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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웃음 (창세기 21:1-7) 05/08/16

 

탈무드에서 각색하여 만든 이야기입니다. 한 소년이 집을 떠나서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위대한 사람을 만나는 꿈을 안고…. 먼저 위대한 사람을 찾아서 숲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위대한 사람이여! 어서 나오세요.”

아무런 흔적도 확인할 수 없어서 소년은 실망스러웠습니다.

이번에는 높은 산의 계곡을 찾아 갔습니다. 물소리가 요란했지만 소년은 용기 있게 바위를 뛰어넘고 흐르는 시내를 건너가서 위대한 사람을 불렀습니다.

“위대한 사람이여! 어서 나오세요.”

역시 아무 반응이 없자 사막으로 떠났습니다.바람이 불고 모래가 날리는 사막이었지만 소년은 두렵지 않았습니다. 소년은 어디에서도 쉬지 않고 계속 나아갔습니다. 하늘에서 별이 하얗게 빛나는 밤에 소년은 마침내 모래 언덕 위에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위대한 사람이여! 어서 나오세요.”

하지만 위대한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소년의 발걸음은 기운을 잃었습니다. 걷다가 너무 지쳐버린 소년이 돌 위에 풀썩 주저앉은 채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 순간에 어느 노인이 소년의 앞에 나타났습니다. 밝은 피부에 맑은 눈동자를 가진 할아버지는 소년이 보기에도 보통 사람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소년은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저분이 내가 찾는 위대한 사람은 아닐까?’

노인이 소년에게 물었습니다.

“얘야, 어디를 그렇게 헤매고 다니느냐?” 소년은 대답했습니다.

“저는 위대한 사람을 만나고 싶어서 이렇게 열심히 돌아다니는 중이랍니다.” 노인은 소년을 보면서 빙그레 웃었습니다.

“내가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 주마.”

“네!” 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기뻐서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고맙습니다. 어서 가르쳐 주세요!”

“지금 곧장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러면 집에서 신발도 신지 않은채 한 사람이 달려 나올 것이다. 그 사람이 바로 이리저리 찾아다니던 그 위대한 사람이다.”

소년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자기 집을 향해서 마구 달려갔습니다. 드디어 며칠 만에 소년은 집에 도착했습니다. 소년은 위대한 사람을 만나고 싶은 다급한 마음에 자기 집 문을 마구 두드렸습니다. 그리고는 목청껏 소리 질렀습니다.

“위대한 사람이여! 어서 나오세요.”

그러자 누군가 안에서 후다닥 밖으로 뛰어나왔습니다. 신발도 신지 않은 맨발이었습니다. 소년은 할 말을 잃고 멍하니 그 위대한 사람을 바라보았습니다. 바로 소년의 어머니였습니다. 모든 어머니는 위대한 어머니라는 탈무드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모든 어머니들은 위대할수밖에 없음을 함께 생각하고자 합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잘 아시는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입니다. 1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라를 돌보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돌보셨다는 뜻은 사라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셨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  

사실 그동안은 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많이 생각하곤 했는데 오늘 어머니 주일을 맞이하여 사라에게 하신 약속을 중심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사라는 아브라함을 통해 늘 간접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듣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라에게도 직접 약속하신적이 있습니다. 창세기 18: 10절 말씀입니다.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물론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대화를 사라가 엿듣고 있었는데 이를 하나님께서 아시고 말씀하셨습니다. 곧 사라도 처음으로 당신의 귀로 약속을 직접 듣게 됩니다. 이 때는 바로 아들 이삭을 낳기  1년 전 곧 아브라함이 99세였을 때입니다. 1년전에 하나님께서 나그네 세 사람이 되셔서 아브라함을 찾아 오셨을 때입니다. 곧 사라는 1년전에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하나님께서 지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키심으로 사라를 돌보신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어머니 주일을 맞이하여 좀 다른 각도에서 돌보심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성 교우님들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사라는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인해 평생 아이를 낳지 못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평생 돌봐주셔서 아이를 못 낳게 하시다가 마지막 아브라함이 백세가 되었을 때 아이를 낳게 하신 것입니다.

