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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 디도서 3:12-15 (12/31/2023)

Sermon 123123- 이영길 목사

디도서 3: 12-15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

저는 미국 온지 40년이 넘었는데 그 때 벌써 많은 분들이 high five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 때 이 전통은 무척 오래 된 줄 알았습니다.

때는 1977년 10월 2일 프로 야구 정규 시즌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다저 스타디움엔 5만여 구름떼 같은 관중이 몰려 왔습니다. 6회말 홈팀 다저스의 공격, 더스틴 베이커가 타석에 들어 섰습니다. 제3구째 한 가운데로 밋밋한 공이 흘러들어 오는 것을 보고 방망이를 슬쩍 갖다 대었는데 공은 높게 포물선을 그리고 담장을 훌쩍 넘어섰습니다.

홈에서 그를 맞이한 선수는 팀의 막내 글렌버크, 그는 오른손을 머리 위로 번쩍 치켜들었습니다. 베이커도 거의 반사적으로 자신의 손을 들어 올렸습니다. 드디어 하이 파이브가 탄생하였습니다.

그런데 우연인지 운명인지 막내 글렌버크도 이날 프로야구 데뷔 첫 홈런을 쳤습니다. 이번에는 베이커가 홈에서 기다렸습니다. ‘하이 파이브’와 함께. 이 때 감독은 유명한 타미 라소다, 그도 초짜 감독이었습니다. 경기가 끝난 후 선수들과 감독은 일일이 ‘하이 파이브’를 하며 부둥켜 안았다고 합니다.

플레이오프에 들어가서 월드씨리즈에서 뉴욕 양키즈와 싸웠지만 안타깝게 준우승으로 그칩니다. 그러나 이들은 우승보다 더 놀라운 자취를 역사에 남깁니다.

‘high five.’

그러니 실은 high five는 제가 미국에 오기 전 4년 전에 생겼습니다. 당연히 저희 교회가 창립한 후로 계산하면 24년이 지나서야….

사실 어느 분이 하이파이브에 대해 쓴 글을 접했었습니다. 그 분이 그 글을 쓰신 이유가 있습니다. 이 분은 우리들의 삶에서도 하이파이브를 계속하자고 권하기 위해서 글을 쓰셨습니다. 가정에서도 친구들과도 어떤 모임에서도 열심히 해서 서로 건강하게 살자는 뜻으로 글을 쓰셨습니다. 좀 더 구체적 이유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송년주일예배를 드립니다. 예배 시간에는 좀 그렇고 마치고 나가시면서 함께 하이파이브를 하십시다.

그런데 교회에서의 하이파이브의 전통은 오래 전에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저는 사도바울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을 마지막으로 디도서 강해를 마칩니다. 사도바울은 그레데 섬에서 목회하는 디도에게 편지를 마치면서 다음과 같이 하이파이브를 합니다.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

이 하이파이브를 어떻게 디도와 그레데 교인들은 반응했을까요? 당연히 “아멘” 하면서 사도바울에게 축복하지 않았을까요?

“은혜가 사도에게도 있을지어다.”

그런데 그레데 교인들과만 하이파이브를 하였을까요? 자주 말씀드렸습니다. 사도바울의 서신이 13개라고 생각할수 있습니다. 모든 서신 마지막은 한결 같이 이렇게 마칩니다.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

물론 예외가 로마서인데 실은 마지막에서 3, 4절 앞에서 사도바울은 이 하이파이브를 합니다.

당연히 사도바울이 편지를 쓴 교회의 상황은 모두 달랐습니다. 로마 교회, 고린도 교회, 갈라디아 교회 에베소 교회 등…. 그러나 서신의 마지막은 항상 같습니다.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

이를 받는 모두 교회 교우들은 한결 같이 이렇게 반응했을 것입니다.

“은혜가 사도에게 있을지어다.”

올해 저희는 70주년을 축하하며 한 해를 감사하며 보냈습니다. 지난 70년간 매번 저희 교회의 상황은 달랐습니다. 그런데 저는 확신합니다. 늘 송년예배가 되면 사도바울을 비롯 하늘나라 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들은 하늘에서 우리 교회를 향해 축복하지 않았을까요?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

그러면 왜 이 고백이 사도바울의 전매 특허 그의 하이파이브가 되었을까요? 한국이 나은 세계적인 신학자로 Fuller 신학교 교수이셨던 김세윤 박사님이 계십니다. 김 박사님은 사도바울의 은혜의 개념은 그의 체험에서 나왔다고 주장하십니다. 저도 적극적으로 동의합니다. 곧 그의 다메섹 도상의 체험이 그의 신학을 정립케 하였다고 말합니다.

