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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팬데믹 II: 바로 앞에 던지라.” 출애굽기 7: 8-13 (07/18/2021)

운동회날-오성호

삶이란 게
가을 운동회날처럼
늘 마음 설레게 하는 것이었으면
끝날 무렵이면 누구나
공책 한 권쯤은 챙길 수 있고
누구나 가족들 앞에
햇살처럼 뻐기고 설 수 있는 그런 날
누구나 똑같은 출발선에 서서
긴장하고 서 있다가
총소리와 함께 목표를 향해 달려나가고,
공정한 출발을 위해서라면
몇 번이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날
어쩌다 재수 없이 넘어져서
꼴찌를 하더라도 부끄럽지 않게
위로받을 수 있는 달리기 시합처럼
우리의 삶도 그럴 수 있다면
진 자도 이긴 자도
떳떳하게 푸른 가을 하늘을
우러를 수 있는 그런 날들이라면

 

자본주의 체제 가운데 살면서 지쳐 있는 우리들에게 우리들의 모습을 느끼게 하는 시인 것 같습니다.

 

오늘은 출애굽의 패러디로 출팬데믹 씨리즈 두번째 설교 말씀을 드립니다. 사실 출애굽의 주인공 모세도 바로 이 시인의 심정을 누구보다도 깊게 공감했으리라 생각됩니다.

모세는 애굽 사람을 죽이고는 광야로 도망을 가고 다행히 십보라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되고 장인 이드로의 양을 치면서 하루 하루를 살아 갑니다. 모세의 마음이 바로 오성호 시인의 마음과 같지 않았을까요? 이런 시상을 가슴에 안고 하루 하루 살아가기를 어느덧 40년이 흘렀습니다. 시상은 더욱 깊어져 갔지만 삶에 전혀 변화는 오지 않았습니다. 물론 삶의 변화를 바라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이런 모세가 어느 날 광야에서 놀라운 체험을 합니다. 떨기나무에 불은 붙었는데 타지 않습니다. 스스로 있으신 분이심을 떨기나무를 통해 보여주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떨기나무는 타지 않고 불이 붙어 있으니 그 분은 아무런 피조물을 필요로 하지 않는 분 곧 스스로 있는 분이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스스로 계신 분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신 이유가 있으셨습니다. 전혀 원하지도 않은 일을 시키십니다. 동족을 출애굽시키라는 것입니다. 사실 모세는 광야에서 오성호 시인의 시상에 젖어 하루 하루 광야에 사는 것이 남은 소박한 소원이었던 것입니다. 스스로 계신 분의 요구는 전혀 자기와는 맞지 않은 것입니다. 하여튼 모세는 스스로 계신 분과 승강이를 합니다.

“할수 있다.” “없다.” “있다.” “없다.”….

 

결국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스스로 계신 분이 이기셨습니다. 9절,

“바로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이적을 보이라 하거든 너는 아론에게 말하기를 너의 지팡이를 들어서 바로 앞에 던지라 하라 그것이 뱀이 되리라.”

 

바로 앞에 서서 지팡이가 뱀이 되게 하는 기적을 행할 것을 명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모세가 하나님과 승강이를 할 때 하나님께서 이미 보여 주신 기적입니다. 모세는 자기의 지팡이가 뱀이 되는 경험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번과 이번에 한 가지 차이가 있습니다. 지난번에는 아무도 보지 않는 가운데 모세가 자기의 지팡이를 던져서 뱀이 되게 했고, 이번에는 바로 앞에서 아론의 지팡이를 던져서 뱀이 되게 하시라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같은 뱀이 아닙니다. 원어로 보면 다른 두 뱀 종류의 이름이 나옵니다. 쉽게 설명드리면 모세의 지팡이가 살모사가 되었다면 아론의 지팡이는 구렁이가 되었다고 할까요.

 

모세와 아론 모두 놀랐을 것입니다. 물론 다른 이유로 놀랐을 것입니다. 먼저 아론은 하나님께서 모세의 지팡이를 뱀이 되게 하셨던 것을 모세에게 들어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론은 모세의 지팡이만 뱀이 되게 하셨지 자기 지팡이도 뱀이 되게 하실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눈 앞에서 놀라운 일이 펼쳐집니다. 자기의 지팡이가 뱀이 된 것입니다.