 

아들을 낳은 후 사라의 반응을 보면 알수 있습니다. 6절 말씀입니다.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사라 주변에는 웃음보가 터졌습니다. 웃음보가 터진 것이 지난 1년간 때문이 아닙니다. 언제 결혼했는지는 알수는 없지만 물론 20세쯤에는 분명 결혼을 했을 것입니다. 거의 7, 80년간 힘든 기다림의 시간이었습니다. 이 기다림의 시간을 사라는 웃음을 터뜨리면서 자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혼자서가 아니라 모든 듣는 자들과 함께….

그런데 여기에 하나님도 함께 웃지 않으셨을까요? 하나님은 사라와 함께 웃길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께서 사라를 평생 돌보셨다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사라의 이 역사적인 웃음을 위하여…. 하나님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라를 웃게 하셨습니다. 사라와 함께 모든 자들을 웃게 하셨습니다. 하나님도 웃으셨습니다. 사라는 웃음을 웃음답게 만든 인류의 첫 사람이 아닐까요?

 

유대인들은 유머를 좋아한다고 합니다. 물론 어느 유대인 랍비가 쓴 책에 그렇게 적혀 있어서 저는 그렇게 믿게 되었습니다. 다음과 같이 저자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유머는 온 세계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을 결합시키는 언어와 같은 것이다. 유대인은 히브리어와 이디쉬어의 두 언어 이외에 제3의 언어로 유대인을 결합시켜 왔다. 유대인들은 유머를 좋아하는 명랑한 민족인 것이다.”

곧 제 삼의 언어는 유머였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유머로 인해서 수많은 민족의 역경도 이겨냈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최근에 들은 유머를 말하라고 하면 한 시간 정도는 넉끈히 말을 할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저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한 프랑스에 사는 유대인 부인이 진통이 와서 산부인과에 갔습니다. 남편은 입원실 밖에서 어린 아기가 태어나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때 유대인 의사가 그의 곁으로 와서 말합니다.

“그렇게 초조하게 기다려 봐야 소용없는 일입니다. 자, 나하고 트럼프나 할까요?”

트럼프가 시작되었습니다. 갑자기 부인이 소리지릅니다. “몬듀! 몬듀! 그프레!” 프랑스 말로 진통의 비명 소리가 들립니다. 남편은 제 정신이 아닙니다. 그러나 의사는 태연히 트럼프를 계속합니다. 이윽고 부인이 또 소리지릅니다.

“바이 데아 메아!”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이디쉬어의 외침 소리가 들려옵니다. 순간 의사는 트럼프 장을 아무렇게나 팽개치고 입원실로 뛰어듭니다. 이제 아기가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 유머를 가지고 프로이드는 다음과 같이 분석하였다고 합니다. 모든 사람이 정말로 괴로울 때에는 어린 아이 때의 표현으로 돌아간다고 분석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이 각기 흩어진 나라에서 살고 있는데 정말로 괴로울 때에는 가장 어렸을 때 들었던 언어로 곧 이디쉬어로 돌아 간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무릎을 치면서 하나님의 섭리에 감격했습니다. 이삭이 태어나자마자 들었던 음성이 무엇이었을까요?

‘웃음’ 아니었겠습니까? 이 당시 사라가 무슨 언어를 사용하였는지는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만 쉽게 히브리어였다고 생각하겠습니다. 사라는 웃으면서 히브리어로 말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깔깔깔깔깔깔깔….”

이삭은 어머니의 웃음 소리를 들으면서 태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인생의 역경마다 이삭은 바로 어머니의 웃음 소리를 듣고 또 들었을 것입니다.

영국 속담에 ‘최후에 웃는 자가 가장 잘 웃는 자이다’라는 속담이 있다고 합니다. 이 속담의 주인공이 바로 사라가 아니었을까요? 아니 사라를 위시해서 시작된 모든 어머니들이 아닐까요? 그러기에 모든 어머니는 위대하지 않습니까?

