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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브엘세바” 창세기 21:22-34 (11/29/2020)

 

 

이정선 시인의 ‘거리’라는 시를 먼저 소개해 드립니다.

 

거리

이정선

 

말을 하는 사람은 많아도
말을 듣는 사람은 없으니
아무도 듣지 않는 말들만이
거리를 덮었네

웃음짓는 얼굴은 많아도
마음주는 사람은 없으니
아무도 갖지않는 웃음만이
거리를 덮었네

신을 믿는 사람은 많아도
사람을 믿는 사람은 없으니
서로들 믿지 않는 사람만이
거리를 덮었네

 

요즘 코로나로 인해 마비되어 있는 거리의 모습을 느끼게 하는 시입니다. 물론 이 시는 코로나 훨씬 전에 쓰여진 시입니다.

 

코로나로 인해 온 세상이 고통을 받고 있는데 어느덧 겨울이 문턱에 왔습니다. 교회적으로는 대강절이 되었습니다. Advent wreath의 첫번째 촛불을 켰습니다. 앞으로 한주가 지나면서 하나씩 더 켜지고 네번째 촛불을 키면서 우리는 하얀 Christ candle을 키고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촛불을 하나씩 켜 가면서 코로나로 인한 어둠을 물리치고 아름다운 빛을 발하는 이번 대강절이 되길 바랍니다. 한편 저는 아브라함의 삶에서 대강절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를 찾아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그동안의 아브라함의 지난 이야기를 알지 못하면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일견해 읽으면 금방 몇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우선 오늘 이야기는 아비멜렉이 군대장관과 함께 아브라함을 찾아온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여기서부터 질문이 생깁니다. 아비멜렉은 블레셋 왕이고 아브라함은 한 가정의 가장입니다.

왕이 군대장관과 함께 한 가족을 직접 찾아 왔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됩니다. 한 가장이 왕을 찾아 가야 하지 않을까요? 더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찾아 와서 협박을 하는 것이 아니라 화친하자고 합니다. 그리고 평화를 약속하는 맹세를 하자고 합니다. 그랬더니 아브라함은 자기를 찾아 온 왕을 나무랩니다. 왕의 종들이 자기 우물을 빼앗았다고….

그리고는 아브라함이 맹세를 받아 냅니다. 우물이 자기 것이라는 맹세를 받아 냅니다. 맹세를 받아 낸 후 그 곳 이름을 브엘세바 곧 ‘맹세의 우물’이라고 붙입니다. 그런데 이 우물의 이름이 이 지역의 이름이 됩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부릅니다.

 

한편 아브라함의 생애에 대해 잘 몰라도 이 이야기만 읽어도 뭔가 속이 시원한 기분이 듭니다. 일개 국가의 왕이 찾아 와서 화친을 구하고 찾아 온 왕에게 화친을 맹세하면서 그동안 있었던 마음의 과제를 다 해결하고 마지막으로는 승리의 월계관을 쓰듯 나무를 심고 있는 모습 너무도 통쾌합니다.

 

한편 아브라함이 어떻게 이런 놀라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수 있었을까요? 우선 오늘 이야기의 궁금한 점을 풀어가면 실마리를 잡을수 있을 것 같습니다. 먼저 왜 아비멜렉 왕이 한 가족의 가장 밖에 안 되는 아브라함에게 평화를 약속받기를 원했을지를 살펴 봐야 할줄 압니다.

아브라함이 99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1년후에 아들이 태어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자, 아브라함은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들을 1년후에 받게 된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들을 낳기 전에 흉년이 든 것입니다.

‘왜 하필 이 때…!?’ 아브라함은 불평의 마음이 안 들었을까요? 그래도 일단 먹고 살아야 하니 그랄로 내려 간 것입니다. 그랄은 블레셋 땅입니다. 그런데 아내 사라가 할머니가 되었는데도 예뻤나 봅니다. 아브라함은 블레셋 사람들이 두려워 사라를 누이라고 거짓말합니다. 그랬더니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사라를 아내로 삼아 버렸습니다. 그 날에 하나님께서 꿈에 아비멜렉에 나타나셔서 사라는 남편이 있는 여자임을 알려주십니다. 다행히 사라와 동침을 하지 않았습니다.

자 만일 사라와 동침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아들을 낳겠다는 약속을 받았는데 아비멜렉의 아내가 되었다면 그 아들의 족보는 어떻게 될뻔 했겠습니까? 아비멜렉은 이 때 초라해 보이는 아브라함을 새롭게 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는 자임을…, 건드리면 큰 일 날 것을….