한편 모세도 놀랐을 것입니다. 지난번 자기의 지팡이를 던지니 살모사가 되었는데 이번에는 아론의 지팡이가 구렁이가 되었습니다. 모세는 두 지팡이가 다른 뱀이 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늘 사람들의 예측을 뛰어 넘는 기적을 행하시는 분임을 새삼 느꼈을 것입니다.

 

이렇게 흥분 가운데 있는데 바로도 마술사들을 불러서 요술을 행하게 합니다. 요술사들의 지팡이도 뱀이 되었습니다. 한편 여기에 뱀은 복수입니다. 한글 성경은 편이상 단수로 되어 있는데 영어 성경만 봐도 복수임을 금방 알수 있습니다. 곧 구렁이와 같은 아론의 지팡이 뱀이 애굽의 현인들과 요술사들의 뱀들을 모두 잡아 먹은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놀라운 장면입니까? 이젠 모세와 아론은 빼도박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자기들의 죽은 지팡이가 산 뱀 그것도 다른 종류의 뱀이 되는 것도 신기한데 애굽의 현인들과 요술사가 만든 뱀들을 다 잡아 먹었으니 말입니다. 뱀들을 잡아 먹었다는 것은 계속 끝없이 잡아 먹을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입니다.

 

사실 모세는 40년간 광야 생활을 통해서 자기의 삶은 끝난줄 알고 있었습니다. 아니 자기는 40년을 광야에서 썩은 사람입니다. 40년간 애굽에서 받은 교육은 다 사라졌고 손에 남아 있는 것은 지팡이 하나 뿐이었던 것입니다. 곧 모세의 손은 죽은 자의 손이었고 죽은 자와 같은 모세의 손에 지팡이만 하나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손에 든 지팡이를 통해서 놀라운 일이 펼쳐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죽은 자의 지팡이가 애굽의 모든 지식인들의 지팡이를 잡아 먹었던 것입니다. 애굽의 지식인들은 지난 40년간 더욱 날카라운 지식을 쌓아 갔을 것입니다. 자신은 광야에서 썩고 있는 동안…. 그러나 그들의 지혜의 뱀을 모두 잡아 먹은 것입니다. 이 사건을 체험하면서 그동안 가졌던 생각이 180도 바뀌었을 것입니다.

 

한편 바로는 어떠했을까요? 자기의 현인들과 요술사들의 뱀이 다 잡혀 먹혔으니 ‘깨갱’해야 하지 않을까요? 13절,

“그러나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여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

 

사실 자기들의 요술사의 뱀이 잡혀 먹히기는 했어도 그럴수도 있지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럴수 밖에…. 애굽이라는 나라가 어떤 나라입니까?

 

세계 7대 유적 중에 하나가 이집트에 있는 ‘Great Pyramid of Giza’입니다. BC2600년경에 27년간 지어졌고 높이는 거의 150미터가 됩니다. 모세가 바로 앞에 설 때는 이 피라밋이 지어진지 1300년쯤이 지난 BC 13세기였습니다. 물론 이 피라밋 말고도 수백개의 피라밋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을 때입니다.

피라밋은 애굽의 힘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피라밋을 볼 때마다 바로는 자기도 저런 피라밋에 언젠가 잠들 것을 생각하면서 신적인 존재로 착각하고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인의 하나님을 믿는 모세와 아론이 와서 지팡이로 뱀을 만들었다고 하루 아침에 마음이 바뀔리가 없습니다.

 

모세는 비록 40년이 흘렀어도 애굽 왕궁에 살 때 피라밋을 잘 보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가 피라밋의 영광을 업고 이처럼 물러서지 않는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한 때 모세도 피라밋 앞에 설 때마다 그 위용에 눌리곤 했을 것입니다.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위용은 모세의 뇌리 속에 깊게 박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팡이 사건으로 모든 것이 뒤바뀌어졌습니다. 피라밋이 새롭게 보이게 된 것입니다. 사실 바로가 믿는 것은 바로 피라밋이었습니다. 피라밋은 무엇을 상징합니까? 말씀드린대로 피라밋은 바로의 무덤입니다. 애굽인들은 바로를 신격화시키려고 피라밋을 만들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무덤입니다.

