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 2007.07.01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인자가 오는 것을 보리라
성경본문 : 마태복음 24장 29-3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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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호정씨라는 언론인이 있는데 이 분이 스웨덴의 공동묘지를 관광한 후 글을 썼습니다. 마지막 부분만 소개해 드리면…,
작디 작은 채플이었다. 땅속에 묻히기 전에 다시 한번 이별하는 그 처소의 입구에 해독할 수 없는 짧은 스웨덴어 문장이 동판에 새겨져 붙어 있었다. 통역을 불러물어 보았다. 통역의 입에서 간단히 이 말이 떨어졌다. 오늘은 나, 내일은 너. 눈물이 왈칵 솟구쳤다. 죽은 자가 우리에게 전하는 그 통절한 메세지가 어두운 내 눈을 찔렀던 것이다.
사실 우리는 늘 죽음의 뉴스를 들으면서 삽니다. 죽음의 뉴우스를 접할 때마다 우리는 우리들 가슴에 울리는 메세지를 듣곤 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나, 내일은 너 우리는 부고를 접할 때 한 번쯤 생각하게 될줄 압니다. 나는 언제 인가? 나의 내일은 언제인가?
저의 집에 건강저널 이라는 잡지가 매 달 날라 옵니다. 물론 저희가 주문한 것도 아닌데 날라 옵니다. 수신인이 저의 이름으로 되어 있습니다. 저와 저의 가정의 건강을 생각하셔서 어느 분이 정기적으로 보내주고 있습니다. 약 100페이지가 넘는 잡지이니 꽤 내용이 많이 담겨져 있습니다. 벌써 61호가 나왔으니 5년이 넘게 발간되는 잡지입니다. 그것도 미주에서 발간되는 잡지입니다. 미국에서 발간되는 한인들을 위한 잡지가 5년이넘게 계속되고 있다면 대단히 성공하고 있는 잡지입니다. 많은 분들이 구독하고 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7월호 카버페이지에 나온 제목들만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댄스와 꾸준한 단백질 섭취로 10년 젊게 살아요.”
“자연에 가까운 좋은 제품을 만드는 곳: 우메켄 일본 토야마 공장을 가다”
“물, 잘만 마셔도 몇 년은 젊어진다.”
“내 몸의 건강 밸런스 산성 VS 알칼리성”
“여름철 원기회복을 돕는 식품”
“녹색 보약 녹즙 건강하게 마시기”
이정도만 잘 따라해도 아주 건강하게 살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가지고 부족한 것 같습니다. 이런 건강에 관한 메세지를 매 달 들어야만 하나 봅니다.
저는 건강저널이 이처럼 인기 있는 것을 보면서 생각이 드는 것은 제 아무리 먼저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이 오늘은 나 내일은 너 라는 멧세지를 남겨도 그 결과는 나의 내일이 언제 오더라도 그 동안 건강하게 잘 살다가 내일을 맞이하자 좀 더 씨니칼하게 표현하자면 나의 내일이 올 때까지 나만 잘 먹고 건강하게 살다가 그 날을 맞이하자 라는 생각에 젖어 있지 않나 생각해 보았습니다.
한 번 스스로 자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최근에 접한 죽음의 소식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가족이던 친구던 이웃이던…. 그 소식이 여러분의 삶에 눈에 띄는 변화를 가져다주었습니까? 한 가지 변화가 있다면 건강에 대해 더 신경을 쓰게 하지 않았나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이웃의 죽음을 대할 때마다 우리도 모르게 질문합니다. 나의 날은 언제인가? 그러나 그 질문이 우리의 삶을 본질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도리어 생명 연장에만 급급하게 만듭니다. 그러면 진실로 어떤 질문이 우리들의 삶을 변하게 할까요. 우리를 본질적으로 변화시키는 질문을 함께 찾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상고하면서 함께 이 질문을 찾으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읽으면 금방 우리가 갖고 살아야할 질문이 무엇인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첫 절을 봉독해 드립니다.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오늘의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갖게 합니다. “그 날은 언제인가?” 물론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아니지만 36절에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곧 그 날은 하나님만 아십니다. 하나님만 아시지만 이 것은 우리에게 새로운 질문을 갖고 살라는 멧세지인줄로 압니다. “하나님만 아시는 그 날은 언제인가?”오늘의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한 가지 질문을 선물로 주고 있습니다. “그 날은 언제인가?” 아니 오늘 본문 말씀뿐 아니라 성경전체가 우리에게 주는 하나의 선물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날은 언제인가?”라는 질문입니다.
구약의 예언서중에 대표적인 이사야서의 마지막 부분은 그 날에 대한 질문으로 가득차있습니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이사야 65:17) 사도바울도 누구 못지 않게 그 날을 마음에 품고 산 사람입니다. 빌립보서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구약에서는 이사야서 신약에서는 사도바울의 서신에서 한 구절씩 소개해 드렸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빙산의 일각입니다.
