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안내
주보
주보 모음
설교 영상
설교 원고
찬양
실시간 예배
2015년 이전 설교

“시험을 받으시더라(I): 주리심” 누가복음 4:1-4 (03/17/2019)

 

한 의인이 소돔에 갔습니다. 소돔 사람들을 죄와 벌에서 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밤낮으로 거리와 시장을 돌아다니며 탐욕과 도둑질, 거짓과 무관심을 버리라고 설교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듣고 빈정거리며 웃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더 이상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이미 소돔 사람들에게 흥미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살인자는 계속해서 살인을 했고, 현자들은 계속 침묵했습니다. 어느 날 그 의인을 가엾게 여기던 한 아이가 다가와 왜 아무 소용없는 외침을 계속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의인은 자기가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이제는 알게 되었다면서 “내가 지금까지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은 사람들이 나를 변화시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말했습니다.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엘리 비젤이 지은 이야기입니다. 오늘 사순절 둘째 주일을 지키고 있는데 우리는 지금 누구를 위해 사순절을 지키고 있나요? 물론 우리 자신을 위해서 당연히 지켜야 할줄 압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주인공처럼 더 이상 이웃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위 사람들로 인해 변질되지 않기 위해 곧 자신만을 위해서 애써 지키고 있지는 않는지요…?

 

사순절은 그러면 어떻게 지내야 하는 것인지, 광야에서 시험받으시는 주님의 모습을 살펴 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절, 2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먼저 오늘 본문 말씀의 배경을 말씀드리면, 예수님은 막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셨는데 이 때 하늘이 열리며 비둘기 같은 성령이 예수님께 임하셨습니다. 곧 성령충만함을 입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 때 하늘로부터 소리가 났습니다. 3:22절 말씀입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요즘 소그룹과 구역에서 마태 복음을 공부하고 있는데 주님의 세례 받는 장면을 이미 공부하셨거나 하실줄 압니다. 이번 마태복음 성경공부 교재 저자는 이 장면을 예수님의 대관식으로 설명을 하십니다. 곧 예수님의 왕권이 시작되는 장면으로 해석을 하십니다. 그것도 중요한 해석입니다. 물론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만 대관식으로 생각하면서 말씀을 계속 살피겠습니다.

자 그러면 예수님께서 왕의 대관식을 마쳤습니다. 대관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신 분이 성령입니다. 성령께서 비둘기 같이 임하신 것입니다. 이제 대관식을 마쳤으면 성령께서는 왕 되신 예수를 어디로 인도하실까요? 빨리 왕좌가 있는 왕궁으로 인도해야 하지 않을까요? 과연 그럴까요? 다시 1절 후반절 말씀을 봉독해 드리면,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성령은 예수를 광야로 이끌어 가셨습니다. 사실 누가복음에서는 ‘이끌리시다’로 표현했지만 마가복음은 더 강한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12절 말씀입니다.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광야로 몰아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대관식을 마치고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어떤 위대한 일을 할까 계획도 아직 세우지 않았는데, 그냥 성령이 몰아 내셨습니다. 성령의 Tornado를 맞은 것입니다. Tornado를 맞고 요단강에서 광야로 내던져진 것입니다. 왕궁은 커녕….

그러면 왜 광야로 쫓겨 갔을까요? 막 대관식을 마친 왕이 되셨는데….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시험을 받으시기 위하여….

 

저는 군의관으로서 비교적 쉬운 군대 훈련을 받았습니다. 쉬운 훈련이라는데도 저에게는 아주 고되더라구요. 일반 장교들은 더 고된 훈련을 받으셨을줄 압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받으신 시험과 장교들의 훈련에는 본질적으로 큰 차이가 하나 있습니다.

장교들은 먼저 훈련을 받습니다. 받고 합격한 사람들만이 장교가 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세례를 먼저 받았습니다. 먼저 대관식을 통해서 왕이 되셨습니다. 왕이 되신 다음에 시험을 받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주는 큰 교훈이 있습니다. 우리는 대관식에 참여하기 위하여 사순절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자녀라는 대관식은 치룬 것입니다. 대관식을 치룬 자들에게 주어지는 특권이 바로 사순절에 동참하는 특권인 것입니다.

올해 모든 분들이 각자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순절을 지키고 계실줄 압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사순절을 잘 지키기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사순절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결론을 내릴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왕이 되기 위하여 시험을 받으신 것이 아닙니다. 왕으로서의 사명을 완수하시기 위하여 시험을 받으신 것입니다. 주님은 왕으로서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시험을 받으신 것입니다. 주님은 온 인류는 죽어가지만 당신 혼자 굳건히 왕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시험을 받으신 것이 아닙니다.

이에 마귀는 당연히 주님의 이런 계획을 무산시키려고 합니다. 마귀는 이미 자신은 영벌에 처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만 영벌에 처할 것이 아니라 온 인류도 자기의 친구가 되길 원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이 놀라운 주님의 계획을 무산시키기 위해 첫번째 시험을 걸어 옵니다. 3절 말씀입니다.

