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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평하게 하는 자는…” 마태복음 5:1-9 (04/10/2022)

 

고진하 시인의 ‘천국엔 아라비아 숫자가 없다’라는 시를 소개해드립니다.

 

“한여름의 시청 광장

마천루 위에 까마득히 떠 있는

광고탑, 뜨겁게 달아오른 아라비아 숫자들이

불인두처럼 이글이글 내 몸에 닿아

쉬 지워지지 않을 깊은 문신을 아로새긴다

…중략…

오, 결핍은

작렬하는 사막에 솟은 불기둥인 양

아무데서나 불타오르고

터번도 두르지 않은 아라비아 숫자들이

태양을 삼킨 채

광고탑에서 이글거리고 있다”

 

조금 과장을 넣어서 이 시를 해석하면 시인은 천국과 세상을 아주 간단하게 구분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아라비아 숫자로 득실 거리는 곳, 반면 천국은 아라비아 숫자가 전혀 없는 곳….

 

이 시를 읽고는 금방 난 생각이 있습니다. 저희 또래가 학교 다닐 때 특히 고등학생 시절 많은 학생들이 가방에다 이렇게 써 놓고 다녔습니다.

‘고생 보따리.’

제가 고등학교 3학년 때는 전 학생들의 석차가 매달 프린트가 되어 교실 뒷편에 늘 붙여지곤 했습니다. 왜 붙여 놓았겠습니까? 가장 높은 곳으로 채찍질 하라는 경고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 고생보따리를 들고 다녀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시작이었습니다. 대학교는 물론이거니와 사회에 나와서도 늘 숫자가 인생의 가장 높은 곳에서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아니 위협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마칠 때까지 숫자는 계속 우리를 따라 다닐줄 압니다. 더 말씀 안 드려도 잘 아실줄 압니다.

 

그러면 천국은 아라비아 숫자 대신 무엇으로 가득차 있을까요? 쉽게 천국에는 숫자가 없음을 금방 생각하게 됩니다. 숫자는 경쟁을 뜻합니다. 경쟁 사회를 질서 있게 만드는 방편이 숫자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세상 질서를 위해서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필요 없습니다. 천국의 주인공들인 하나님의 아들들은 숫자에 사로잡혀 있지 않을터이니 말입니다.

 

한편 오늘의 본문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천국에는 무엇으로 가득차 있는지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번 오늘 본문 말씀을 봉독해 드립니다. 이번에는 원어를 직역해서….

“복되도다. 화평케 하는 자들이여…,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그러면 경쟁사회 가운데서 화평케 하는 자들은 어떤 자들일까요? 왜 이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일컴음을 받게 될까요?

 

오늘은 종려고난 주일로 지킵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성 가까이 오신 후 한번도 타 보지 않은 나귀새끼를 타시고 입성하시는 모습을 묵상하며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이 주님의 모습이 화평케 하는 삶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려 준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마태복음에는 안 나오지만 누가복음에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19: 41, 42절,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주님은 나귀 새끼를 타시고 입성하시면서 한편으로 한탄하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당신이 나귀새끼를 타신 이유를 모르신다는 것입니다. 반면 이 나귀새끼를 타는 것이 평화와 깊은 관계가 있음을 은연중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혼자 되뇌이신 것입니다.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저는 감히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주님은 오늘 본문 말씀 곧 일곱번째 팔복을 말씀하실 때 언젠가 아니 삼년후 당신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나귀 새끼를 타실 것을 상상하시며 이 말씀을 하시고 계셨을줄 압니다. 주님은 평화의 길을 완성시키시려고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며 일곱번째 팔복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 당시 유대인들은 1년에 세번 예루살렘으로 순례의 길을 떠나 왔습니다.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 주님께서 공생애 마지막으로 세번째 순례의 길을 떠나 오셨고 이번에는 특별히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고 계십니다.

