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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자들” 디도서 2:1-14 (12/10/2023)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자들” 디도서 2:1-14 (12/10/2023)

뉴욕 맨하탄의 델리 가게에서 일하는 어느 집사님 이야기입니다. 주인보다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면서 열심히 일을 했다고 합니다. 담임 목사님이 그렇게 성도들을 교육시켰다고 합니다.

“가게 출근하면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그렇게 알고 최선을 다해 섬기고 봉사하십시오. 그것이 사명입니다.”

목사님의 가르침에 늘 순종했던 집사님은 마침내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그 주인이 집사님을 부르더니, 열쇠를 맡기더라는 것입니다. 본인은 한국에 갈테니 가게를 잘 운영하면서 돈을 보내면 된다고 말을 하고는 열쇠를 주더라는 것입니다.

집사님은 고백합니다.

“종이 주인처럼 일을 하니 주인의 것이 내 것이 되었습니다.”

 

오늘 대강절 두번째 주일 예배로 드립니다. 지난 주일은 첫번째 촛불을 키고 한편으로는 아기 예수의 탄생을 감사하며 또 한편으로는 새롭게 저희들의 삶의 말구유에 찾아 오시는 아기예수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오늘은 두번째 촛불을 키고 2000년전 아기 예수로 오셨던 주님께서 이제는 영광 중에 구름 타시고 다시 오실 것을 믿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사실 디지털 시대가 되었고, 한편 백세 시대가 되면서 재림 신앙이 얼마나 소중하지를 나누고자 합니다.

 

그러면 다시 오실 주님을 사모하는 삶은 과연 어떤 삶일까요? 오늘도 계속해서 디도서 강해를 이어갑니다. 사도바울은 디도를 그레데 섬에 보낸 후 디도에게 지혜로운 목회자가 되도록 디도서를 쓰고 있습니다. 자주 말씀드렸습니다. 그레데 섬은 윤리적으로 많이 타락한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곳입니다.

특히 사도바울은 1장 마지막 절 곧 오늘 본문 말씀 전 귀절을 통해서 그들은 많은 경우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는 가증한 자들이라고 질책하였습니다. 1:16절,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그리고는 이제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2:1절,

“오직 너는 바른 교훈에 합당한 것을 말하여.”

 

제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다닐 때입니다. 3년차에는 Harvie Conn교수님이라고 보수신학계에서는 유명한 선교학자님이 계셨습니다. 이 분이 가르치는 클래스를 듣게 되었습니다. 한 가지 지금도 강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이 있습니다.

교수님은 선교학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갑자기 학교에 대한 불만을 표현하셨는데, 다름 아닌 “왜 우리 신학교에는 윤리학 교수가 없느냐”는 불만이었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들으면서 “아니 신학교에 무슨 윤리학 교수가 필요하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윤리는 기본이지 뭘 따로 배울 필요가 있느냐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이후로 지금까지 윤리학이 얼마나 기독교 신학에 소중한지 절감하고 있습니다. 그 때는 구원만 받으면 생활은 저절로 변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물론 저와는 정반대의 생각을 가졌던 분이 바로 사도바울입니다. 사도바울의 서신이 13권이라고 생각할수 있는데 사도바울 서신의 특징이 있습니다.

첫 절반은 신학부분입니다. 주로 구원론이라고 해도 좋을줄 압니다. 그리고는 나머지 절반은 윤리학입니다. 구원 받은 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가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구원받은 자들의 삶이 쉽게 변한다면 사도바울은 이처럼 성경의 많은 부분을 실천 곧 윤리학을 가르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디도서는 신학부분은 거의 없습니다. 제일 앞에 인사 부분을 마치고는 그대로 실천 부분으로 넘어 갑니다. 먼저 그레데 교회 사역자를 어떻게 세울 것인가를 제시한 후 그 지역 사람들이 윤리적으로 얼마나 타락해 있는지 안타깝게 지적한 후 오늘 본문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오직 너는 바른 교훈에 합당한 것을 말하여.”

 

사도바울은 디도가 교리에 대해서 잘 가르칠 것을 권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교리는 알아서 어련히 잘 가르칠 것을 믿은 것입니다. 사도바울 보기에 중요한 것은 이들의 삶이었습니다.

 

한편 다른 서신에서는 볼수 없는 남다른 방법으로 권면합니다. 여러 그룹으로 나눠서 권면을 시작합니다. 각 그룹에 맞게 차례로 권면합니다. 2절 부터 6절까지 다음 순서로 권면합니다.

