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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나오며…

날짜 : 2007.07.22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들어가며 나오며…
성경본문 : 요한복음 10:7-10

http://kcbostonmedia.cponsolny.com/Sermon_audio_master/2007_07_22_sermon_audio.wma

<알림: 이번주 설교 오디오 화일의 마지막 5분 가량이 녹음 관계로 실리지 못했습니다.양해를 바랍니다. >

두 명의 목회자가 등장하는 코메디입니다. 한 사람이 묻습니다.

“자네 교회 어때?”

다른 사람이 대답합니다.

“잘 나가고 있지. 내가 처음 그 교회에 갔을 때 교인이 서른 명 남짓이었는데, 1년이 지난 지금은 주일예배 출석교인이 400명이 넘어, 자네 교회는 어때?”

“글쎄, 잘 모르겠어. 내가 처음 설교를 시작했을 때 교인이 100명가량 되었는데, 1년 동안 복음을 전하다 보니 열명으로 줄었어.”

어느 미국 목사님이 지은 책에서 읽었던 내용입니다. 물론 코메디입니다만 많은 도전을 주는 코메디입니다. 이런 코메디가 나온 이유를 우리는 여러 가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금방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많은 분들이 복음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말을 듣기를 원하는 것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교인들의 귀를 즐겁게 해 줄 때 교회가 부흥하고 교인들의 귀에 예민하기 보다는 복음 그 자체에 더 예민할 때 교인들은 지루해 하는 것이 바로 교인들의 모습이 아닌가 일깨워 주는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이 번에는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어느 분이 거리에 나가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몇 가지 단어를 불러주고는 무엇이 제일 먼저 생각나는지 조사해 보았습니다. 눈, 독수리, 크리스챤…. ‘크리스챤’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잠시 머뭇머뭇하더니 대체로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위선자’, ‘가식’, ‘교회’, ‘따분하다’. 위선자와 가식은 비슷한 말이니 결국 위선과 따분함이 주변 사람들이 보는 우리들의 모습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에 대해서는 한 가지 변명할 것이 있습니다. 아니 저는 위선자라는 말을 들어도 별로 마음이 상하지 않습니다. 도로시 데이(Dorothy Day)가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크리스챤은 행복한 위선자이다.” 이 말의 뜻은 우리는 말씀대로 온전히 살수가 없습니다. 사실 말씀 따라 사는 척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우리가 점점 주님을 닮아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챤은 좋은 뜻에서 위선자일수 밖에 없습니다. 저는 데이의 이 말을 들은 후 ‘위선자’의 콤플렉스에서 완전히 해방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직 한 가지가 남아 있습니다. ‘따분하다’. 여기에 대해선 변명할 자신이 없습니다.

교우 여러분, 정말 크리스챤은 따분한 사람들입니까? 정말 교인들의 삶은 지루합니까? 우리가 따분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예수를 믿습니까? 여러분은 오늘도 따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셨습니까?

위의 두 이야기를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고 봅니다. 첫 번째 복음은 따분한 것이기에 복음을 제대로 전하면 교인들이 준다. 두 번째 그러므로 가짜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래야 교회가 부흥한다. 정말 그럴까요?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복음은 결코 교인들을 지루하게 할 것 같지 않습니다. 10절을 다시 봉독해 드릴까요?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10절 말씀으로 인수 있는 것은 복음은 믿는 자들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곧 복음은 믿는 자들로 하여금 풍성한 삶을 누리게 합니다. 복음은 ‘풍성한 삶’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는 풍성한 삶을 전합니다. 그리고 풍성한 삶은 누구나 좋아 하기에 참 복음을 전하면 많은 사람들이 순종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 금요일 보스톤에서 서쪽으로 2시간 떨어진 노스필드(Northfield)에 있는 무디의(D L Moody) 생가를 방문했습니다. 무디(Moody)를 무디(Moody)되게 했던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시카고에서 목회를 할 때입니다. 무디가 자주 집회를 나갔었는데 어느 주말 유명한 목사님이 시카고를 방문하였는데 그 주말 무디는 영국을 방문하게 되어있었습니다. 부인에게 그 목사님을 맞이하라고 하고는 목요일설교를 그 목사님에게 맡겼습니다. 그리고 반응이 좋으면 계속 토요일까지 부탁하라고 하였습니다. 목요일저녁집회가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3: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봉독하고는 은혜로운 설교를 마쳤습니다. 너무 은혜를 받았기에 그 다음날도 설교를 부탁드렸습니다. 물론 무디는 없고 부인이 모든 것을 주관했습니다. 다음날 목사님이 단상에 올라가 본문을 봉독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전날과 똑같은 본문의 설교였습니다. 그러나 또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다음날인 토요일 설교를 또 부탁드렸습니다. 그 다음날도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런데 교인은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무디가 집에 돌아왔습니다. 부인이 세 번씩이나 같은 본문의 설교를 잘 들었다면서 너무 은혜를 받았다고 무디에게 말합니다. 주일 설교를 또 부탁했습니다. 무디는 주일설교이니 다른 설교를 할 것을 기대합니다. 단상에 올라가 본문을 봉독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무디까지도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이후로 무디의 메세지가 변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의 메세지를 제일 즐겨 전합니다. 그로 인해 큰 부흥의 불길을 일으킵니다. 풍성한 사랑의 메세지가 미국에 잠자던 자들을 깨웠던 것입니다.

