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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흡이 있는 자마다

날짜 : 2007.07.08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호흡이 있는 자마다
성경본문 : 시편 150편 1-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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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큰 축제에서 성악가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한 남자가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남자에게 소근거립니다.

“저것도 노래라고 부릅니까? 귀가 다 아프네요. 노래하는 저 여자는 누구죠?”

옆에 앉은 남자가 말합니다.

“제 아내입니다.”

당황한 남자가 말을 잇습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제 말은 저 성악가가 노래를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작곡가가 형편없다는 뜻입니다. 저런 멜로디를 작곡하다니.”

“제가 저 곡을 작곡했는데요.”

이 이야기를 읽으면 이런 생각이 떠오릅니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구나. 노래를 창조하고 부르는 사람과 듣고 비평하는 사람….”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부류에 속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노래를 창조하고 부르는 사람, 아니면 듣고 비평하는 사람…?

그런데 우리 믿는 사람들은 노래를 잘 부르던 못 부르던 모두 부르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본문 마지막 절 말씀이 확실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찌어다. 할렐루야.”

지금 시편기자는 믿는 사람뿐이 아니라 모든 인간은 살아 있는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찬양하여야 함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산 사람치고 호흡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호흡이 있는 자마다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다 찬양하여야 함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인간의 호흡에는 하나님의 영이 담겨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당신의 호흡을 불어 넣어서 생령 곧 인간이 되게 하셨습니다. 곧 인간의 호흡은 하나님의 사랑의 영이 담긴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영이 담긴 호흡이니 마땅히 호흡을 가진 자들은 하나님을 찬양하여야 할 줄 압니다.

2년 전인가 한국을 방문 중에 제가 자란 영락교회를 방문하여 예배를 드렸었습니다. 어느 부목사님께서 설교하셨는데 인간의 호흡이 얼마나 중요한지 일깨워주는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는 서론에서 다음과 같은 사례를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분이 한국 가요계의 가수들을 연구해 보았다고 합니다. 가수들이 부른 노래와 그들의 삶의 여정을 살펴보는 연구를 한 것입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그들이 부른 노래가 과연 그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조사 연구했다는 것입니다. 설교시간이라 제가 다 받아 적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부른 가수가 있다고 합니다. 제목은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 가버린 사랑의 가사를 늘 부르던 그는 일찍 세상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또한 “간다 간다 나는 간다 너를 두고 나는 간다,” 물론 도산 안창호 선생의 거국가의 가사이긴 하지만 이 가사를 많이 부른 사람도 세상을 일찍 떠나신 것 같습니다. 하여튼 제가 그 논문을 직접보지 못하고 목사님 설교를 통한 희미한 기억으로 말씀드려서 죄송합니다만…, 저는 꽤 일리가 있는 논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비슷한 예를 또 하나 든다면, 사탄을 대적하기 위해서 늘 ‘사탄, 사탄’을 강조하는 기독교 그룹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그룹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사탄의 올무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곤 합니다.

사탄을 미워해서 ‘사탄, 사탄’해도 그 말 자체가 도리어 그 말하는 사람을 사로 잡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매일 무대에 나와서 노래하는 자들은 어떻겠습니까? 그 가사에 자기도 모르게 매이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시편 기자를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찬양할 것을 명령하시는지 쉽게 이해가 됩니다. 때로 우리는 사탄을 대적하기 위해서 ‘사탄아 물러가라’ 소리쳐야 합니다. 그러나 그 말을 한 것보다도 훨씬 자주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여야 합니다.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을 좋아하시는 분, 죄송하지만 많이 부르지 마십시요. 그 가수와 비슷한 길을 가실지 모릅니다. 사실 설교 준비를 하면서 이 노래를 누가 불렀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인터넷으로 들어 가 보았습니다. 가사뿐이 아니라 노래가 흘러 나왔습니다. “찬 바람이 싸늘하게” 하면서 흘러 나왔습니다. 저의 귀에도 꽤 익은 노래였습니다. 저의 귀에도 익을 정도이니 많은 분들이 좋아 하실 줄 압니다. 부르고 싶으면 부르십시요. 그러나 그 노래를 부르신 것보다 훨씬 많이 하나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여야 하는 이유는 단지 우리의 찬양의 가사대로 우리가 그 안에 살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더 놀라운 이유가 있습니다. 1절 말씀입니다.