예언서와 사도바울 서신에서 이처럼 그 날에 대해서 강조되어 있는데 하물며 복음서는 어떻겠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이 있는 마태복음에서는 24장 25장이 전부 ‘그 날’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을 읽으면 복음서뿐만 아니라 곳곳에서 “그 날이 언제일까?”라는 질문을 갖게 합니다. 왜 이런 질문을 갖게 할까요? 이 질문이 우리들을 위한 귀한 선물이기 때문일 줄 압니다. 이 질문을 바로 갖고 있으면 우리의 삶은 변합니다. 최고의 삶을 누리게 됩니다. 이 것이 우리들을 위한 귀한 선물이 아니면 이처럼 여러번 성경에 언급하실리가 없습니다. 이 것이 너무도 귀한 선물이기에 언급하고 또 언급하고 또 언급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도 하실 수 있겠습니다. “성경에는 ‘나의 날은 언제일까?’라는 질문은 금하고 있는가?”물론 금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제가 아는 지식으로는 한 군데에서 이 질문의 필요성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시편 90:12입니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곧 우리는 나의 날이 언제일까 생각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이 것은 그 큰 성경에서 단 한 번 나옵니다. 반면 창세기에서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성경 전체를 흐르는 메세지는 아니 선물은 “그 날은 언제일까?”입니다.
그런데 그 날은 하나님만 아십니다. 우리는 그 날이 언제일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 날은 하나님만 아시지만 그 날에 어떠한 일이 일어날 것인지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알려주셨습니다. 29절 말씀입니다.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29절은 “그 날 환난 후에”로 시작됩니다. 우리가 기다려야하는 그날은 환난과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환난 후에 그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환난 없이 그날이 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먼저 그 환난이 어떤 환란인지 살펴보아야 될 줄 압니다. 오늘 본문 말씀으로 삼지는 않았습니다만 그 환난에 대해서는 오늘 본문 말씀 전 귀절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먼저7, 8절 을 봉독해 드리면…,
“민족이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
첫번째 환난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그런 환난입니다. 이런 환난이 세상 마지막에 있다는 것입니다. 한편 두 번째 환난은 종교적 환난입니다. 24절 말씀입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교우 여러분 세상 마지막에는 사회적 환난과 함께 종교적 환난이 곳곳에서 일어 납니다. 이 것이 오늘 본문 말씀 전 귀절에서 말씀하는 마지막 날의 환난입니다. 사실 요즘에도 이미 이런 환난은 임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많은 신학자들은 이미 마지막 날은 시작되었다고 주장하는 것 같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환난이 ‘그 날’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그 날 곧 환난 후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환난’ 과 ‘그 날’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왜 환난과 그 날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을 수 밖에 없는지 궁금해집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누가 환난받길 줗아하겠습니까? 그런데 환난 후에야 그날이 온다니 좀 하나님께 따지고 싶지 않습니까?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사랑의 하나님께서 애꿎게 아무 필요 없이 우리에게 환난을 주시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사실 “그 날”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왜 환난 후에 그날이 와야 되는 지 알 수 있게 될 줄 압니다. 그러면 계속 그 날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한 마디로 그 날에 창조세계가 뒤 흔들려 진다는 것입니다.
Washington 대학교의 과학자들이 지구의 종말은 이미 시작했다는 연구 자료를 발표했습니다. 태양은 점점 커지고 뜨거워지고 있는데 언젠가는 너무 커져서 수성(Mercury)와 금성(Venus)를 삼킬 것이고 지구에 사는 모든 생명체를 다 앗아 갈 것을 밝혔습니다. 그 과학자들의 발표와 오늘 본문 말씀을 비교하면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합니다. 주님은 해가 어두워진다고 말씀하셨는데 과학자들은 해가 더 광채를 발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 날에 해가 어두워져야 하는 한편 지금 해는 계속 커지고 밝아지고 있다면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태양이 지구를 잡아 먹기전에 그 날은 온다는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습니다. 태양이 수성과 금성을 잡아먹고 또 지구를 파괴하러 지구로 향하여 오기 전에 주님은 오신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태양이 지구를 잡아먹기 전에 창조세계는 뒤흔들려진다는 것입니다. 이로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날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창조의 법칙은 새로운 질서로 대치된다는 것입니다. 이 것이 그날에 이루어지는 첫번째 사건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창조세계가 새로운 질서의 창조세계로 바뀌면서 주님은 다시 오십니다. 우리는 이날을 기다리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첫번째 창조질서와 두 번째 창조질서와의 차이는 어떤 것일까요?
