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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4일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본문: 마가복음 3: 13-19

 

 

정현종 시인의 ‘한 그루 나무와도 같은 꿈이’라는 시입니다.

 

꿈을 버리다니, 요새의 내 꿈은

방이 많은 집 하나 짓는 일이야.

그래 이 세상의 떠돌이와 건달들을 먹이고 재우고,

 

이쁜 일탈자들과 이쁜 죄수들,

거꾸로 걸어다니는 사람과 서서 자는 사람,

눈감고 보는 사람과 온몸으로 듣는 사람,

 

끌어 안을 때는 팔이 엿가락처럼 늘어나는 사람,

발에 지평선을 감고 다니는 사람,

자동차 운전 못하는 사람,

 

원시주의자들,

말더듬이,

굼벵이,

우두커니,

 

하여간 그런 그악스럽지 못한 사람들을 먹이고 재우게

방이 많은 집 하나 짓는 일이야.

 

……

 

앵무새는 물론 안 되고,

모든 전쟁광들과 무기상들,

핵 좋아하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이 출입 금지.

그리고 또 그리고 또 있겠지만

이하 생략.

 

허나 어떤 사람이든 환골탈태를 하면 언제든지 환영이야.

누구를 제외하는 데서 얻는 쾌감은 제일 저열한 쾌감의 하나이니.

 

……

 

꿈을 버리다니, 요새의 내 꿈은

한 그루 나무와도 같아

나는 그 그늘 아래 한숨 돌리느니.

 

 

요즘 시를 좋아하시는 분들 사이에 정현종 시인의 시를 좋아하시는 분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시를 읽어 보면 정현종 시인이 세상을 비판적으로 바라 보지만 아울러 그 아픔 가운데서 자신의 멋진 인생관을 펼쳐나가는 모습이 가까이 와 닿고 있음을 느낍니다.

시인은 세상의 강자 대신 약자들을 사랑하고 그들과 공동체를 꾸미고 싶은 소박한 꿈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 주님이 시를 쓰셨더라면 어떤 시를 쓰셨을까요? 주님께서 제자들을 택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한번 상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주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3절 말씀입니다.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주님께서 30살이 되셔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후 금방 12제자를 부르신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혼자서 여러 기적을 행하시고 말씀을 전하십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 곧 바로 복음을 전파하십니다. 그리고는 서너 명의 제자를 부르시고는 기적을 행하시기 시작하십니다.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고 많은 병자들을 고치십니다. 나병환자 중풍병자 손 마른 사람들을 고치십니다. 이제 점점 더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이 주님께 몰려 오기 시작합니다.

더 이상 당신 혼자 아니면 서너 명의 제자와 함께 이 일을 감당하기 어려우셨던지 산 위에 올라 가셨습니다. 사실 이 때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 주변에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산 위에서 제자들을 세우십니다. 예수님은 딱 12명을 택하십니다. 그런데 이 12명을 어떻게 정하셨을까요?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주님은 당신이 원하시는 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사람들이 “이런 사람이 어떻습니까?” 하고 데리고 온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자들을 직접 부르셨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어떤 분들을 원하실까요? 정현종 시인처럼 착하고 약한 자들만 부르셨을까요?

열두 제자들을 보면 직업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교육수준도 다 달랐습니다. 17절에 보면,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두 제자의 성격이 드러납니다. 우레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정현종 시인이 싫어할만한.… 한편 직업도 다양했는데 어부와 세리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곧 성격과 직업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을 원하셨을까요? 14절 말씀입니다.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열둘을 세우셨다는 사실 우리는 너무나 잘 알기에 그냥 지나칠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제자가 될수 있는 첫번째 조건이 이 표현 안에 잘 담겨져 있다고 봅니다.

주님은 공동체를 믿는 제자를 원하셨습니다. 독불장군을 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요즘 ‘공동체’ 하면 생각나는 글이 있습니다. 올해 사순절 묵상집에 나온 글입니다.

 

“지난 연말 우연히 주말 연속극 ‘미생’ 중 한 회를 시청하게 되었는데 그 중에 한 장면이 무척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계약직 사원인 장그래가 본인이 기안한 사업계획을 사장과 임원들 앞에서 발표한 후 사장의 칭찬을 받으며 “신입사원이 어떻게 그런 아이디어를 냈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우리 회사니까요” 라고 가슴 뭉클한 대답을 합니다.”

