 과연 어떤 사람들이 이 축복을 누리게 될까요? 말씀을 상고하며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오늘 설교제목을 ‘요나단과 다윗’으로 정했습니다. 많은 경우 두 사람을 칭할 때 ‘다윗과 요나단’으로 부릅니다. 요즘 궁금하면 구글을 두드리지 않습니까? 구글로 ‘다윗과 요나단’이라고 치지 않고 ‘요나단과 다윗’으로 쳐 봤습니다. 결과는 ‘다윗과 요나단’으로 되어 있는 자료들이 대개 뜨고 간혹 ‘요나단과 다윗’으로 뜨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면 제가 왜 제목을 ‘요나단과 다윗’으로 정하게 되었는지 살펴보며 그 얼굴을 소유하는 삶은 어떤 삶인지를 나누려고 합니다. 사실 요나단과 다윗의 관계를 제일 잘 보여주는 말씀은 오늘 본문 말씀이 아닌 사무엘상 19:1절 말씀입니다.

“사울이 그의 아들 요나단과 그의 모든 신하에게 다윗을 죽이라 말하였더니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다윗을 심히 좋아하므로.”

 

얼뜻 읽으면 제일 곤란을 당한 사람이 다윗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다윗의 신세는 처량합니다. 사울왕이 신하들을 시켜서 죽이라고 하니 그야말로 생명이 간달간달합니다. 그런 면에서는 다윗의 처지가 쉽게 이해가 됩니다.

한편 요나단의 입장을 생각해 보십시다. 요나단은 다윗의 친구로 다윗을 먼저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다윗을 죽이라고 합니다. 요나단도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사울은 다윗에게 왕위를 빼았길 두려움에 사로 잡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아버지입니다. 자신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이 될 왕세자입니다. 왕권이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효도도 해야 하고 또 한편으로는 왕권도 달려 있고 그런데 아버지가 죽이고자 하는 다윗은 자기의 절친인 것입니다.

요나단과 같은 곤궁에 처했던 사람이 과연 역사 가운데 몇 명이나 있을지 궁금한 생각이 들지 않을수 없습니다.

 

‘관포지교’라는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관중과 포숙이란 사람의 우정이야기로, 둘다 춘추시대 제나라 사람인데 둘은 어릴 적부터 친구였습니다. 그러나 라이벌이 된 서로 다른 주군을 모셨습니다.

관중은 친구 포숙이 모시던 소백을 죽이려다 실패합니다. 소백이 왕이 된 후 당연히 자기를 죽이려 하던 관중을 처형하려고 하는데, 관중의 친구 포숙이 나서서 천하를 도모하려면 관중같은 인재를 곁에 둬야 한다며 재상으로 천거합니다.

실은 소백이 왕이 될 때까지 도운 건 포숙이니까 포숙이 재상이 되는 게 당연했는데, 포숙은 친구 관중의 생명을 구할 뿐 아니라 재상 자리까지도 양보합니다. 그래서 관중과 포숙의 관계를 말하는 관포지교가 아름다운 우정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나단과 다윗의 관계는 이와는 비교도 안 됩니다. 조금 전에 봉독해 드린대로 사울이 다윗을 죽이고자 하니 요나단은 다윗에게 일단 사울의 눈을 피해 도망 가 있으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사울에게 다윗을 한참 칭찬한 후 다윗에게 안심하고 사울 앞에 다시 나타나라고 합니다. 그랬더니 다윗은 요나단을 믿고 나타났지만 사울이 다윗에게 창을 던집니다. 다윗은 간신히 피하여 멀리 달아나게 됩니다.

다시 요나단과 다윗이 만나서 이번에는 새로운 작전을 핍니다. 다윗을 들에 숨게 하고 요나단이 화살을 쏜 후 화살이 앞에 있다고 사환에게 말하면 사울이 죽일 계획을 갖고 있으니 달아나라는 싸인임을 먼저 약속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오늘 본문 말씀으로 넘어 갑니다.

 

본문 말씀 31절에 다윗을 향한 사울의 마음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새의 아들이 땅에 사는 동안은 너와 네 나라가 든든히 서지 못하리라 그런즉 이제 사람을 보내어 그를 내게로 끌어 오라 그는 죽어야 할 자이니라 한지라.”