이와 관련해서 폴킹혼(Polkinghorne)이라는 물리학자이며 성공회 신부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창조는 가능성의 창조입니다.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를 우리에게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 놓으시고 하나님은 안 보이시는 것 같습니다. 이 것이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상입니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창조세계는 가능성을 약속하신 세계입니다. 가능성을 개발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반면 두 번째 창조 세계는 가능성의 세계를 허락하셨던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만남의 세계라는 것입니다. 첫번째 창조세계 안에서 우리는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났지만 두 번째 창조세계 안에서는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를 만드신 그 분, 그 분에게 안깁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날이 오기 전 환난이 임하는지 이해할 수가 있게 됩니다. 첫번째 창조 곧 가능성의 세계를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가능성의 세계 안에서 인간은 죄를 지었습니다. 죄를 지은 우리 인간이 진정 하나님을 만날수 있는 방법은 환난인 것입니다. 첫 번째 세계 안에서는 미안하지만 어려움 없이 환난 없이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지진과 홍수 그리고 전쟁과 적그리스도의 나타남은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이 것은 바로 하나님의 임재의 한 방법입니다. 죄 있는 인간은 환난 없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이 환난 없이 하나님을 만날 수 없음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환난 없이 하나님을 만나신 분 누구인지 아십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 위대한 사도바울도 자기에게는 사탄의 가시가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일차적인 창조 세계 가능성의 세계에 사는 우리들은 모두 환난 안에서만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러므로 이차적인 창조 세계가 도래하기 전에는 환난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지혜로운 자들은 환난 가운데서 늘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환난이 올 때마다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결국 그 가운데서 하나님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것입니다. 언젠가 이차적인 세계가 도래할 때는 환난 가운데 만났던 그 하나님을 우리는 직접 만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환난과는 거리가 먼 곳에서 만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환난 없이도 만나게 될 그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그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곧 주님을 기다리면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날은 환난 후 찾아 올수 밖에 없습니다. 첫번째 창조질서 안에서 하나님은 환난이 깊을수록 우리를 깊게 만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날이 오면 환난 가운데 있던 자들이 더 이상 환난이 필요가 없습니다. 그날 이후 두 번째 창조 질서 안에서는 환난 없이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날을 바로 이해하는 자들은 그날을 기다리게 되어있습니다. 이는 환난 중에 있던 핍박받는 자들이 해방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30, 31절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30절을 다시 봉독해 드립니다.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그 때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31절과 비교해야지 더 잘 설명이 될 줄 압니다. 31절 말씀입니다.
“저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주님이 구름을 타고 오시는데 땅의 모든 족속이 통곡한다고 30절에 기록되어 있는 반면 31절에는 그 택하신 자들을 사방에서 모으신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알 수 있는 것은 30절에는 택함받지 못한 자들에 대한 언급입니다. 반면 31절은 택함받은 자들에 대한 언급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우연일지 몰라도 택함 받지 못한 자들을 언급할 때는 땅의 모든 족속이라고 표현된 반면, 택함 받은 자들을 언급한 때는 사방에 흩어진 자들을 모은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가장 알맞은 해석은 땅의 권세를 잡은 자들을 아마도 땅의 모든 족속으로 표현 하셨을지 모르겠습니다. 반면 택함 받은 자들은 세상 권세를 잡지 못하고 흩어진 자들로서 삶을 살다가 주님의 오심과 더불어 권능을 덧입는 사건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곧 주님의 오심은 창조세계의 질서가 뒤바뀜과 아울러 사회질서의 뒤바뀜을 동반합니다. 세상 권세자들이 통곡을 하고 그 밑에서 신음하던 자들이 천사들의 나팔 소리를 들으면서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합니다. 이 것이 바로 그 날에 이루어지는 두 번째 사건입니다. 곧 세상권세 밑에서 신음하던 작은 자들이 새로운 사회질서 안에서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제가 세상 마지막 날을 생각하면 늘 떠오르는 장면이 있습니다. 마지막 날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시면서 하시는 말씀은 이 한마디입니다. “뒤로 돌아 갓!”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처음 된 자들이 나중되고 나중된 자들이 처음이 될 것입니다. 곧 주님은 창조질서를 바꾸실 뿐 아니라 사회 질서를 바꾸십니다. 주님은 더 이상 가능성의 세계를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와 더불어 가능성의 세계를 창조하길 원하십니다. 주님은 사회를 뒤엎으시고 더 이상 환난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능력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나게 하십니다.
교우 여러분, 주님의 다시 오심을 통하여 이러한 일이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이날은 언제가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오직 하나님만 아십니다. 우리는 단지 이 날을 기다릴 뿐입니다. “이 날이 언제일까” 생각하며 기다릴 뿐입니다. 이런 기다림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 이 땅 위에서부터 최고의 삶을 살게 됩니다.
