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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이기지 못하였도다.” 시편 129:1-8 (12/25/2022)

먼저 홍성웅 시인의 시 ‘새로운 역사 속으로’를 나눕니다.

 

학은

묵은 해를

미련없이 떨치고

회한과 분노도

티끌처럼 날려 버리고

훨 훨

날아 가는가?

 

아주 가는 다리로

미망과 굴종의 땅을 박차고

힘찬 날갯짓을 하려는가?

용기와 감사가 있는 새로운 역사 속으로

 

한 해를 보내는 마음으로 송년 예배를 드리는 저희들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아름다운 시입니다.

학처럼 묵은 해를 미련없이 떨쳐 버리고 새로운 역사 속으로 함께 날아가자고 시인은 우리에게 독촉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시를 읽으면 이미 학이 되어 있는 느낌입니다. 다리는 비록 가늘지만 힘찬 날갯짓을 하면서 새로운 역사 속으로 날아 가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느낍니다.

 

그러나 한 가지 과제가 남아 있습니다. 정말 어떻게 학처럼 날아서 새로운 역사를 만끽하는 삶을 살수 있을까요? 어떻게 학처럼 묵은 해를 떨치고 용기와 감사가 있는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할수 있을까요?

 

얼마전 제가 늘 보는 웹싸이트에 다음과 같은 글이 올라왔습니다.

“December is letting go of all the past year’s fails, and starting anew in January, as time again chases its tail.” – Stewart Stafford

“12월은 지난해의 모든 묵은 것을 떨쳐 버리는 달이다, 1월을 새롭게 시작하기 위한…. 마치 시간의 꼬리를 쫓아 가듯이 ….” Stewart Stafford

 

물론 12월은 새로운 해를 기다리는 멋진 달입니다. 그러나 이 분의 생각처럼 시간이 지나감으로 지난 해의 묵은 것들이 사라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곧 시간의 지나감으로만 우리는 새로운 역사로 들어갈수 없습니다. 오늘의 시편을 통해 어떻게 우리가 새로운 역사 속으로 날아 갈수 있을지 상고해 보겠습니다.

 

오늘의 시편을 지은 시인은 이스라엘 민족을 새로운 역사 속으로 초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시는 표제어를 통해서 알수 있듯이 성전으로 올라가며 부르는 노래입니다. 여러번 말씀드렸습니다.

이스라엘인들은 1년에 세번은 예루살렘에 순례를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 그들은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성전으로 향합니다. 성전으로 향하면서 노래를 부릅니다. 1절,

“이스라엘은 이제 말하기를 그들이 내가 어릴 때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혔도다.”

성전을 향하여 가는데 의외의 고백을 합니다. 과거 일을 떨치지 못하고 무거운 발걸음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어릴 때 괴롭힘을 당했다고 표현합니다. 시인은 애굽의 종살이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얼뜻 보면 아직 시인은 옛 묵은 일을 떨쳐 버리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섣불리 속단하면 안 되겠죠. 좀 더 살펴 봐야겠습니다. 성전을 향해 순례의 길을 가면서 이런 고백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이와 같이 시인은 한 해에 세번 같은 아픔의 이야기로 초대합니다. 작년에도 세번, 재작년에도 세번, 재재작년에도 그 전해도…. 같은 아픔의 이야기로 초대하고 초대하고 초대합니다.

이렇게 한 해에도 세번씩이나 반복적으로 고백한다면 단순히 옛 일을 떨치지 못해서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무슨 깊은 이유가 있을줄 압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번째 이유는 계속되는 시인의 고백을 읽으면 금방 알수 있습니다. 2절,

“그들이 내가 어릴 때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혔으나 나를 이기지 못하였도다.”

곧 이어 그들의 머리에 떠오르는 장면은 바로와 애굽을 향한 10 가지 재앙이었을줄 압니다. 9번 내리 고통을 당했어도 끝까지 버티자 드디어 장자를 치십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또 바로는 군대를 보내 이스라엘 백성을 뒤쫓게 합니다. 결국 모든 애굽 군인들은 홍해에 빠져 몰사합니다.

 

지난번 월드컵에서 한국이 16강까지 올라갔습니다. 16강까지 가기 위해서는 포르투칼을 이겨야했습니다. 저는 오래전에 잡혔던 약속이 있어서 전반전 1:1로 비기는 것만 보고 모임 장소로 향했어야 했습니다.

식당에 도착했는데 잠시 후 스크린을 보니 2:1로 이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몇 분이 남아 있었습니다. 다행히 만나기로 하신 분이 조금 늦게 와서 멀리서 스크린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이 얼마나 길었는지요. 하여튼 마지막 휫슬이 불리면서 게임을 마쳤습니다.

후반전을 보지 않았기에 집에 와서 하이라이트를 두번 세번 보았습니다. 이긴 게임이지만 볼 때마다 약간의 긴장과 함께 승리의 확신이 교차되는 묘한 느낌을 갖고 보게 되었습니다. 곧 용기와 감사로 향하는 세계로 가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요….