그러면 1800년도 말 미국을 휩쓴 이 부흥이 불길이 이제는 왜 이처럼 식었나요? 더 이상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를 전하는 사람이 없어져서 인가요? 요즘 기독교가 많이 쇠퇴한 것은 더 설명드리지 않아도 잘 아실 줄 압니다. 무엇인가 참 복음의 메세지를 잡아먹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말씀을 전해도 그 것을 삼키는 무엇이 있는 것 같습니다. 무엇일까요?

그런데 예수님은 이미 이 것을 예언하셨던 것 같습니다. 7, 8절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예수님은 절도와 강도가 있음을 아셨습니다. 절도와 강도들이 양들을 빼앗아 갈려고 하는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복음을 삼키는 자들이 있음을 벌써 아셨습니다.

그러면 절도와 강도들이 양들을 어떻게 빼앗아 갈까요? 정말로 칼과 총으로 빼앗아 갈까요? 오늘 미국을 비롯한 많은 서방세계의 교회들이 힘을 잃었는데 총과 칼 때문이었을까요?

총과 칼…? 역사적으로 볼 때 도리어 총과 칼 앞에서 복음은 더욱 꽃을 피웠습니다. 그러면 무엇일까요? 거짓 풍성함입니다. 풍성한 삶을 알리는 복음의 전부가 거짓 풍성함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깊이 살펴보면 두 가지 풍성함이 온 세상에 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두 가지 풍성함을 주님은 아시고 지금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이 두 풍성함이 우리를 차지하려고 우리주위에서 늘 우리를 향하여 손을 내밀고 있는 것입니다. 다투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쉽게 정리가 됩니다.

예수님은 거짓 풍성함으로 위장한 자들을 절도요 강도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요즘 거짓 풍성함으로 위장한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제가 이 시간 말씀 안드려도 너무나 잘 아실 줄 압니다.

한 가지만 말씀드릴까요? 쉐인 클레이본(Shane Claiborne)이라는 홈리스들을 섬기는 분이 쓴 책을 지난 번 접해 보았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궁전과 같은 집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깊은 고독을 느낄 수 있었다.” 궁전과 같은 집은 우리를 거짓 풍성함으로 이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의 결과는 깊은 고독이라는 것입니다. 궁전과 같은 집이 바로 절도요 강도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마음에 부요함을 빼앗아가고 고독으로 가득 채우니 말입니다. 거짓된 풍성함은 모든 것을 결과적으로 빼앗아 갑니다. 그러니 그 것이야말로 도적과 강도입니다.

무디를 통해서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는데 왜 오늘은 기독교가 이렇게 침체되었을까요? 총과 칼 때문에…? 거짓 풍성함으로 인해서입니다.

오늘 니카라과 선교단 파송예배를 드립니다. 매 해 이처럼 니카라과에 선교단을 보내게 하여주시는 하나님께 먼저 감사를 드립니다. 선교단원뿐 아니라 많은 분들이 보이지 않은 곳에서 수고하시고 계심을 볼 때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페루 선교까지 합하면 8년째 선교단을 파송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 선교단원들에게 또한 선교단을 보내는 우리들에게 한 가지 중요한 메세지를 주고 있다고 봅니다. 오늘의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도 거짓 풍성함을 좇는 시대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복음 전파는 더욱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우리를 찾아오는 많은 니카라과주민들이 거짓 풍성함을 사모하며 찾아올지 모른 다는 것입니다. 사실 지난번 니카라과선교를 갔을 때 깜짝 놀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어느 선교사님이 그 곳 주민 교회 주일예배를 참석하였는데 다음과 같이 말씀하더라는 것입니다. “니카라과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선교사들입니다.” 오늘 설교준비를 하면서 그런 말을 하는 이유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많은 선교사분들이 복음보다는 거짓 풍성함을 가지고 찾아온다는 뜻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니카라과 주민들이 거짓풍성을 따르고 있기에 또한 선교사들이 거짓풍성으로 선교하기에 이런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므로 거짓 풍성함을 좇아서 우리를 찾아오는 자들에게 참된 풍성함을 전파하는 것 이것이 우리들에게 주어진 과업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갈수록 어려워질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과업을 어떻게 잘 완수할 수 있을까요? 9절 말씀이 한 가지 실마리를 주는 것 같습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늘 예수님은 선한 목자로 말씀하시다가 여기에서는 문이라고 표현하고 계십니다. 도적과 강도에 대항하려면 목자로 표현하셔야 하겠는데 문이라고 표현하시고 계십니다. 깊은 의미가 담겨있다고 봅니다. 도적과 강도는 담을 좋아합니다. 담을 넘어 들어옵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도적과 강도는 담장을 올라타고 소리지릅니다. “여기에 삶의 풍성함이 있노라. 이리로 와 보라.” 소리칩니다. 그리고는 세상 모든 부귀영화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는 잡아먹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담장 넘어로 시끄럽게 떠들지 않습니다. 조용히 문이 되어서 우리가 들락날락하기를 기다립니다. 도적과 강도가 날뛰는 곳에서 주님은 말없는 문이 되어 계십니다. 우리가 담장 넘어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문을 향하여 나간다면 우리는 주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문을 들락날락할 때마다 우리는 꼴을 얻습니다. 풍성한 삶을 누립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어떠한 자세로 선교해야 할지 알게 됩니다. 선교는 곧 예수님이 이들의 문임을 알리는 것입니다. 세상의 요란한 소리 가운데서 예수님은 문이 되어 계심을 알리는 것입니다. 니카라과 선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예수님을 마음의 문으로 삼도록 돕는 것입니다. 예수님이라는 문을 들락날락 할 때 얻는 꼴을 맛보며 그로인한 풍성한 삶을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1주일간의 선교활동이 그들로 하여금 세상적인 풍성함을 그리워하게 하지나 않을까, 우리는 두려운 마음으로 선교에 임하셔야 합니다. 반면 그들이 예수님을 마음의 문으로 삼도록 하는 겸손한 마음으로 선교에 임하셔야 합니다.