유대교 신학자로서 최고의 신학자로 손꼽혔던 아브라함 헤셀(Heschel)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의 책을 읽으면 이 분이 얼마나 ‘그 날’에 대한 것을 강조하고 있는지 쉽게 알게 됩니다. 사실 그럴수 밖에 없는 것이 구약의 태반이 ‘그 날’에 대한 주제 입니다. 영어로는 ‘the Lord’s day’인데 이 ‘주의 날’에 대한 언급이 수없이 나옵니다. 유대교 신학자로서 그 날을 생각하지 않으면 가짜 신학자입니다.
헤셀은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한 것을 하나의 그 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언젠가 더 큰 그 날이 이스라엘을 위하여 도래할 것을 믿습니다. 이렇게 그 날에 대해서 깊이 연구하는 그는 어느덧 유대신학을 이끄는 거두보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위대한 학자에게도 죽음은 찾아옵니다. 드디어 헤셀 박사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침대 머리맡에 두 권의 책이 놓여 있었습니다. 하나는 유대문학책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그 당시 한창이었던 베트남 전쟁에 관한 책이었습니다. 그는 새로운 창조질서 새로운 사회질서를 그리워한 분입니다. 그 날을 그리워한 분입니다.
헤셀 박사는 우리들에게 많은 도전을 줍니다. 그가 주는 교훈은 그 날을 기다리는 자들은 세상의 환난을 애통해 한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사회질서를 갈망합니다. 그 날을 기다리는 자들은 자기만을 위하여 사는 자들이 아닙니다. 온 우주를 위하여 사는 자들입니다. 온 세계평화를 위해 사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위대한 삶의 주인공이 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헤셀박사는 이미 오신 메시야를 믿지는 않았지만 그 날을 기다리며 기다리는 삶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헤셀 박사는 예수님을 만나지도 못한채 막연한 그날을 기다리면서도 그 와같은 놀라운 삶을 살았는데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까?
교우 여러분,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자들은 막연히 기다리지 않습니다. 오늘도 환난 가운데 있는 자기와 같은 연약한 자들을 찾아 갑니다. 그 들에게 가서 그 날을 함께 기다리자고 권합니다.
아니 그뿐 아닙니다. 이웃을 박해하는 자에게도 찾아 갑니다. 그 날이 올 것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그 날을 준비하자고 권합니다. 그 것이 또 다른 박해를 가져올 지라도…. 이것이 참으로 그날을 기다리는 자의 삶입니다.
교우 여러분, 나의 날을 생각하면 결국 나 자신의 건강만을 생각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그 날을 생각하는 분들은 환난 가운데서도 즐거워합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그 날에 만날 하나님을 기다립니다. 또한 지금 환난 가운데 있는 자들을 생각합니다. 아니 찾아 갑니다. 그 들 안에서 앞으로 만날 주님을 만납니다.
교우 여러분, 나에게 있는 어려움이 없어진 다음에 이웃을 찾아 갈 생각을 하지 마십시다. 이 어려운 고비만 넘기면 열심히 이웃을 위하여 살겠다고 결심하셨습니까? 그러한 날은 오지도 않습니다. 그 날이 오기 전에는…. 그러므로 각자의 환난을 안고 이웃을 찾아 가십시다. 그 때 이웃도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을 만날 것입니다. 환난 없이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환난 가운데 있는 자만이 진정 이웃을 만날 수 있습니다. 환난 없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그 날을 기다리며 작은 이웃을 만나는 축복의 삶을 사십시다. 이것이 진정 그날을 기다리는 자의 삶입니다. 그날을 기다리는 자는 건강저널을 읽는 자들이 아니라 베트남 전쟁에 관한 책을 읽는 자들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에밀리 디킨슨의 시입니다.
마음이 찢어진 한 사람을 위로할 수 있다면…
나 헛되이 사는 것 아니리…
삶의 아픔 하나 덜어줄 수 있다면…
괴로움 하나 달래줄 수 있다면…
기진맥진 지친 울새 한마리
둥지에 다시 넣어줄 수 있다면…
나 헛되이 사는 것 아니리…
역사의 마지막을 기다리는 사람은 바로 디킨슨처럼 한 사람을 만나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이 한사람을 만날 때 세상 창조질서는 뒤바뀌어집니다. 사회질서는 뒤바뀌어집니다. 그들은 언젠가 주님께서 “뒤로 돌아 갓!” 하실 것을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예수님도 우리와 더불어 그 날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날이 오기까지 환난 중에 잇는 우리들과 함께 계시며 그 날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교우여러분, 주님과 더불어 그 날을 기다리며 하루에 한 사람을 매일 매일 만나십니다. 그 한 사람은 바로 우리가 그 날에 만날 예수님이십니다. 영광 중에 나타나실 예수님이십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 때에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