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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기다림” 시편 42:1-5 (11/27/2022)

멕시코 시티의 한 시장 구석에서 어느 노인이 양파 스무 줄을 놓고 팔고 있었습니다. 시장 구경을 하던 한 미국인이 노인에게 양파 한 줄이 얼마냐고 물었습니다. 10 센트라고 대답했습니다. 두 줄은 얼마냐고 하니 20센트라고 말합니다. 1센트도 안 깎아 주니 또 묻습니다. 세 줄을 사면 얼마냐고…. 30센트라고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많이 사도 깎아주지 않으니 모두 사면 얼마냐고 물었습니다.

“모두 한꺼번에는 팔지 않습니다.”

“왜요?”

“지금 모든 것을 팔면 집으로 빨리 들어갈 수 있어도 시장에서 누리는 행복을 잃게 됩니다.”

 

미국인은 한 대 맞은 기분이 들었을 것입니다. 당연히 두 줄 세 줄 사면 discount를 받을 것을 기대했는데…. 도리어 엉뚱한 답변을 들었던 것입니다.

노인이 사는 세계와 미국인이 사는 세계는 분명 다른 세계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노인이 사는 세계에 더 마음이 끌리지 않습니까? 노인에게는 있고 미국인에게는 없는 그 세계는 어떤 것일까요?

 

오늘 대강절 첫째 주일 예배로 드립니다. 실은 대강절이 교회력의 시작입니다. 이처럼 교회력의 새해를 대강절로 지키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동안 잃었던 삶의 본질을 되찾고 새해를 멋지게 하나님께 드리기 위함인줄 압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는 삶의 본질을 되찾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상고하며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1절,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시인은 누구 보다도 간절히 주님을 사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자신이 주님을 사모하는 모습을 사슴의 모습에서 보았던 것 같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은 산양이 많이 살고 있습니다. 산양들은 그야 말로 절벽에서 삽니다. 맹수들을 피해서…. 그러니 물을 얻는 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늘 목이 마릅니다. 목 마름 가운데 있다가 기회가 되면 아니 물을 만나면 급히 내려와 물을 마십니다. 이처럼 시인은 늘 산양을 볼 때 마다 주님을 간절히 찾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시인은 주님을 간절히 사모하고 있을까요?

 

이를 알려면 저자가 누구인지를 살펴 보면 큰 도움이 됩니다. 사실 표제어에 이 시인의 정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라 자손의 마스길,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고라 자손에 대해서 언젠가 말씀드린 것 같지만 다시 소개해 드리면 고라는 레위지파로 모세와 아론의 사촌입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고라는 자기 사촌인 모세와 아론이 온 민족을 다스리고 또 제사장직이 아론의 자손으로 이어지는 것에 배가 아팠습니다. 그래서 모세와 아론에게 거역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모세와 아론에게 거역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거역하는 것입니다.이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십니다. 하나님은 땅을 가르고 거역한 250명을 빠져 죽게 합니다. 그리고 만사천칠백 명이 전염병에 걸려 죽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고라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거역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살아 남습니다. 고라는 비참하게 죽었지만 아들과 자손들은 하나님의 자비로 살아 남습니다. 그냥 살아 남은 것이 아닙니다. 감사하게도 자기들에게 주신 사역은 계속하게 됩니다. 어떤 사역이었을까요?

 

지난번 부부청년부 헌신 예배 시 강사 목사님께서 고핫 자손이 성막과 성기구를 옮기는 사역을 맡았다고 말씀하셨는데 물론 모세나 고라 모두 고핫 자손입니다.

자비하신 하나님께서는 고라의 죄로 인해서 고라 자손들을 벌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아니 원래 주신 사역을 그대로 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고라의 자손은 계속 광야에서는 성막을 옮기는 사역을 하게 됩니다. 물론 가나안 땅에 들어 와서는 성전을 돌보는 일을 맡게 되었구요.

 

그러면 광야에서 성막을 옮기면서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요? 자기 조상 고라가 하나님을 거역한 것을 생각하면 정말로 자기들도 죽어 마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계속 성전을 관리하고 성막을 옮기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겠습니까? 어쩌면 사촌인 모세나 아론의 자손들보다 더 주님을 사랑하였을 것입니다. 아니 사모했을 것입니다.

