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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여 떨지어다.” 시편 114:1-8 (01/15/2023)

강원도 원주에서 목회하시는 고진하 목사님이 계십니다. 목사님은 시인이시기도 한데, 당신이 사시는 집 이름을 ‘불편당’이라고 부르시고 계십니다. 이유는 ‘불편하게 살아야 건강하다’라는 신념에서 나왔는데 그렇게 불편하게 사는 삶의 소중함을 몸소 체험하시는 분이십니다.

새롭게 이사를 간 후 보니 마당에 잡초가 많은데 문득 모든 잡초가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후로 모든 잡초에서 좋은 면을 발견하는 삶을 사시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중 대표적으로 질경이에 대한 글을 쓰셨습니다.

질경이는 설사 뿐 아니라 상처 치료 및 여러 가지  건강에 좋은 면을 여러 자료를 통해 설명해 주시고 계십니다. 사모님도 어느덧 잡초 전문가가 되셨는데 사모님은 질경이의 약효과를 다음과 같이 정리합니다.

“눈을 밝게 하고, 간을 치료한다. 혈관을 튼튼하게 하며 이뇨작용을 돕는다.”

물론 잡초는 독소가 있어서 꼭 요리를 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질경이를 가지고 여러 가지 요리를 하시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질경이는 주로 어디서 잘 자라죠? 길 가에서 많이 보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두 가지 큰 이유가 있는데 먼저 한 가지를 소개해 드립니다.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글을 씁니다.

 

“그렇습니다. 길 위에 사는 질경이는 끊임없이 짓밟힙니다. 그렇게 짓밟히면서도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은 뭘까요. 질경이는 잎 속에 강한 다섯 줄기의 강한 실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질경이는 이처럼 부드러운 잎 속에 강한 실 줄기를 지니고 있기에 밟혀도 죽지 않는 겁니다.”

 

오늘 새해 세번째 주일을 맞이하여 질경이를 소개해 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은 계묘년을 어떤 자화상을 안고 시작하셨습니까? 질경이의 자화상은 어떤지 해서 먼저 나누었습니다. 한편 저는 질경이의 모습을 이스라엘 민족의 모습에서 찾아 볼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시편은 표제어가 없습니다. 그래서 시의 배경은 알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일견해 읽으면 금방 알수가 있습니다. 전체의 이미지는 출애굽입니다. 1절,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며 야곱의 집안이 언어가 다른 민족에게서 나올 때에.”

당연히 출애굽 이야기임을 금방 알수 있습니다. 한편 2절을 보면,

“유다는 여호와의 성소가 되고 이스라엘은 그의 영토가 되었도다.”

특이한 점은 유다와 이스라엘을 나누어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유다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성소를 지키는 지파가 되었음을 암시하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가장 무난한 해석은 유다도 중요하고 나머지 11지파도 중요함을 뜻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고 봅니다. 사실 성소가 없는 영토도 무의미하고 영토 없는 성소는 생각조차 할수 없습니다.

 

곧 이것이 주는 암시는, 아마 이 시를 지을 때 이미 남왕국과 북왕국이 갈라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서로 못 잡아 먹어서 으르렁 거릴 때 시인은 이런 놀라운 이스라엘의 자화상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수 있다고 봅니다.

 

시인은 남왕국 북왕국으로 분열되어 있는 사랑하는 민족을 위해서 계속 이스라엘의 참 자화상을 써 내려 갑니다. 3절,

“바다가 보고 도망하며 요단은 물러갔으니.”

여호와의 성소와 여호와의 영토인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하고 나오는 것을 보고 바다가 도망을 쳤고 요단이 물러 갔다고 시인은 노래하고 있습니다. 바다가 도망을 친 것은 홍해 바다가 갈라지는 것을 말하고 있고 요단은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 땅으로 들어 오는 장면을 말하고 있음은 금방 알수 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저희 아버님이 미국 출장을 다녀 오신적이 있습니다. 그 때는 집에 TV도 있지 않을 때였습니다. 아버님이 미국 이야기를 해 주셨는데 그 때 마침 십계 영화가 처음 미국에서 상영되었는데 아버님이 십계를 보신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특히 인상 깊게 들은 것은 홍해가 갈라지는 장면을 아버님은 정말로 어떻게 그렇게 멋지게 촬영했는지 모르겠다면서 흥분 가운데 말씀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저는 출애굽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아버님께서 설명하셨던 그 모습이 늘 생각이 납니다. 물론 그 후에 저도 십계를 보면서 그 장면에 매료되곤 했습니다. 한편 계속 시인은 노래합니다. 4절,

“산들은 숫양들 같이 뛰놀며 작은 산들은 어린 양들 같이 뛰었도다.”

하나님의 성소와 영토가 출애굽한 후 바다와 강을 뚫고 나오는 것을 보고는 큰 산 작은 산들이 뛰놀았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인들의 사명 중에 하나가 일반인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것인줄 압니다. 이 시인도 실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있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출애굽’ 하면 생각하는 것은 ‘홍해’입니다. 그리고 ‘홍해’의 연장선이 ‘요단강’이구요. 시인은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출애굽은 ‘홍해’와 ‘요단’뿐이 아님을…. 시인은 보았던 것입니다. 큰 산과 작은 산이 숫양들과 어린 양들처럼 뛰놀았음을….

