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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요나서 1:11-16 (02/04/2024)

제가 좋아하는 목회자이자 신학자인 유진 피터슨 목사님이 목회 과정에서 많은 혼돈을 겪고 있었을 때입니다. 그의 목회를 180도 전환하는 계기가 있었습니다. 목회하던 도시인 볼티모어에 유명한 저술가가 와서 강연을 하였습니다. Chaim Potok이라는 작가인데 자신의 어릴 때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챠임은 어릴 때부터 작가가 되는 꿈을 가졌습니다. 이제 대학으로 진학할 때가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말합니다.

“챠임, 네가 작가가 되고 싶어하는 것 잘 안다. 그런데 더 좋은 아이디어가 있어. 뇌수술 의사가 되면 어떻니? 많은 사람들을 죽음에서 구해줄거야; 물론 돈도 많이 벌고.” 어린 챠임은 말합니다.

“No, Mama.나는 작가가 되고 싶어요.”

대학교에 다니기 시작했고 방학이 되어 집에 왔습니다. 엄마가 또 말합니다.

“챠임, 네가 작가가 되길 원하는 것을 잘 안단다. 그런데 내 말 좀 들어봐. 뇌 수술 의사가 되어라. 그러면 많은 사람을 죽음에서 건질거야, 돈도 많이 벌고….” 챠임은 말합니다.

“아뇨. 어머니, 저는 작가가 되고 싶어요.”

이 대화는 방학 때마다 반복되었습니다. 점점 더 대화는 거칠어져 갔습니다. 드디어 어느 날입니다. 어머니가 말합니다.

“챠임, 너는 시간을 낭비하고 있어. 뇌 수술 의사가 되어라. 그러면 많은 사람을 죽지 않게 할거야. 그리고 돈도 많이 벌고.” 챠임은 참다 못 해 외칩니다.

“어머니, 나는 사람들을 죽지 않게 하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아요. 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사는 법을 보여 주고 싶어요.”

 

그동안 거의 4년간 힘든 팬데믹을 지냈습니다. 감사하게도 코로나 백신이 많은 사람들을 죽지 않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백신이 사는 법까지는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사실 백신의 덕을 많이 보았지만 그래도 백신의 불완전함이 밝혀지면서 우리들 마음에는 어느덧 ‘어떻게 사느냐’ 보다는 ‘어떻게 죽지 않느냐’라는 생각이 더 지배해 온 것도 사실입니다. 어느덧 이것이 우리들의 습관으로 깊이 자리 잡게 되지 않았을까도 생각해 봅니다.

 

얼마전 어느 목사님의 목회관에 대한 말씀을 들었는데 다음의 말씀이 크게 와 닿았습니다. “교회는 생존을 위한 조직이 아니라 생명을 위한 조직입니다.”

코로나를 지나면서 많은 교회가 생존을 걱정하다가 생명을 잃고 있음을 지적하는 말씀으로 들렸습니다.

 

오늘부터 교회적으로는 새 회기가 시작됩니다. 오늘 임직예배가 마침과 함께 공식적으로 새 회기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 새 회기를 시작하며 신임제직과 함께 재임 제직 그리고 구역장 및 소그룹인도자분들을 임명하였습니다. 올 한 해도 이 분들과 이미 임직을 받으신 제직분들과 또한 모든 교우님들과 함께 멋진 한 해를 기대해 봅니다. 생명을 위한 한 해가 될 것을 기대합니다.

그러면 사는 법을 보여주는 사역자가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계속해서 요나서 강해를 이어갑니다.

 

두 주 전에 요나서 강해를 시작했으니 잠시 반복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니느웨에 가서 외치라고 했습니다. 웬지 요나는 당시 테러리스트 국가인 니느웨가 회개하는 것을 보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다시스로 향하기 위해 배를 탔습니다. 그런데 지중해에 큰 풍랑이 불어 닥칩니다. 제비를 뽑으니 요나가 뽑혔습니다.

이제부터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풍랑은 더욱 거세졌습니다. 이에 무리가 요나에게 묻습니다.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 요나는 답합니다.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지난번에 말씀드렸습니다. 요나서의 키는 요나의 이름에 있다고…. 물론 한국 분들에게만 통하는 이야기입니다. 요나는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요 ‘나’ 때문입니다.”

이것이 요나의 위대함입니다.