 

저는 이번주 설교를 준비하면서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호탕하게 웃은 사람이 누구일까? 답을 찾는데는 1초도 안 걸렸습니다. 성경 그 어디에도 여기에 버금가는 표현은 나오지 않습니다.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사라의 웃음으로 인해서 온 세계는 희망이 있지 않은가요?

 

생각해 보십시다. 이삭이 당했던 첫 번째 역경이 무엇입니까? 아버지가 자기를 묶어서 제단에 올려 놓지 않았습니까? 사실 이 때 이삭은 꽤 컸습니다. 백세가 넘은 아버지를 밀치고 뛰쳐 도망 내려 올수도 있었습니다. 아마 이삭은 이 역경 가운데서 어머니의 웃음 소리를 듣게 되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이 웃음을 이삭은 야곱에게 전해 주지 않았을까요? 에서를 만나기 전에 얍복강가에서 천사와 싸워 승리하고는 ‘깔깔깔’ 웃지 않았을까요?

이들은 모두 사라의 웃음의 전수자들이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세상 살이 힘드시지 않습니까? 세상에 비해서 너무나 연약한 모습이 아닙니까? 사실 하나님은 이 세상은 연약한 사람들이 살기에 너무도 험한 세상임을 잘 아시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 세상역사를 거두시지 않고 계십니다. 어머니들의 웃음소리가 들리기 때문이 아닐까요? 위대한 어머니들 때문이 아닐까요? 사라의 웃음은 하나님의 웃음입니다. 사라의 위대함은 하나님의 위대함입니다.

가만히 들어보세요. 이 시간에도 어디선가 어머니의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닥종이 인형작가로 널리 알려진 김영희 작가가 있습니다. 갑자기 남편과 사별한 뒤 독일인 남편을 만나 재혼하고 독일로 이주를 합니다. 이미 세 자녀를 두고 있었는데 후에 독일에 가서 두명의 자녀를 또 낳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첫번째 수필집 제목이 ‘아이를 잘 만드는 여자’입니다. 독일에 살지만 한국에도 자주 방문하여 예술 활동을 펼쳐 오곤 했습니다.

한 번은 한국에 머물고 있는 동안 어느 방송국에서 인터뷰 요청이 왔다고 합니다. 인터뷰 맡으신 분이 작가 분이기에 예술세계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려니 하고 큰 기대를 갖고 인터뷰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개인 생활에 대한 질문들을 받았다고 합니다. 사실 독일인 남편은 14살 연하였습니다. 인터뷰가 한참 진행중인데 갑자기 이런 질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김영희씨 남편은 14살 연하라면서요?”

“네.”

“그런데 큰따님 유진씨와 부군 토마스 씨와의 차이도 열네 살이 되네요. 우연의 일치인가요?”

“……”

순간 김영희씨는 정신이 어리둥절해집니다. 그 시간까지도 큰 딸과 남편의 나이가 14살 차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것입니다.

그 후 몇 밤을 웁니다. 그리고 그 후 어떻게 했을까요? 물론 그 수필집에는 독일에서 공부중인 큰 딸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던 일을 이야기 하고 큰 위로를 받습니다. 그러나 수필집에 기록이 되어 있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김영희 작가가 이 이야기를 수필집에 쓸수 있는 용기는 어디서 나왔을까요? 모성애가 아닐까요? 모성애로 인한 최후의 웃음을 터뜨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위대한 어머니이기에 다시 웃음으로 모든 것을 승리한채 자신의 떳떳한 이야기를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말씀을 거둡니다.

약 10년전에 저희 어머니는 하늘나라에 가셨습니다. 아버님도 그렇고 어머님도 저는 임종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염을 하는 시간에 맞추어 가 뵐수가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이 저에게는 아직도 따뜻하게 남아 있습니다. 어머니도 위대한 여인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말씀을 하시는듯 하셨습니다.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저희 어머니 뿐일까요? 모든 어머니들은 사라의 위대함을 소유하십니다. 모든 어머니들은 최후의 웃음을 소유하십니다. 사라처럼….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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