제일 먼저 장년 남자들에게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를 말씀합니다. 2절 상반절,

“늙은 남자로는 절제하며 경건하며 신중하며….” 그 다음으로는 장년 여자들에게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를 말씀합니다. 재미 있는 것은 디도에게 직접 젊은 여자들을 가르치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대신 장년 여자들이 젊은 여자들을 가르치게 하라고 합니다. 아마 이 당시 상황으로는 그것이 제일 맞는 방법이었기 때문이었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젊은 남자들에게 신중한 삶을 살도록 권면하라고 말씀합니다.

 

곧 장년과 청년을 모두 아우르면서 구체적으로 그 그룹에 맞게 바른 교훈을 가르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모두에게 교훈의 말씀을 구두로만 가르치면 될까요? 7, 8 상반절,

“범사에 네 자신이 선한 일의 본을 보이며 교훈에 부패하지 아니함과 단정함과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사도바울은 누군가가 모범을 보여 주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 역할을 디도에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로만 하지 말고 모범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마틴 루터의 유명한 말을 나눕니다.

“목사의 삶은 평신도의 복음이다.”

사도바울은 디도에게 평신도의 복음이 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목사의 삶을 보고 평신도가 소망 가운데서 말씀에 순종하도록 해야 한다는 말씀인줄 압니다. 곧 마틴 루터는 자기를 따르는 목사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한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디도에게 말하고 있듯이….

 

그런데 사도바울은 나름 다른 목적도 갖고 이 말씀을 했을줄 압니다. 목사의 삶이 평신도의 복음이 되듯이 평신도의 삶이 교회 밖 사람들에게 복음이 되게 하라는 뜻이 분명히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사도바울은 행함이 소중함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8절 하반절,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

믿는 자들의 소유와 사회적 위치가 이웃을 감동감화시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을 보고 대적하는 자들이 믿는 자들의 삶을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최소한 선한 행동을 하는 자들에게는 꼬뚜리는 잡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악하다는 말을 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편 사도바울은 이 당시 큰 무리를 이루었던 종들에게도 교훈합니다. 이 당시 인구의 약 25%가 종이었습니다. 9, 10절,

“종들은 자기 상전들에게 범사에 순종하여 기쁘게 하고 거슬러 말하지 말며 훔치지 말고 오히려 모든 참된 신실성을 나타내게 하라 이는 범사에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사도바울의 놀라운 지혜를 보게 됩니다. 종이 아닌 자들도 당연히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이들은 인구의 ¾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말씀에 순종할 때는 고작 대적하는 사람들은 성도들 안에 악한 모습을 보지 못하게 된다고 표현하였습니다.

반면 종들이 말씀대로 순종하여 상전들에게 신실성을 나타내면 하나님의 교훈이 빛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종의 칭찬 받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종이 아닌 기독교인들은 바른 교훈에 따라 사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잘 하는 것은 그냥 본전입니다. 만일 못 하면 악하다는 평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반면 종들의 순종은 하나님의 교훈이 빛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를 생활 속에서 실천하신 분이 바로 도산 안창호 선생이십니다. 그는 독립자금을 모으기 위해 캘리포니아에 와서 한인 코뮤니티를 형성하고 오렌지 농장에서 일합니다.

특히 그는 각 집을 다니면서 청소를 독려하였다고 합니다. 사실 미국에서 거주하는 한인 동포들이 불결하게 생활하고 시끄럽게 떠드는 등으로 미국인들에 불쾌감을 주고 이들로부터 멸시받는 것을 목격하고는 교민 사회를 변화시키는 노력을 시작하였습니다. 먼저 도산 선생은 몸소 한집 한집 청소 운동을 시작하고 집집마다 화분을 놓는 등 청결한 환경을 조성하였고, 한인들에게 의복을 깨끗하게 갖추고 음주 고성방가를 삼가도록 하였습니다.

 

사실 중산층으로 살면서 음주 고성방가 하지 않는 것 당연합니다. 이를 통해서 악하다는 이야기는 듣게 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교훈이 빛을 발하지는 않습니다. 반면 종과 같은 천한 처지에 처해 있던 미주 한인들이 다른 민족과 달리 어려움 가운데서 신실하게 살면 빛이 날 것임은 당연한 사실일줄 압니다.

 

이로서 우리가 생각할수 있는 것은 환경이 어려운데 있는 분들이 순종할 때 하나님의 교훈은 더욱 빛을 발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빛을 발하기 위해서 종의 신분처럼 되어야 할까요? 하나님은 종의 신분의 소유자들만 편애하시는 것인가요? 11-13절,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사도바울은 강조합니다. 물론 종의 신분을 소지한 사람들에게 임하는 특별한 축복이 있지만 실은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난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참 은혜 받은 자들의 모습은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는 자들이라고 말씀합니다.

