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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라 함께 가자 (마가복음 14:32-42) 02/28/2016

 

어느 분이 당신의 수필집에 ‘체리의 향기’라는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주인공은 늘 흔들리는 연약한 삶을 살고있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늘 죽음을 생각하면서 생활을 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죽음에 이웃이 함께 자리를 해주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어느 이웃이 스스로 삶을 마감하는 자리에 함께 하려고 하겠습니까? 다행히 한 노인 어르신이 그 자리를 채워주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먼저 노인은 자신의 이야기를 합니다.

“결혼한 직후 내게는 온갖 어려움이 산적해 있었습니다. 난 너무 지쳐 끝장을 보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새벽 동이 트기 전에 차에 밧줄을 실었어요. 난 자살하기로 굳게 마음 먹었습니다. 뽕나무 농장에 도착했는데 그곳에 도착했을 때까지도 해가 뜨지 않았어요. 나무에 밧줄을 던졌지만 걸리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던졌지만 소용이 없었어요. 그래서 나무 위로 올라가 밧줄을 단단히 동여맸습니다. 그때 내 손에 뭔가 부드러운 게 만져졌어요. 체리였습니다. 탐스럽게 익은 체리였어요. 난 그걸 하나 먹었어요. 과즙이 가득한 체리였습니다. 그리곤 두 개 세개를 먹었어요. 그때 산등성이에 태양이 떠오르더군요. 정말 장엄한 광경이었습니다.

갑자기 학교에 가는 아이들의 소리가 들렸어요. 그 애들은 가다 말고 서서 날 쳐다보더니 나무를 흔들어 달라고 했어요. 체리가 떨어지자 애들이 주워 먹었어요. 그 모습을 보니 행복하더군요. 체리를 주워 집으로 향했습니다. 아내는 그때까지도 자고 있었어요. 잠에서 깨어나 그녀도 체리를 먹었어요. 아주 맛있게 먹더군요. 난 자살을 하러 떠났지만 체리를 갖고 집으로 돌아왔어요. 체리 덕분에 생명을 구한 거죠. 체리가 내 생명을 구했어요.”

 

이 노인의 이야기가 젊은이의 삶을 구했는지 안 구했는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이 체리는 노인을 구했습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물론 영화지만 주인공 젊은이와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사순절 세번째 주일 예배를 드리는데 사순절 설교 준비를 위해서 책을 읽던 중 늘 제 뇌리에 남아 있던 이야기입니다. 왜 이 이야기가 계속 내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고 생각나고 또 생각나나 혼자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는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노인에게 체리가 필요하였듯이 하나님도 체리와 같은 그 무엇이 필요하시지 않으실까?”

물론 하나님은 노인처럼 자살하려고 하시진 않으십니다. 그러나 체리가 노인에게 그토록 소중했던 것 처럼 하나님에게도 그토록 소중한 그 무엇, 체리와 같은 그 무엇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내려다 보는 세상은 죄악이 관영하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을 바라 보면서 내가 세상을 만들기를 잘 했구나 생각나게 하는 그 무엇이 있지 않을까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체리일줄 압니다. 과연 그것이 무엇일까요? 32절 말씀입니다.

“그들이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주님께서 유월절 만찬을 마치시고 유대인들에게 잡히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가셨던 곳이 겟세마네 동산입니다. 어느 영성학자는 겟세마네 동산을 에덴 동산과 연결시켜서 생각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시작한  창조 이야기는 이제 겟세마네 동산에서 새로운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됨을 말하고 있습니다.

에덴 동산에서는 아담과 이브가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먹음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죄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면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어떤  역사적 사건이 펼쳐지고 있을까요? 33절 말씀입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에덴 동산과 겟세마네의 분위기는 전혀 달랐습니다. 세 제자들은 무슨 영문인지 몰랐습니다. 사실 이곳은 주님께서 자주 오시는 곳이었습니다. 어쩌면 제자들은 이곳에만 오면 에덴 동산 같은 느낌을 받곤 하였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유독 이 날은 뭔가 좀 느낌이 다릅니다. 주님은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까지 고백하시고 계십니다. 그리고는 혼자 좀 거리가 되는 곳에서 간절한 기도를 드립니다. 36절 말씀입니다.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아마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대답도 하시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주님은 하나님 앞에서 엄청난 외로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동안 하나님을 위해서 그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하나님은 전혀 일언반구도 없으십니다.

깊은 외로움 가운데 있는데 한 가지 생각이 나셨을 것입니다. 다행히 세 제자를 데리고 왔습니다. 세 제자들이 당신을 위해 기도, 아니 당신을 위해 기도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저 당신의 기도하는 모습만 봐도 큰 위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받은 깊은 외로움의 상처를 위로 받기 위해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왔습니다. 그런데 웬걸 세 제자들은 느러지게 자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큰 배신을 느꼈을 것입니다. 더 큰 외로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다시 사랑스런 목소리로 말씀하십니다.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그뿐 아닙니다. 40절 말씀입니다.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심히 피곤함이라 그들이 예수께 무엇으로 대답할 줄을 알지 못하더라.”