감사하게도 요즘 종종 세례를 안 받으시거나 유아세례만 받으신 분들이 새신자로 오십니다. 그분들도 이해할수 있도록 말씀을 전하려고 저나름대로 애쓰고 있습니다. 곧 어떤 분들은 ‘다메섹 도상’이 무슨 뜻인지 모르시는 분도 우리 중에 계실수 있음을 먼저 말씀드립니다. 그러니 다 아시는 이야기라고 지루해 하시지 마시고 그럴 때일수록 아직 믿음이 생기지 않으신 이웃들을 생각하시면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들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도바울이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많은 신자들을 죽이는 일에 앞장 섭니다. 대표적인 희생자가 스데반입니다. 스데반을 죽인 후 승승 장구해서 더 많은 신자들을 잡으로 다메섹으로 향합니다.

그 때 하늘로부터 홀연히 빛이 비추이면서 말씀하십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이에 사울이 묻습니다.

“주여 누구시니이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그리고는 주님은 사울을 13번째 사도로 세우십니다.

이것이 바로 사울이 경험한 은혜였습니다. 사울은 예수를 박해하였습니다. 창과 칼을 들고 쫓아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를 만나셨습니다. 창과 칼에 찢기시면서 사도바울의 삶 안으로 들어 가셨습니다. 이에 사도바울은 유명한 고백을 합니다.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사도바울은 주님께서 당신을 박해한 최악의 죄인인 자기 안에 들어오셨음을 고백합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이 체험한 은혜였습니다. 이 체험이 사도바울의 신학의 시작이 된 것입니다.

곧 사도바울은 자기와 같은 인류 역사상 최악의 죄인에게 들어 오신 주님께서 이 세상 그 누구에게도 들어가시지 못하실분이 없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이 몰랐던 것이 있었을줄 압니다. 제가 처음에 하이파이브 글을 쓰신 분의 의도가 있었다고 말씀드렸는데 지금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실은 야구선수들의 하이 파이브가 우승보다 더 소중했음은 의학적으로도 후에 밝혀집니다. 덴마크에선 심장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 600명을 A와 B 두 그룹으로 나눠 A에게는 매일 하이 파이브를 하도록 했습니다.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고 합니다. A에 속한 환자들의 수명이 B보다 5년 가량 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학계 일각에선 악수 대신 하이 파이브로 인사를 대체하자는 캠페인도 일고 있다고 합니다. 감염 가능성이 그만큼 적다는 이유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도는 혼자해도 하이파이브는 혼자 하지 못하지 않습니까? 그는 권유합니다. 가정에서도, 친구들과도, 동문회에서도 이웃들과도 기회만 되면 하이파이브를 하자고…. 건강히 오래 살기 위해서….

사도바울은 이 점은 분명히 몰랐을 것입니다. 한편 다음에 말씀드리려는 것은 알았을수도 있습니다.

저의 친구가 의사이면서 시인입니다. 물론 기독교인입니다. 정확히는 교회 장로입니다. 얼마전 ‘의학과 문학’을 주제로 훌륭한 책을 펴냈는데 고맙게도 저에게 보내왔습니다. 몇 가지를 소개해 드리면, 우선 저자는 히포크라테스의 말을 인용합니다.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두 가지 수단이 있다. 하나는 약이고 다른 하나는 언어다.”

이미 수 천년 전에 히포크라테스는 언어가 치료에 얼마나 소중한지를 간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자는 또한 다음과 같은 글을 인용합니다.

“우리가 가까운 거리를 찾아갈 땐 과학자에게 의지하지만, 멀리 있는 미래로 갈 때는 시인에게 의지한다.”

 과학자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과학자는 가까운 거리를 찾아 가게 합니다. 그래서 과학은 계속 발전해야 합니다. 멈추면 가까운 거리를 찾아 가지 못하게 됩니다. 과학자들의 수고가 인류 역사상 꼭 필요합니다.