 

드라마이긴 하지만 주인공은 공동체의 힘 ‘우리’의 힘을 아는 아니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이런 사람들을 원하신 것 같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힘을 아는 사람들 중에 또 어떤 사람들을 원하셨을까요? 우리의 힘을 아는 자 중에 조폭도 있지 않습니까? 그 다음 귀절은,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어느 농장에 말 두 마리가 늘 함께 다니고 있었습니다. 멀리서 보면 두 말이 서로를 무척 아끼고 사랑하는듯 보입니다. 가까이 갈수록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한 마리 말은 앞을 보지 못하는 말입니다. 말 주인은 앞 못 보는 말을 그대로 버리지 않고 함께 살게 하였습니다. 방법은, 다른 말의 목에 방울을 달아 놓았습니다. 방울 소리를 들으면서 눈이 먼 말은 따라 갑니다. 눈 먼 말은 친구 말을 믿습니다. 그리고 방울 소리가 나는대로 언제나 움직입니다.

 

그런데 만일 눈 먼 말이 방울 소리를 따라 다니기 싫다고 한다면 주인이 이 말을 어떻게 했을까요? 더 이상 한 가족처럼 살고 싶어도 살수가 없지 않았을까요?

주님께서 원하신 제자들은 눈먼 그래서 주님의 방울소리가 필요한 사람들이 아니었을까요?

 

교우 여러분,

주님의 제자 열두 명은 모두 앞 못 보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늘 누군가의 방울소리를 귀담아 듣는 자들이었습니다. 아울러 공동체의 소중함을 깊게 인식하고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런 12명을 주님께서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 앞 못보는 그러나 공동체의 위대함을 믿는 자들과 함께 주님은 무엇을 하시기 원하시나요? 14절 하반절과 15절 말씀입니다.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주님의 궁극적인 꿈은 12제자들을 통해 전도도 하고 귀신을 내 쫓는 권능을 가지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 그러면 그냥 단번에 능력을 주셔서 전도도 하고 귀신을 내쫓게 하시면 되지 왜 3년간 붙들고 계셨을까요? 그만한 능력이 없으셨나요?

 

요즘 많은 분들에게 알려진 ‘만 시간 법칙’이 있습니다. Malcolm Gladwell이라는 저널리스트가 ‘Outliers’라는 책에서 발표하였는데 만 시간을 투자하면 누구나 달인이 된다는 개념입니다.

몇년전 저희 교회에 김종철 감독이 오셔서 여러 가지 좋은 말씀을 나눈적이 있습니다. 그분이 만든 TV프로그램중 하나가 ‘생활의 달인’이라는 프로입니다. 그 프로를 만들게 된 계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방송국 직원들의 신발을 닦는 구두닦는 사람이 있었는데 하루에 약 30개의 구두를 닦는다고 합니다. 구두를 받아 갈 때 누구의 구두인지 적지도 않고 받아 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구두를 닦은 후 한번도 틀리지 않고 정확히 구두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을 보면서 감격하게 되었고 결국 ‘생활의 달인’이라는 프로를 제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구두닦는 사람이 남보다 더 뛰어나서 30명의 구두를 하나의 오차도 없이 주인에게 돌려주고 있을까요? 그가 달인이 된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반복 반복 반복을 하면서 많은 시간을 같은 일에 투자하였습니다. 그래서 달인이 아니 전문가가 된 것입니다.

Gladwell에 의하면 만 시간을 투자하여 반복 반복 반복한다면 달인이 곧 전문가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자들이 주님과 얼마나 함께 시간을 보냈을까요? 3년 곱하기 365일 곱하기 60시간 하면 26,280시간입니다. 달인이 되어도 두번 하고 반 달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물론 밥먹고 잠자는 시간을 빼도 만 시간은 전도하고 귀신을 내쫓는데 사용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달인이 되어 간 것입니다.