 

시인은 출애굽하면 홍해와 요단만 생각하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시인의 사명을 다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다와 강만 갈라진 것이 아니라 산과 들에 있는 모든 피조물도 기뻐 뛰놀았음을…. 이처럼 위대한 하나님의 민족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홍해와 요단강은 구원을 상징합니다. 아니 survive살아남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반면 산과 들은 thrive번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홍해와 요단을 건너 구원을 받은 이스라엘 민족이 이제 산과 들에서 thrive를 해야 함을 시인은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시인의 눈에 보이는 것은 남왕국 북왕국이 서로 다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통탄한 마음으로 계속 시를 써내려 갑니다. 5, 6절,

“바다야 네가 도망함은 어찌함이며 요단아 네가 물러감은 어찌함인가 너희 산들아 숫양들 같이 뛰놀며 작은 산들아 어린 양들 같이 뛰놂은 어찌함인가”

시인은 다투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놀라운 참 이스라엘 민족의 자화상을 애타게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위대한 민족이면 바다가 도망을 가고 산과 들이 뛰어 노는지….

 

Angela Davis라는 분이 자신의 자서전에서 자신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저는 거의 견디기 어려운 긴장 가운데 있습니다. 저는 마치 두 얼굴을 소유한 야누스와 같습니다.

한쪽 얼굴은 과거에 늘 매여 있습니다. 무섭고 폭력적이고 간혹 의미를 겨우 찾을수 있는 과거에 매여 있습니다. 물론 가족의 사랑으로 견딜수 있었지만…. 다른 쪽은 미래를 향해 기다림과 초조한 마음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많은 도전이 있고 물론 실패의 가능성이 늘 도사리고 있는 미래를 힐끗 보는 또 한쪽의 얼굴입니다.”

 

이 분의 자화상은 두 얼굴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의 아픔에 매여 있고 미래도 불안감 가운데 간신히 소망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아마 이스라엘 민족도 이런 비슷한 자화상을 갖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잠시 다윗과 솔로몬을 통한 통일 왕국을 이루지만 곧 남북으로 갈라진 과거의 모습이 늘 자기들을 붙잡습니다. 미래도 불안한 마음으로 희미한 소망을 안고 있습니다. 이런 자화상을 갖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시인은 선포합니다. 7절,

“땅이여 너는 주 앞 곧 야곱의 하나님 앞에서 떨지어다.”

이젠 시인은 더 이상 이스라엘의 자화상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땅에 명령을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들으라고….

시인은 ‘땅이여 주 앞 곧 야곱의 하나님 앞에서 떨지어다’ 명령하고 있는데 이유가 있습니다. 땅에게는 유다가 하나님의 성소여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영토입니다. 곧 땅에게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광야를 걸었고 드디어 가나안 땅에 들어 왔다는 것입니다.

 

저는 강아지를 좋아합니다. 집사람은 고양이를 좋아하고…. 한편 저는 산책을 즐겨 나가는데 산책을 하면 자주 만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강아지를 산책시키러 나온 사람들입니다. 많은 강아지들이 저를 보면 저에게 오곤 합니다.

저는 고마운 마음으로 쓸어주곤 합니다. 한편 쓸어줄 때마다 혼자 생각을 합니다. ‘이 강아지 눈에는 내가 하나님과 같은 존재이지….’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물의 영장으로 삼으시고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창조 세계를 다스리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시인도 이스라엘 민족을 생각하며 비슷한 생각으로 선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땅아 하나님 앞에서 떨지어다!”

 

요즘 시편 강해를 오랫동안 설교 말씀으로 드려 왔는데, 돌아 보니 지난해 8월부터 말씀을 드렸습니다. 6개월이 되었네요. 곧 마치게 될줄 압니다.

지난주 설교 준비를 하면서 시편 강해를 시작할 때 드린 말씀이 다시금 떠 올랐습니다. 시편 1. 2편이 시편 전체의 서론 내지 도입부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제가 아는 모든 시편 학자들은 동의를 하고 있습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모든 시편은 시편 1, 2편 사이에 있다’라고 말할 정도로 시편 1, 2편을 중요시 여깁니다. 그런데 시편 1편은 잘 아시죠? 1, 2절,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곧 시편 1편은 개인의 신앙을 강조하는 시입니다. 반면 2편은 다시 봉독해 드릴 시간은 없습니다. 공동체의 신앙을 강조하는 시입니다. 곧 시편은 개인의 신앙과 공동체의 신앙의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의 시편을 보면 이는 개인의 자화상이기 전에 이스라엘 민족의 자화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시편을 읽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교회 공동체의 자화상인 것입니다. 곧 새해를 막 들어선 우리들을 위해 시인은 대신 소리치고 있는 것입니다.

“땅이여 너는 주 앞 곧 야곱의 하나님 앞에서 떨지어다.”

