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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 VII: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마태복음 6:5-13

방송인인 유인경씨의 글 일부를 소개해 드립니다.

“70대 후반의 지인이 지난해 늦여름 넘어져서 다리뼈가 부러졌다. 대학병원에서 수술을 받았지만 그곳에선 장기간 입원을 할 수 없어 서울 강남에 있는 요양병원에 입원했다. 그러다 두계절을 보내고 며칠 전 퇴원했다. 코로나 탓에 입원기간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병문안도 제한돼 수시로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거나 가끔 먹거리를 보내드릴 뿐이었다.
무사히 집으로 돌아온 지인은 병상에서 인생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고 한다. 지인에 따르면 70∼90대의 노인들이 모인 요양병원에서는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다르다. 박사건 무학이건, 전문직이건 무직이건, 재산이 많건 적건 상관이 없단다. 누구나 똑같이 환자복을 입고 병상에 누워 있는 그곳에서는 안부전화가 자주 걸려오고 간식이나 필요한 용품들을 많이 받는 이가 ‘상류층’이란다. 가족과 친구로부터 받은 간식과 생필품을 의료진이나 같은 병실 환자들에게 나눠주는 이가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병실 계급은 그렇게 좌우된단다.
“내 옆자리의 할머니는 밖에서 교장 선생이었고 아들도 고위 공무원이라는데, 사과 몇알은커녕 전화도 거의 안 오더라. 그래서인지 내가 받은 과일이나 간식을 나눠주면 너무 감사하다면서도 민망한 표정을 지었어. 내가 그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 야단이라도 치고 싶었다니까. 몇달 아파서 요양병원에서 지내보니 왕년의 직함이나 과거사는 다 부질없더라고.””

한편 유인경씨는 계속 노후를 위해서 가족 내지 이웃과 좋은 관계를 쌓아 두는 것이 제일 좋다는 것을 깨닫고 좋은 관계를 위하여 시간과 물질을 투자하기 시작했다는 글로 마칩니다. 노후에 상류층 사람이 되기 위해서….

그것도 인생을 사는 좋은 지침일줄 압니다만 오늘 주기도문의 일곱번째 창문을 여는 날인데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를 드리는 자들은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떤 삶을 살 것을 결단하게 될까요?

일단 우리 앞에 있는 여섯개의 창문을 다시 한번 하나씩 열어 보겠습니다.

첫번째 창문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우리는 매일 아침 기도의 창문을 열면서 오늘 만나는 이웃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이름을 기대하게 됩니다.

두번째 창문은, “나라가 임하시오며.” 자주 자주 하나님께서는 침묵으로 응답하시지만 침묵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기대하며 하루를 힘차게 시작하게 됩니다.

세번째 창문은,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인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아낌없이 아들을 내어주셨습니다. 이제는 땅에서 하나님의 인류 구원의 역사가 펼쳐질 것을 기대하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곧 첫 세 창문은 하나님의 이름과 나라와 뜻을 위한 기도제목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주님은 강하게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네번째가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기도입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인 것처럼 매일 나려 주시는 양식을 통해 주권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곧 일용할 양식은 기도의 응답인 동시에 우리들의 기도가 이루어지고 있는 증거인 것입니다.

다섯번째 창문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하나님으로부터 죄사함을 받고 또 이웃으로부터 용서를 하고 용서를 받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아름다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여섯번째 창문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한편 죄사함의 은총은 너무 소중한 것인데 때로 우리 마음대로 이 은총을 도용해서 도리어 죄를 가볍게 생각하는 시험에 빠질수가 있습니다. 그 결과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시험에 들지 말게 해달라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여기까지가 그동안 함께 나눈 주기도문의 말씀입니다. 처음 세 창문을 열면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게 하시더니 그다음으로는 한 마디로 인간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기도 제목을 주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일용할 양식이 필요한 자들이고 아울러 죄사함을 받아야 하고 시험에 쉽게 빠지는 우리임을 고백하는 기도제목인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서 있는 일곱번째 창문은 어떤 창문인가요?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역시 우리의 연약함을 아뢰면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기도제목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마지막 창문입니다. 물론 더 있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이 말씀은 다음주에 나누겠지만 기도 제목은 아닙니다. 하나의 송영입니다.

곧 일곱번째 창문이 마지막 구체적인 기도제목의 창문입니다. 그런데 이 창문도 우리의 연약함을 아뢰는 창문인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보면 주기도문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을 고하면서 하나님께서 알아서 다 해달라는 내용이라고 생각할수 밖에 없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럴리가 없죠. 성삼위 일체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데 우리 인간의 존재를 연약함에만 가두어 놓으셨을까요?