이처럼 침묵하시는 하나님과 한 시도 깨어 있지 못하는 제자들 사이를 두세번 오고 가십니다. 주님의 발걸음은 어떠했겠습니까? 여기도 저기도 당신을 환영하고 있지 않습니다. 41절 말씀입니다.

“세 번째 오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 되었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주님은 세번째 가서 똑 같은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이제 응답을 받은 것 같습니다. 다행한 것은 더이상 왔다 갔다 하실 필요는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당신이 머물러야 할 곳을 아시게 된 것입니다.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죄인들의 손이 마지막으로 가야할 곳임을 아시게 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을 아신 후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42절 말씀입니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주님은 공생애 3년간 하나님께 당신의 모든 것을 맡기고 사역을 하셨습니다. 이제 겟세마네 동산을 떠나시면서 마지막 1주일은 당신의 모든 것을 죄인의 손에 맡기시고 계신 것입니다.

설교 서두에 ‘체리의 향기’라는 영화를 통해 하나님을 위한 체리는 무엇인지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자고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감히 생각해 봅니다. 주님께서 “일어나라 함께 가자”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을 때 하나님은 체리의 향기를 맛보시지 않았을까요?

 

오늘 사순절 세번째 주일로 지킵니다. 예수님의 수난을 영어로는 ‘Passion’이라고 합니다. 종종 ‘passionate suffering’으로 심한 고난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원래 라틴 원어의 ‘passio’의 뜻은 ‘수동’ ‘passiveness’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non-activity’를 뜻하며 무엇이 자기에게 향해 오는 것을 도리어 깊게 받아드리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수난은 예수님에게 찾아 오는 것들을 깊게 받아드리는 모습입니다. 곧 주님은 죄인의 손에 팔리는 것조차 그대로 받기로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 앞에서 passive하셨습니다. 사람 앞에서 passive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제자들에게 내 몰았고 사람은 하나님께 내몰았습니다. 탁구공처럼 passive하게 여기 저기 왔다리 갔다리 하셨습니다. 둘 다 받지 않고 있는데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죄인들의 손!!

 

한편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 오실 때까지는 passive하신 분이 아니셨습니다. 적극적인 분이셨습니다. 당신이 원하시는대로 공생애 3년간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고치셨고 말씀을 전하셨고 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공생애를 마치면서도 당신이 원하셔서 유월절 만찬을 제자들과 함께 하셨고 당신 뜻대로 겟세마네 동산에 오셨습니다. 당신은 항상 앞장 섰습니다.

그러나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의 삶의 태도는 돌변합니다. 겟세마네 동산에 들어 오셔서 주님은 먼저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피조물로서 인간으로서 마땅한 기도를 올렸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그러나 당신의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으시는 하나님 앞에서 드디어 놀라운 결정을 내리십니다. 당신의 뜻을 다 내려 놓으십니다. 기도의 제목도 내려 놓으십니다. 전적으로 passive한 생애를 살 것을 결단하고 마지막으로 자신을 active하게 하나님께 드립니다.

사실 이 후의 죄인들의 손에 끌려 다니는 주님의 passive한 삶이 얼마나 소중했으면 복음서 기자들은 복음서에 1/4-1/3가량의 분량을 주님의 passive한 시간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3년간 공생애 생활을 하신 것 잘 아실줄 압니다. 그러면 이 고백 “일어나라 함께 가자” 고백을 하신 후 부활하실 때까지가 얼마의 시간이 걸렸습니까? 대충 1주일에서 열흘이라고 생각하면 족할줄 압니다. 그러면 3년 중 1주일의 생애를 복음서 1/4 – 1/3에 기록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라는 고백이 얼마나 소중하였음을 쉽게 알수 있습니다. 이 고백과 더불어 주님은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체리의 향기가 되셨던 것입니다.

 

다음의 마더 테레사의 말을 들으면 주님의 이 결단의 고백이 정말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체리의 향기가 되고도 남음을 느끼게 됩니다.

“아주 작은 겸손을 얻기 위해서 어마어마한 굴욕이 필요하다.”

마더 테레사의 글을 읽으면 왜 주님께서 그토록 세번씩이나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셨는지 감이 잡힙니다. 어마 어마한 굴욕을 거쳐야지만 아주 작은 겸손의 덕을 쌓게 되는 것을 마더 테레사는 경험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으시기 위해서는 어마 어마한 굴욕 아니 우주적 굴욕을 거쳐야 하지 않으셨겠습니까?

우리가 결코 상상할수 없는 굴욕을 거쳐야 하셨습니다. 가장 큰 굴욕은 하나님의 아들이 passive하게 죄인의 손에 팔리는 것이었습니다.

