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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시편 3:1-8 (08/21/2022)

오늘로서 시편 씨리즈 네번째 설교 말씀을 드립니다. 때를 맞추어서 저의 친구 중 시인이 있는데 시낭송에 대한 동영상을 얼마전 보내 왔습니다. 시편 말씀을 준비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대략 중요한 점을 다시 말씀드리면, 시를 낭송할 때는 시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를 해야 하고, 시의 배경은 물론이고 시인의 삶까지…. 그리고는 자신의 것으로 시를 소화한 후 낭송을 할 때 시는 새롭게 만들어져서 듣는 이들에게 감동적으로 전달이 된다는 것입니다.

음악 감상도 그렇지 않습니까? 작곡가의 생애를 이해할 때 음악 감상에 더 큰 도움을 주는 것은 일반화된 상식인줄 압니다.

 

이를 시편의 편집자들도 익히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거의 모든 시편의 시는 표제어가 있습니다. 표제어는 제일 위에 쓰여 있는 글입니다. 시의 배경 내지 시인을 소개하는 내용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시편 3편의 표제어는 다음과 같습니다.

‘다윗이 그의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에 지은 시’

 

사실 지난주는 광복절 기념 주일이기에 87편을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시편 3편을 나눕니다. 시편 150편 중에 앞으로 몇 편을 나누게 될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만 시편 3편을 꼭 나누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얼마전 말씀드린대로 시편 1, 2편은 시편의 도입부입니다. 서론이라고 할까요? 시편의 도입부를 지나 첫번째 시가 바로 3편입니다. 그러니 3편의 의미가 큽니다. 어떻게 보면 시편의 첫번째 시라고도 생각할수 있습니다. 시편 편집자들은 어떤 의도가 있었는지 148편 중에 오늘의 시를 시편 전체로는 세번째로, 도입부 이후로는 첫번째로 편집한 것입니다.

그런데 표제어만 읽으면 고개를 갸우뚱 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잘 알고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시편 23편 같은 시는 한참 뒤로 미루고 생뚱맞은 시로 시작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면 왜 시편23편등 잘 알려진 시편은 뒤로 미루고 잘 알려지지 않은 3편을 제일 앞에 놓았을까요? 사실 표제어를 통해서 편집자들의 의도를 짐작할수 있다고 봅니다.

이 시의 배경은 표제어에 나타나 있듯이 다윗이 압살롬을 피해 달아나고 있을 때입니다. 압살롬은 아들인데 아들에게 쫓겨서 달아나고 있습니다. 이 때 아버지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다윗이 할수 있는 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기도.’ 기도뿐이었습니다.

 

이로서 알수 있는 것은 시편 편집자들에게는 시편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기도임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은 기도문인 것입니다. 기도 가운데 찬양이 스며 있는 것입니다. 찬양 가운데 기도가 스며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 가운데 찬양이 스며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 둘은 궁극적으로는 하나이지만….

 

오래전 어느 신학 교수님으로부터 본인의 책을 선물 받은적이 있습니다. 책 제목은 ‘기도의 정석’이었습니다. 아주 알찬 내용의 책이었습니다. 믿음의 선배들의 기도문들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편집자들은 시편 편집을 위해 기도의 정석이라고 생각하는 시를 찾았을 것입니다. 3편을 기도의 정석으로 꼽은 것입니다. 아들에게 쫓기는 다윗의 기도에서 기도의 정석을 찾아 낸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3편이 도입부를 지나자마자 제일 먼저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의 시를 통해서 기도의 정석은 무엇인지 살펴 보고자 합니다. 1, 2절,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

기도의 정석의 시작은 이처럼 곤궁에 처한 상태에서 시작됩니다. 이것이 주는 멧세지는 놀라운 것입니다.

 

기도는 바로 “주님, 큰 일 났습니다” 외침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외침 없이는 기도는 시작이 될수 없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설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의 본질은 외치는 것입니다. 아들에게 쫓기는 다윗처럼….