그런 의미에서 오늘 일곱번째 창문 앞에 서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생각치 않을수 없습니다. 함께 열어 볼까요?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악’을 어떤 사본에서는 ‘악한 자’로 되어 있는데 이는 ‘사탄’을 뜻한다고도 볼수 있습니다. 일단 그냥 사탄이 만든 ‘악’으로 생각하겠습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 사탄이 만든 악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악’에 대한 정의는 쉬우면서도 어려운 것 같습니다. 가장 쉬운 방법은 악을 만들어 낸 ‘사탄’의 어원에서 찾아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사탄’의 뜻은 ‘참소하는 자’ 영어로는 ‘Accuser’입니다.

그렇다면 7번째 창문은 우리들에게 이런 하루를 맞이하라고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남을 accuse하지 않게 하소서.”

사실 죄가 처음 세상에 들어오자마자 사람이 한 것이 있습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기 까지는 하와에게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외쳤습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은 후 하나님께 이렇게 변명을 하죠. 창 3: 12,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말이 변명이지 아담은 첫번째로는 하나님을 accuse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아마 이 때 아담의 표정은 하나님께 이를 가는 표정이었을 것입니다. 두번째로는 하와를 accuse하고 있습니다.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줌으로 내가 먹었나이다.”

사실 선악과를 따먹기 전까지 하와는 아담에게 아주 잘 했을줄 압니다. 하와를 만드신 이유가 창2:18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이처럼 하와는 돕는 배필로서 아담과 둘도 없는 친구가 되어서 지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은 후 그동안 하와가 행한 모든 것은 다 잊어 버렸습니다. 한 가지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힘센 아담이 연약한 하와를 한 가지 이야기로 규정시켜 버린 것입니다. 그동안 함께 이루었던 수많은 아름다운 이야기들은 다 사라지고 한 가지 이야기만 남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악’입니다.

이것의 결과는 갈라지는 것입니다. 그동안 아담과 하와는 하나였습니다. 이제는 하나인 것 같지만 남이 된 것입니다.

악의 시작은 이렇게 된 것입니다. 악은 갈라 놓는 것입니다. 악은 서로의 좋았던 것은 다 잊어 버리게 하고 나쁜 이야기만 남게 합니다. 그래서 갈라지게 만듭니다.

오늘 처음 소개해 드린 이야기도 갈라진 자들이 사용하는 단어가 나옵니다. ‘상류층.’ 물론 요양병원에 입원하신 분들은 더 이상 계층이 없어졌다고 하지만 그래도 마지막으로는 또 갈라 놓습니다. ‘상류층’과 ‘하류층.’

이것이 사탄이 하는 일입니다. 이로서 알수 있는 것은 악한자들은 도깨비처럼 머리에 뿔이 난 자들이 아닙니다. 갈라 놓기를 좋아하는 자들입니다. 이웃을 한 가지 이야기로 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번 말씀을 준비하면서 사탄이 제일 싫어하는 동물 하나를 생각해 낼수 있었습니다. 아주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는 동물입니다. 개, 어감이 안 좋으니 강아지라고 할까요?

제가 건강을 위해 산책을 자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본인을 위해서도 그렇고 집에 함께 사는 강아지를 위해서도 그렇고 함께 산책을 나갑니다.

저도 강아지를 무척 좋아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저희 집에는 ‘포인터’라고 하나요. 아주 잘 생긴 포인터가 있었습니다. 특히 그런 강아지를 산책할 때 만나면 껴안고 싶은 생각마저 듭니다.

잘 생긴 포인터도 보면 어떤 종류의 강아지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무조건 좋아서 멍멍 짓습니다. 그야말로 한국 식으로 똥개라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상류층 하류층 구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어떻습니까? 요즘 인종문제가 복잡한데 이유는 조금만 달라도 갈라 놓기를 좋아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요즘 인종문제 때문에 피켓 들고 데모도 많이 하는데, 여러 글들이 써 있습니다. 제일 좋은 피켓은 아마도 ‘강아지에게 배우자’ 라고 써 놓으면 제일 파워풀 하지 않을까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 정말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강아지들에게 배우는 것을 좋아하실까요? 사실 강아지들은 기껏해야 가끔 만납니다. SNS도 할수 없으니 평소 교제도 없습니다. 나쁜 이야기가 만들어질 틈이 없습니다. 그래서 항상 반갑고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주 만납니다. SNS로 인해 전보다 훨씬 더 자주 만납니다. 그러다 보니 안 좋은 일이 자주 생기고 결국 accuse하는 일이 비일비재해집니다. 강아지를 따라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주님께서 이 기도를 가르치시는 깊은 뜻이 있지 않을까요? 저는 주님께서 한번 인용하셨던 시편 말씀에서 그 해답을 찾아 보았습니다. 시편 82: 6, 7;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그러나 너희는 사람처럼 죽으며 고관의 하나 같이 넘어지리로다.”

