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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I: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마태복음 6:5-10 (04/18/2021)

 

저희 교회 교우님이 보스톤코리아에 한 컬럼을 맡아 매주 연재하시고 계신 것 잘 아실줄 압니다. 지난번에는 ‘제비’라는 제목의 글을 실으셨습니다. 서두를 김채영 시인의 ‘이름에 대하여’를 인용하셨습니다.

 

제비꽃도 가끔은

제 이름 싫은지 모른다.

꽃잎으로는 날 수도 없는데

많고 많은 이름 중에

하필이면 제비라니,

 

제비꽃도 가끔은

이름 바꾸고 싶은지 모른다.

 

시인은 아마 제비꽃을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름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어떻게 ‘제비’라는 이름이 붙이게 되었는지 꽤 유감을 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저도 어릴적에는 저희 집이 대광학교 교정에 있어서 여름에는 넓은 운동장에서 뛰어 놀곤 했습니다. 그 때 제비들이 날아다니는 것을 보고 늘 경이에 찬 마음으로 바라보곤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커서 보니 ‘제비’라는 말이 어감이 좋지 않게 사용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마 김채영 시인도 저와 비슷한 경험을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비꽃을 대신해서 고백합니다.

 

‘제비꽃도 가끔은

이름 바꾸고 싶은지 모른다.’

 

시 하나를 더 소개해 드립니다. 황금찬 시인의 ‘꽃’입니다.

 

산길을 가다가

이름 모를 꽃 한 송이를 만났지
쉬운 표정으로 물었네

이름이 뭐냐고.
꽃은 한참 머뭇거리더니

그냥 꽃이라고 불러 주세요.
제 이름이 꽃이니까요.

웃고 있었다.

꽃이…

 

황금찬 시인의 놀라운 지혜를 느낍니다. ‘꽃, 꽃이면 되지 왜 자꾸 이름을 붙이느냐…?’ 물론 이름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잘 붙이면 좋은데 잘 못 붙였다가는 또 다른 제비꽃이 나오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시인은 더 깊은 뜻을 시를 통해 나누고 있을줄 압니다.

 

요즘 봄이 와서 여기저기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해 있습니다. 꽃 이름을 아시면 좋지만 모르셔도 좋은 것 같습니다. 꽃들은 우리들에게 말하고 있지 않을까요?

“그냥 꽃이라고 불러 주세요.”

 

그러면 우리 하나님은 어떠실까요?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에 만족하실까요?

 

오늘부터 몇 주간에 걸쳐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곧 주기도문에 대해서 나누고자 합니다. 주기도문 첫 귀절이 우리의 궁금증을 확실하게 풀어줍니다. 9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나님은 이름이 있고 이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 인간의 특권임을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것이 기도의 시작임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여기서 잠시 주님께서 주기도문을 가르치시게 된 배경을 알아 보는 것이 좋을듯합니다. 주님은 12제자를 모두 부르시기 전에 많은 무리를 보신 후 산에 오르셨습니다. 유명한 산상수훈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여러 말씀을 하신 후 기도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6:5절 말씀입니다.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한 마디로 바리새인들은 제 아무리 거창하게 기도를 해도 응답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미 상을 다 받았다는 것입니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받는 칭찬이 그들의 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참 기도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6절 말씀입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주님은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의 기도는 제아무리 거창해도 하나도 응답이 되지 않지만 은밀한 곳에서 “아버지” 부르면 이미 모든 것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 첫번째 축복은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다 아셔서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때 어떤 제자는 속으로 이런 질문을 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면 계속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를 외치기만 하면 되나요? 아니면 몇 번쯤 외쳐야 하죠?”

이것을 다 아신듯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다시 9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하면 이미 우리들의 모든 필요는 충족되어질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되신 하나님께서 다 아셔서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 중언부언하지 말고 첫번째 기도제목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그러면 두 가지 질문이 떠 오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길 것인가?’

아니 이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무엇인가?’