“할렐루야 그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찌어다.”

언뜻 보면 이것은 명령이지 찬양의 이유가 아닌 것으로 느껴집니다. 그러나 좀 깊이 살펴보면 이 말씀 안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먼저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명령은 마지막 절과 서로 상반되는 내용의 명령입니다.

이 당시 성소 안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제사장들이었습니다. 그러나 6절에 보면 누가 찬양하여야 합니까? 모든 사람들 곧 호흡이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하여야 합니다. 남녀노소 호흡이 있는 자들은 모두 찬양하여야 합니다.

이 당신 이스라엘의 한 여성이 이 시편을 읽었다고 생각하십시다. 그 여인은 고개를 갸우뚱 했을 것입니다. 1절에는 “성소에서 찬양하라” 말씀하십니다. 이 여인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하, 이 말씀은 제사장들을 향한 말씀이구나. 제사장들만 성소에 들어갈 수 있으니.” 그런데 마지막 절을 읽습니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곧 호흡이 있는 자들은 모두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는 여성이기에 성소에 들어 갈수가 없습니다. 깊은 고민에 잠겼을 것입니다.

이 것은 여인들뿐이 아닙니다. 이방인은 물론이거니와 제사장들을 제외한 모든 이스라엘인들을 당혹케 하는 말씀입니다.

이 시간 복잡한 신학적인 논리적 전개는 생략합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찬양하는 자들은 이미 성소에 들어 온 것입니다. 제사장들만 들어오는 성소에 이미 들어 온 것입니다. 이 당시에도 진실로 찬양하는 자들은 이 깊은 뜻을 이해했을 것입니다. 비록 제사장이 아니라서 성소에는 들어가지 못할지라도 자기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때 자기들이 있는 곳은 성소가 되는 체험을 하고 또 하였을 것입니다.

요즘 방학이라서 그런지 주중에 교회에 오면 아침 일찍부터 교회에 와 있는 영어회중 젊은이가 있습니다. 그 친구는 혼자서 기타를 치면서 때로는 교회 정문에서 때로는 후문에서 노래를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겠다 생각이 들곤 합니다. 제가 아침에 기도하는 것을 알아서 그런지 예배당 안을 피하는 것 같습니다. 아마 마음 속으로는 성전인 본당 안에서 찬양하고 싶은 것 같습니다. 겟세마네의 주님을 바라보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성전에서 찬양을 드리지 않을지라도 우리가 어디서 드리든 그 찬양은 우리가 있는 곳을 성전으로 바꿉니다. 우리는 그 어느 곳에서든지 천국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시간이 있을 때마다 찬양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찬양은 우리가 거하는 곳을 성소로 만드니 말입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이 지난 일주일 찬양하였던 곳은 그 시간 성소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 시간 우리는 가장 아름다운 곳에 거했던 것입니다. 그곳이 집이던, 일터이던, 차 안이던, 가장 아름다운 곳에 거한 것입니다. 초가삼간 오막살이라도 성소로 변하게 됩니다. 아울러 이 시간이 우리 생애의 최고의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뿐이 아닙니다. 시편기자는 더 놀라운 표현을 합니다.

“그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찌어다.”

그 권능의 궁창에서 찬양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곧 천군 천사들이 있는 하늘에서 찬양하라는 뜻입니다. 아니 성소에서 찬양하는 것도 제사장이 아니라서 불가능했던 것인데 이제는 천사들이 있는 궁창에서 찬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도저히 궁창에서 우리는 찬양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의 찬양이 우리가 있는 곳을 권능의 궁창으로 만든다는 것 이외에 다른 해석을 할 수 없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의 찬양은 우리가 있는 곳을 하늘의 궁창으로 만듭니다. 아니 우리는 찬양할 때 능력의 궁창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제사장이요 우리가 바로 궁창에 있는 천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보증이 된 것입니다. 곧 예수님을 찬양하는 자는 성소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능력의 궁창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험을 한 사람이 바로 사도바울입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찬양으로 감옥을 주님의 성소로 변화시켰던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울과 실라가 복음을 전하다가 빌립보 감옥에 갇혔습니다. 밤중에 바울과 실라는 하나님을 찬미하였습니다. 곧 감옥에서 찬양하였습니다.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집니다. 잠자던 간수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검을 빼어 자결하려 합니다. 이 때 바울이 크게 소리질러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외칩니다.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부복하고 저희를 데리고 나가서 고백합니다.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사도바울이 답변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감옥이 성소로 변한 사건입니다. 어떻게 감옥이 성소로 뒤바뀌었을까요? 사도바울과 실라의 찬양이었습니다. 그들의 찬양이 어둠침침한 빌립보 감옥을 성소로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능력의 궁창으로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교우여러분, 우리가 어디에 있던지 우리는 우리가 있는 곳을 180도 뒤바꾸어 놓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찬양이 우리가 있는 곳을 성소로 능력의 궁창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찬양은 다른 무엇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호흡만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의 호흡을 주님께 드리는 것 이것이 찬양입니다. 이러할 때 우리가 있는 곳은 180도 뒤바뀝니다.

