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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그루터기 (이사야 6:1-13) 01/17/2016

 

오늘이 1/17일입니다. 그런데 오늘을 독립기념일로 지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미국의 독립 기념일은 7/4일입니다. 그런데 왜 어떤 사람들은 오늘을 독립기념일로 지킬까요?

먼저 힌트를 하나 드리겠습니다. 오늘 어떤 스키장들에서 독립기념일 행사가 진행이 된다고 합니다. 한참 추운 1월 중순에 왜 스키족들은 독립기념일 행사를 치루고 있을까요?

66년전 1/17일 스키어들은 날씨에서 독립이 된 날입니다. 이 날 눈 만드는 기계가 발명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 전까지는 늘 눈이 와야 스키를 탈수 있었는데 그 후로는 눈이 안 와도 스키를 탈수 있게 된 것입니다. 곧 날씨로부터 독립이 된 날입니다. 그래서 이 날 어떤 스키장에서는 여러 가지 행사가 열린다고 합니다. 물론 불꽃놀이도 당연히 하겠죠.

 

사실 우리를 묶어 놓고 있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오래 전 Independence Day라는 영화가 나왔었습니다. 최근에 나온 영화 말고…. 그 영화의 주제는 가정 생활을 주제로 한 영화이었는데 남편에게서 독립을 하였다는 것을 기념하는 한 여인의 독립기념일에 대한 영화였습니다.

한편 영화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1996년도에도 Independence라는 영화가 나왔었습니다. 저는 보진 않았는데 내용은 지구로 외계인들이 쳐 들어 온 것입니다. 아마 외계인으로부터 독립하게 되는 것을 주제로 만든 영화인 것 같습니다. 이것이 잘 되었는지 곧 후편이 또 나온다고 합니다.

하여튼 독립은 끝없는 사람들의 갈망인 것 같습니다. 날씨로부터 폭군 남편으로부터 외계인으로부터 질병으로부터 가장 크게는 외적으로부터…. 이외에도 수없이 많은 것에서 우리는 독립하길 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인간의 피에는 자유를 갈망하는 독립군의 피가 흐르고 있는가 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우리들 안에 흘러야 할 자유한 자의 피는 어떤 것일까요? 우리들 안에 이러한 피가 흐르고 있는지 오늘 본문 말씀을 상고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절 말씀입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이사야가 환상 중에 하나님의 보좌 앞에 가 있는 체험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때가 바로 웃시야 왕이 죽던 해입니다. 대략 BC 740년이라고 생각하면 좋을줄 압니다. 웃시야왕은 훌륭한 왕 중에 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잘 섬겨서 유다 왕국을 부유하게 했던 왕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흠은 후에 교만해져서 제사장의 일을 침범하는 죄를 범하게 되는데 끝내 문둥병이 걸리게 됩니다.

물론 말년은 안 좋았지만 그만하면 훌륭한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웃시야가 죽게 되면서 나라는 급속도로 나빠지기 시작합니다. 아마도 이사야는 이런 모든 것을 잘 알고 답답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간 것 같습니다.

이 때 졸지에 이사야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본 후 이사야는 소리를 지릅니다. 5절 말씀입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이 당시는 하나님을 보면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얼떨결에 하나님을 뵌 이사야는 당연히 죽을 것을 알고 슬픔 중에 소리지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에게 급소라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을 잘 못 건드리면 꼼짝 못하게 되는 곳입니다. 사람의 정신 세계에도 급소라는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곳을 건드리면 절망으로 곤두박질 쳐 들어갑니다.

이사야도 그런 급소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뵙는 순간 급소를 찔린 것을 체험합니다. 그 후 절망적 상황이 된 것입니다. 깊은 절망의 세계에 빠져 들어 간 것입니다.  