 

말씀드린대로 고라 자손은 레위 지파인데 레위 지파 안에 다른 자손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시편 기자들은 하나님을 갈망하는 자의 모델을 고라 자손들에게서 찾은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이 5권으로 되어 있는데 그 중 2권의 첫 시편을 바로 고라 자손의 시로 고른 것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간절히 하나님을 찾는지 계속 살펴 보겠습니다. 2절,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아마 시인은 무슨 일인지 당분간 성전에 갈수 없게 된 것 같습니다. 어떤 주석가는 이 시는 바벨론 포로시 쓰여졌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전에는 일년에 세번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에 성전을 방문하곤 하였는데 더 이상 그럴수 없게 된 것은 틀림 없습니다. 3절 말씀을 보면 시인이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더 잘 알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일단 바벨론 포로가 되어 있는 이스라엘 자손이라고 가정하겠습니다. 바벨론 사람들은 조롱합니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이에 대답할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면 어떻게 바벨론 포로가 되어서 살고 있느냐고 주위 사람들이 비꼬고 있으니 말입니다. 대답은 못하고 대신 고백합니다. 4절,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아, 이제 더 뚜렷해졌습니다. 시인은 회중들을 성전으로 인도하는 성직자였습니다. 그 때를 너무도 그리워 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고라 자손으로 교인들을 성전으로 이끌수 있는 자격이 없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회중들을 인도하곤 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이 인생 최고의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이제 바벨론 포로가 되어 그 때 일을 생각하니 고통이 밀려 옵니다. 그래서 고백하는 것입니다. 4절 하반절 다시 한번 봉독해 드리면,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그런데 갑자기 반전이 일어납니다. 5절,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도리어 자신을 책망하며 자신에게 명령합니다.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여기서 다시 표제어로 돌아갑니다. 표제어에, ‘고라 자손의 마스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마스길의 뜻은 ‘교훈’입니다. 곧 ‘고라 자손의 교훈’입니다. 이로서 알수 있는 것은 비록 고라 자손은 하나님을 거역한 자의 자손일지라도 그들은 항상 하나님께 소망을 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지금 바벨론 포로 생활 한 복판에서도 스스로에게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사실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제일 이 말을 할 자격이 없는 자들이 바로 고라 자손입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바로 고라 자손의 이 고백을 고라 자손의 교훈으로 삼고 시편 제2권을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라 자손은 하나님께 소망을 둘수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조상의 죄 때문에…. 그러나 그들은 조상의 죄에 불구하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있는 모습을 그들은 사슴에서 아니 광야의 산양에서 보곤 하였던 것입니다.

산양들은 맹수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물을 찾아 헤멥니다. 이처럼 고라의 자손은 선조의 죄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선조들의 죄를 뚫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것입니다. 이들의 삶이 어느덧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의 교훈이 된 것입니다. 조상의 죄악도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이길수 없었던 것입니다.

 

한편 조상의 죄를 뚫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시인은 고백합니다.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인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확신하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제가 지난번 전교인 찬양의 밤에서 시편에 대한 개괄적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중에 드린 말씀은 시편에 나오는 시들은 거의 모두 아직 기도 응답을 받지 않은채 찬양을 드리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바로 대표적인 시가 오늘의 고라 자손의 시입니다.

 

전혀 눈 앞에 보이는 것으로는 소망이 없습니다. 그래서 낙심하려는 마음이 생기려 합니다. 이에 스스로에게 교훈을 하는 것입니다.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하나님께 소망을 둘 때 바라는 것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아도 최고의 찬양을 하나님께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망의 힘입니다. 소망이 있는 자들은 아니 하나님을 바라는 자들은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하나님께 최고의 찬양을 드리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진실로 최고로 높으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기도의 제목이 이루어진 후 드리는 찬양은 기도의 제목 만큼의 찬양을 올리게 됩니다. 반대로 하나님께 소망을 둔 자는 정말로 하나님께 합당한 최고의 찬양을 올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찬양 사역의 모델을 시편 기자들은 고라의 자손들에게서 찾은 것입니다.

 

그러면 한 가지 질문이 떠오릅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려면 조상의 끔찍한 죄가 꼭 필요한가?’ 저는 C. S. Lewis의 ‘순전한 기독교’에 나오는 글에서 해답을 찾을수 있었습니다.

“만약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것들로 채워지지 않는 욕구가 내 안에 있다면, 그건 내가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에 맞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 가장 그럴듯한 얘길 거야.”