참 은혜받은 자들은 재림 신앙의 소유자가 됩니다. 제가 디지털 시대이자 백세시대가 된 오늘 재림신앙이 그 어느때 보다 소중하다고 말씀드렸는데 백세시대가 된 것이 축복이지만 신앙적으로는 큰 도전입니다.

“차차, 차차 하지”라는 생각이 스며듭니다. 신앙적으로는 암과 같은 질병입니다. 이에 대한 최고의 약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오늘 오신다면….”

재림신앙입니다. 이들은 더욱 말씀에 순종하게 됩니다.

 

사실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종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남녀노소 귀천에 구별이 없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종이 되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종이 되어 말씀에 순종할 때 공통점이 있습니다. 순종하는 자들은 기다림의 사람들입니다. 순종은 곧 기다림입니다.

 

오늘 아침에 교회에 오시면서 어떤 분들은 맥도날드 같은 fast food점에 들려서 버거를 드시면서 교회 오신 분도 계실줄 압니다. 주문하면 이미 만들어진 것을 건네 줍니다.

반면 순종은 fast food가 아닙니다. 우리가 순종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순종을 받으신 후 요리하기 시작합니다. 언제 어떻게 어떤 모양으로 요리되어 나올지는 종들은 모릅니다. 주인이

알아서 만드시고 가장 적절한 때 보상해 주십니다. 이처럼 신앙은 순종이요 순종은 기다림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의 순종에 따른 기다림의 열매는 언제 완성이 되죠? 우리는 전혀 알수가 없나요?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어떤 어려운 여건에서도 순종한 삶의 열매가 맺혀지는 날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는 모두 우리들의 순종과 기다림의 열매가 완성됨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순종하는 삶의 하이라이트는 주님의 다시 오심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이 때 우리는 어느덧 세상의 별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처음 소개한 집사님은 물론 이 땅에서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감히 말씀드립니다. 그것은 빙산의 일각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 그는 자기의 순종이 얼마나 위대한 순종이었는지를 새삼 다시 보게 될줄 압니다. 그 작은 순종을 가지고 주님께서는 위대한 작품을 만드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입니다. 14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곧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별이 되게 하시길 원하십니다. 아니 영원한 하늘의 별이 되게 하시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다시 오십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질문하실지 모릅니다.

“주님의 오심을 사모하였는데 아직도 안 오시니 이젠 지쳤어요.”

 

우리가 사모해도 아직 안 오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원하십니다.

주님은 둘 사이에 늘 갈등하십니다. 당신을 기다리는 성도들을 위하여 빨리 오시고 싶으시고 한편 아직도 구언받지 못한 수많은 영혼 때문에 기다리셔야 하고….

그래도 우리는 매일 아침 눈을 뜨면서 사모해야 합니다.

“주여 오시옵소서.”

이 때 우리는 하루 종일 빛을 발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저녁에는 이런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아직도 안 믿는 자들 때문에 오늘도 오시지 않으셨군요. 감사합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이어령 선생님이 암으로 아파하던 딸에게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습니다.

“암에 걸렸던 너의 아픔으로 시력을 잃어가던 너의 어둠으로 나를 영성의 세계로 이끌어주었다. 네가 애통하고 서러워할 때 내 머릿속의 지식은 검불에 지나지 않았고, 내 손에

쥔 지폐는 가랑잎보다 못하다는 걸 알았다. 70평생 살아온 내 삶이 잿불과도 같은 것이라는 것을 가르쳐 준 것이다. 지성에서 영성으로 너의 기도가 높은 문지방을 넘게 했다.”

 

보스톤은 지성의 도시임을 전세계가 다 잘 알고 있습니다. 보스톤에는 이어령 교수님과 같은 지성인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지성인 이어령 교수님이 영성가가 될수 있었던 것은 먼저 주님을 영접한 따님의 아픔과 눈물어린 기도와 기다림의 열매였습니다.

 

다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면서 빛추인 그 빛을 지성인 이어령 교수는 보았습니다. 결국 영성의 높은 문지방을 넘을수 있었습니다. 그후 주님을 사모하는 지성인이 되었습니다. 세상의 참 별로 거듭난 것입니다.

 

보스톤에 수많은 지성인들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지적 논리가 아닙니다. 교리가 아닙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세상을 비추는 참 별입니다.

 

제2, 제3 제4…, 수많은 이어령이 참 별을 보기를 원합니다.

 

종이 되어 말씀에 순종하십시다. 다시 오실 주님을 사모하십시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사모하는 자들이 바로 온 세상의 복음의 삶을 사는 자들입니다. 이 세상의 별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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