이 우주적 굴욕을 결심하신 후 주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 이 말씀하신 첫번째 이유는, 당신의 우주적 굴욕의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두번째로는 우리가 할수 있는 작은 굴욕에 동참하라고…. 주님은 우리도 하나님을 위한 체리의 향기를 발하는 삶으로 초청하시고 계십니다.

 

저희 본당에는 항상 예쁜 꽃으로 성만찬 테이블을 장식합니다. 성만찬 테이블과 그 위에 놓인 꽃을 보면서 하나님은 두 가지 향기를 맡으실 것이라고 저는 감히 생각합니다. 하나는 꽃의 향기입니다. 오늘도 예쁜 꽃이 향기를 발하고 있습니다. 비록 꽃꽂이를 위해서 꺾여지긴 했지만 하늘을 향하여 높이 높이 그 향기를 발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꽃을 피우기 위해서 열심히 일했고 드디어 예쁘게 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강단에 바쳐졌습니다.

또 하나는 무엇이겠습니까? 신학적으로는 성만찬 테이블에 예수님이 누워계십니다. passive하게 누워 계십니다. 지금 저 테이블에 누우실 것을 겟세마네 동산에서 결단하신 것입니다. 그 결단과 함께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

남은 사순절 기간 저 테이블을 보시면서 주님께서 누워 계신 모습을 상상하시기 바랍니다.

교우 여러분,

다음부터 꽃장식을 보실 때 두 가지를 보시기 바랍니다. 열심히 active하게 피여진 꽃을 보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passive하게 누워계신 주님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체리의 향기를 맛보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지난주 월요일에서 수요일까지 리치몬드 유니온 신학교에서 이민신학에 대한 강의를 마치고 보스톤으로 돌아 온 후 목요일 새벽기도회를 인도하고 집에 와서 금주 설교 준비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수요일까지 강의하느라 금주 설교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상태로 그동안 읽었던 책들도 뒤져 보면서 설교 준비를 시작하였습니다.

그 때 마침 교회 사무실에서 이멜을 받았습니다. 전날 밤에 어느 목사님께서 사무실에 멧세지를 남겨 놓으셨다면서 저에게 전화 번호를 보내 왔습니다. 물론 제가 잘 아는 목사님입니다. North Carolina에 계신 분이십니다.

보통 때 같으면 당장 전화를 걸었을텐데 좀 망설여졌습니다. 제가 받은 이멜 내용으로는 가까이 보스톤에 오셨는데 인사차 전화를 거셨다는 것입니다.

제가 전화를 걸면 점심이나 저녁 때 만나자고 하실게 뻔히 보였습니다. 오늘 설교 준비를 마치고 또 다음날 금요일 새벽기도회도 인도해야 하는데 도저히 만날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른척하고 저녁 나절 웬만큼 설교준비를 마친 후 걸어야겠다 생각하고 설교 본문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이에 North Carolina로 떠나시면 다행이고….

그런데 마음이 계속 불편합니다. “목사님은 몰라도 너도 알고 하나님도 아신다.” 용기를 내서 전화를 걸기로 했습니다. 목사님이 원하시는게 무언지 몰라도 목사님께 passive하게 대하자 결심을 하였습니다. 나머지는 하나님께 맡기고….

제가 받은 전화번호로 걸었더니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아무 교회라고 하면서…. 어느 교회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있는 부교역자겠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무개 목사님께서 어제 전화를 걸어서 회신하는 거라고 했더니 잠시 기다리라고 하면서 바꿔주었습니다.

내용인즉슨 이곳 보스톤에 올라오신 것이 아니고 제가 리치몬드에 강의하러 갔었는데 가까이 있으면서 가 뵙지 못했다고 양해의 뜻을 전하는 전화였습니다.

목요일에 사무실에서 수고하신 교역자님이 녹음된 전화 멧세지를 듣고 전해 줬기 때문에 좀 착오가 있었고 저는 그 목사님께서 보스톤에 와 계신 것으로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전화를 끊고 생각했습니다. “역시 passive하길 잘했다….” 제가 받은 큰 교훈이 있습니다. 우리가 passive해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사정을 잘 아신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지각을 넘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작은 일에도 passive하기까지 시간이 걸렸습니다. 잠시 나가서 점심이나 저녁을 같이 하는데도…. 물론 그런 일은 안 생겼지만….

 

겟세마네 동산에서 보여주신 주님의 passivity에 비해서는 너무도 작은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작은 passivity마저도 필요한 때가 되지 않았을까요? 이런 작은 것들이 모여서 주님의 겟세마네의 발걸음을 빛내게 하지 않을까요?

교우 여러분,

주님의 굴욕의 증인이 되십시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작은 굴욕에 동참자가 되십시다. 하나님을 위한 체리의 향기가 되십시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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