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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기회” 마태복음 20:1-16 (02/05/2023)

1958년 인도 태생의 한 여자가 테레사 수녀를 찾아 왔습니다. 그녀는 최상층 신분계급에 속한 사람이었는데 7년이라는 긴 시간의 망설임 끝에 자신이 누릴 수 있는 모든 특권을 포기하고 수녀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그녀에게 웃음 띤 얼굴로 물었습니다.

“잘 웃고, 잘 먹고, 잘 자나요?”

예상하지 못한 엉뚱한 질문에 그녀는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차분한 목소리로 “네”라고 대답했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환영의 뜻으로 그녀를 가만히 안아주었습니다.

“잘 웃고 잘 먹고 잘 자는 사람”

 

마더 테레사가 인도 캘커타에서 한 사역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 일은 너무 고되서 아무나 선뜻 시작할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을 잘 알기에 한 인도의 상위층에 속한 여인도 7년을 망설입니다. 그리고 결단을 내립니다. 한편 그 여인이 이 귀한 사역을 할수 있는 조건은 하나였습니다.

“잘 웃고 잘 먹고 잘 자는 사람.”

 

오늘 2부 예배는 제직 임직식을 거행합니다. 새롭게 또는 다시 임직을 받으시는 분들께 주님은 어떤 조건을 내실까요? 아마 주님도 비슷하지 않으실까요?

“잘 웃고 잘 먹고 잘 자는 사람.”

 

지난 주에 이어서 오늘도 주님의 비유를 나눕니다. 지난 주에 비유의 몇 가지 특징을 말씀드렸습니다. 첫번째는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려 주는 특별한 쟝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비유에는 한 그룹은 분노케 하고 한 그룹은 통쾌하게 웃게하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러한 문학 작품이 되기 위해서는 어쩔수 없이 비유에는 역설적인 요소가 항상 들어가게 됩니다. 곧 예상치 못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세상적 배경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요소가 늘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곧 일반적 관점을 뛰어 넘어 통쾌하게 웃게 하는 요소가 늘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의 비유는 어떨까요?

 

먼저 오늘의 비유는 어떤 배경 가운데서 주어진 것일지 살펴 봐야겠습니다. 이 비유의 전후 문맥을 살피면 흥미롭습니다. 먼저 바로 전 귀절인 마태복음 19: 30,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비유 마지막 절인 20: 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비유 바로 전 귀절은 ‘먼저 된 자’가 먼저 나옵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됨을 강조합니다. 비유 마지막에는 ‘나중 된 자’가 먼저 나옵니다.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것입니다. 비슷한 내용이지만 강조하는 점은 분명 다르다고 봅니다.

 

그러면 마태는 왜 이 비유의 앞 뒤를 이렇게 구성했는지 궁금한 생각이 듭니다. 이 궁금증을 안고 오늘의 비유를 살펴 보겠습니다. 비유는 직설적이지 않습니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많은 궁금증을 안고 읽을 때 그 안에 숨은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발견하게 됩니다. 특별히 나에게는 어떤 도전을 주나 생각할 때 더 깊게 닥아 옵니다. 1절,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 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지난주 본문인 누가복음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로 표현되어 있지만 오늘 본문인 마태복음에서는 ‘천국’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같은 표현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아침 일찍 나가서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을 하고 고용했습니다. 한 데나리온은 이 당시 하루 품삯입니다. 당연히 일꾼들은 오늘 번 돈으로 가족들을 위한 생활비를 벌게 되었다고 생각하며 기쁘게 포도원으로 갔을줄 압니다.

그 후 주인이 아홉시에 나가 보았더니 장터에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똑 같이 약속을 하고 고용합니다. 그 후 정오 12시에 또 나가 봅니다. 아마 일감은 많은데 일꾼이 더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는 오후 3시에 나가서 또 일꾼들을 고용합니다. 그뿐 아니라 오후 5시에도 나갑니다. 오죽 주인은 급했었나 봅니다. 빨리 일을 끝내지 않으면 많은 손해를 예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 시간만이라도 일할 사람을 찾아 고용합니다.

 

그러면 잠시 먼저 된 자의 입장에서 오늘의 비유를 살펴 보겠습니다. 새벽에 곧 새벽 6시부터 일하기 시작한 사람들은 하루 종일 어떤 마음으로 일했을까요?

