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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내었노라” 누가복음 15:8-10 (05/17/20)

어느 일본 코메디언이 아주 비싼 포르셰를 샀습니다. 친구를 태우고 가다가 차를 멈추었습니다. 친구에게 차를 몰라고 하고는 자기는 내려서 택시를 탔습니다. 그리고 친구가 모는 자기 포르셰를 뒤따라 갔습니다.

택시 기사에게 포르셰가 멋지지 않냐고 말합니다. 기사는 왜 포르셰를 타지 않고 택시를 타고 쫓아 가냐고 되물었습니다. 대답하기를,

“바보 아니세요? 내 차에 타면 포르셰가 안 보이잖아요?”

 

제가 작년에 구입한 어느 책에서 본 이야기이니 분명히 이 이야기는 코로나 사태 이전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요즘에 누가 포르셰를 타고 가다가 자기 차가 멋진 것을 보려고 택시를 타고 쫓아갈 사람들이 있을까요? 택시보다는 포르셰 안이 훨씬 안전할테니 말입니다.

 

코로나는 우리 삶을 많이 뒤바꾸어 놓은 것은 기정 사실입니다. 물론 많은 불편함도 주지만 어떻게 보면 우리들에게 삶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주는 기회가 될지도 모릅니다.

 

얼마전 어느 분이 이멜로 아래와 같은 글을 보내 왔습니다. 제목은 ‘코로나로 인해 느낀 열 가지’ 그 중 몇 가지만 소개해 드립니다.

 

‘축구 스타보다 의료 종사자들이 훨신 값어치 있다.’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 그렇게 돈을 많이 벌던 운동선수들은 온데 간데 없고 의료 종사자들만 종횡무진 활약하고 있습니다.

‘소비 없는 사회에 석유는 쓸모없다.’

요즘 개스값이 폭락하고 있는데 이를 잘 증명해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격리되어 보니 동물원의 동물들 심정을 알겠다.’

갇혀 있다 보니 동물원의 동물들 심정을 얼마큼 이해가 된다는 말일줄 압니다.

‘인간들이 덜 활동하면 지구는 회복된다.’

예, 요즘 공해가 거의 없어지고 있다는 뉴스를 자주 접하게 됩니다.

 

한편 제 마음을 씁쓸하게 하는 글도 있었습니다.

‘종교는 단 한명의 환자도 살리지 못한다.’

 

이 분은 대단한 편견을 갖고 있습니다. 있다는 것은 증명하기 쉽지만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면 온 세계를 다 둘러 볼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사실 저도 지난번 부활주일 설교시 신앙으로 코로나에서 나은 목사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분이 말하는 것 대개 맞습니다. 그러나 그는 정말로 코로나로 인해 우리가 얻을수 있는 귀한 것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럴수밖에, 그것은 종교로만 채워질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종교가 사람을 살리고 사회를 살리고 있는 것을 이 분은 보지 못하고 계신줄 압니다.

 

그러면 이런 위기 가운데 우리가 신앙으로 얻을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오늘 본문 말씀을 상고하며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배경은 15:1, 2절에 나오는데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주님께 가까이 왔습니다. 이 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리면서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고 핀잔을 줍니다.

사실 요즘 우리는 사람을 만나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음식은 절대로 같이 먹을수가 없습니다. 그야말로 social distancing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social distancing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상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의인들과는 얼마든지 같이 밥먹고 교제할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죄인과 세리와는 social distancing을 지켜야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무서운 코로나 보다도 더 무서운 균이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주님께서 무시하셨습니다. 이들과의 social distancing을 지키시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주님을 정죄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주님도 같은 균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들에게 옮아서….

 

이들의 정죄하는 마음을 잘 아시는 주님은 먼저 오늘 본문 말씀 바로 전에 나오는 잃은 양 한 마리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양 백 마리 중에 잃은 양 한마리를 찾으러 나간 목자의 이야기를 들려 주십니다.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양 99마리를 들에 두고 찾으러 간다는 것은 이 때 당시로는 이해할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비유를 많이 들어서 금방 머리에 뭔가가 떠오르지만 처음 듣는 이들에게는 무척 생소한 이야기입니다. 세상에는 양 한 마리로 인해서 99마리를 들에 놓게 갈 목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알쏭달쏭해 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여기까지가 정확히 오늘 본문 말씀의 배경이 되겠습니다. 이제 주님 보시기에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당신의 말씀을 잘 이해를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셨는지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온 비유를 또 말씀하십니다. 8절 말씀입니다.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여기서 드라크마는 하루 일당입니다. 여인은 열 드라크마를 갖고 있었는데 하나를 잃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찾기 위해서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오래 찾았는지는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 상상에 맡기는 것 같습니다. 추측하건데 몇 시간을 족히 찾으려고 애쓴 것 같습니다. 아니 오늘 찾다가 못 찾았으면 다음 날 또 다음날 찾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루가 더 지날수도 있습니다. 하루 일당을 찾기 위해 하루 종일을 보낸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드디어 몇 시간 아니 십여 시간 만에 찾았습니다. 한 드라크마를…. 그 한 드라크마는 하루 품삯 곧 요즘식으로 하면 8시간 품삯인데 8시간 품삯 보다 더 많은 시간을 드려 찾고야만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9절 말씀입니다.