 

어떤 분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30개가 있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여호와 이레’, ‘여호와 닛시,’ 곧 ‘하나님께서 준비하신다,’ ‘하나님 깃발’과 같은 이름도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생각하면 그야말로 30개가 됩니다. 곧 하나님에 대한 서술도 모두 이름으로 생각한 경우입니다.

반면 ‘여호와’나 ‘엘’ 등 하나님의 이름만으로 생각하면 그래도 8개쯤 됩니다. 그 중 뭐니 뭐니해도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여호와’인줄 압니다. ‘야훼’라고도 하고요.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을 여쭈니 하나님께서 마지 못해 대답하신 이름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니 30개에 속한 이름을 불러도 아니면 8개에 속한 이름을 우리가 불러 드려도 기쁘게 받으실줄 압니다. 제비꽃처럼 이름을 바꿔 달라고 하시지도 않으시겠고 야생화처럼 그냥 ‘꽃’이라고 불러달라고 하시지도 않으실줄 압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한편으로는 섭섭하실줄 압니다. 30개를 주장하는 사람이나 8개를 주장하는 사람이나 정작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이라고 장황하게 말씀하신 그 이름은 늘 빼 놓으니 말입니다. 어느 이름일까요? 출애굽기 3: 15절,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아니 이스라엘에게 주신 당신의 이름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그 누구도 하나님의 이름 명단에는 이 이름을 빼 놓습니다. 30개 속에도, 8개 속에도…. 도리어 역사적으로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고 있는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 곧 ‘스스로 있는 자’입니다. 물론 멋있게 들립니다. 그러나 하나님 가슴 속에 깊게 와 닿는 이름은 바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이름입니다.

한편 이해는 갑니다. 사람들이 아니 신학자들이 이 이름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여기지 않는 것을….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인데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 냄새 보다는 인간 냄새가 나는 이름입니다.

물론 아브라함이나 이삭만 해도 참을만 합니다. 야곱. 뜻은 ‘발뒤꿈치를 잡음’인데 의미는 ‘얌체’가 아닙니까? 인간 냄새가 뭉실뭉실나는 이 이름을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여기기 불편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엿보이지 않습니까?

 

저희 집에도 저희 가정 족보가 있습니다. 거기 보면 조선 시대에 높은 지위에 있었던 사람들의 직위가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한편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 같으면 어떻게 족보를 꾸미셨을까? 높은 지위에 있었던 사람들의 이름만 화려하게 꾸며 놓았을까요?

 

언젠가 쉐마의 밤에서 소개해드린 줄 압니다만 세계에서 가장 긴 이름이 747개의 알파벳의 이름을 가졌던 독일인인데 1997년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저는 부모님이 어떤 의도로 이런 이름을 주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한 가지 우리들에게 교훈을 주신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도 이런 긴 이름을 원하시는 것이 아닐까요? 당신이 택한 모든 자녀들의 이름이 바로 당신의 이름이 되길 원하시지 않으실까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일뿐 아니라 모든 택한 자의 이름이 다 담겨져 있는 이름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그 이름이 끝없이 길어지시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방법이 무엇인지 알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끝없이 길어지는 것에 동참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삶일줄 압니다.

 

사실 거룩하지 않은 사람들의 이름을 당신의 이름으로 삼으시는 하나님이야 말로 거룩하신 하나님이지 않으실까요? 하나님께서는 형편없는 사람의 이름을 당신의 이름에 포함시킴을 통해서 그 사람을 거룩하게 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곧 거룩하신 하나님이시기에 형편없는 사람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이름에 넣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당신의 이름을 늘 바꾸시길 원하십니다. 새로운 사람 이름을 당신의 이름에 계속 붙이시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fancy한 이름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이름으로 당신의 이름을 가꿔 가시길 원하십니다. 아니 평범하지 않고 도리어 얌체 아니 얌체가 아니라 양아치 등 세상에 쓰레기로 여김을 받는 이름들로 당신의 이름을 가꿔 가시길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의 이름이 하나님의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독생자이신 주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피를 흘리시게 하셨습니다. 보혈의 능력으로 모든 사람의 이름을 당신의 이름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삶이란 바로 모든 사람들의 이름이 하나님의 이름이 되도록 힘쓰는 것이 아닐까요?  특히 세상에서 무시당하는 사람들의 이름이 하나님의 이름이 되도록 힘쓰는 것이 아닐까요? 이것이 가장 중요한 기도제목이기에 주님께서 첫번째 기도제목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교우 여러분,

우리들의 이름이 주님의 보혈로 이미 하나님의 이름 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부터 시작한 이름 속에….