6시부터 일하고 있는데 세 시간 후 곧 9시에 일꾼들이 들어 옵니다. 속으로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우리는 한 데나리온을 주신다고 하였는데, 그래서 한 데나리온으로 가족을 부양하는 돈을 벌게 되었는데 저 일꾼들은 3시간 후에 들어 왔으니 한 데나리온은 받지 못하겠지….’ 한편으로는 안도 한편으로는 뒷 사람들에 대한 약간의 동정심이 생겼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세 시간후에 또 일꾼이 들어 옵니다. 이 들은 반 데나리온 밖에 받지 못하겠지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더 안 된 것은 오후 세시에도 들어 옵니다. 이들은 반 데나리온도 받지 못할 것이 확실해 보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두 시간 후 곧 5시에도 새 일꾼들이 들어 옵니다. 그들은 한 시간 뿐이 일할수 없습니다. 1/12 데나리온을 받을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기들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하루 종일 수고했지만 그래도 한 데나리온을 받게 된 것을 큰 다행으로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한편 새벽 6시에는 오지 못했지만 오전 9시 온 사람들은 어떠했을까요? 자기들보다 세 시간 먼저 온 사람들을 부러워했을줄 압니다. 그런데 웬걸 3 시간 후에 또 일꾼들이 들어 옵니다. 그들을 보고는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12시에 온 사람들, 세시에 온 사람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며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이제 오후 6시가 되어 포도원 일은 끝이 났습니다. 제일 먼저 온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우리는 한 데나리온을 받을 텐데 후에 온 자들은 그렇지 못하겠지…. 가족들이 안 되었네….’

그 후로는 9시 12시에 온 사람들도 저들나름 머릿속으로 계산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한편 먼저 와서 일한 사람들은 제일 먼저 돈을 받게 될 것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받고 빨리 시장에 가서 필요한 것을 사서 집으로 갈 생각에 골똘해 있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제일 마지막에 온 일꾼들을 먼저 부릅니다. 물론 그것은 괜찮습니다. 조금 늦게라도 받기만 하면 되니…. 9절,

“제십일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먼저 온 사람들은 깜짝 놀랍니다. 여기에서 먼저 온 사람들은 새벽부터 온 사람을 포함 바로 오후 세시에 온 사람들이 포함됩니다. 한 시간 일한 사람들이 한 데나리온을 받는 것을 본 것입니다.

금방 머리 속이 빠르게 움직여집니다. 세 시간 일한 사람들은 세 데나리온을 기대합니다. 여섯 시간 일한 사람은 6데나리온 물론 새벽에 온 사람들은 12 데나리온…. 정말로 롯또가 맞은 기분입니다. 앞으로 12일 간 먹고 살 걱정 없이 지낼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10절,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이에 일제히 먼저 온 자들이 소리 지릅니다. 12절,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물론 이 중 제일 목소리를 크게 한 사람들은 당연히 새벽에 온 사람들일줄 압니다. 13, 14절,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말씀드린대로 비유에는 항상 분노하는 사람들이 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이 비유를 들으면서 먼저 온 자들과 동일시하며 포도원 주인에게 분노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아니 주님은 그들이 들으라고 이 비유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 글에서 읽은적이 있습니다. 목사님은 설교 중에 소리쳤다고 합니다.

“오늘 여러분들 중에 도둑이 들어 와 있습니다.”

아마 예배 참석자들은 순간적으로 가방이나 지갑을 체크 했을줄 압니다. 이 때 다시 목사님은 외치십니다.

“남과 비교하는 마음이 바로 도둑입니다. 우리들의 행복을 도둑질하고 있습니다.”

 

“나는 새벽 6시 왔는데….” 하면서 이웃과 비교할 때 하나님의 나라는 도둑질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몇 년전 저의 사무실에 있던 집사람 가방을 누군가가 가져 갔습니다. 후에 찾았지만 현찰과 몇 가지는 잃었었습니다. 그 후로 늘 저는 사무실 안에 있는 closet에 귀중품을 놓고는 꼭 닫아 둡니다. 혹시 또 누가 실례를 할까 봐….

이번주 설교 준비를 하면서 늘 closet을 닫곤하는 제 모습이 좀 우스워 보였습니다. 사실 더 크고 무서운 도둑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교하는 마음….