피라밋은 온 세상은 죽음이 통치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무덤이었던 것입니다. 그동안도 바로는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죽지 않으려거든 와서 노예가 되라가 협박했던 것입니다. 죽음이 무서워서 많은 사람들이 애굽의 노예가 되었고 노예가 되어서 죽음을 상징하는 피라밋을 만들고 또 만들었던 것입니다. 바로가 바로가 될수 있었던 것은 죽음을 도구로 삼고 세상을 위협한 것입니다.

 

이제 모세는 바로는 죽음을 무기로 온 세상을 통치하는 연약한 자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반면 죽음으로 온 세상을 통치하는 바로 앞에 시골뜨기 두 사람이 서서 지팡이를 던진 것입니다. 지팡이가 뱀이 되는 것을 보게 하시면서 지팡이를 쥐었던 손은 바로 하나님의 손이었음을 모세와 아론은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는 죽음으로 위협을 하지만 모세와 아론은 생명으로 도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길까요?

 

사실 출애굽은 죽음과 생명의 싸움입니다. 출애굽기 1장에 보면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서 이스라엘민족을 중노동시키는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그런데 자꾸 이스라엘 민족이 강해지니 아예 산파들에게 이스라엘인들이 아들을 낳으면 곧 죽이라고 합니다. 죽음으로 통치하는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이에 히브리 산파 십브라와 부아라는 사람은 도리어 그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려 줍니다. 아마 그 덕에 모세도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십브라와 부아는 생명으로 도전한 대표적인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시작한 출애굽 이야기는 이제 놀라운 클라이맥스로 향하고 있는 셈입니다. 바로는 모세를 비롯한 모든 이스라엘 아이들의 죽음을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용감한 산파와 부모님들로 인해 죽음을 면한 모세는 자신의 죽음을 명했던 바로 앞에 섰습니다.

이에 바로는 계속 죽음의 신을 믿고 모세와 아론을 위협합니다. 모세와 아론은 스스로 있는 자이신 생명의 하나님을 믿고 바로에게 도전하기 시작합니다. 얼마나 드라마틱합니까? 앞으로 어떻게 펼쳐질까요? 당분간 출애굽의 이야기로 주일 설교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오늘 출팬데믹 두번째 말씀을 드리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이 놀라운 출애굽 이야기에 초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21세기의 출애굽은 바로 출팬데믹이 아닐까요? 하나님은 이미 우리의 출팬데믹을 위한 모든 구상도 마치셨을 것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이 이야기의 주인공들을 찾고 계십니다.

 

이 드라마에는 두 종류의 주인공들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죽음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자들입니다. 바로와 같은 자들입니다. 또 하나는 십브라와 부아 그리고 모세와 아론으로 이어지는 생명으로 도전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죽음을 무서워하는 자들이 아니라 생명을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죽음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자들은 언제나 쉽게 찾아 볼수 있습니다. 애굽 이후에 계속해서 세계를 지배하는 나라들이 연이어 나타났습니다.

크게 몇 나라만 소개하면 로마제국, 몽골, 대영제국 그리고 이제는 미국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강대국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모두 피라밋을 섬깁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자기 나라에 굴복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합니다. 곧 죽음의 신으로 세상을 정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설마 미국도 그럴까요? 잘은 모르지만 현재 미국은 미국의 말을 잘 듣는 나라에만 백신을 공급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것도 죽음의 신으로 세상을 정복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물론 저도 백신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 사람이긴 하지만….

 

이러한 때 주님은 새로운 주인공들을 찾고 계십니다. 생명으로 죽음의 신들을 도전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교우 여러분,

함께 출팬데믹의 클라이맥스까지 동참하십시다. 이미 출팬데믹은 시작된 것입니다. 누가 출팬데믹의 주인공들이 될까요? 주님의 음성을 듣는 자들입니다.

“너의 지팡이를 들어서 바로 앞에 던지라.”

이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십시다. 역사의 클라이맥스의 주인공이 되십시다.

 

우리들의 지팡이는 뱀이 될 것입니다. 아울러 뱀이 된 우리들의 지팡이는 죽음의 지팡이를 삼킬 것입니다. 우리들의 지팡이는 생명의 지팡이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소그룹 성경공부에서 사사기를 공부하고 있는데 제가 참고 자료로 보는 주석책이 있습니다. 주석가가 다음과 같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초등학교 4학년이 되었을 때 아버지께서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셨다고 합니다. 매달 5불씩 용돈을 주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아주 놀랐고 당연히 기뻐했을줄 압니다. 한 가지 조건이 있었는데 십일조만 드리고 나머지는 마음대로 사용할수 있었습니다. 십일조를 드리고 나면 $4.50이 남았습니다.

