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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팬데믹 III: 마실 물을 구하였더라.” 출애굽기 7: 14-25 (07/25/2021)

 

공자의 제자 중에 자로라는 제자가 있습니다. 성격이 급했던지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와 비교되는 제자였다고 합니다. 자로가 공자를 처음 만났을 때 일입니다. 공자가 자로에게 물었습니다.

“그대는 무엇을 좋아하는가?

“나는 긴 칼을 좋아하오.”

“나는 그걸 묻는 것이 아니다. 그대가 능한 기술 위에다 학문을 더하게 되면 누가 여기에 따라올 수 있겠는가? 나는 무슨 공부를 좋아하는가를 물었네.”

“배우는 게 무슨 이익이 있겠소이까? 남산의 대나무는 잡아주지 않아도 저절로 반듯하게 자라는 법이오. 그리고 그 반듯한 대나무를 자르면 바로 곧은 화살이 되지요. 그러니 꼭 학문을 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이오.”

공자가 답합니다.

“곧은 화살 대가리에 쇠촉을 꽂고 꼬리에는 깃을 꽂는다면 날카롭고 가벼운 것이 겸해져서 과녁에 적중하고, 또 박히는 것이 깊어지지 않겠는가!”

자로는 공자의 이 반격에 무릎을 꿇고 두 번 절한 다음 제자의 예를 갖추었다고 합니다.

 

배움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는 이야기입니다. 자로는 대나무로 화살을 만드는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 공자를 만나서 화살에 쇠촉을 꽂고 꼬리에 깃을 달아 훨씬 위력있는 화살을 만들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배움의 힘인 것 같습니다.

 

오늘 출팬데믹 씨리즈 세번째 말씀을 드립니다. 그러면 배움을 통해서 우리가 그토록 바라는 출팬데믹이 이루어질까요? 물론 가능합니다. 배움을 통해서 백신이 만들어졌으니 계속해서 배움의 과정 가운데서 출팬데믹도 이루어질줄 압니다. 언젠가는 안전한 치료제까지도 개발될수 있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진정한 출팬데믹이 가능해질까요?

 

우리는 쉽게 결론을 내릴수 있습니다. 배움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출애굽 이야기가 증거입니다. 바로는 주위에 많은 현인들 곧 학자들이 있었습니다. 반면 모세는 전혀 배우지 못한 아론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할수 있었습니다. 무엇이 모세와 아론의 비결이었을까요? 이 비결을 알 때 우리에게도 진정한 출팬데믹이 찾아 오지 않을까요?

첫번째 재앙 이야기가 담긴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진정한 출팬데믹은 어떻게 누릴수 있을지 살펴 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완악한 바로 앞에서 모세에게 지팡이로 나일 강을 치라고 하십니다.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애굽인들의 생명줄과 다름이 없는 나일강이 피로 변했습니다. 7:21,

“나일 강의 고기가 죽고 그 물에서는 악취가 나니 애굽 사람들이 나일 강 물을 마시지 못하며 애굽 온 땅에는 피가 있으나.”

이에 어떻게 반응하죠? 22절,

“애굽 요술사들도 자기들의 요술로 그와 같이 행하므로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여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

 

전에 모세가 지팡이로 뱀을 만들었을 때 똑같이 뱀을 만들었었는데 이번에도 모세가 강물을 피가 되게 하니 똑 같이 요술사들로 하여금 피가 되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피를 물이 되게 하지 못하고 물이 피가 되게 했으니 더 상황은 나빠지게 된 것입니다. 재앙을 더 키운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의 태도가 재미 있습니다. 백성들의 상황이 더 나빠진 것에는 아랑곳 하지 않습니다. 그냥 자기의 요술사들도 할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더 완악해집니다. 죽음으로 통치하는 자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모두 다 보셨겠지만 저도 어릴 때 영화 ‘십계’를 보았습니다. 출애굽 이야기를 그린 영화입니다.

저에게 두 장면이 깊게 남아 있는데 하나는 홍해가 갈라지는 장면입니다. 너무나 멋있었습니다. 또 하나는 나일강을 피로 만드는 장면인데 그중에서도 나일강이 붉은 피로 변하자 바로가 요술가에게 물로 다시 붉은 피를 맑게 만들라고 합니다. 성경 말씀과는 맞지 않습니다.

그런데 항아리에 있는 물을 붓고 있는데 그 물 조차 피가 되어서 요술사도 깜짝 놀랍니다. 십계의 저자가 왜 성경을 왜곡해서 그렇게 각본을 썼는지 좀 의아한 생각이 듭니다. 물론 이해도 되고요.

 

성경을 보면 요술사도 나일강을 피가 되게 한 것입니다. 그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모세, 너 할수 있니? 나도 할수 있다.”

바로는 모세에게 “이런 것 가지고 나를 위협해” 하는 식입니다. 23절 보면 잘 알수 있습니다.

“바로가 돌이켜 궁으로 들어가고 그 일에 관심을 가지지도 아니하였고.”