예수님을 마음의 문으로 삼고 살았던 줄리아 딘모어(Julia Dinsmore)라는 시인이 있습니다. 이 분은 시인이자 홈리스입니다. 극심한 가난 속에서 많은 시를 지은 분입니다. 저는 이 분의 시를 읽으면서 니카라과 주민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줄리아는 미국에 사는 니카라과인이 아닌가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제일 사랑하는 것을 사용하여 우리를 자기 앞에 무릎을 꿇게 한다. 때로는 우리의 가족을 사용하고 우리의 경력 소유 건 강등을 사용한다. 이 세상은 큰 도적과 같다. 우리의 마음을 빼앗아 간다. 이 세상은 쉴 틈 없이 우리의 기쁨과 평화 우리의 찬양을 빼앗아 간다. 우리의 마음을 빼앗아 간다.”

저는 세상이 쉴 틈 없이 우리의 마음을 빼앗아 간다는 말에 많은 공감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이처럼 이 세상을 예리하게 분석하게 된 경위가 있습니다. 어느 날 책을 거의 마무리 지을 단계에서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어느 음성이 들렸습니다. “Guard your heart, Julia.”(네 마음을 지키라) 네 마음의 문을 지키라는 뜻일 줄 압니다. 아니 마음의 문을 소중히 여기라는 음성일줄 압니다. 그 후 그 분은 기독교인인데 마음의 문을 예수님으로 삼아 하루하루의 삶을 누립니다. 매일 매일을 노래와 시로 채우면서 살아갑니다. 반면 이 세상은 쉴 틈 없이 자기가 누리는 평화와 기쁨을 늘 빼앗으려고 달려오고 있는 것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문으로 삼았기에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추운 미네소타의 한 겨울 수은주가 영하 60도가 되었을 때 다음과 같은 글을 썼습니다.

“혹한을 통해서 세상에 모든 복잡한 것을 잊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라디오 TV 전화가 없기에 하나님과만 대화할 수 있게 하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질투와 욕심 경멸과 같은 짙은 구름을 없게 해 주셔서 참 나 자신을 보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나의 자녀들을 이 세상의 폭력과 부패에서 보호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장미의 향기를 기억하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천둥번개 후에 상쾌한 공기를 기억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어린 아이들의 아름다움으로 인해 감사합니다. 매일 아침 웅장한 광채로 하루를 맞이하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오늘과 같은 맹추위로 인해 감사합니다. 마음에서 우려 나오는 영혼의 노래를 듣고 부를 수 있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예수님을 마음의 문으로 삼은 자의 노래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니카라과에 가는 이유도 그 곳의 사람들이 미네소타에 사는 이 시인과 같은 삶을 살게 하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을 삶의 문으로 삼는 자들은 이러한 노래의 주인공이 됩니다. 그들은 문을 들어가며 나오며 주님의 꼴을 먹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도 자명해졌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우리의 마음의 문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문을 자주 자주 들락날락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노래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선교 단원 여러분,

이 번 일주일간 예수님을 우리의 삶의 문으로 삼으십시다. 그리고 자주 자주 들락날락하십시다. 세상의 것들이 우리의 마음을 빼앗아 가려할 때마다 들락날락거리십시다. 우리도 놀라운 시인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24시간이 하나의 아름다운 시가 될 것입니다. 노래가 될 것입니다.

그 노래를 부르며 그 시를 읊으며 니카라과로 향하십시다. 그들은 우리들의 놀라운 풍성함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도 예수님을 그들의 삶의 문으로 삼을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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