 

이와 같이 이스라엘 회중도 옛 이야기를 통해서 용기와 감사로 향하는 새로운 세계로 향하면서 큰 위로를 받았을줄 압니다. 그러면 이제는 시인은 다음으로 어떤 세계로 회중을 이끌까요? 3절,

“밭 가는 자들이 내 등을 갈아 그 고랑을 길게 지었도다.”

새로운 세계로 진입할줄 알았는데 의외입니다. 도리어 다시 애굽 종살이로 돌아 가고 있습니다. 그 표현도 정말로 아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종살이하면서 밭을 갈 때 고랑을 만들곤 하였는데 실은 그 고랑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등에 새겨졌다는 것입니다. 승리의 미소를 머금자마자 더 비참했던 옛 이야기를 다시 상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등에는 고랑이 새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간이 지나도 없어지지 않는 상흔인 것입니다.

 

승리의 이야기는 입술의 잠깐의 미소와 흥분을 가져 옵니다. 그러나 시인은 곧바로 민족의 깊은 상처는 깊은 상흔이 되어 있음을 일깨워주고 있는 것입니다. 시인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과거를 생각할뿐 아니라 애통해 하라는 것입니다. 탄식하라는 것입니다. 영어로는 grieve하라는 것입니다. 슬픈 옛 이야기는 기억만으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기억만으로는 도리어 분노하게 됩니다. 옛 이야기는 탄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얼마 안되는 이스라엘 인들이 세계를 주름 잡고 있는 것 잘 아실줄 압니다.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은 과거 역사를 탄식할줄 아는 민족입니다. 그래서 세계 곳곳에 홀로코스트 박물관을 세워 놓은 것입니다. 이것이 이들의 저력이 된 것입니다. 즐거운 이야기는 기억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러나 억울한 이야기는 탄식해야 합니다.

 

이제 탄식할줄 아는 회중들에게 시인은 계속 고백합니다. 4절,

“여호와께서는 의로우사 악인들의 줄을 끊으셨도다.”

다시금 승리를 주셨던 하나님의 이야기로 돌아 갑니다. 그런데 승리의 주인공은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탄식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승리를 주십니다. 시인은 그 어느 때 보다도 승리의 확신 가운데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탄식하는 자들의 편이심을 믿기에…. 5절,

“무릇 시온을 미워하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여 물러갈지어다.”

 

이제 감히 자기들의 등에 채찍으로 상처를 주었던 자들에게 이제는 말로 명령하다시피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들보다 더 크신 하나님께서 자기들 편이시니 말입니다. 그들에게 향하여 “꺼지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확신 가운데서…. 계속 이어집니다. 6, 7절,

“그들은 지붕의 풀과 같을지어다. 그것은 자라기 전에 마르는 것이라. 이런 것은 베는 자의 손과 묶는 자의 품에 차지 아니하나니.”

시인은 자신과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자들의 운명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지붕에 풀이 자라면 얼마나 자랍니까? 지붕에 자란 풀이 열매를 맺히면 얼마나 맺힙니까? 어떻게 보면 원수들을 저주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둘중 하나일줄 압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원수들을 저주하던가, 아니면 이제는 더 이상 상대가 되지 않으니 불쌍히 여기던가…? 문법적으로는 둘 다 가능합니다.

그런데 지금 이 시는 성전으로 향하면서 부르는 노래입니다. 애굽의 종살이를 하면서 이렇게 고백한다면 당연히 저주하는 것으로 밖에 생각치 않을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시인은 회중들을 이끌고 성전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요즘 우리식으로 하면 어느 교우님이 다른 교우님 가족과 차에 함께 타고 교회로 예배드리러 오고 있는 중입니다. 그 때 저주하면서 올까요?

 

사실 시인은 그들의 모습을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께 미움을 받고 있는 그들을 위해서 grieve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절이 이를 더 확증시키고 있습니다. 8절,

“지나가는 자들도 여호와의 복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하거나 우리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축복한다 하지 아니하느니라.”

이들은 이미 하나님께 미움을 받았고 또 지나가는 이웃들마저 이들에게 축복하고 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들을 위해 시인은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곧 성전으로 올라가는 회중은 먼저 자신들의 아픔을 탄식합니다. 탄식중에 하나님을 향한 확신에 가득찹니다. 어느덧 이 탄식은 자신을 넘어 자신들을 탄식케 한 자들을 위한 탄식으로 발전합니다. 이 때 이들은 진정 용기와 감사가 넘치는 새로운 역사 속으로 초대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삶에서 늘 체험하여 이제는 많은 사람들을 새로운 역사 속으로 초대하고 있는 분이 있습니다. 얼마전 한 번 소개해 드린 미원주민이신 Edgar Villanueva라는 분입니다.

어릴 때 홀어머니 밑에 자랍니다. 어머니는 하루에도 두 세 가지 일을 하셨습니다. 공무원으로  9시에서 5시까지 일하고 양로원에서 두번째 일을 합니다. 그리고는 가정부로 세번째 일을 하곤 했습니다. 아침 7시까지….

그리고 어머니와 함께 토요일과 주일에는 가가호호를 방문하며 원주민 자녀들을 교회로 직접 밴을 태우고 갑니다. 300명의 자녀들이 모였다고 합니다.