“마귀가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사실 주님은 장장 40일간 굶으셨을 때입니다. 그러니 정말로 기가 막힌 시험입니다. 돌을 떡이 되게 하여 하나님의 아들됨을 증명도 하고 스스로 허기진 것도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곧 당신의 능력을 당신 자신을 위해 사용할 것을 권합니다.

 

어떻게 보면 자신의 것을 자신을 위해 사용하는 것은 하등 잘못이 없습니다. 아니 그렇게 사는 것이 오늘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사회의 문화입니다. 자기가 벌어서 자기의 영광과 행복을 위해 사용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남을 속이면서 번 돈이 아니면 내 마음대로 사용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마귀의 첫번째 시험에 걸려 있는 것이 아닐까요? 마귀의 마법에 붙잡혀 있는 우리가 아닐까요?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며 살고 있지 않습니까? 세금 낼 것 다 내고 십일조등 헌금 낼 것 다 내면 나머지는 내 마음대로 나를 위해 사용하면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사순절을 통해 그동안 하나님께 성경말씀대로 드리지 못한 것을 깨닫게 하려고 사순절을 지키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평상시에도 언제나 깨달아야 합니다. 마귀는 우리에게 교묘하게 접근합니다.

“너 드릴거 다 드렸어. 이제는 너만을 위해 살아.” 이와 같은 마귀의 교묘한 말을 구분하는 것이 사순절에 우리가 받아야 할 은혜입니다.

사실 우리는 기도는 많이 하지만 기도 중 대부분이 나를 위해 돌을 떡이 되게 해달라는 기도가 아닐까요? 우리들 중에 과연 몇 명이나 이 마귀의 첫번째 시험을 통과할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오고 가는 세대에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시험을 받을줄 아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에게 이러한 시험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어떻게 통과하셨는지 살펴 보면 크게 도움이 될줄 압니다. 4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은 어떻게 보면 동문서답을 하십니다. 돌을 떡으로 만들수 없다던가 아니면 만들수는 있는데 그러기 싫다던가 말씀하셔야 하는데 살짝 말을 돌리십니다. 대신 신명기 8:3절 말씀으로 답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마귀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습니다. 그 답변으로 case가 close됩니다. 왜 그랬을까요? 어떻게 보면 동문서답인데…. 제가 마귀라면 이렇게 대꾸하였을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사람은 떡으로만 살수는 없읍니다. 그 뜻은 떡으로도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돌을 떡으로 만들어 보세요. 아마 그런 능력이 없나 보네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가 보네요?”

그런데 사탄은 왜 아무 대꾸를 안 했을까요? 저보다 지혜가 없어서…?

 

교우 여러분,

사람은 떡으로만 살수 없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수 없다는 뜻은 떡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떡과 말씀이 다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한편 떡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자들의 삶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들은 떡도 먹고 말씀도 먹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먹고 마시는 모든 행위를 자신을 위해서만 하지 않습니다. 지금 마귀는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면 자신을 위해서 자신의 허기진 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돌을 떡으로 만들라고 시험한 것입니다.

이에 주님은 나는 나만을 위해서는 돌을 떡으로 만들지 않는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면 계속 굶주리시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마귀는 꼬리를 내린 것입니다.

 

이제 이 시험을 통과하신 주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능력의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이 땅에서 이웃을 위한 떡을 만드는 certificate을 받으신 것입니다. 광야의 시험을 통하여….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운전을 아무리 잘 해도 그 지역에 가면 그 곳에서 또 운전 면허를 받아야 합니다. 왕도 운전하려면 면허를 받아야 하지 않습니까? 이처럼 주님은 광야의 시험을 받으셨어야 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돌을 떡으로 바꾸는 능력은 후에 증명이 됩니다. 유명한 오병이어의 사건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말씀을 듣기 위해 쫓아 온 많은 사람들이 허기진 것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합니다. 제자들은 겨우 한 소년이 갖고 온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개를 주님께 가져 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축사하시고 제자들에게 나눠주라고 하십니다. 장정만 5천명이니 만명 이상이 먹고 12광주리에 차고 넘쳤습니다.

 

저는 이렇게 상상해 봅니다. 마귀가 돌들로 떡이 되게 하라고 했을 때 주님은 인간이신지라 잠시 솔깃하셨을줄 압니다.

그런데 그 순간 얼마 후 당신의 말씀을 들으면서 허기진채 듣고 있는 무리들의 한 사람 한 사람 얼굴이 떠오릅니다. 만일 지금 자신을 위해 떡을 만든다면 그 때는 떡을 만들수 없게 되었을 것입니다. 마귀의 시험에 넘어 갔으니 말입니다.

마귀의 시험은 자신을 위해서 떡은 만들지만 남을 위해서는 만들지 못하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험에 넘어 갔더라면 주님은 2천년이 지난 지금도 배고플 때마다 혼자서 돌을 떡으로 만들면서 재미 있게 지내 오셨을줄 압니다. 그러나 주님은 시험을 뿌리치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느끼시면서 마귀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영과 육의 양식에 굶주려 있는 온 세상 사람들의 불쌍한 얼굴을 한 사람 한 사람 만나시면서 신명기 말씀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은 광야의 시험을 통하여 오고가는 수많은 굶주린 사람까지 만나신 것입니다. 그들을 배불리 할수 있는 license를 받으신 것입니다.