그러면 찬양은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필수임이 확실해 졌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의 현 주소는 어떻습니까?

얼마 전에 방선오씨가 그린 풍자만화를 보았습니다. 오늘 우리 크리스챤들의 모습을 고발하는 내용이 담긴 풍자만화입니다. 첫 번째 사람이 말합니다. “몸에는 박수가 짱이지.” 박수를 치면 건강에 좋다는 뜻이 담긴 말입니다. 종종 부흥회에 가 보면 박수를 치라고 하면서 박수가 몸에 좋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찬양시간에 힘차게 안하니까 박수를 치면 건강에 좋다고 종종 말합니다. 그러면 당연히 박수소리가 커집니다.

두 번째 사람이 말합니다. “살 빼는 데는 금식 기도가 최고여.”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겠죠.

세 번째 사람이 말합니다. “찬양을 해야 폐가 좋아지죠.” 찬양을 많이 하면 당연히 폐가 좋아지겠죠. 그런데 이런 풍자만화가 왜 나왔겠습니까?

오늘 현대 크리스챤들에게는 찬양도 자신을 위한 찬양이 되었습니다. 찬양으로 건강해진다고 해야 찬양을 합니다. 결국 궁창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고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하여 사용하게 되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의 궁창에서 흘러나오는 능력이 우리 각자를 위한 부귀영화와 건강을 위해서 이용될 수 있을까요?

천만에…, 결코 우리들의 소원대로만 이루워지지 않습니다. 그 결과 느끼는 것이 무엇입니까? 찬양을 해도 별로 느낌이 없습니다. 우리가 있는 곳이 성소로 뒤바뀌는 것 같지 않습니다. 능력의 궁창으로 변하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아무리 찬양해도 세상적인 축복이 내려오지 않으니까, 결국 찬양이 맥이 빠집니다. 요즘 찬양팀들이 많이 생겼는데 찬양팀 리더들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낸 것입니다. 건강을 우상으로 삼고 있는 현대 크리스챤들임을 너무 잘 아는지라. “찬양을 해야 폐가 좋아지죠.” 그 말을 듣고 또 열심히 찬양합니다. 그러나 가면 갈수록 힘을 잃어 갑니다.

오늘 본문 말씀2절이 이에 대한 해결책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현대 크리스챤의 문제가 예리하게 파헤쳐져 있습니다.

“그의 능하신 행동을 인하여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광대하심을 좇아 찬양할찌어다.”

우리의 건강과 우리의 부귀영화를 위하여 찬양하지 말고 하나님의 능하신 행동과 그의 지극히 광대하심을 생각하며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궁창의 능력을 가지고 우리의 건강과 부귀영화를 위하여 사용하기에는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병중에 있을 때는 궁창의 능력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역경가운데서 우리 각자도 하늘의 놀라운 능력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눈을 들어 세상을 보면 진실로 궁창의 능력이 필요로 하는 곳이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소로 변하여야 할 곳이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시편기자가 지금“그의 능하신 행동을 인하여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광대하심을 좇아 찬양할찌어다”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궁창의 능력이 필요로 하는 곳을 생각하며 찬양을 하라는 뜻일 줄 압니다. 성소로 변하여야 할 곳이 많은데 그러한 곳을 생각하며 찬양을 하라는 뜻일 줄 압니다.