후에 성장해서는 non-profit기관에서 기금 모으는 일에 종사합니다. 그러면서 책을 펴내고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면서 아주 유명해졌습니다. 저희 교단 스탶에게 소개를 받아 그 분의 책을 읽었는데 아주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서로를 잡아 먹고 잡혀 먹히는 세상에는 힐링이 필요함을 역설합니다. 그런데 힐링의 과정은 7단계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중 첫 단계는 애통 Grief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애통은 두 가지로 나눕니다. 하나는 피해자의 애통, 또 하나는 가해자의 애통. 왜냐하면 그는 주장하기를 우리는 모두 친척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서로 interdependent곧 의지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서로의 상처를 인정하면서 서로의 힐링에 함께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친척이기 때문에….

 

이제는 그가 사회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이유는 바로 그는 애통할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어린 시절 당한 모든 일들을 애통할줄 아는 분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자기들의 조상을 괴롭혔던 백인들을 보면서 애통할줄 아는 분입니다. 어느덧 사회의 힐러가 되어 간 것입니다.

 

지난 한 해 원하지 않은 일들도 많이 겪으셨을줄 압니다. 이 모든 일은 우리들 안에서 두 가지로 남게 될 것입니다. 힐링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든지 아니면 파괴로 향하는 원동력이 되든지….

지난 해 당한 일들을 애통해 한다면 아울러 어려운 일을 가한 자들로 인하여 애통해 한다면 우리는 건강한 새 해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 오늘은 성탄절입니다. 그런데 실은 오늘 저는 애통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저희 교회와 함께 예배를 드리는 미국 교회는 오늘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지 않습니다. 크리스마스이기 때문에….

지난주일 미국 교회 목사님께 물었었습니다. 다음 주일 곧 오늘 예배를 드릴 것이냐고…. 그랬더니 노회가 모여서 구성되어 있는 대회가 있는데 대회에서 제공하는 예배 동영상으로 대신하고 주일에는 함께 모이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이웃을 해하는 것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직접 해를 주는 것이 있고 간접적으로 해하는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처럼 성탄절이라고 주일 예배를 안 드리는 것은 간접적으로 이웃을 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이런 것이 더 무서운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사정상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릴수는 있지만 온 교회가 함께 대회에서 나오는 동영상으로 예배를 드린다면 미국 교회 자녀들의 심령에 많은 해를 가하는 것이고 이들의 영향이 열심히 주님을 섬기려는 자들에게까지 해를 끼친다고 생각합니다.

 

이 때 어떻게 해야 하죠? 애통해야 합니다. 탄식해야 합니다. 그들이 탄식하게 될 때까지…. 어느덧 우리 모두는 힐러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용기와 감사가 넘치는 새로운 역사 속으로 발을 내딛게 될 것입니다.

이를 주님께서도 십자가상에서 몸소 보여 주셨습니다. 누가복음 23: 34,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주님은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위해 탄식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이 탄식으로 말미암아 용기와 감사가 있는 새로운 역사가 펼쳐지게 된 것입니다. 주님께서 만드신 이 새로운 역사는 2023년도 새해 문턱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목사로서 의사로서 울릉도에서 나병환자 등 여러 가지 사역을 하셨던 이일선 목사님이 계십니다. 훌륭한 일을 많이 하신 만큼 많은 오해와 중상 모략을 당하셨던 분이십니다. 결국 잘 세워 놓은 울릉도 병원 마저 아픔을 안고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언젠가 이 목사님에 대해 더 자세히 나눌 시간이 있을줄 압니다.

 

연세대 김형석 교수님은 이일선 목사님과의 만남의 일화를 아래와 같이 적고 있습니다.

“오래전 친구인 이일선 목사 부부가 우리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리는 의사이기도 하다. 대문 안을 들어서면서 “사람은 둘인데 다리가 여섯이어서 죄송합니다.” 하고 웃으면서 인사를 했다. 둘 다 지팡이를 짚고 와 미안스러웠던 모양이다. 아직 늙은 나이는 아니었다. 그 유머러스한 태도가 부러웠다. 나도 때가 되면 지팡이를 짚고 걸으면서 ‘나도 늙으니까 두 다리가 모자라 셋이 되었습니다’ 라고 농담할 용기가 있어야겠다고 다짐해본다.”

 

이일선 목사님이 이처럼 멋진 삶을 살수 있었던 이유는 쉽게 알수 있습니다. 그는 시인의 고백에 늘 동참했던 분이었을줄 압니다. 애통할줄 알았습니다. 자신의 아픔을 나병환자들의 아픔을 물론 자기들을 해한 사람들의 아픔을….

그는 매일 새로운 역사 속으로 날으는 학이 되었던 것입니다.

 

지난 한 해의 어려운 일들을 피하지 마십시다. 도리어 주님 안에서 아파하고 탄식하십니다. 아울러 우리를 해한 사람들을 위해 아파하고 탄식하십시다. 새로운 역사가 새해를 통해 펼쳐질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들이 내가 어릴 때부터 여러번 나를 괴롭혔으나 나를 이기지 못하였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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