국가가 위기에 처해서 절망 가운데 있었는데 더 이상 국가를 걱정할 때가 아닙니다. 본인 스스로의 절망에 빠져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6, 7절 말씀입니다.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두 가지 절망 가운데 있었는데 이제 하나는 해결이 되었습니다. 국가적 절망은 남아 있지만 개인의 절망은 사라졌습니다. 스랍이 부젓가락으로 핀 숯을 입에 대면서 죄가 사하여졌다고 선언을 하니 어느덧 그토록 두려웠던 절망은 온데 간데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제 정신적 절망이 사라짐 가운데 있는데 아울러 새로운 음성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8절 말씀입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자 답변합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사야는 유다왕국의 모든 절망적 상황을 잘 알고 있던차라 쉽게 자기의 결단을 고백합니다. 자기가 한번 해 보겠다는 용감한 결단을 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용감한 결단을 한 이사야를 가만히 놔 두실리 없죠. 하나님께서는 사명을 주십니다. 9, 10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한 마디로 더 이 민족을 더 절망에 빠뜨리게 하라는 사명을 주십니다. 도저히 회복할수 없게 하라는 사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귀가 막히게 하고 눈을 감기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사야가 기대했던 사명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도리어 더 큰 절망에 빠뜨리게 하는 사명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허나 이사야는 상당히 지혜로왔던 사람 같습니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나는 그럴수 없습니다. 지금도 절망에 빠져 있는 우리 백성인데 구하지는 못할지언정 어떻게 더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게 하란 말입니까?”

그러나 이사야는 정말로 소망이 없는 자신의 민족임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사야에게 주어진 사명은 민족을 절망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절망에 빠진 민족이 당하는 모든 것을 지켜 보는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민족적 슬픔을 먼저 체휼하는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이 사명을 받아들이며 이사야는 한 가지 질문을 합니다. 11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언제까지 이 민족은 절망으로 치달아야 하고 언제까지 자기는 그 절망의 목격자요 증언자요 동참자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인 것입니다. 참 이사야는 정말로 안타까운 지경에 처한 것입니다. 원래 절망적 상황에 처한 민족을 위해 기도를 드리는 것으로 시작되었는데 결과적으로는 더욱 절망적 상황에 몰아치게 할뿐 아니라 본인이 이 모든 것의 증인이 되게 생겼으니 말입니다. 이에 하나님은 친절하게 답변하십니다. 11절 하반절에서 12절 말씀입니다.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곧 유다왕국의 멸망을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아픈 자녀를 둔 부모가 있다고 생각하십니다. 부모는 자녀가 계속 병세가 나빠지는 것을 목격하는 것까지는 감당하기로 굳게 마음 먹었습니다. 그래서 의사에게 물었습니다.

“언제까지 나빠지겠습니까?”

“죽을 때까지요.”

 

이사야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대답은 이것이었습니다. 이에 이사야는 눈 앞이 깜깜해졌을 것입니다. ‘결국 유다왕국의 멸망까지 목격하는 것이 나의 운명, 아니 소명이란 말인가?’

 

그러면 정말 절망의 마음을 안고 유다의 멸망을 기다리는 것이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주신 소명의 전부였을까요? 이런 절망 가운데 있는데 계속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옵니다. 13절 말씀입니다.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

 

Walter Brueggemann이라는 유명한 구약학자가 있습니다. 이 분의 책 중에 ‘예언자적 상상력 (The Prophetic Imagination)’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미국 학자들은 대개 책 서두에 누구에게 드린다는 글을 쓰곤 하는데 이 분은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 매일 나에게 애통의 힘과 놀라움의 힘에 대해서 가르쳐 주는(현재형) 여성 동역자들에게”(For sisters in ministry who teach me daily about the power of grief and the gift of amazement)

예언자의 상상력은 두 가지 뿌리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애통함 그리고 놀라움.

 

이사야에게 주신 소명도 바로 이 두 가지였습니다. 민족적 애통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언젠가는 놀라운 일이 기다리고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언젠가 짤려지는 민족의 나무를 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짤린 나무는 언제나 그루터기가 남아 있는 법 그 그루터기가 바로 거룩한 씨가 되어서 새로운 시작을 약속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짤려지는 나무만을 보게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짤릴수 없는 그루터기도 보게 하신 것입니다. 이에 이사야는 그 누구도 건드릴수 없는 그루터기를 비로소 보기 시작합니다. 그후 그루터기를 보면서 항상 희망의 멧세지를 전할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이사야의 사명이었습니다. 죽을 때까지 자꾸 잘려지는 나무의 아픔을 보고 또 보아야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또한 그루터기를 보곤 하였습니다. 거룩한 씨가 그 안에서 숨쉬고 있음을 보았던 것입니다.

 

어떤 학자는 이사야가 64년간 예언자 생활을 하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웃시아 왕이 죽은 후 유다왕국의 멸망까지 약 154년이 걸렸는데 이사야가 죽은 후 거의 90년 후에야 완전히 유다왕국이 멸망합니다.