 

한편 아비멜렉은 소식을 들었을 것입니다. 100세에 낳은 아들이 잘 자라고 있다고…. 그리고 그 아들이 지금 거의 10살이 되어 오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전 귀절에 첩 하갈이 낳은 이스마엘이 이삭을 괴롭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니 거의 10살이 되었다고 볼수 있습니다. 곧 자기는 일개 국가의 왕이지만 아무리 해도 자기 자손들을 위해서는 이삭과 잘 지내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찾아 온 것입니다.

 

그런데 아비멜렉은 예상치 않은 요구를 듣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의 우물을 도로 달라는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귀를 의심했을지 모릅니다. 아무래도 자기가 왕이고 지금 아브라함은 자기 땅에 와 빌어 먹고 사는 자인데 우물을 도로 달라니 좀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그 무엇에 눌렸는지 횡설수설합니다. 26절 말씀입니다.

“아비멜렉이 이르되 누가 그리하였는지 내가 알지 못하노라 너도 내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나도 듣지 못하였더니 오늘에야 들었노라.”

이를 확실히 하고자 아브라함은 양과 소를 가져다고 언약을 세웁니다. 30절 말씀을 보면,

“아브라함이 이르되 너는 내 손에서 이 암양 새끼 일곱을 받아 내가 이 우물 판 증거를 삼으라 하고.” 그 우물은 아브라함의 것임을 확인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는 그 곳을 ‘브엘세바’라고 부릅니다. 브엘세바의 뜻은 ‘맹세의 우물’입니다.

 

사라를 누이라고 속일 때는 언제이고 이제는 당당하게 자기의 권리를 찾는 자가 되었을까요? 사라를 누이라고 속일 때와 지금 우물을 되찾고 ‘브엘세바’라고 이름을 붙일 때와는 어떤 차이가 있죠?

하나님의 약속? 물론 75살에 약속을 받았으니 사라를 누이라고 속일 때도 이미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을 때입니다. 그러나 사라를 누이라고 속일 때와 지금 우물을 되찾고 ‘브엘세바’라고 명명할 때와 큰 차이가 하나 있습니다. 지금은 약속의 성취를 보았습니다. 아들 이삭이 함께 있었던 것입니다.

 

눈 앞에 보이는 이삭이 아브라함을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감히 블레셋 왕과 화친 조약을 할 뿐더러 우물을 다시 내 놓으라고 하고 그 곳 지명도 마음대로 붙인 것입니다. 아침마다 듣는 이삭의 울음 소리와 이제 좀 큰 이삭의 발걸음 소리가 아브라함을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이삭의 발걸음 소리는 약속을 지키시고야 마는 하나님의 걸음 소리였던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크게 세 가지를 약속하셨었습니다. 자손, 땅, 그리고 이웃이 자기로 인해 복을 받게 되는 것….

 

곧 아브라함은 이삭의 발걸음 소리와 웃음 소리를 들으면서 약속은 이루어졌고 또 이루어질 것을 확신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기어코 자기의 우물을 되찾을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땅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첫 싸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곳 이름을 브엘세바라고 부릅니다. 이삭은 자손의 약속이 이루어진 것이고 브엘세바는 땅의 약속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한 가지 남은 것이 있죠. 이에 힘을 얻은 아브라함은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33절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한 일이 뭐라고요? 에셀나무를 심었습니다. 에셀 나무는 10미터 까지 자란다고 합니다. 그래서 광야를 지나는 유목민들에게 그늘을 제공해 준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지가 연해서 가축들의 먹이가 된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이 자기를 위해 에셀 나무를 심었을까요? 아브라함도 유목민입니다. 언제 여기를 떠나야 할지 모릅니다. 그래도 그의 고향이 있다면 헤브론입니다. 여기는 잠시 거하는 브엘세바….

그리고 그는 이미 100세가 한참 넘었습니다. 그는 언젠가 만민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고 믿음으로 오고 가는 모든 민족들을 생각하며 심지 않았을까요?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질 것을 믿은 것입니다. 자손, 땅, 이웃의 축복. 그래서 에셀나무를 심은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모든 믿는 자들에게는 똑 같은 약속이 주어져 있습니다. 자손, 땅, 이웃이 복을 받음. 물론 자손, 땅, 이웃의 축복이 아브라함이 받은 것과는 차이가 있을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모두 세 가지 축복을 다 받는 것입니다.  아기 예수가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사셨습니다. 이삭이 아브라함과 함께 살았던 것처럼…. 함께 숨을 쉬고 밥을 먹고 노래를 부르고 놀이를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약속을 받았고 또 약속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당당한 자세로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아브라함 처럼 세 가지 약속에 대한 확신을 가지십시다. 이를 위해 아기 예수가 오셨습니다. 자손, 땅, 이웃….