우리는 어려움을 당했을 때 두 가지 길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가는 길입니다. 또 하나는 세상 사람들이 가는 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가는 길은 어려움을 당했을 때 ‘악’을 택합니다. 곧 accuse하기 시작합니다. 사탄의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이웃을 향하여 나쁜 한 가지 이야기로 정죄합니다. 세상을 갈라지게 합니다.

반면 하나님의 아들들은 다른 길을 택합니다. 결코 accuse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아담처럼 이를 갈지 않습니다. 연약한 하와를 나쁜 한 가지 이야기로 뒤집어 씌우지 않습니다. 그들은 악을 선으로 바꿉니다. 도리어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어 갑니다. 세상을 하나가 되게 합니다.

Paulo Coelho라는 분이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No matter what he does, every person on earth plays a central role in the history of the world. And normally he doesn’t know it”- Paulo Coelho. (사람은 어떤 일을 하든 이 세상 역사의 중심에 서서 큰 역할을 한다. 다만 본인이 모를 뿐이다.)

우리는 악을 선으로 바꿀 때 우리도 모르게 세상 역사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가는 길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삶을 살게 하시려고 주님께서는 일곱번째 창문을 소개해 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그리고 이 기도가 이루어지도록 주님께서 손수 악을 선으로 갚으셨습니다. 죄인들을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죄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에덴 동산보다 훨씬 더 멋진 영원한 하늘나라를 만드신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로 하여금 당신께서 하신 일의 동역자로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함께 악을 선으로 바꾸는 삶으로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곧 주기도문의 창문 일곱번째 앞에 서는 순간 우리는 다시 역사의 주인공이 됩니다. 더 이상 연약한 자가 아닙니다. 주님을 닮은 악을 선으로 바꾸는 위대한 하나님의 자녀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나라 갈 때까지 매일 어려움을 맞이할수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매일 역사의 주인공으로서 악을 선으로 바꾸는 아름다운 이야기들의 창조자가 되게 하기 위함일줄 압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아침 7번째 창문을 열면서 외칩니다.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그리고는 이웃과 더불어 오늘도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만이 만들수 있는 이야기를 주님 안에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갈라져 있는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이 도리어 아름다운 관계를 맺게 되는 이야기가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사탄이 좋아하는 참소하는 이야기는 사라지고 매일 새롭게 아름다운 이야기가 무수히 꽃피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1848년 영국에서 아일랜드 독립을 위한 민중봉기가 일어났습니다. 무장봉기로 인한 유혈 사태는 결국 실패로 끝나버렸습니다.

빅토리아 여왕은 반역의 주동자로 체포되었던 8명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지만 주변 국가들의 압력으로 8명을 호주로 추방했습니다. 당시 호주는 시베리아 땅처럼 사람이 거의 살기 어려운 곳이었습니다.

26년이 지난 어느 날, 빅토리아 여왕은 호주의 국가 상황을 보고받는 자리에서 깜짝 놀랍니다.

바로 26년 전에 추방했던 사람들 중 찰스 더피라는 이름이 호주의 총리 이름과 같았습니다. 깜짝 놀란 빅토리아 여왕은 그가 동일 인물인지 알아보도록 명령하고 당시 추방했던 나머지 7명을 추적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이후 보고서를 받아든 빅토리아 여왕의 충격을 훨씬 더 컸습니다. 예상했던대로 찰스 더핀은 호주의 총리가 되었고 나머지 추방자들도 호주 법무부 장관 미 육군장성 몬타나 주지사 뉴욕 주지사 뉴욕 상원의원, 그리고 캐나다 주지사 등으로 모두가 호주와 미국에서 성공해 있었습니다.

이들 모두 악을 선으로 바꾼 자들입니다. 아름다운 이야기들의 주인공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더이상 빅토리아 여왕을 참소하는데 시간을 보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주기도문의 창문을 여는 자들을 통해서 오늘도 아름다운 이야기는 창조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기도드리십시다.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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