“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아니 하루 품삯을 수십 시간 걸려서 찾은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벗과 이웃을 불러서 잔치를 벌입니다. 벗과 이웃을 불렀다고 하면 못해도 수십명은 부른 것입니다. 그렇다면 찾은 한 드라크마뿐 아니라 나머지 아홉 드라크마도 다 사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을 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기가찼을 것입니다. 더이상 상대할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미련한 여인입니다. 처음 소개해드린 일본 코메디언 같으면 자기 코메디의 소재로 사용하기에 딱 좋은 여인입니다. 코메디언은 택시 기사보고 “바보 아니세요?” 말했는데 아마 이 여인에게도 같은 말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 여인은 한 드라크마를 찾았는데 결국 자기가 소유한 모든 것을 털어서 잔치를 벌이고 있을까요? 정말 미련해서였을까요?

 

어느 주석가에 의하면 예수님 당시 여인들은 작은 은화를 꿰어 장식을 만들어 머리에 두르곤 했다고 합니다. 드라크마 열개로 꿰어 만든 것을 세메디라고 부르는데 이는 결혼한 남녀의 사랑의 증표였다고 합니다. 아마 주님도 여인의 세메디를 생각하시면서 이 비유를 말씀했을수가 있습니다.

곧 그냥 한 드라크마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랑의 증표로 만들어졌기에 하나를 잃으면 전부를 잃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열 드라크마는 곧 하나라도 없어서는 안되는 서로가 깊게 연결된 유기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 비유 앞 뒤의 비유가 새롭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 비유 전에는 잃은 양 한 마리의 비유이었는데, 목자는 양 99마리를 들에 놓아 두고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위험한 길을 나섭니다. 그동안 양 99마리가 어떻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한 마리를 찾으러 떠납니다. 한 마리가 없는 99마리 양떼는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이는 한 아름다운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이중 한 마리도 중요하지 않은 양이 없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오늘 본문 다음 비유는 잘 아시는 돌아온 탕자의 비유입니다. 곧 한 가족의 이야기입니다. 피로 맺어진 가족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돈으로 계산할수 없는 사랑하는 가족을 찾은 이야기인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는 한 드라크마와 9드라크마의 가치는 쉽게 비교할수 있어 보입니다. 양 한 마리와 양 99마리의 가치도 쉽게 비교할수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 보시기에는 비교할수 없어 보입니다. 한 사람의 소중함이 공동체 전체의 소중함이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없으면 공동체 전체가 없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숫자 개념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당연히 포르셰에 대한 개념도 없으십니다. 싼 차 비싼 차에 대한 개념이 없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개념이 밝지 않습니까? 너무 머리가 빨리 돌아가지 않습니까? 바리새인과 서기관처럼…. 그래서 코로나가 우리를 찾아 온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은 숫자 개념이 없으시기에 한 사람을 잃으면 찾도록 찾으십니다. 그리고 끝내 찾아내시면 숫자 개념 없는 잔치를 베푸십니다.

“드디어 찾아 내었노라” 노래를 부릅니다.

 

사실 주님은 우리를 찾아내셨습니다. 찾아내신 후 한 드라크마의 여주인보다 훨씬 더 큰 잔치를 여셨습니다. 10절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그런데 이러한 놀라운 잔치를 받은 우리들에게 왜 코로나를 경험하게 하시나요?

코로나는 우리를 social distancing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로 하여금 서로의 소중함을 더 알게 하는 기회가 아닐까요? 우리 중 한 사람도 빠짐 없이 소중함을 알게 하는 기회가 아닐까요? 특별히 아직도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찾으러 나서는 주님의 뒷 모습을 보게 하는 기회가 아닐까요? “찾아내었노라” 축제를 준비하는 기회가 아닐까요?