요나단은 아버지의 마음은 더욱 굳어져 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어쩔수 없이 다윗에게 약속한 대로 다음날 사환과 함께 들에 나가서 다윗이 듣도록 화살을 쏜 후 사환에게 외칩니다.

“화살이 네 앞쪽에 있지 아니하냐.”

사환은 아무 영문도 모르고 요나단에게 돌아 옵니다. 요나단은 사환을 성읍으로 보낸 후 장면입니다. 41절,

“아이가 가매 다윗이 곧 바위 남쪽에서 일어나서 땅에 엎드려 세 번 절한 후에 서로 입 맞추고 같이 울되 다윗이 더욱 심하더니.”

다윗은 왕세자에게 절을 세 번 한 것입니다. 그리고 요나단의 잊을수 없는 얼굴을 보면서 심하게 웁니다.

물론 다윗은 자신의 신세가 애처러워서 심하게 울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한 가지 더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 애처로운 얼굴의 소유자는 요나단입니다. 아버지와 친구 사이를 끊어 놓을수 밖에 없는…. 42절,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우리 두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 하였느니라 하니 다윗은 일어나 떠나고 요나단은 성읍으로 들어가니라.”

 

그 이후 사울은 다윗을 잡으러 동분서주 다니기 시작합니다. 그 무리 중에 어쩔수 없이 요나단도 함께 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요나단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한번은 다윗이 도망자 신세가 되어 사울을 피해 십 광야 수풀에 숨어 있었는데 요나단이 수풀에 들어가서 다윗을 만나 다윗을 응원합니다. 23:17절,

“곧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 아버지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아버지 사울도 안다 하니라.”

이렇게 말하고 요나단은 다시 두 사람의 언약을 확인하고 자기 집으로 돌아 갑니다.

 

아마 이것이 요나단과 다윗의 마지막 만남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요나단은 이 말을 했겠습니까? 다윗에게 용기를 주기 위함이었을줄 압니다.

“네가 승리자야. 끝까지 버텨…. 우리 아버지와 우리 집은….”

한편 이를 말하고 떠나는 요나단의 얼굴을 평생 다윗은 잊지 못했을줄 압니다.

 

그러면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다윗이 몇 년간 사울에게 쫓겨 다니죠? 장장 10년간…. 다윗에게도 힘든 시간이었지만 요나단에게도 무척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10년후 사울과 요나단은 블레셋 사람들과 전쟁에서 함께 전사합니다. 이 때까지 요나단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한편 다윗이 그 긴 십년을 견딜수 있었던 이유는 당연히 요나단 아니 요나단의 얼굴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다윗은 15살에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습니다. 왕이 될 것이라는 싸인이었습니다. 5년후 20살에 사울을 만납니다. 그 때부터 10년의 광야 생활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그 때는 광야 생활이지만 요나단과의 진정한 우정이 깊어가는 시간이었습니다. 우정으로 인해 그 어려운 시간을 견딜수 있었고 드디어 30세에 왕이 되었던 것입니다. 위대한 다윗 왕국을 건설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요나단 없이 가능했을까요?

 

제가 오늘 설교 제목을 ‘요나단과 다윗’으로 정한 이유는 바로 요나단이 함석헌 시인이 말하는 ‘그 얼굴’의 소유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이 세상에 온 보람이 있었습니다. ‘그 얼굴’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요나단은 다윗과 비교도 안되는 축복을 누렸습니다. 바로 ‘그 얼굴’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그 얼굴’이 사라질 때 세상은 어떻게 될까요? 역사상 가장 비참한 전쟁 중 하나가 30년 전쟁입니다. 위키피디아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30년 전쟁은 유럽에서 로마 가톨릭교회를 지지하는 국가들과 개신교를 지지하는 국가들 사이에서 벌어진 종교 전쟁이다. 유럽 뿐만 아니라 인류의 전쟁사에서 가장 잔혹하고 사망자가 많은 전쟁 중 하나였으며, 사망자수는 800만 명이었다.”

특히 개신교의 종주국이라고 할수 있는 독일 인구의 1/3-2/3가 사망했다고 합니다.