그런데 땅에게는 교회가 바로 하나님인 것입니다.

 

곧 시인은 비천한 자화상을 갖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일깨워주고 있는 것입니다. 땅도 이스라엘 민족의 발걸음으로 인해서 떨고 있음을…. 땅도 이스라엘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음을…. 이처럼 요즘은 땅은 교회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실 땅은 이미 경험하였습니다. 8절,

“그가 반석을 쳐서 못물이 되게 하시며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

 

땅에 있는 반석은 강가에 있는 차돌은 이스라엘 민족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못물이 되고 샘물이 되어질 것을….

물론 이는 광야에서 모세가 반석을 쳐서 물을 쏟아 내었던 이야기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 40년 생활 중에 물이 없어서 모세에게 원망했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반석을 치라고 하셔서 물을 내게 하신 이야기에 근거한 것입니다. 이것을 역으로 해석하면 반항하는 이스라엘에게 반석에서 물을 내게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께서 한편 온전한 자화상을 가진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서 반석이 물을 내게 하시고 차돌이 샘물을 내게 하시는 것은 당연지사가 아니겠습니까?

한편 이는 오늘은 우리 교회를 위하여 물을 내게 하시고 샘물을 내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교우 여러분,

2023년의 땅을 밟고 서 있는 교우 여러분, 땅은 떨고 있습니다. 반석은 못물을 차돌은 샘물을 낼 준비를 마쳤습니다.

 

한편 저는 땅이 떨수 밖에 없는 이유를 질경이의 두 번째 특징에서 또 찾아 볼수 있었습니다. 제가 설교 서두에 질경이에게는 두 모습이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이제 두번째 모습을 소개해 드립니다. 고진하 목사님은 계속 다음과 같은 글도 쓰셨습니다. 그는 일본 작가의 글을 참조해서 다음과 같이 또 써내려 갑니다.

“또 질경이가 길바닥에서 살아갈 수 있는 중요한 이유는, 다른 식물은 잎이 줄기에 붙어 있지만, 질경이는 잎이 지면에 붙어 있기 때문입니다. 잎이 줄기에 붙어 있다면 밟히면 꺾이거나 하겠지만 지면에 붙어 있으니까 발에 밟혀도 잎이 충격을 덜 받는 겁니다. 이처럼 질경이는 잎을 지면에 가까이 둠으로써 사람이나 자동차 바퀴에 밟혀도 거뜬히 살아갈 수 있는 겁니다.”

 

왜 땅이 떨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이야기입니다. 출애굽을 경험한 자들은 질경이와 같은 삶을 살게 됩니다. 그 어디에서도 굳건히 살게 됩니다. 자동차 바퀴에 밟혀도 거뜬히 살아갑니다. 도리어 어디에서도 좋은 약제를 만들어 갑니다.

이는 오늘날 교회의 모습입니다. 교회는 어디에서도 살고 어디에서도 좋은 약이 됩니다. 어떤 반석도 못물로 어떤 차돌도 냇물로 바꾸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땅이 떨어야 하는 가장 큰 이유가 있습니다. 이 땅에 주님께서 오셨습니다. 반석에서 물이 나게 하시기 위하여 차돌이 샘물이 되게 하시기 위하여…. 그리고 우리 모두를 교회 공동체로 부르셨습니다.

 

주님은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에 우리 교회 공동체를 인도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질경이의 삶을 사신 것입니다. 자동차 바퀴에 밟혀 죽으셨지만 다시 사셨습니다. 이 주님께서 오늘 시인처럼 외치지 않으실까요?

“땅이여 너는 나를 믿는 자들 앞에서 떨지어다.”

 

요한 계시록을 보면 주님께서는 교회 공동체를 위하여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예비해 두셨습니다. 하늘 나라에서 생명수의 강을 맛 보기 전 우리는 이 땅에서 반석에서 나는 못물과 차돌에서 나는 샘물을 맛 보는 것입니다.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어느 유치원에서 소풍을 갔습니다.

 

한 아이가 졸졸 흐르는 시냇물을 보고 선생님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시냇물은 왜 소리를 내며 흘러가요?”

선생님은 답합니다.

“시냇물이 소리를 내는 것은 물속에 돌맹이가 있기 때문이란다.”

 

오래전 정신질환자들을 위한 치료 방법은 냇가를 만들어서 소리를 듣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유명한 히포크라테스가 창안하였는데 저는 터키 방문시 그 당시 만들었던 냇가를 둘러 볼수 있었습니다.

물속에 돌멩이가 있어서 소리를 내게 하는 이유는 많은 분들에게 힐링을 주기 위함인 것입니다.

 

2023년도 반석에서는 못물이 나고 차돌로 인해서는 샘물이 납니다. 그 샘물로 인해서 아름다운 소리가 생겨 납니다. 올해도 우리는 survive가 아니라 thrive하는 한 해가 될 것입니다. 우리의 자화상은 출애굽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닮은 질경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한 해를 시작하였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땅이여 너는 주 앞 곧 야곱의 하나님 앞에서 떨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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