 

모세는 붕찐 것입니다. 그런데 불쌍한 것은 누구입니까? 24절 말씀입니다.

“애굽 사람들은 나일 강물을 마실 수 없으므로 나일 강가를 두루 파서 마실 물을 구하였더라.”

이스라엘인들을 출애굽시키려고 했는데 더 고생하는 것은 애꿎은 애굽 시민들입니다. 모세도 마음이 아팠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불평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런지 25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나일 강을 치신 후 이레가 지나니라.”

 

아마도 마실 물을 구하는 애굽 사람들의 모습을 보시고 그 다음 귀절을 통해 추측할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일찍 재앙을 거두신 것 같습니다.

 

그러면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붕찌게 만드셨나? 하나님께서 애굽 요술사들도 나일강을 피로 만들수 있다는 것을 아셨을텐데 말입니다. 그래서 애꿎게 선량한 시민들만 나일 강가를 두루 파는 수고를 하게 하셨을까요?

 

모세도 나일강이 다시 회복되는 것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애굽시민들을 생각하면서 다행이다 생각이 들었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아무 소득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So what?”했을까요?

그럴리 없습니다. 그의 손에는 하나님의 지팡이가 들려져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보다 한참 전의 말씀인데 4:20,

“모세가 그의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든 모세가 쉽게 불평할리가 없습니다. 지팡이를 만지며 하나님의 숨은 계획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지팡이가 어디서 난 거죠?

 

그것을 알면 우리도 하나님의 지팡이를 얻을수 있게 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팬데믹에서도 더 느긋하게 대처할수도 있겠구요. 하나님의 지팡이이니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던져 주셨나요?

 

얻게된 계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불러 출애굽의 사명을 주시려는데 모세가 자기는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키는 일을 할 자신이 없다고 하자 드디어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셨습니다. 이에 ‘지팡이’라고 하자. 지팡이를 땅에 던지라 합니다. 그랬더니 뱀이 되었습니다. 모세가 뱀 앞에서 피합니다. 왜 피했겠습니까? 지난 주에 말씀드린대로 독이 있는 뱀이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4: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어 그 꼬리를 잡으라 그가 손을 내밀어 그것을 잡으니 그의 손에서 지팡이가 된지라.”(출4:3)

 

저희 집 주변에도 garden snake를 종종 봅니다. 특히 제가 자주 가는 가까운 산에는 두세 번에 한번은 꼭 봅니다. 걸어가는데 갑자기 부시식 소리가 들리면 저도 잠시 깜짝 놀랍니다.

그리고 보면 뱀이 슬슬 도망가는 것이 보입니다. 한번도 잡아 본 적은 없지만 제가 뱀을 잡는다면 당연히 머리 부분을 잡을 것입니다. 꼬리를 잡으면 머리 부분이 저를 공격할 것은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뱀 꼬리를 잡으라고 하셨습니다. 독사의 꼬리를 잡는다는 것은 조금이라도 뱀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은 도저히 할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결론을 지을수 밖에 없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믿고 목숨을 내 놓고 순종한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도저히 맞지 않는 일을 한 것입니다. 이 때 모세의 지팡이는 하나님의 지팡이가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는 시작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팡이 자체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모세의 지팡이도 나일강을 피로 물들게 했고 애굽의 요술사도 물을 피로 바꿀수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모세의 순종이었습니다. 이 순종이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를 시작하게 한 것입니다. 나일강의 기적은 구원 역사의 파노라마의 시작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21세기의 출팬데믹도 어떻게 진행될지 알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을 통하여 이루어질 것입니다. 뱀의 머리를 잡고 싶은데 꼬리를 잡으라고 하십니다. 이에 순종하여 꼬리를 잡을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죽음이 물러나고 새로운 역사가 펼쳐집니다.

물을 피로 만드는 것은 애굽의 요술사도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구원의 역사에 동참할수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들의 지팡이가 물을 피로 바꾸지 못해도 상관 없습니다. 그것은 요술사들도 할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순종은 구원의 역사에 기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순종할 뿐입니다.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계획 안에서 역사하실 것입니다.

 

한편 말씀을 순종하는 자들의 위력을 아론의 지팡이를 통해 알수 있습니다. 모세가 목숨을 걸고 순종했는데 그 다음으로는 아론의 지팡이도 뱀이 되게 하셨고 실은 나일강에 담근 것도 아론의 지팡이였습니다. 모세의 순종이 아론의 지팡이까지 기적의 지팡이가 되게 한 것입니다. 이것이 순종의 위력입니다.

이로서 알수 있는 것은 우리가 순종의 삶을 살 때 우리의 집은 하나님의 집이 됩니다. 모세의 지팡이가 하나님의 지팡이가 된 것처럼…. 우리가 타고 다니는 차도 하나님의 차가 되니다.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도구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만드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구원 사역이 창조보다 훨씬 복잡합니다. 아니 정교합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이 위대한 하나님의 창조 세계가 인간의 죄로 물들었습니다. 이제 필요해진 것은 구원입니다.