 

저희 교회는 프로그램 위주의 교회가 아니지만 많은 한국과 미국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교회사역을 펼쳐가는 교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 교회에 가장 큰 고민이 있다고 합니다. 늘 새로운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프로그램으로 만 시간을 채우기 전에, 아니 만 시간이 뭡니까, 백 시간 아니 열 몇 시간도 채우기 전에 새로운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달인이 되어 갈수 있을까요?

 

2년전 저희 교회 60주년 행사 중 하나이었던 이민신학 심포지움에 오셨던 허천회 목사님께서 보스톤 근교 어느 교회 부흥회에 오셔서 제가 하루 집회에 참석하였었습니다. 다음과 같은 말씀에 큰 공감을 느꼈습니다.

“교회는 전문가를 필요로 합니다. 박사나 의사만 전문가가 아닙니다. 안내하는 일, 설거지 하는 일, 청소하는 일, 복사하는 일 등 수많은 전문인을 필요로 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은 바로 반복 반복을 통해 전문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아닐까요? 더 크게 은혜 받은 것은 허 목사님은 당신의 어머니를 자랑하는데 어머니도 전문가라고 자랑하셨습니다. 김치 만드는 전문가!

 

여기 까지 정리를 하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은 먼저 주님의 방울 소리를 따라 오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공동체 곧 ‘우리’의 힘을 아는 자들입니다. 한편 한 가지를 반복 반복 반복함으로 전문인이 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가 마음에 걸립니다. 19절 말씀입니다.

“또 가롯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에서 어떻게 지내실까요? 아주 바쁘게 지내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새로운 성도가 하늘나라에 도착할 때마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성도들이 하늘나라에 도착하자 마자 질문합니다.

“주님, 왜 가롯 유다를 제자로 삼으셨어요?”

이 대답은 우리 모두 하늘 나라에 가서 들으십시다.

그러나 저는 가롯 유다가 주는 큰 교훈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롯 유다는 3일을 기다리지 못하는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어두움의 3일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 말입니다. 그러나 11제자는 3일을 기다릴줄 아는 사람들이었다고 봅니다.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원하는 신앙은 3일의 신앙입니다. 주님은 성금요일에 십자가에 달리십니다. 3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왜 주님께서 3일만에 부활하셨을까요? 3일간 흙속에 파묻혀 있기에 너무 답답해서 아니면 지옥에서 3일간의 시간이 너무 힘들어서…?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주님은 3일을 내다 보면서 희망 중에 사는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원하십니다. 그들을 부르십니다.

 

지난주 인도자 교육에 비슷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3일이 지나면 또 다시 3일을 내다보면서 기다리면 되고 또 소식이 없으면 또 새로운 3일을 기다리면 되고 이것이 바로 부활의 신앙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교우 여러분,

주님은 3일을 내다 보며 사는 자들을 원하십니다. 3일만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자들을 원하십니다. 특히 주님의 방울 소리에 늘 귀를 기울이며 공동체를 떠나지 않고 신앙의 달인이 되어 3일을 내다 보며 사는 자들을 원하십니다. 이들을 통해 세계 역사는 뒤바뀌어집니다. 12제자들처럼 말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자가 되십시다.

 

말씀을 거둡니다.

주후 196년 곧 초대교회 시대에 어느 역사학자가 다음과 같은 글을 썼습니다.

“예수로 인해서 여기 저기에 생겨지는 새로운 종족 곧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는 크리스챤에 대해서 우리가 무어라고 말을 해야 할까? 오! 우리는 예수의 이름을 따라 크리스챤이라고 불리워지고 있다. 일주일에 한번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 모인다…. 그들이 있는 곳에는 그 지방의 법이 그들이 따르는 그리스도의 법에 압도 당하고 있다.”

 

예수님은 성공하셨습니다. 당신이 원했던 사람들을 통해 놀라운 일을 해 내셨습니다. 세상법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들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능히 성공하시고 계십니다. 당신이 원하시는 사람들과 더불어 말입니다.

교우 여러분,

주님께서 여러분을 원하십니다. 부르십니다. 공동체 곧 ‘우리’의 소중함을 알고 주님의 말씀에 묵묵히 순종하고 따르며 주어진 일을 반복 반복 반복하기를 기뻐하고 3일의 소망을 가슴에 안고 사는 자들을 부르십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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