 

곧 이사야 후로도 수 많은 예언자들이 민족적 애통의 동참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물론 거룩한 씨의 그루터기의 희망을 안고 말입니다.

이들도 이사야에 뒤를 이어 민족의 나무가 짤리는 아픔에 동참하였습니다. 한편으로는 나무가 아무리 짤려도 그루터기를 보면서 거룩한 씨가 숨쉬고 있음을 선포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는 이 위대한 소명은 누구에게 맡겨져 있나요?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이 아닐까요? 이 소명 가운데 사는 분들이 자유인이 아닐까요? 이 세상 여러 가지 굴레에서 진정으로 독립한 사람들이 아닐까요?

 

사실 이 소명을 온전히 이루신 분이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은 온 인류의 멸망에 동참하셨습니다. 스스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주님의 몸은 짤려 나갔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건드릴수 없는 그루터기로부터 새 싹이 피어 올랐습니다. 몸소 인류 역사의 새로운 시작이 되신 것입니다.

 

신년예배시 올해 저희 교회 표어를 소개해드렸습니다.

“네 지경을 넓히리니.”

사실 우리들 앞에 넓은 평지가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속박하려는 많은 것들이 우리를 가로 막고 있습니다. 경제적 압박 건강의 문제 가정의 기도의 제목 등…. 무엇보다도 한국과 미국 그리고 전 세계의 미래가 밝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루터기 안에 담겨진 거룩한 씨를 보는 자들은 이미 자유한 자들입니다. 이들과 함께 주님은 올 한 해 지경을 넓혀 가실 것입니다.

 

저희 집사람이 지난주 어느 TV 설교자의 이야기를 듣고 전해준 강아지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목사님은 작은 강아지가 한 마리 있다고 합니다. 옆집은 불독처럼 큰 개인데 당신 집 개는 작은 강아지라고 합니다.

하루는 당신 집 강아지가 펜스 밑을 파고 이웃집으로 가서 하룻 강아지 범 무서운줄 모른다고 큰 개에게 덤볐습니다. 큰 개가 한 대 빵 치니 ‘깨갱’ 하고는 집으로 돌아 왔다고 합니다. 돌아 와서는 피난 곳을 핥으면서 아픔을 스스로 달랩니다. 웬만큼 나았습니다. 다시 펜스 밑을 지나 이웃집으로 갔습니다.

큰 개가 한 대 빵 치니 또 다시 ‘깨갱’ 하고는 피를 흘리면서 집으로 돌아 옵니다. 다시 피난 곳을 핥으면서 아픔을 스스로 달랩니다. 웬만큼 나았습니다. 다시 펜스 밑을 지나 이웃집으로 갔습니다.

큰 개가 한 때 빵 치니 또 다시 ‘깨갱’합니다. 다시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또 나은 모양입니다. 다시 펜스 밑을 지나 이웃집으로 갔습니다.

이 때 큰 개가 ‘깨갱’ 하더니 마루 밑으로 숨더라는 것입니다. 저 보고 이 강아지의 이름을 지으라면 ‘이사야’로 짓겠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설교준비하면서 자주 생각하였습니다. 한 가지 질문이 생겼습니다. 이 강아지가 어디서 저런 것을 배웠을까? 과학자들은 DNA라고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내린 결론은 주인 목사님으로부터가 아닌가…?

우리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으로부터 배우십시다.

말씀을 거둡니다.

일제때 살았던 정인보 민족시인의 ‘새해의 노래’라는 시입니다.

 

새해의 노래

 

온 겨레 정성덩이 해 돼 오르니
올설날 이 아침야 더 찬란하다
뉘라서 겨울더러 춥다더냐
오는 봄만 맞으려 말고 내 손으로 만들자

깃발에 바람세니 하늘 뜻이다
따르자 옳은길로 물에나 불에
뉘라서 겨울더러 흐른다더냐
한이 없는 우리 할 일을 맘껏 펼쳐 보리라

 

정인보 시인은 일제시대 조선의 멸망을 통해서도 거룩한 씨가 그루터기에 담겨져 있음을 보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올해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21세기의 예언자로 부르셨습니다. 인류의 아픔에 함께 하십시다.   인류의 아픔 안에 거룩한 씨가 심겨져 있음을 잊지 마십시다. 이를 믿는 자들이 바로 그루터기입니다. 이를 믿는 우리로 인하여 새로운 시작이 펼쳐질 것입니다. 우리들의 지경이 넓혀질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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