 

실은 요나가 다시스로 향하는 배에 탈 수밖에 없었던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무엇이지요? 니느웨의 악독함입니다. 요나가 배에 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니느웨 때문입니다. 곧 핑계를 니느웨에 돌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 함께 니느웨를 위해서 각자의 신께 기도드리는 길이 유일한 길이라고 말할수도 있었습니다. 죽음을 면하려고…. 그러나 요나는 니느웨의 ‘니’자도 안 꺼냅니다.

“요 ‘나’ 때문이니 나를 바다에 던지라.”

요나는 이 고백으로 인해 생존을 택한 것이 아니라 생명을 선택했습니다.

 

College Football에 관심 있으신 분들은 잘 아실줄 압니다. 유명한 Football팀 중에 하나가 Alabama대학팀입니다. 올해는 아깝게도 준결승에 멈추었습니다.            Alabama대학팀을 오늘에 최고의 팀으로 세우게 한 유명한 코치가 있습니다. Bear Bryant입니다. 25년간 헤드코치였습니다. 그 중 6차례나 전국 챔피언이 되었습니다. 수많은 대학축구 팀이 있는데 6차례나 우승한다는 것은 대단한 성과입니다.

오래 전 그 분이 한 유명한 말을 접해 보았습니다. 그의 삶의 철학이 담긴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잘 되었을 때는 당신 때문에, 그저 그랬을 때는 우리 때문에, 잘 안 되었을 때는 나 때문에….”

곧 “요 ‘나’ 때문에….”

 

Bryant 코치가 역사에 길이 남는 코치가 된 이유는 생존을 선택하지 않고 생명을 선택하는 삶의 철학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한편 ‘요 나’ 때문이라고 하는 요나의 말을 듣고 사공들은 어떻게 하죠? 13절,

“그러나 그 사람들이 함께 노를 저어 배를 육지로 돌리고자 하다가 바다가 그들을 향하여 점점 더 흉용하므로 능히 못한지라.”

요나가 자기 때문이라고 해도 듣지를 않습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죠. 하나는 아마도 그 동안 사람을 제물로 던져 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더 큰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스스로 자수한 사람을 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생존을 선택하는 사람은 많았는데, 이 처럼 자기를 바다에 버리라고, 곧 본질적으로 생명을 선택한 사람은 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이 두 가지가 합해져서 이들은 요나를 감히 바다에 던지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니, 던진다고 해도 풍랑이 잔잔해 질 것이라는 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곧 그들은 ‘요 나’라는 고백의 위력을 전혀 몰랐습니다. 도리어 괜히 애꿎은 사람 하나를 제물로 바치는 것이고 그로 인해 돌아올 화도 은근히 걱정이 되었을수도 있습니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으로 어쩔 수 없이 애를 쓰면서 노를 짓고 있는데 도저히 감당이 안 됩니다. 결국 요나를 바다에 던집니다. 그래서 화를 당할까봐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면서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구하고 구하오니 이 사람의 생명 때문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옵소서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주 여호와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심이니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요나의 말대로 흉용한 바다가 뛰노는 것이 멈추었습니다. 이렇게 쉬운 것을 괜한 고생을 하였습니다. 요나의 고백의 위대함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요나는 ‘요 나’라는 위대한 고백을 할 수 있었을까요?

 

요나는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소명을 받았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기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은 죽음을 면치 않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에게 사는 법을 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에 가서 병들어 죽어가는 자들을 위한 의사가 되라고 명령한 것이 아닙니다. 말씀으로 ‘사는 법’을 알려 주라는 것이었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참 삶을 사느냐 못 사느냐는 자기에게 달려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이 참 삶을 살게 되는 것을 눈 뜨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스로 도망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많은 나라 중에 다시스로 도망치고 있었을까요? 지난번에도 잠깐 언급해 드렸습니다만, 다시스의 두 가지 특징이 있다고 봅니다. 첫째로는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살고 싶어하는 도시입니다. 또 하나는 종교의 자유가 있었던 곳입니다. 자기가 원하는대로 종교생활을 할 수 있는 도시입니다.

그런데 요나가 다시스를 택한 또 다른 이유가 있을줄 압니다. 다시스는 사회보장이 잘 되어 있는 곧 사람들이 죽는 것을 예방해 주는 도시였을줄 압니다.

