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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로마서 8:29-34 (06/14/2020)

 

어느 영국 신사가 Rolls-Royce를 샀습니다. 차의 엔진의 성능이 궁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동차 매뉴얼에도 없고 차 안을 찾아 봐도 horsepower가 얼마인지 기록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문의해 보았는데 차의 성능에 대해 알려주는 것은 Rolls-Royce회사의 정책에 어긋난다는 답변을 받아 보았습니다. 이 신사는 그래도 궁금했습니다. 그리고 그 많은 돈을 주고 산 것인만큼 자기는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편지를 썼습니다. 차의 성능에 대한 정보를 요구하는…. 며칠후 전보가 배달되었습니다. 답신은 한 단어였습니다: ‘Adequate.’(적당하오.)

 

그 회사는 보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국 안이던 세계 어느 구석이던 이 차가 다니지 못할 곳은 없으니 자신감을 갖고 마음껏 달리라는 것입니다. 다른 생각 말고 Rolls-Royce를 소유한 자의 영광을 마음껏 누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Rolls-Royce만 있으면 정말로 우리들의 삶이 막히지 않고 영광스러운 삶을 매일 살아 갈까요? 물론 전 세계 어느 거리나 씽씽 신나게 달리면서 온갖 세상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며 영광을 누릴줄 압니다. 우리들의 삶의 길이 단지 아스팔트로 만들어진 도로뿐이라면…. 그러나 롤즈로이스가 달릴수 없는 길이 언제나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오늘 영어 성경본문 말씀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여호수아의 영도하에 광야 40년을 마치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말씀을 봉독한 이유는 이번에 견신반 교육의 주제가 바로 ‘요단강을 건너는 것’이었습니다.

아주 좋은 주제였다고 봅니다.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가 2세들과 함께 요단강을 건너는 놀라운 체험을 하였는데, 이것은 우리들의 2세인 저희 자녀들에게는 정말로 필요한 주제였다고 봅니다.

 

여호수아가 만일 롤즈로이스 회사 사장에게 문의했다고 생각해 봅시다.

“지금 요단강을 건너야 하는데 롤즈로이스로 건널수 있습니까?”

이에 사장이 뭐라고 답신을 하겠습니까?

“Adequate?” 그럴리가 없습니다. 도리어,

“Crazy!”

 

그러면 우리들 앞에 놓인 길이 무엇이기에 롤즈 로이스가 꼼짝을 못할까요? 29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들 앞에 놓여 있는 길은 롤즈로이스로는 갈수 없는 길입니다. 그 길은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닮아가는 위대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사실 때 롤즈 로이스를 타셨더라면 우리도 어떻게 해서든지 롤즈 로이스를 타야 합니다. 주님을 닮아가기 위해서…. 그런데 주님은 다행히 타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주님은 요단강은 건너시지 않으셨지만 비슷한 위험한 길을 가셨습니다. 확실한 것은 요단강 보다 더 위험한 갈릴리 호수 위를 걷기도 하셨습니다. 롤즈 로이스로는 도저히 갈수 없는 길을 걸으신 것입니다.

물론 우리들에게 우리들도 갈릴리 호수를 걸으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당신을 따르는 길은 위대한 길이요. 그러기에 위험한 길임을 일깨워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위험해 보이긴 하지만 우리 모두 무사하게 목적지에 도착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무사하게 목적지에 도착하는 위험한 길이라면 한번 도전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보장되어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도전해야 할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30절 말씀입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당신의 택한 자들을 위해서 특별한 여정을 준비시켜 놓으셨습니다. 그들을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결국 영화롭게 하십니다. 그 길은 롤즈 로이스의 영광 조차도 너무도 초라하게 보이게 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입는 영광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사도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31절 말씀입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여기서 ‘이 일’은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입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일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하나님께 대해 어떤 확신을 갖고 있다구요?

“Adequate.”

 

그러면 사도바울은 어떻게 이런 확신을 갖게 되었을까요? 32절 말씀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영어에 Give와 Take라는 단어가 있죠. 이 두 단어는 항상 같이 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많이 쓰는 말이, ‘Give and take’. 그런데 이는 세상적인 개념이고 성경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지금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주시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경적인 개념은, ‘Give and Receive’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주시는 분이고 우리는 은혜를 받는 자들입니다. take하는 것이 아닙니다. Take는 움켜쥐는 것입니다. 자기가 골라가며 뺐다시피…. 그런데 움켜쥐다보면 도리어 새나갑니다. 자기가 아무리 제일 좋은 것을 골랐다 하더라도….

그러나 받는 것은 주시는 그대로 받는 것입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그러니 하나도 새어 나가지 않습니다.

 

받는 자들은 손을 내밀고 손바닥을 폅니다. 이것이 받는 자세입니다. 취하려 하는 자세는 손등을 내밉니다. 그래서 나까챕니다. 저희가 찬양드릴 때 종종 손바닥을 편채 손을 내밉니다. 받는 자세입니다. 그러나 찬양하면서 손등을 내밀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은 원래는 손등을 내밀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take해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입니다. 예수믿는 자들을 잡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take하는 길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자들을 잡으로 다메섹으로 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주님께서 사도바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손등을 내민 것이 도리어 주님을 박해한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사도바울은 이 주님의 은혜를 거부하지 않고 겸손히 받습니다. 그리고는 영광스러운 삶을 사는 것은 take가 아니고 receive임을 고백하며 그런 삶을 살아갑니다. 그의 사전에는 더 이상 take는 없어졌습니다. 모든 것은 받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에 이르는 영광스러운 삶은 우리가 take하는 것이 아닙니다. receive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요즘 기독교가 많이 약해져 있음은 누구나 다 공감하시리라 봅니다. 특히 서구사회에서…. 저는 근본적인 원인이 receive를 하지 않고 take하려고 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서구 자본주의의 정신은 receive가 아닙니다. take입니다. 반면 신앙 생활은 receive인 것입니다.