 

순복음 교회 조용기 목사님과 온누리 교회 하용조 목사님 두 분이 만나서 ‘믿음’에 대해서 대화를 나눴습니다.

조용기 목사님은 ‘믿음은 번지 점프를 하는 것입니다’, 말씀하셨습니다. 하용조 목사님은 ‘절벽에 서 있는 것입니다.’

두 분 모두 “주님, 큰 일 났습니다” 외치고 또 외쳤던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반문하실수도 있습니다. “두 분 다 대형교회를 이루었지만 본받기 어려운 점도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다윗도 매한 가지입니다. 다윗이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가게 된 이유는 11년전에 다윗이 간음죄와 살인죄를 범했기 때문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나단을 보내셔서 아내들까지도 빼앗기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아들 압살롬을 통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다윗도 당연히 지난날에 과오로 인한 벌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날의 과오는 이미 회개했습니다. 11년전에…. 그래서 다윗은 다시 회개하지는 않습니다. 이미 회개는 했습니다. 다윗이 해야 할 일은 하나입니다.

“주님, 큰 일 났습니다. 살려주세요.”

이것이 기도의 시작입니다.

 

그러면 기도의 정석은 어떻게 진행이 될까요? 3, 4절,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다윗은 기도 응답의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그러면 다윗은 구체적으로 무엇에 대해 확신하고 있었을까요? 다윗은 지금 예루살렘에서 빠져 나와 도망치고 있습니다. 언제 다시 압살롬이 자기를 쫓아 와서 죽일지도 모릅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압살롬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자기의 왕권은 이렇게 무너지는구나 생각이 들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놀랍게 응답하십니다. 다윗이 받은 응답은 무엇일까요?

곧 다윗은 자신의 왕권을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응답을 받았던 것입니다. 어떻게 받게 되었을까요?

 

다시 다윗의 오래전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기 전이었습니다. 다윗은 착한 마음이 들어서 성전을 지어 드리겠다는 마음을 나단 선지자에게 전했습니다. 나단이 다음 날 찾아 와서는 놀라운 말씀을 전해 줍니다. 사무엘하 7: 9,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원수를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땅에서 위대한 자들의 이름 같이 네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리라.”

이는 다윗의 이름을 위대하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뿐이 아닙니다. 12절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이는 두 가지 예언이 포함되어 있는데 한편으로는 솔로몬을 세우시겠다는 예언의 말씀이고 또한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의 말씀인 것입니다. 육신적으로는 솔로몬의 영화를 말씀하시고 계시고 한편으로는 메시야가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은 위기 가운데서 도리어 11년 보다 더 전에 약속하신 그 약속을 다시금 마음 속에 되새기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가 하나님의 약속을 파기시킬수 없는 것입니다.

 

곧 기도의 두번째 정석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신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편안히 잠이 듭니다. 5, 6절,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저도 간혹 잠이 잘 안 올 때가 있습니다. 그런 날은 다시 하루 생활을 뒤돌아 봅니다. 혹시 염려했던 것이 있나…? 많은 경우 찾아 냅니다. 염려했던 것을 회개하면 금방 잠이 들곤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주신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의 두번째 정석입니다.

물론 우리가 다윗처럼 구체적인 약속을 받지 않았을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말씀이 우리를 향한 약속의 말씀인 것입니다.

세번째 정석은, 7절,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언어를 세 가지로 나눕니다. 제1언어, 2언어, 3언어. 제 1언어는 어린 아이가 부모에게 사용하는 언어입니다. “배고파 순두부 해 줘.”

2언어는 정보의 언어입니다. “오늘 메뉴는 순두부야.”

3언어는 유도하는 언어입니다. “나는 순두부가 제일 맛있는데….”

 

이 중 기도의 언어 및 시의 언어는 제1언어뿐이라는 것입니다.

“배고파 순두부 해 줘.”

 

7절의 시작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조금 바꾸면,

“아빠 큰일 났어 빨리 일어나.”