 

사실 우리가 사는 지금도 아브라함이 살던 때와 별 다를 바가 없다고 봅니다. 우리도 아비멜렉 왕 앞에서 그가 소유한 땅에 살고 있는 셈입니다. 워싱톤과 월스트릿트를 좌지우지 하는 사람들 앞에서 우리는 살고 있는 것입니다. 감히 우리가 사는 지역을 우리 마음대로 이름을 정한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하고 살고 있습니다.

 

제가 필라델피아에서 신학교를 다닐 때입니다. 교수님 한 분이 시내를 가는데 ‘Korea St.’이라는 싸인을 보고 아주 좋게 생각하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나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얼마 후 그 싸인은 철거 되었습니다.

그 거리 이름이 ‘5th Street’이었는데 한인들이 많이 사업을 했던 곳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시에서 붙여 주었습니다. 많은 한인들 보다 힘센 사람들이 반발을 해서 다시 철거된 것입니다. 지금 30년이 넘었는데 다시 고쳐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공식적으로 고칠 필요는 없습니다. 더 문제만 불러 일으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스스로 새로운 명칭을 붙이면 되는 것이 아닐까요? 아브라함 처럼…. ‘브엘세바.’

우리가 걷는 이 거리를 아기 예수가 걷길 원하시는 곳이고 그러기에 우리를 보내셨다고 생각하면서 걷는다면 바로 우리가 걷는 땅은 약속의 땅이 되지 않을까요? 우리들이 걸어다니는 거리가 바로 ‘브엘세바 St.’이지 않을까요? 우리가 살고 있고 걷고 있다면 그 땅은 지금 우리 땅인 것입니다. 우리가 서 있는 곳이 ‘브엘세바’인 것입니다.

 

그리고 브엘세바 st.에 가로수를 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에셀 나무를 심은 것처럼…. 브엘세바 거리를 걸으며 이웃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아기 예수가 오셨고 또 다시 오실 것을 믿기에, 그리고 언젠가 온 세상에는 푸른 그리스도의 계절이 올 것임을 믿기에 축복의 에셀 나무를 심는 것입니다. 사람들 눈에 보이진 않을지라도….

그런데 보이지 않게 에셀 나무는 자라납니다. 그래서 광야와 같은 세상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그늘을 제공해 줍니다. 아울러 캄캄한 어두운 길에 가로등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코로나로 어두워진 거리를 밝히는 우리들의 대강절 촛불인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나 촛불을 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자들만이 킬수 있습니다. 자손, 땅, 이웃.

 

말씀을 거둡니다.

1800년대에 사셨지만 요즘도 온 세상을 밝히 빛내고 계신 분이 있습니다. ‘The Little Flower’로 알려진 St. Therese of Lisieux(리쥬의 성테레사)입니다. 15세에 헌신을 하고는 24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납니다. 그런데 많은 성인들이 순교를 당하던가 큰 기적을 행하던가 하는데 테레사 성녀는 아무런 업적이 없지만 성인으로 추앙을 받게 되었습니다.

단지 병고 가운데서도 작은 일들로 주님께 충성을 다한 것뿐입니다. 얼마나 눈에 띄는 일이 없었냐 하면 죽은 후 고별 예배를 드릴 때 별로 주위 분들이 할 말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소위 조사할 내용이 빈약했다는 것입니다.

한편 세상을 떠나기 1년전에 결핵을 앓게 되었는데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서 고통을 견뎌 냈다고 합니다. 얼마나 아팠는지 믿음이 없었더라면 자살을 기도할수 밖에 없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틈틈히 혼자서 글을 써서 현재 두 권의 책이 전세계인들에게 읽혀지고 있습니다.

 

그녀의 책에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글이 있습니다.

“저를 바다의 모래알 처럼 작게 만들어 주세요. 사람들 눈에 거의 안 띄이게요.”

그 다음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저를 분자처럼 작게 만들어 주세요. 하나님만 알아 보실수 있게요.”

아마 요즘 같으면 이렇게 고백했을 것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보다 더 작게 만들어 주세요. 하나님만 알아 보실수 있게요.”

 

그는 홀로 그가 사는 곳을 브엘세바라고 생각하고 매일 에셀 나무를 심은 것입니다. 작아지는 에셀 나무…. 그래서 이제는 온 세계를 비추는 나무가 된 것입니다.

작아지는 것을 누구에게 배웠겠습니까? 아기예수에게서…. 작아지셨기에 커지신 것입니다.

 

그런데 작아지려고 하면 할수록 더 강하게 하나님의 약속은 그녀의 삶을 통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자손, 땅, 이웃을 향한 축복이….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의 신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은 버릴래도 버릴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더 찾아 옵니다. 아기예수가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아기예수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아기 예수를 닮아감을 통해 아름다운 빛을 발하십시다. 어두워진 보스톤의 거리를 환하게 밝히십시다. 아기 예수의 빛으로….

 

성경은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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