우리가 다시 receive하는 자세로 신앙 생활한다면 놀라운 일들이 펼쳐지리라 확신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한편 손을 피는 우리들에게 사탄이 찾아와 우리 귀에 속삭일지 모릅니다.

“이봐 너는 기도를 할 자격이 없어 네 꼬락서니가 어떤지 몰라? 네가 손을 내민다고 주실줄 알아?” 사도바울도 종종 이런 사탄의 소리를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사도바울은 외칩니다. 33절 말씀입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우리 모두 의로운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 있게 손을 펼수 있습니다. 아울러 사도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자기가 기도할 때마다 누군가가 도와 주시는 분이 계심을 알고 또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34절 말씀입니다.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그러니 우리는 마음껏 우리의 인생 여정에서 손을 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우리의 여정에서 손을 펼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닮아가는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주셨고 또 모든 것을 주십니다. 그 뿐 아니라 지금도 주님께서 하나님 우편에서 기도를 드리시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최고의 기도를 주님께 올려야 하지 않을까요?

 

요즘 뉴우스를 들으면 코로나 이야기 보다도 미네소타에서 희생당한 George Floyd와 관련된 이야기로 가득차 있습니다. 더 이상 말씀 안 드려도 잘 아실줄 압니다.

저는 일주일에도 총회나 노회에서 오는 많은 뉴스레터를 받습니다. 최근에는 백인 우월주의를 비판하는 글이 쏟아집니다. 물론 백인 우월주의 인종차별 비판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그건 아주 쉽습니다. 글 하나 써서 보내면 됩니다.

지난주에는 어느 신학교 교수님이 자기가 인터뷰한 것을 저에게 보내 오셨습니다. 아주 조직적으로 백인 우월 주의를 비판하시고 계셨습니다. 정말 고개가 절로 끄떡여집니다. 고개만 끄떡여지는 것이 아니라 주먹이 불끈 쥐어질 정도였습니다.

지난 10여일이 넘게 많은 이멜 및 뉴우스를 받아 보았는데 모두가 정의편에 서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이번 가해자가 법의 심판을 강조하는 글들이었습니다. 주먹을 불끈 쥔채 쓴 글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빠진 것을 느꼈습니다. 어떤 법정 판결이 나올지 모르지만 상식적으로 보면 무기징역 내지 장기수가 될 것으로 봅니다. 한 가지 수많은 기독교인들의 목소리에서 빠져 있는 것은 가해자의 영혼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모두가 주먹을 불끈 쥔 모습들이었습니다. 손바닥을 핀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번 감옥 생활이 그가 요단강을 건너는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입게 되는 영광의 길이 되게 해달라는 기도는 들어보질 못했습니다.

왜? 하나님의 능력이 adequate하지 못해서…?

 

가해자에 대한 벌은 주먹을 불끈 쥐고 누구나 내릴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로 하여금 회개하고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입게 하는 일은 주먹 쥔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손바닥을 펴고 예배드리는 우리 모두는 그 가해자도 언젠가 우리처럼 손바닥을 펴고 예배드리도록 기도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사실 그 가해자는 세상에 있는 모든 인종차별자를 대신해서 이번에 감옥에 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기도는 그 가해자를 넘어 세상에 힘을 갖고 있는 모든 인종차별자를 위해서도 드려져야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의 능력은 adequate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견신을 받는 다섯 명의 자녀들 이제 대학으로 향합니다. 제가 듣기로는 대학에 가면 더 같은 인종끼리 모이게 된다고 합니다. 서로 피해는 주지 않는다고 하지만 이미 인종차별의 차거운 세상으로 한 발 내딛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자녀들이 가는 곳마다 평화의 소식들이 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기도와 함께 주님께서 간구하고 계시니 온 세상에는 평화의 나라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주님은 저희 자녀들을 택하셨고 우리 모두를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입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입은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손을 펴는 것입니다. 손을 편채 함께 힘차게 인종차별의 요단강을 건너십시다.

 

말씀을 거둡니다.

최인호 소설가가 묵상 중에 주님과 대화를 나눈 것 같습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문득 베드로의 답이 생각나서 그대로 따라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것은 베드로의 생각이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아무 대답을 떠올릴수 없었을 때 주님은 또 천천히 물으십니다.

“다른 사람의 말이 아닌 너의 말을 가져오너라. 내가 듣고 싶은 것은 바로 너의 생각이다.” 소설가는 진땀이 흐르기 시작합니다. 주님은 다시 물으십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모르겠습니다.”

“네가 나를 모른다면 나 또한 네가 누군지 모른다. 또한 네가 나를 모른다면 너는 또한 네가 누군지 모를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곧 너이며, 너는 곧 나이기 때문이다.”

 

최인호 소설가는 주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에 이를 것을 확신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멋진 소설가가 되어 간 것입니다.

저희 자녀들도 우리 모두도 모든 것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입은 자가 되어서 멋진 영화로운 삶을 하나님께 바치십시다.

온 인류가 하나님 앞에 손바닥을 펼 때까지 우리들의 작은 손바닥을 하나님 앞에서 펴십시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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