제가 지난번 안식년때 터키를 방문했었습니다. 유적지가 다 관광지가 되어 있으니 제가 가는 곳마다 많은 상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가게에서 하나같이 파란 바탕에 눈이 그려진 쁘로찌와 같은 수버니어를 팔고 있었습니다. 저의 안내인이 저에게 그 수버니어를 선물로 사 주었습니다. 팁을 많이 달라는 뜻이 담겨 있었을 줄 압니다만, 그러면서 저에게 그 수버니어를 설명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것이 바로 ‘알라신의 눈’이라는 것입니다. 이 수버니어를 달고 있으면 알라신이 보호해 준다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늘 말하던 부적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에 5‐6번씩 온 마을에 싸이렌이 울립니다.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알라신을 높이 올려놓고 그 밑에서는 미신을 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습이 남의 모습이 아닙니다. 현대 기독교인들의 모습입니다. 단지 수버니어를 안 단 것뿐입니다.

‘알라신의 눈’을 달고 다니는 무슬렘 교도들의 모습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늘 알라에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나를 돌보소서. 나를 돌보소서.” 이웃을 생각할 겨를 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도 아침부터 잠이 들 때까지 늘 마음으로 기도하지 않습니까? “나를 돌보소서. 나를 돌보소서.” 무엇이 다를 바가 있겠습니까?” 물론 이런 기도가 전혀 잘 못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기도도 해야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기도를 응답해 주시기 위해서 궁창의 능력을 늘 사용하여야 하실까요?

그러므로 참 찬양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찬양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들은 새로운 창조적 능력을 필요로 하는 어려운 상황에 거한 이웃을 향하여 찾아 갑니다.

이와 같이 어려운 곳을 찾아다니는 자들에게 시편기자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 소고 치며 춤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 큰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지어다.”

로버트 쇼(Robert Shaw)라는 유명한 지휘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애틀란타 교향악단(Atlanta Symphony Orchestra)과 합창단의 지휘자였습니다. 1988년 로버트 쇼는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을 이끌고 동부 베를린을 방문합니다. 물론 이 때는 베를린 벽이 무너지지 않은 때입니다. 이들은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을 연주했습니다. 연주가 끝나자 모든 청중들은 일어서서 기립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한 결같이 자유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찼습니다. 자유 기쁨 형제애로 이어지는 감격어린 연주였습니다. 이 연주 후 수개월 안에 드디어 베를린 벽이 무너졌습니다.

물론 어떤 분들은 우연이라고 말하실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놀라운 상징이 내포하고 있음은 사실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들의 합창이 그동안 베를린 벽 앞에서 부른 수 없이 많은 찬양의 가장 마지막 찬양이 아니었을까?

참된 찬양은 권능이 있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 이 놀라운 찬양을 하도록 명령 받았습니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 지어다.”

교우 여러분 우리가 찬양하는 곳이 성소요 권능의 궁창입니다. 그러므로 성소가 되어야 할 곳에 그리고 하늘의 궁창에서 내리는 능력이 필요한 곳에 우리가 가야 하지 않을까요? 그 곳에서 여호와를 찬양하여야 하지 않을까요?

말씀을 거둡니다.

에밀리 셀리어(Emily Salier)라는 가수가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슬픔을 당한 사람에게 우리가 줄 수 있는 것은 노래뿐이다.”

병든 그리고 슬픔 가운데 있는 이 세대에 사는 많은 분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들의 노래일줄 압니다. 논리적 사고나 예리한 통찰력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오늘의 세대는 노래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눈을 들어 세상을 바라보십시오. 이 세상은 폐허가 되어 있습니다. 전쟁과 기근 그리고 인간들의 끝없는 욕심으로 폐허가 되어 있습니다. 이곳을 성소로 바꾸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세상은 우리들의 노래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노래할 것을 명령하고 계십니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그런데 우리들의 호흡이 노래입니다. 우리들의 호흡에 아름다운 가사를 붙이면 됩니다. 우리가 있는 곳은 성소가 될 것입니다. 궁창의 능력이 우리의 노래와 더불어 세상을 아름답게 할 것입니다.

끝으로 베를린 벽을 무너뜨린 노래 가사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기뻐하며 경배하세 영광의주 하나님
주 앞에서 우리 마음 피어나는 꽃 같아
죄와 슬픔 사라지고 의심 구름 걷히니
변함없는 기쁨의 주 밝은 빛을 주시네

새벽별의 노래 따라 힘찬 찬송 부르니
주의 사랑 줄이 되어 한 맘 되게 하시네
노래하며 행진하여 싸움에서 이기고
승전가를 높이 불러 주께 영광 돌리세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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