 

저는 매일 아침 교인주소록을 한 페이지씩 넘기면서 교우님들의 이름을 보며 기도드립니다. 교인주소록에 담긴 모든 이름은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곧 하나님의 이름이 기록된 책인 것입니다.

이처럼 이웃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의 이름을 거룩케 하시려고 주님께서 두 주전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승천하시기 전까지 우리 곁에 계십니다. 이 주님께서 지금도 첫번째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말씀을 거둡니다.

미주 크리스챤 신문을 늘 보고 있습니다만, 제가 제일 빠짐 없이 보는 기사가 있습니다. 미전도 종족을 소개하면서 기도해 달라는 기사입니다. 한번은 예멘의 소코트란 종족에 대해서 소개되어졌습니다.

 

60,900명의 소코트란족은 소코트라섬에 거주하는데, 이 섬은 아프리카 호른(Horn)과 아라비아 반도 사이 상어 출몰지에 위치합니다. 이 섬은 오랫동안 “지구의 끝”으로 여겨졌습니다.

한편 기독교가 매우 일찍 주후 535년에 이 섬 사람들에게 소개됐다는 증거가 있습니다. 이때 네스토리우스 교파 주교 한 분이 이 섬에 거주했고, 사도 도마의 사역결과로 그곳에 기독교 교회가 있다고 믿어진다고 합니다.

소코트란족은 1542년 성 프랜시스가 인도로 가는 도중 그들을 방문했을 때까지도 신실한 믿음을 지켰습니다. 슬프게도 1680년까지 기독교는 사실상 끊어지게 됐습니다.

오늘날 소코트란족은 거의 100% 무슬림이고 세계 다른 지역들과 차단돼 있다는 점이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어려움이 되고 있습니다. 섬을 방문하기 위한 허가는 예멘 군대로부터 얻어야 하고, 섬에 있는 하나뿐인 호텔은 군사적 이용을 위해 활용된다고 합니다.

성경의 일부가 소코트란족 토착어로 있기는 하나 어떤 형태로든 영적 돌파구가 없이는 그 쪽복음들이 분배되거나 사용될 가능성은 거의 없고, 기도는 이들에게 복음의 문을 여는데 중요하다고 합니다.

이들을 생각하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를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요? 언젠가 이들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장식될 것을 위하여 기도드리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기도가 아닐까요?

 

교우 여러분,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것은 이웃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것이고 이웃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지 두 주가 지났습니다. 승천하시기 전 40일간 땅 위에 계십니다. 아마 요즘은 예멘의 소코트란 족들과 함께 하시지 않으실까요? 물론 우리들과도 함께 계시구요.

 

교우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니 아무 염려 마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공동체적 기도를 드리십시다. 함께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십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을 거룩히 여기시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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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Title Writer Date
246 “주기도문 VI: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마태복음 6: 5-13a (05/30/21) webmaster 2021.06.03
245 “주기도문V: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마태복음 6:5-12 (05/23/21) webmaster 2021.05.27
244 “주기도문IV: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마태복음 6:5-11(05/16/21) webmaster 2021.05.27
243 “주기도문III: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태복음 6:5-10 (05/02/2021) webmaster 2021.05.04
242 “주기도문II: 나라가 임하옵시며.” 마태복음 6:5-10a (04/25/2021) webmaster 2021.04.27
241 “주기도문I: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마태복음 6:5-10 (04/18/2021) webmaster 2021.04.19
240 “이 모든 것을 보라VI: 부활의 사람들” 빌립보서 3:7-12 (04/04/2021) webmaster 2021.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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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7 “이 모든 일을 보라III: 오네시모” 빌레몬서 1:8-22 (03/07/2021) webmaster 2021.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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