구원은 말씀하심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말씀을 순종함으로 가능합니다. 그래서 먼저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셨고 이에 주님께서 순종하여 이 땅에 내려 오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믿는 자들을 구원하십니다.

아울러 주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원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순종입니다. 주님을 믿는 자들의 순종을 통해서 구원의 역사는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배움도 중요합니다. 배움을 통해서 팬데믹에서 벗어날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출팬데믹은 배움으로만 가능하지 않습니다. 순종으로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매일 매일 저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꼬리를 잡으라.”

 

공자는 말씀합니다.

“배우라.”

주님은 말씀합니다.

“꼬리를 잡으라.”

 

하나님의 창조 섭리는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구원 역사에 참여하려면 순종해야 합니다. 구원 역사는 하나의 대하 드라마입니다. 이 대하 드라마에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는 믿음의 공동체를 초대하십니다. 출팬데믹은 순종하는 믿음의 공동체에게 주시는 특권인 것입니다.

 

북미주에서 약 4천 킬로미터 날아가서 멕시코에 있는 어느 전나무로 덮여 있는 산에서 겨울을 보내는 나비떼가 있다고 합니다. 길이는 4센티도 안 되는 이 나비는 모나크라고 불리는데 제왕나비라고도 합니다.

3대 4대 알을 낳고 도대체 길도 모르고 GPS도 없을텐데, 그리고 새떼에게 아니면 바람 때문에 죽을 수도 있는데, 그 수천만 마리의 나비떼가 고스란히 멕시코에 날아가서 그 산 전체 전나무에 붙어서 겨울을 보낸다고 합니다.

재앙을 일으키는 메뚜기떼와 달리 이 나비떼는 비록 약한 몸이지만 몸에 독성이 있어서 새가 잡아먹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고 그들이 두세 마리 함께 어울리면 바람도 이겨나갈 수 있는 강력한 힘을 뿜어냅니다.

1월경에는 멕시코 산 전체 전나무에 붙어 있는 나비떼를 볼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기들도 살고 전나무도 살고 산도 따뜻하게 산다고 합니다. 무게는 0.5그램밖에 안 되는 나비, 그 나비떼가 함께 모여 태풍도 이겨내면서 멕시코까지 날아 갑니다. 몇 세대를 거치면서….

 

이 나비떼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 두셋이 모여서 멋진 출팬데믹을 이루는 모습을 그려 볼수 있었습니다.

 

지난 거의 1년 반 팬데믹 기간 감사하게도 3세대 예배로 하나님께 드릴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팬데믹 기간 저희 교회도 제왕나비가 되어 갔습니다. 3, 4대에 걸쳐서 저 높은 곳으로 함께 날아 갔으니 말입니다.

 

매주 3세대가 함께 모여서 저희를 위하여 먼저 뱀의 꼬리를 잡으신 주님을 찬양했습니다. 영어로 한글로 기도를 올렸고 영어로 한글로 전해지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절기마다 성만찬에 참여하였고 여러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도 꼬리를 잡으라 하신 주님의 말씀에 많은 분들이 순종하셨습니다. 팬데믹 기간에도 여러 행사를 치룰수 있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저희는 제왕나비 교회가 되어 갈수 있었습니다.

 

물론 아직도 갈 길은 멉니다. 그러나 전보다 더 주님의 음성을 귀담아 들으며 순종할 때 남은 출팬데믹의 여정도 잘 마치게 될줄 압니다. 더욱 멋진 제왕나비가 되어 이곳 지역사회를 따뜻하게 하고 아울러 저희가 그동안 섬겼던 모든 선교지에도 늘 따뜻한 소망의 선물을 보내게 될줄 압니다.

 

주님께서 팬데믹을 보내신 이유가 있으십니다. 우리 안에 제왕나비의 모습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순종함으로 함께 제왕나비가 되어서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아가십시다. 말씀을 순종할수록 더 높이 더 높이 전에 상상도 할수 없었던 높은 하늘을 날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에 도착하여 주님의 뜻을 이루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특별히 나일 강 주변을 파며 마실 물을 찾는 자들을 찾아가십시다.

 

말씀을 거둡니다.

 

루이 암스토롱이 부른 흑인 영가가 있습니다.

 

Oh when the saints go marching in

오 성자들이 행진할 때

Oh When the saints go marching in

오 성자들이 행진할 때

Oh Lord I want to be in that number

주여, 나도 그들과 함께 하고 싶나이다

Oh When the saints go marching in

성자들이 행진해 들어갈 때

 

성도들이 앞으로 행진을 시작할 때 나도 넣어 달라는 기도문입니다.

출팬데믹의 행진에 함께 동참하는 마음으로 불러 보시면 은혜가 됩니다.

 

우리들의 이성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때에도 주님 말씀하시면 순종하십시다. 그 때 우리는 놀라운 행진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제왕나비 교회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모세와 아론이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행하여 바로와 그의 신하의 목전에서 지팡이를 들어 나일 강을 치니 그 물이 다 피로 변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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