반면 멀리 있는 미래로 갈 때는 시인의 언어가 필요한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이를 알고 있지 않았을까요? 히포크라테스도 알고 있었는데…. 세상 지식인들의 지식은 가까운 거리를 찾아 가게 해 준다는 것을 그러나 먼 미래를 보기 위해서는 시인의 언어가 필요하다는 것을…. 그리고 최고의 시인의 언어는…,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

디도서를 보면 거의 대부분의 내용이 질책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는 축복의 말로 하이파이브를 보냅니다. 사실 사도바울은 특히 자신에 대해 가장 불만이 많았던 고린도 교인들에게도 하이파이브를 날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세상 지혜로 먼 미래를 보게 할수 없음을 잘 알았던 것입니다. 결국 여러 차례 편지를 쓰면서 최고의 시인의 언어를 보낸 것입니다. 짧은 미래만 보게 하는 세상 지혜에 매여 있지 말고 먼 미래를 보게 하려고….

곧 사도바울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 언어의 힘의 위대함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 스크린 시대가 되면서 보이는 것이 더 힘이 있어 보이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요즘 보이는 것에 압도 당하는 듯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허상입니다. 더 파워풀한 것은 우리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보이는 것은 잠시 있다 사라집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말은 미래를 결정짓습니다.

사실 요즘 팔레스타인 분쟁으로 온 세계가 불안에 휩싸였는데, 미디어에서는 거의 안 나오지만 팔레스타인 크리스챤들이 얼마나 어렵게 2천년을 지내 오고 있는지 특히 기독교 단체들이 세계에 알리려고 많은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2천년을 견딜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은혜’의 멧세지였습니다. 이들은 아마도 사도바울의 하이파이브를 마음 속으로 받으면서 오늘까지 이겨 왔으리라 봅니다. 그들은 어려움 속에서도 미래를 바라 볼수 있었습니다.

보이는 것에 압도 되었다면 팔레스타인 크리스챤들은 이미 사라졌을 것입니다. 그들은 오늘도 송년예배를 드리면서 서로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지 않을까요? 이들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 언어의 힘의 위대함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한 해를 마치면서 서로 서로 하이파이브를 하십니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사회에서 이웃들과 함께….

아울러 상상할수 없는 어려움 가운데 있는 이웃들에게까지 은혜의 축복을 보내십시다. 물론 우리와 생각이 다르고 불편한 관계에 있는 이웃들에게까지 미래를 여는 축복의 열쇠를 나누십시다.

하나님의 은혜의 하이파이브를 받을수 없을 정도로 악한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이 이를 증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인자인 사도바울을 통해서 도리어 최고의 하이파이브의 주인공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껏 은혜의 하이파이브를 나누십시다.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

이 고백을 하는 분들이 당대의 최고의 시인입니다. 2023년도 최고의 시인이 되십니다. 그리고 멋진 시인이 되어서 새해를 맞이하십시다.

말씀을 거둡니다.

제가 좋아하는 시인 정현종 님의 「작은 국화분 하나」라는 시를 소개해 드립니다.

“용달차가 작은 국화분 하나를 싣고 간다.(동그마니) 아니다 모시고 간다.

용달차가 작은 국화분 하나를 모시고 간다. 용달차가 이쁘다.

(용달차가 저렇게 이쁠 수도 있다) 기사도 이쁘다.”

결국은 용달차를 운전하는 기사가 이쁘다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글쎄 요즘 젊은 교우분들 중에 옛날 용달차를 모르시는 분도 계실줄 압니다. 아마 시인이 이 시를 쓸 때의 용달차는 바퀴 셋이 달린 자그마한 짐차였을줄 압니다.

이 당시 용달차를 운전하는 기사를 보면서 그 누구도 ‘이쁘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고백합니다.

“기사도 이쁘다.”

고백하는 순간 그 기사는 최고의 미인이 되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2023년도 우리가 만난 사람은 모두 이쁜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은 생각이 다를 뿐이었습니다. 그분은 코끼리 다리를 만지셨고 나는 꼬리를 만졌을 뿐입니다. 어떤 분은 우리 보다 앞서 나갔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우리도 그들의 경지에 도달하면 이해하고 감사할 것입니다.

결국 단지 시간이 없고 생각이 모자라 “이쁘다”고 고백하지 않은 것뿐입니다. 새해가 오기 전에 고백하십니다.

“기사도 이쁘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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