그런데 집근처에 그로서리 가게가 있었습니다. 친구와 함께 그 돈으로 맛있는 것을 사먹곤했습니다. 두 세 달 지나고 나서 친구의 엄마가 눈치를 챘습니다. 아버지도…. 결국 용돈 제도는 사라졌다고 합니다.

 

$4.50은 그에게 주어진 지팡이였습니다. 이를 생명의 지팡이로 사용할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했네요.

아마 $4.50은 하찮은 액수의 돈이라고 생각해서 자기 마음대로 사용한 것 같습니다. 적은 액수의 돈도 생명의 지팡이가 될수 있음을 알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이웃의 생명을 사랑하여 그 적은 돈을 사용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다시 히브리 산파 이야기로 돌아가서, 1: 20, 21,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 그 백성은 번성하고 매우 강해지니라. 그 산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안을 흥왕하게 하신지라.”

생명의 지팡이를 잘 사용할 때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사실 우리들의 손에도 작은 것들이 주어져 있습니다. $4.50이 들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는 생명의 지팡이가 아닐까요? 생명을 사랑하는 자들의 손에 든 모든 것은 생명의 지팡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명의 지팡이를 잘 사용하는 자들에게 놀라운 축복이 임합니다.

 

교우 여러분,

주변을 살펴 보면 우리들의 $4.50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요? 코로나 바이러스 하나가 금방 수십개로 번식 되고 있지만 실은 생명의 지팡이도 사용할수록 놀라운 역사가 펼쳐지지 않을까요? 정신과학자 폴 투르니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삶은 아름답지만 그것은 모든 인간에게 힘든 것이며, 심지어 대다수에게는 혹독하기까지 하다. 시련을 당하거나 상실에 직면하면 더욱 힘들어진다. 삶은 많은 용기를 요구한다. 나는 그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내가 별로 용기가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내 용기는 용기 있는 사람들과 접촉할 때 되살아난다. 그들은 흔히 내 환자들이며, 나보다 더 큰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기에 나는 그들이 보여 주는 용기를 존경한다. 용기는 가르쳐서 생기는것이 아니기 때문에 전염시켜야 한다. 사회는 상호 격려의 거대한 실험실이다. 각 구성원은 상대방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용기만을 줄 수 있다.”

 

진정한 출팬데믹은 백신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의 지팡이를 함께 사용함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아니 우리가 생명의 지팡이를 사용하지 않고 있어서 팬데믹이 온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 손에 쥐어진 생명의 지팡이를 이번 주간도 담대히 사용하십시다. 죽음의 지팡이를 삼킬 것입니다. $4.50이면 충분합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제가 자주 산책을 나가는 데담 타운에 성공회 교회가 하나 있습니다. 교회당 뜰에는 두 신부님의 유해가 담긴 석관이 있는데 한 분의 석관의 글이 눈에 띄었습니다.

“He made full proof of his ministry. He now rests from His labors. And his works do follow him.”

“그는 성실히 사역을 잘 감당하셨고, 이제 그의 수고에서 쉼을 누리고 있습니다. 한편 그의 사역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신부님의 생명의 지팡이의 사역은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감동적은 내용입니다. 신부님은 죽음의 세력이 통치하는 세상에서 생명을 사랑하는 사역을 끝까지 감당하신줄 압니다.

 

오늘도 죽음의 세력이 세상을 통치하고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생명의 지팡이를 든 자들이 죽음의 세력을 이기고야 말 것입니다. 주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생명을 사랑하십시다. 생명의 지팡이로 온 세상을 아름다운 이야기로 채우십시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는 아론에게 말하기를 너의 지팡이를 들어서 바로 앞에 던지라 하라 그것이 뱀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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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Title Writer Date
356 “나는 양의 문이라” 요한복음 10:1-9 (04/28/2024) webmaster 2024.04.29
355 “나는 세상의 빛이라” 요한복음 8:12-20, 9:35-41 (04/21/2024) webmaster 2024.04.22
354 “나는 생명의 떡이라” 요한복음 6:22-35 (04/14/2024) webmaster 2024.04.15
353 “마지막 아담: 살려 주는 영” 고린도전서 15:42-46 (03/31/2024) webmaster 2024.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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