제1언어를 쓰면 쓸수록 신비스럽게 확신이 생깁니다. 온갖 정보로 머리 속에 넣는다고 확신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기가 막히게 유도한다고 확신이 생기지 않습니다.

“엄마 배고파 순두부 해줘.”

이 고백이 확신을 가져다 줍니다.

 

세번째 기도의 정석은 제1언어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오할레스비는 ‘기도’라는 책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 부를 때 하늘에서 긴장하시고 귀담아 들으신다고 말합니다.

“아버지!”는 제1언어인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의 정석을 정리해 볼까요?

첫번째는 곤궁에 처한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Issac Bashevis Singer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곤궁에 처했을 때만 기도드린다. 그런데 나는 항상 곤궁에 처해 있다. 그래서 항상 기도드린다.

 

두번째는 약속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약속이 이루어질 날이 어제 보다 하루 더 가까워졌다고 믿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언제나 제1언어의 위력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엄마 배고파 순두부 해줘.”

순두부에다가 불고기가 덤으로 나올 것입니다. “순두부가 제일 맛 있는데” 유도의 언어를 사용할 땐 불고기가 안 나옵니다.

 

다윗은 상상할수 없는 죄를 범했습니다. 그래서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 달아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기회를 그냥 버리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큰 일 난 사정을 아뢰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되새겼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리광을 부렸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온 세계를 축복하였습니다. 왕의 기도를 하게 된 것입니다. 8절,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개인을 위한 기도로 시작해서 온 백성을 위한 기도 왕의 기도로 마친 것입니다.

그는 기도의 정석을 오고 가는 세대에 남긴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남길까요?

 

말씀을 거둡니다.

하바드 의대 교수로 봉직하시는 김광수 교수님이 계십니다. 최근 만능줄기세포를 만들어 파킨슨병 환자에게 이식하여 치료에 성공하신 분이십니다. 2년전 처음 시술을 하였는데 2년이 지난 지금도 환자는 상태가 양호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릴 때는 불우한 환경에서 살았습니다. 교수님의 아버님이 사업에 실패해서 극빈자 수준으로 살았고 친구도 없고 우울한 기가 죽어 있는 학생이었다고 합니다. 할머니의 손을 잡고 교회를 다녔는데 고등학교 때 주님을 영접하게 됩니다. 다음과 같이 고백하십니다.

“어느날 교회 친구들과 함께 심야기도를 하면서 하나님께 아무것도 없는 나에게 공부를 계속하고 과학자가 될 수 있게 도와주시기를 기도드렸다.”

20년후 보스톤에 오게 되고 그후 20년이 지나서 이제는 파킨슨병 치료에 획을 긋는 성과를 이루어낸 것입니다. 그는 또 다시 이렇게 고백합니다.

“돌이켜보니 20년 전 보스톤으로 오면서 드렸던 기도를 하나님께서 다시 응답해 주신 것이다.” 최근에는 이런 기도를 드린다고 합니다.

“하나님, 저의 부족한 연구가 많은 환자들에게 새로운 삶을 열 수 있게 해 주십시요.”

 

어느덧 교수님의 기도는 개인의 기도에서 공동체의 기도로 승화되었던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시편 1편은 개인적 신앙생활을 강조한다면 2편은 공동체적 신앙생활을 강조한다고…. 모든 시편은 이 두 시편 사이에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모든 시편에는 개인적인 기도의 제목으로 시작되지만 공동체적 기도로 마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시도 다음과 같이 마칩니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이 놀라운 삶은 우리 모두에게 열려져 있습니다. 아니 스스로 늘 곤궁에 처해 있음을 아는 자들에게 열려 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늘 곤궁에 처한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약속을 믿고 “아버지”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심히 찬양하며 주님께서 주신 일을 매일 매일 감당하시는 것일줄 압니다.

우리들의 삶은 어느덧 한편의 시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시인은 고백합니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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