원래 순례자들은 먼 길을 나귀나 말을 타고 오다가도 예루살렘성에 와서는 걸어서 예루살렘을 들어 왔다고 합니다. 물론 이 때도 로마군인들은 당연히 말을 타고 들어 왔구요. 유명한 타이투스 황제는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 자신의 마차가 들어오기에 예루살렘 성문이 좁아서 성문을 부수고 넓혀서 마차를 타고 들어 온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나귀새끼를 타신 것은 아주 묘한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군인들처럼 말은 아니지만 나귀 새끼를 탔기에 왕권을 소유한 모습으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고 계신 것임을 알수 있습니다. 순례자들은 나귀를 타고 오다가 성으로 입성할 때는 걸었는데, 주님은 반대로 걸어서 오시다가 나귀새끼를 타신 것입니다. 당신은 왕으로서 평화의 왕으로 입성하시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한편 주님께서 입성하실 때 제자들은 옷을 길에 펴고 많은 사람들이 노래를 부릅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이 노래도 주님이 평화의 왕으로 오시고 있음을 찬양하는 노래입니다. 물론 이를 부르는 무리들은 자기들이 부르는 노래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었지만….

 

한편 주님께서 나귀새끼를 타시고 입성하시는데 무리들의 합창을 들으시면서 무슨 생각이 나셨을까요? 당연히 다윗의 어떤 모습이 생각나지 않으셨을까요? 기억하실지 모르시겠지만 작년도 송년 주일 예배시 ‘다윗의 군대’라는 제목으로 사무엘상 22:1, 2절 말씀을 본문으로 설교 말씀을 드렸었습니다. 다시 한번 본문을 읽어드리면,

“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다윗은 사실은 경쟁에 실패한 자들의 장군이 되었던 것입니다. 숫자 게임에서 진 사람들의 왕이었던 것입니다. 곧 꼴찌 왕이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 다윗의 자손이 되어서 꼴찌 왕이 되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숫자를 모르는 자들의 왕을 통해서 세상에 평화가 올 것임을 보여 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주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여김을 받게 될 것임을 주님은 예루살렘 입성을 통해서 보여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세상의 꼴찌들은 숫자에 약합니다. 그래서 꼴찌가 된 것입니다. 곧 꼴찌들의 손에는 숫자가 들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숫자 감각이 없습니다. 그러면 그들의 손에는 무엇이 들려져 있을까요?

 

유대문학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기도를 드리다가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모를 경우 랍비들은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냥 알파벳을 외우라고 합니다. 그러면 천사가 알파벳을 맞추어서 아름다운 기도문을 만들어 하나님께 상달케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식으로 하면 ‘ㄱㄴㄷㄹㅁㅂㅅㅇㅈㅊㅋㅌㅍㅎㅏㅑㅓㅕㅗㅛㅜㅠㅡㅣ.’

반면 아라비안 숫자는 외우면 안 됩니다. 전혀 상달이 되지 못합니다. 천국에는 아라비아 숫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1234567890’ 아무리 외워도 하늘 나라에 전달이 안 됩니다. 천국문턱을 넘어가지 못합니다.

 

한편 이번 설교 준비를 하면서 재미 있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저의 짧은 음악상식으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음계도 보면 숫자로 매기지 않은 것 같습니다. ‘도레미파솔라시도’도 그렇고, 이를 영어 알파벳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CDEFGAB….

 

사실 다윗은 시인이고 음악가이었는데 곧 다윗은 숫자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좀 교만해지다 보니 숫자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전 국민의 통계를 내게 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 혼납니다. 다윗의 숫자를 좋아했던 죄으로 인해 애꿎은 이스라엘 민족 7만명이 죽습니다. 다윗은 말년에 이웃나라보다 얼마나 커졌는지 숫자로 알아 보길 원했던 것입니다.

 

이로서 알수 있는 것은 숫자는 경쟁입니다. 숫자에는 평화가 임하지 않습니다. 숫자는 높아지려는 본성을 갖고 있습니다. 비극을 초래합니다.

한편 글자는 혼자서는 아무 의미를 갖지 못 합니다. 다른 글자들과 합해질 때 아름다운 뜻을 발휘합니다. 곧 글자는 늘 화평으로 향합니다. 음계와 같이…. 그러니 천국에는 숫자는 없고 글자만 있을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한 가지 숙제는 남아 있네요. 천국에는 숫자는 없고 알파벳으로 가득찬 것 까지는 풀렸는데 그 알파벳은 어떤 알파벳이기에 화평하게 하는 자들이 복이 있는 것인지….