 

그러면 왜 비교할 때 하나님의 나라는 도둑질 당하게 될까요? 하나님 나라의 선물은 약속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모두 한 데나리온 씩 주셨습니다. 이는 모두 같은 약속의 선물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래도 질문하실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남들에게 더 큰 약속을 하셨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그런 질문이 나올 것을 예상했는지 마태는 오늘 비유 바로 뒤에는 주님께서 세 번째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실 것을 예언하신 말씀을 기록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모두에게 한 데나리온을 약속하셨습니다. 한 데나리온이 하루 생활비이듯이, 영적인 한 데나리온은 우리들에게 영생을 주시는 주님의 보혈입니다. 영적인 한 데나리온인 것입니다. 이는 모든 택한 자들에게 주시는 똑 같은 약속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 영적 한 데나리온을 받은 사람은 어떤 삶을 살게 될까요? 새벽 6시에 온 사람? 아니면 9시? 12시? 3시…?

영적 한 데나리온을 받은 모든 사람은 오늘의 비유에서 자신을 오후 다섯시에 온 사람과 동일시 여기게 됩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조금 전에는 먼저 온 사람들의 모습을 살펴 보았는데 이제 다섯시에 온 사람들의 모습을 살펴 보십시다.

우선 한 데나리온을 받았을 때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요? 이는 하루 품삯입니다. 자기네는 1/12데나리온을 예상했는데 한 데나리온을 받았습니다. 이제는 가족들에게 가서 떳떳하게 번 돈을 보여드릴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기뻐하고 있는데 자기들 보다 일찍 온 사람들도 한 데나리온씩을 받습니다. 이 때 어떻게 반응할까요?

“저들이 다 일을 해 놓고 우리와 똑같이 받네”

이들은 주인에게도 감사, 먼저 온 일꾼들에게도 감사한 마음을 품게 될 것입니다.

 

이 모습이 진정 십자가의 은혜를 받은 자의 모습이 아닐까요? 이들은 주님께 빚진 자들입니다. 그리고 먼저 온 자들에게 빚진 자들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섬길수록 더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제가 한국에서 군대에 있을 때 주말에는 자주 시외버스를 타고 서울에 오곤 했습니다. 때로는 막차를 놓칠 때도 있었고 막차를 탔을 때도 있습니다. 언제 제가 잘 웃고 잘 먹고 잘 자겠습니까? 막차를 탔을 때였습니다.

 

막차를 탄 대표적인 사람이 사도바울입니다. 스스로 만삭되지 못한채 태어난 자라고 고백할 정도입니다. 그의 이 고백은 어떻게 보면 그의 서신 중 가장 중요한 서신인 로마서에 잘 나타나 있다고 봅니다.

사도바울은 마지막 16장에서 그동안 자기를 도운 사람들의 이름을 열거합니다. 어떻게 보면 16장에 기록된 사람들은 바울보다 일찍 온 사람들입니다. 곧 자기 보다 일찍 와서 수고하신 분들의 이름을 기록하고는 로마서 16: 22, 23절에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이 편지를 기록하는 나 더디오도 주 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노라 나와 온 교회를 돌보아 주는 가이오도 너희에게 문안하고 이 성의 재무관 에라시도와 형제 구아도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더디오가 로마서를 기록하였는데 ‘더디오’의 뜻은 ‘셋째’입니다. 구아도가 나오는데 ‘구아도’의 뜻은 ‘넷째’입니다.

셋째 넷째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을 보아서 이들은 노예 출신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구원 받은 자들입니다. 사도바울은 마지막으로 구원 받은 이들보다 더 마지막으로 구원 받은 것을 은연중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잘 자고 잘 먹고 잘 웃으면서 그 험한 복음 사역을 완수한 것입니다.

 

오늘 제직 임직식을 거행합니다. 우리는 모두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마지막에 구원받은 자들입니다.

 

오늘 임직 받는 분들도 실은 여러 그룹이 있습니다. 처음 서리집사로 임직 받는 분들, 재차 아니 삼차 내지 4차 그 이상으로 임직 받는 분들 그러나 우리 모두는 한 가지 약속을 받은 자들입니다. 십자가의 은혜….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5시에 불리움을 받았습니다. 5시는 마지막으로 불림을 받은 것을 뜻합니다. 왜 우리를 5시에 부르셨을까요? 항상 마지막 기회로 생각하며 감사하며 섬기게 하기 위함이 아닐까요? 이들의 특징은 항상 잘 웃고 항상 잘 먹고 항상 잘 잡니다. 주님의 약속으로 인해 막차를 타게 된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 때 어느덧 마지막 기회는 최고의 기회가 됩니다.

 

교우 여러분, 제직 여러분,

마지막 기회입니다. 최고의 기회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십시다. 여러분보다 먼저 수고하신 분들께 감사드리십시다.

 

한편 약속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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