 

모든 인간의 깊은 곳에는 이 세상 것으로 채워지지 않는 욕구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욕구는 결국 하나님을 소망할 때 채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12지파 중 레위지파, 그 중 고핫의 자손, 또 그 중 고라의 자손이 이 욕구를 발견하였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조상의 죄로 인해서 생긴 아픔으로 인해 다른 자손들보다 더 간절히 이 욕구를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들의 아픔은 어느덧 이스라엘을 위한 교훈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이스라엘 민족에게 아니 온 인류에게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바람으로써만이 깊은 욕구가 해결된다는…. 그리고 이 소망이 있는 자들은 언제 어디서나 찬양을 부를수 있다는 것을…. 기도 제목이 이루어지지 않았을지라도….’

 

처음 멕시코 상인 이야기로 돌아가서 그 노인 상인이 양파 스무 줄을 한꺼번에 다 팔지 않은 이유를 어렴풋이 알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는 한꺼번에 다 팔고 집에 일찍 귀가하는 것 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한 가지는 양파를 사러 오는 사람을 기다리는 즐거운 기대라고 할까요…? 묘한 스릴을 느끼며 다음에는 누가 올까 상상하면서 기다림의 시간 속에 잠기곤 했을지 모릅니다.

곧 그는 만남을 기다린 것입니다. 돈을 기다린 것이 아니라. 돈을 기다렸으면 당연히 한꺼번에 다 팔고 집으로 향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나 돈을 기다리지 않고 만남을 기다리게 될까요? 저는 확신합니다. 그는 세상이 줄수 없는 그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늘의 시인처럼….

 

그러므로 대강절은 세상이 줄수 없는 그 무엇을 기다리는 축복의 시간을 회복하는 절기입니다. 세상 보다 하나님께 더 소망을 두고 주님의 오심을 다시금 사모함을 회복하는 절기입니다. 주님의 오심을 사모하는 것이 우리들의 깊은 영혼의 욕구를 채우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고라의 자손과 같은 죄인들이 당신을 사모할 때 주님은 어떤 모습을 보여주실까요? 사실 시인의 간절한 소망에 따라 2천년 전에 주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사모하는 모든 자들에게 당신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특히 사도요한은 요한복음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두 단어로 표현했습니다.

“내가 목마르다.” (I thirst.)

놀랍게도 주님을 목말라 하는 자들에게 목마름 가운데 있는 당신의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주님은 한 인간로서 십자가에 달리신채 하나님의 사랑을 목마르게 소망하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들의 사랑을 목마르게 기다리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리신채 마지막 고백을 하신 것입니다.

“내가 목마르다.”

이로서 모든 인간들을 위한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이 주님의 고백은 마더 테레사에게 큰 영향을 줍니다.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주님이 우리의 사랑에 심히 목말라 하고 계심을 아는 것은 너무도 중요합니다. 물론 온 세상 사람들의 사랑도…. 스스로 물어보십시요: 주님께서 나에게 직접 다음의 말씀을 개인적으로 하셨는가를, “내가 목마르다. 너의 사랑을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원한다.””

 

곧 대강절은 주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목마르다” 외치시는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위한 시냇물의 물이 되어 드리는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주님을 사모할 때 우리는 시냇물의 물이 되는 것입니다.

 

한편 우리가 주님을 사모하며 주님을 위한 시냇물의 물이 될 때 우리는 어느덧 이웃의 갈증도 풀어주는 자들이 되지 않을까요? 마더 테레사 처럼….

 

그러므로 대강절은 목마른 자들의 축제인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들의 마음을 그리워하시며 외치십니다.

“I thirst.”

 

우리도 응답하십시다.

“I thirst.”

주님의 사랑을 목말라하며 아울러 이웃의 영혼을 목말라 하며….

 

말씀을 거둡니다.

어느 신학자는 전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발표했습니다.

“애즈버리 신학교의 복음 전도학 교수 조지 헌터는 30년 전에 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려면 5번의 의미 있는 만남이 필요했을 거라고 말한다. 오늘날에는 보통 12번에서 20번 정도의 넛지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넛지’라는 것은 꽤 충격을 주는 전도를 말합니다. 30년 전에는 5번이 필요했는데 요즘은 12번에서 20번 정도의 넛지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20번이 아니라 100번이라도 하게 될 것입니다. 이웃의 영혼의 목마름을 느낀다면 그리고 이웃의 영혼을 사랑하는 목마름이 있다면….

 

이 모든 것은 대강절을 참 대강절로 지킴으로 시작됩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시작됩니다.

“I thirst.”

 

아울러 주님의 음성을 따라 함으로 완성됩니다.

“I thirst.”

 

시인은 고백합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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