 

올해도 홍보위원회의 수고로 사순절을 뜻깊게 보내고 있습니다. 위원장님이 마감 1주일 전까지 10편밖에 안 들어 왔다고 저에게 교우님들께 간곡한 광고 말씀을 전해달라고 해서 올해는 원고 내용도 빈약하려니 생각했지만 그 어느 해 못지 않게 충실한 내용의 글들로 꽉 채워져 있음을 매일 한 편씩 읽으면서 체감하고 있습니다.

그 중 오늘 설교 말씀과 연관된 글이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함께 신앙 생활하시다가 텍사스로 이주하신 어느 집사님의 글이었습니다.

제목은 ‘중보기도.’ 한 문장만 읽어드리면,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 그 말이 사실은 아주 다 맞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데 어떻게 자신할 수 있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딱 한 가지 제가 할 수 있는 고백이 있답니다. 바로 ‘중보기도’예요. 보고 싶으면 언제든 만날 수 있는 거리가 더이상 아닌 곳에 살면서 제가 유일하게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방법이 ‘중보기도’였습니다.”

 

위해서 중보기도를 드리는 자와 경쟁할리가 없습니다. 도리어 화평의 사람이 되어 갈 것입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작년 이맘 때 제가 주기도문 씨리즈 설교 말씀을 여덟 차례에 걸쳐서 말씀드렸는데, 제일 첫번째 설교 제목은 당연히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있는 자’ 곧 ‘여호와’라고 자신의 이름을 밝히시기 전에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처음으로 당신의 이름을 소개하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 그리고 이를 당신의 영원한 칭호라고 또 다시 강조하십니다.

그리고는 제가 결론적으로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의 이름을 당신의 이름으로 여기신다고…. 그리고 이 이름이 끝없이 길게 연결되어지길 원하신다고….

하나님은 숫자를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무한대의 하나님 앞에서 숫자는 하등 의미가 없습니다. 반면 당신의 이름이 무한정 길어지시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무한정 길게 만드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사는 자들이 곧 화평케 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 안에 하나님의 이름이 내재해 있음을 믿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사람을 숫자로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봅니다.

그리고 이들은 믿습니다. 모든 이름 안에는 각자의 특유한 멜로디가 담겨져 있음을…. 서로의 특유한 멜로디가 조화를 이루어서 우렁찬 교향곡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천상을 울리는 교향곡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작은 땅에서부터…. 꼴찌왕을 따르는 자들로 부터 시작됩니다. 이들은 모든 사람 안에 알파벳을 보는 자들입니다. 그들의 특유의 알파벳은 그들만이 소유한 최고의 하나님의 이름인 것입니다. 이웃 안에 하나님의 이름을 볼수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만이 누리는 특권인 것입니다. 이들이 화평케 하는 자들입니다.

 

반면 숫자를 우상으로 삼고 있는 자들은 꼴찌들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꼴찌들을 혐오하기에 꼴찌왕을 십자가에 달리게 한 것입니다. 이에 주님은 십자가에서 외치셨던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 외침으로 인해 세상의 꼴찌들이 하나님의 이름이 되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칼커타의 테레사 수녀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나님은 높고 초월적이시고 전능하십니다. 제가 너무 작기에 저는 잘 이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작아지셨습니다. 그리고 나의 사랑을 갈망하십니다. 애걸하십니다. 저는 이해할수 없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저는 이해가 됩니다. 하나님은 숫자에 찌들려 사는 우리들에게 오셔서 우리들의 이름이 되시길 원하십니다. 모든 사람 안에 이름이 되시기 위해서 작아지셨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가능하게 된 것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외치셨기 때문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주님께서 꼴찌 왕이 되셨기에 거센 숫자들의 폭풍을 뚫고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들 안에 들어올수 있었던 것입니다.

 

숫자의 폭풍 가운데서 이웃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이름을 찾아 내십시다. 그 이름을 부르십시다. 이것이 화평케 하는 삶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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