30년 종교전쟁은 1618년에 시작합니다. 곧 종교개혁이 1517년에 시작했으니 그후 100년이 지나서 구교와 신교 사이에 불화가 커지면서 터진 전쟁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결국 30년후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구교와 신교의 문제는 일단락을 짓게 됩니다.

 

한 국가가 한 종교를 선택할수 있게 함으로 마무리를 짓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종교 갈등이었지만 후에는 다른 정치적 갈등으로 발전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시작은 종교적 갈등이었습니다.

 

개신교는 말씀의 중요성만을 강조하고 구교는 전통을 강조하면서 서로의 얼굴을 보지 못함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개신교는 이성을 강조하며 말씀으로 자기들의 얼굴을 가렸고 구교는 감성을 강조하며 전통으로 자기들의 얼굴을 가렸습니다. 두 얼굴은 모두 자기만 옳다고 생각하는 분노의 얼굴들이었습니다.

이유는 요나단의 얼굴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요나단이 사라질 때 세상은 신의 이름으로 이런 전쟁의 도가니로 변할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반면 요나단의 얼굴이 세상에 나타날 때 다윗을 탄생시킵니다. 위대한 나라가 건설되는 것입니다.

 

요나단의 얼굴은 어떤 얼굴이라구요? 친구를 걱정하며 10년간 아버지 뒤를 따라서 안타깝게 울며 고통했던 얼굴입니다. 다윗은 이 얼굴을 마음에 새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 아무리 사울이 무서운 얼굴로 자기를 잡으려고 달려 들어도 차분하게 도망 다닐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왕위에 앉히실 때까지….

 

결국 10년간 다윗을 쫓던 사울은 요나단과 함께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전사하게 됩니다. 이 소식을 듣고 다윗은 자기 옷을 잡아 찢습니다. 그리고 노래를 만들어서 이것을 유다 족속에게 가르치기까지 하라고 명합니다. 이 노래가 사무엘하 1: 19-27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몇 절만 소개해드립니다. 25-27절,

“오호라 두 용사가 전쟁 중에 엎드러졌도다. 요나단이 네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였도다.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으며 싸우는 무기가 망하였도다.”

 

사실 이 노래를 보면 다윗의 위대함도 드러납니다. 다윗은 요나단만 높이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죽으려 했던 사울도 높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도 요나단의 얼굴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다윗은 사울로 부터는 악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모습이 다윗의 심장을 늘 썩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다윗의 삶을 고귀하게 가꾸어갔습니다. 사울로 인해 썩어질수 밖에 없는 다윗의 심성은 요나단으로 인해 도리어 늘 새롭게 피어나곤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수많은 시를 지은 것이 아닐까요? 결국은 다윗으로 하여금 자신의 원수인 사울조차도 칭송하게끔 만든 것입니다. 여기에 요나단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 왕국의 시작은 다윗이 아니라 요나단이었습니다. 다윗은 요나단의 얼굴에서 십자가를 지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았을줄 압니다. 주님의 모습을 보면서 40년간 이스라엘을 훌륭하게 다스렸습니다.

 

올해 우리에게 주신 2022라는 선물을 그냥 보내지 마십시다. 그 얼굴의 소유자가 되십시다. 주님의 얼굴의 소유자가 되어 가십시다. 새로운 역사가 펼쳐질 것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셍떽쥐베리의 어린 왕자에 어린 왕자와 여우의 대화가 나옵니다.

 

“네가 장미를 위해 할애한 시간이 네 장미를 아주 소중한 것으로 만들어 주었어.”

“내가 장미를 위해 할애한 시간이…….”

어린 왕자가 그 말을 기억하기 위해 되뇌었다.

“사람들은 그 진실을 잊어버렸어.”

여우가 말했다.

“그렇지만 넌 그것을 잊으면 안 돼. 넌 네게 익숙해진 것들을 지켜 줄 책임이 있어. 넌 장미를 책임져야 해…….”

 

요나단은 다윗을 책임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윗을 위한 그 얼굴의 소유자가 된 것입니다. 올해 그냥 보내지 마십시다. 책임져야 할 사람을 정하고 끝까지 사랑하십시다. 인물을 세워가는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수년 내에 놀라운 인물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우리 두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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