 

로마 황제들이 거대한 로마를 통치하기 위한 수단이 하나 있었다고 합니다. 세 가지를 충족시키는 것입니다. 빵, 법, 유흥.

‘빵’, 배를 부르게 하는 것이 기본입니다.

‘법’, 법으로 질서를 지키고 통제하는 것입니다.

‘유흥,’ 즐거움이 있어야 불평거리가 없어지고 만족하게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콜로세움 등을 짓고 여러 유흥을 위한 행사들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빵과 법과 유흥, 아마 이것이 다시스의 모습이었을 것 같습니다. 이것은 바로 죽지 않게 하는 최고의 전략입니다. 다시스의 백성들을 지키는 방법이고 여기에 모두 매료 되어서 다시스로 모였을 것입니다. 아니 로마로 모여 들었던 것입니다. 요즘 미국도 다시스가 되어 있지 않을까요?

요나는 사람을 살리라는 명령을 뒤로 하고 죽음을 연장시키는 다시스에 가서 오래 살기로 마음 먹고 도망간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요나에게 주신 사명은 사는 법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무시했을 때 풍랑을 맞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 그는 자신을 되찾습니다. 자신은 소명자임을 고백합니다. 소명자로서 자신을 바다에 던지게 합니다. 나머지는 절대자이신 하나님께 맡긴 것입니다.

소명자가 바다에 던져질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이는 다음 주에 나누겠습니다.

 

물론 세상 살이를 위해서 ‘빵과 법과 유흥’ 모두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죽지 않게 하는 방법입니다. 세상은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최선의 삶을 삽니다. 삶을 연장시켜 주는 곳으로 사람들은 몰려 옵니다. 한편 다시스와 같은 세상에 사는 우리를 참 삶을 위한 삶에 주님은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제직 임직식을 거행하고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 모두를 ‘요나’로 부르셨습니다. 생존의 메시지를 전하는 자가 아닌 생명의 메시지를 전하는 자들로 부르셨습니다. 생명의 메시지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지 않을 때 풍랑이 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말씀에 의지하여 하나님께 맡길 때 풍랑은 잔잔해집니다.

 

Kathleen Norris의 말을 소개합니다.

“You’re not that big of a deal. The call is the big deal.”

“당신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부르심이 중요합니다.”

 

요나의 위대함은 변치 않았습니다. 요나를 부르신 부르심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 중요합니다. 우리를 향한 부르심 때문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러시아의 폭정에 맞서 싸우다가 시베리야로 유배를 당합니다. 거기서 신약성경을 선물로 받은 후 새 사람이 됩니다. 곧 그는 러시아인들이 굶어죽지 않게 하기 위해 항쟁하다가 유배를 당했고 신약성경을 접하면서 더 이상 죽음의 예방자가 아니라 삶의 축복을 나누는 자로 변신합니다. 결과 그는 수많은 고전을 창작하게 됩니다. 모든 것의 시작은 어느 여인이 넘겨 준 신약 성경이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생존을 위하는 삶과 생명을 위하는 삶을 다음과 같은 말로 구분합니다.

“처음부터 완전함으로 시작할 수 없습니다. 완전함을 얻으려면 먼저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없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가 만일 빨리 이해한다면 우리는 더 깊은 것을 이해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죽음을 피하는 길은 쉽게 이해가 됩니다. 빵, 법, 유흥. 생명으로 가는 길은 신비스러운 길입니다. 불확실성이 늘 기다리고 있습니다. 신비한 불확실성입니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 나오는 것처럼 30배, 60배, 100배의 신비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반면 죽음을 피하는 길은 30, 60, 90이라는 확실성의 길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은 이런 불확실성 안에서 완전으로 향하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생명을 향하는 이야기입니다. 요나의 이야기이고 성경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들 손에 성경이 들려 있다면 우리는 위대한 부르심의 소유자들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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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Title Writer Date
355 “나는 세상의 빛이라” 요한복음 8:12-20, 9:35-41 (04/21/2024) webmaster 2024.04.22
354 “나는 생명의 떡이라” 요한복음 6:22-35 (04/14/2024) webmaster 2024.04.15
353 “마지막 아담: 살려 주는 영” 고린도전서 15:42-46 (03/31/2024) webmaster 2024.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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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1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요나서 4:5-11 (03/17/2024) webmaster 2024.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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