 

미국 역사 속에 길이 기억되는 busboy 곧 식당에서 음식을 나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웨이터도 아니고 웨이터를 돕는 사람을 busboy라고 합니다. Juan Romero라는 사람이 1968년도 Robert Kennedy가 암살당하는 현장에 있었습니다.

후에 그는 가난하지만 정장을 구입하고 워싱톤 DC로 비행기를 타고 갑니다. Robert Kennedy의 묘지 앞에 서서 참배를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니 참배 보다는 사죄를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가 사죄하려고 한 것은 바로 자기 때문에 케네디가 암살당했다고 자책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로버트 케네디가 바쁘게 유세하던 중인데 케네디가 잠시 그를 보고는 멈춰 섰습니다. 아니 그를 주목했던 것입니다. 잠시 멈춰 서 있는 바로 그 시간에 총에 맞은 것입니다. 멈추지 않고 그냥 지나쳤으면 케네디가 암살을 당하지 않았을텐데 하찮은 busboy인 자기 앞에 멈춰 섰기에 그 순간 암살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에게는 죄책감으로 남아 있어서 그 비싼 양복과 비행기표를 사서 알링톤 국립묘지까지 찾아 간 것입니다.

 

어쩌면 이 모습이 사순절을 보내는 우리들의 마음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잠시 멈추는 순간들로 인해서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우리들의 배고픔을 당신의 배고픔으로 여기셨기에 주님은 도리어 채찍에 맞으셨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의 시작은 바로 성령의 이끌림을 받으셔서 광야에 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돌이 떡이 되게 하라는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을 때 잠시 우리들의 얼굴을 떠 올리신 것입니다.

한편 우리들의 얼굴을 떠 올리시면서 그 때 주님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이런 못난 죄인들 때문에 내가 십자가를 지겠구나? 내 팔자야…!” 하셨을까요?

Robert Kennedy는 그 busboy가 언젠가 자기의 묘 앞에서 정장을 하고 서 있을 모습을 그는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굶주림 가운데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모습을 떠 올리셨을 것입니다. 어떤 모습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때로는 굶주리는 모습을…, 아니 이웃을 위해 함께 맛있게 먹고 때로는 이웃과 함께 굶주리는 모습을 보셨을줄 압니다. 사도바울이 먹든지 마시든지 주님의 영광을 위한 것처럼 모든 사람들이 그러한 삶을 살게 될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으로 사는 자들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고백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말씀을 인용하면,

“사람은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말씀을 거둡니다.

사순절 묵상집을 지은 어느 수녀가 당신의 웹싸이트에 자기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고 합니다.

‘I am a mother, a wife, a teacher, a lover of chocolate.’

어느 말이 제일 귀가 솔깃하십니까? 저에게는 ‘a lover of Chocolate.’ 우리는 먹는 것으로 모두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때로는 배부름으로 때로는 굶주림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한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한 인간이 되셔서 위대한 인류 공동체를 위하여 광야에서 굶주린 것입니다. 우리들의 얼굴 하나 하나를 떠올리면서…. 우리를 배불리 하시기 위하여….

우리도 남은 사순절 이웃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기도와 절제와 구제에 참여하십시다. 우리도 license를 받으십시다. 언젠가 우리도 5병2어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주님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절제의 삶 가운데서 이웃의 눈길을 느끼는 복된 사순절을 보내십시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This entry was posted in 설교 원고. Bookmark the permalink.
No. Title Writer Date
357 “예수의 어머니” 요한복음 2:1-12 (05/12/2024) webmaster 2024.05.13
356 “나는 양의 문이라” 요한복음 10:1-9 (04/28/2024) webmaster 2024.04.29
355 “나는 세상의 빛이라” 요한복음 8:12-20, 9:35-41 (04/21/2024) webmaster 2024.04.22
354 “나는 생명의 떡이라” 요한복음 6:22-35 (04/14/2024) webmaster 2024.04.15
353 “마지막 아담: 살려 주는 영” 고린도전서 15:42-46 (03/31/2024) webmaster 2024.04.01
352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누가복음 23:32-28 (03/24/2024) webmaster 2024.03.25
351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요나서 4:5-11 (03/17/2024) webmaster 2024.03.18
350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요나서 4:1-4 (03/03/2024) webmaster 2024.03.04
349 “베 옷을 입은지라” 요나서 3:1-10 (02/18/2024) webmaster 2024.02.19
348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 요나서 1:17-2:10 (02/11/2024) webmaster 2024.02.13
< Prev 1 2 3 4 5 6 7 8 9 10 36 ... Next > 


The Korean Church of Boston (PCUSA) 32 Harvard St. Brookline, MA 02445
교회 : (617) 739 - 2663, (617) 277 - 8097 / Fax : (617) 739 - 1366 / 담임 목사 : 이영길 목사 (781) 467 - 0002
  Powered by The Korean Church of Bost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