 

모든 사람은 한 드라크마와 같은 존재입니다. 얼뜻 보면 평범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 한 드라크마 없이는 위대한 공동체가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바로 우리가 그 한 드라크마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 위대한 드라크마인 것을 깨달으십시다. 우리가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기에 코로나를 보내신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이웃 안에 있는 위대한 드라크마를 찾아 내십니다. 이웃의 한 드라크마 없이 위대한 공동체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번 코로나의 풍랑 속에서 위대한 공동체를 이루어 가십시다.

 

어린이 TV프로인 ‘Mr. Rogers’ Neighborhood’프로를 많은 분들이 잘 아실줄 압니다. 얼마전에는 이 프로의 주인공이신 Rodgers목사님에 관한 영화가 만들어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는 원래 저희 교단 목사님이십니다.

그가 그런 훌륭한 프로그램을 제작하게 된 숨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Rogers목사님은 어릴 때 천식이 있었는데 살기는 피츠버그에서 살았습니다. 피츠버그는 한참 석탄 산업이 발달되고 있었던 차라 공기가 나뻐서 여름에는 방안에 혼자 지낼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소위 말하는 self quarantine을 하였습니다.

혼자서 상상의 날개를 피면서 상상의 세계와 친구가 됩니다. 그러면서 인형들을 만들어서 상상의 세계를 펼쳐갑니다. 이 때 만들었던 인형들이 후에 TV프로그램에 나오는 인형들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이들 하나 하나에게 “You are the only one”이라는 멧세지를 남깁니다. 그는 혼자 생활한 것 같았지만 혼자의 시간 속에서 주님으로부터 멧세지를 받은 것입니다.

“You are the only one.”

피츠버그의 검은 연기 속에서 Self quarantine중에 이 멧세지를 받은 그는 곧 온 인류를 위한 인물로 자라갔던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코로나가 극성인 이 때 Rogers목사님은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지 않을까요?

“You are the only one.”

그런데 나 하나 없이는 온 세계가 없는 것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 각자 안에 있는 하나 밖에 없는 존재를 찾아내십니다. 아울러 우리 이웃도 하나밖에 없는 존재임을 찾도록 도와 주십니다. 그리고 언젠가 기쁨으로 재회하게 하십니다.

이를 위해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한 드라크마의 위대함을 완성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하늘에서 잔치를 벌이셨습니다. 한편 우리를 하나님의 사자들의 잔치에 초대하십니다. 이 잔치는 코로나를 무색케 하는 잔치입니다. 택한 자들이 하나가 되는 잔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코로나를 무색케 하는 길이 우리에게 열려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됨의 축제를 신나게 벌이는 것입니다. 오늘 이 순간부터…. 코로나는 우리를 갈라 놓는 것 같지만 우리는 더욱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함께 축제를 벌이십시다. 하나님의 사자들도 기뻐하실 것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저도 최근에 썬글래스를 쓰고 산책하러 나갔다가 큰 교훈을 얻었습니다. 아마 벤치에 앉아서 잠깐 쉬었던 것 같습니다. 요즘 벤치에 앉으면 누구나 다 하는 것 있지 않습니까? 스마트폰을 봅니다. 그런데 썬 글라스를 저도 모르게 벗었던 것 같습니다. 한참 스마트폰을 보고서는 그냥 썬글라스를 벤치에 놓고 집으로 왔습니다.

다음날 산책하러 나가려는데 썬글라스가 집에 아무리 찾아 보아도 없습니다. 결국 생각이 났습니다. 어느 벤치에 놓고 왔을 거라는 것을…. 부랴부랴 차를 몰고 제가 앉았던 두 벤치로 향했습니다. 당연히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며칠을 계속 그 벤치로 산책을 갑니다. 혹시나 다시 놓고 가지는 않았나 해서…. 지금 거의 두 주간을 그 벤치를 찾아 가고 있습니다. 빈 벤치를 볼 때마다 누군가가 저에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썬글라스를 찾도록 찾아다니는 제 모습을 보면서 진정 제가 찾아야 할 잃은 영혼들의 모습을 일깨워주는 목소리를 듣는 것 같습니다.

“네가 이토록 썬글라스를 찾고 또 찾고 있는데 이 노력으로 내 잃은 양을 찾으러 다녀야 하지 않느냐?”

 

이 때가 도리어 한 영혼을 찾기에 가장 좋은 때가 아닐까요? Mr. Rogers를 찾아내십시다. 위대한 공동체를 이루어 가십시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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