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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한복음 13:1-15) 09/11/2016)

유럽의 Croatia의 한 마을에는 아주 놀라운 황새 커플이 산다고 합니다. 약 15년전에 암컷 황새가 사냥꾼의 총에 맞아 부상을 입게 되었습니다. 이 황새는 봄에는 크로시야에서 살지만 가을이 되면 8,000마일 남쪽 남아프리카에 가서 겨울을 보내곤 합니다. 그러나 부상을 입은 암컷 황새는 남쪽으로 날아갈수가 없어서 그만 크로시야에 혼자 남게 되었습니다. 이를 본 한 주민이 부상을 입은 황새를 위해 자기 집 위에 새집을 지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가을에는 숫컷 황새는 남아프리카에 갔다가 봄에는 다시 크로시야로 찾아 옵니다. 이런 멋진 사랑의 관계를 장장 15년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봄을 맞이해서 아내를 찾아오는 장면을 동영상을 통해 보겠습니다. 먼저 황새가 매년 오고가는 곳이 어디인지 지도를 보시겠습니다. 계속해서 이들이 만나는 장면을 보시겠습니다.

picture1

 

Love-sick stork flies 8,000 miles every year to visit his injured soulmate

 

몇년간이라구요? 예, 15년간입니다. 보시다시피 암컷 황새는 날개를 다쳐서 제대로 날지 못합니다. 그러나 겨울 내내 남편을 기다립니다. 아마 둘 중에 하나가 죽기까지 이 아름다운 사랑의 여정은 계속되리라 생각됩니다. 한 마디로 이 둘은 끝까지 사랑하는 황새 커플입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보시면서 많은 생각이 오가실줄 압니다. 황새의 사랑이 어쩌면 최고의 사랑의 본보기가 아닌가 생각이듭니다. 끝까지 사랑하는 황새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끝까지 사랑하는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하나님께서 완성하십니다.

황새는 매년 아내를 찾아 옴으로서 자신의 사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단번에 우리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 말씀에는 주님의 사랑의 정수가 담겨져 있다고 생각됩니다. 1절 말씀입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사실 주님께서 12제자를 택하신 가장 큰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시기 위함이셨습니다. 12제자를 택하신 후 그 중에 누구는 진짜 제자로 삼고 누구는 들러리로 삼기 위하여 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한 사람 한 사람 끝까지 사랑하시기 위해서 12제자를 택하신 것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목회자인 John Stott 목사님이 ‘기독교의 본질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변하십니다.

“바로 그리스도다.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어떤 외적 제도가 아니다. 그것은 한 인격이며, 그 인격과의 인격적인 관계다.”

존 스토트 목사님이 이런 결론을 내릴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끝까지 사랑하시는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손에 한번 들어온 사람을 주님은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만약 공생애 3년간 제자들을 테스트 하셨더라면 당연히 누구 한 사람은 떨어졌을 것입니다. 가롯 유다. 그러나 주님은 가롯 유다까지도 도중에 떨어뜨리지 않으셨습니다.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보면 화근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2절 말씀입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롯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역으로 이용합니다. 돈을 좋아하는 유다는 마귀의 영향을 받아 주님을 팔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가롯 유다의 마음을 주님께서 모르실리가 없죠. 3절 말씀입니다.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주님은 당신을 배반하려는 가롯 유다를 포함해서 모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기 시작하십니다. 그런데 왜 발을 씻기셨을까요?

주님은 인격적 관계의 완성은 바로 발을 씻음을 통하여 이루어짐을 보여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가롯 유다의 배반이 주님의 인격적 사랑을 멈추게 할수 없었습니다. 아니 도리어 더 완성시키신 것이 아닐까요?

주님은 잠시 후 가롯 유다에게 팔려서 로마 군인들 손에 넘겨질 것을 다 아셨습니다. 그러나 그 것이 주님을 멈추게 하지 못 했습니다. 주님은 가롯 유다의 발까지 씻기십니다. 가롯 유다가 당신을 배반하는 것은 가롯 유다의 자유입니다. 주님의 자유는 당신을 배반하는 자의 발을 씻기는 것입니다. 끝까지 인격적 관계의 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끝까지 사랑하신 것입니다.

 

저에게 있어서 가장 후회되는 것이 있다면 끝까지 사랑하지 못하고 헤어진 관계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는 제가 끝까지 사랑을 베풀지 못해서 헤어진 경우가 있겠고 또 한 경우는 상대방이 끝까지 베푸는 사랑을 거부해서 헤어진 경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후자는 어쩔수 없습니다. 아마 가롯 유다가 이와 같은 케이스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주님의 끝없는 사랑을 받지 않은 것입니다.

좀 웃으운 이야기 같지만, 제가 끝까지 사랑하지 못해서 헤어진 이야기를 말씀드리면…, 오래 전에 저희 가족과 아주 가깝게 지내던 목사님 가족이 있었습니다. 자주 왕래를 하였고, 어느 날은 생각지 않은데서 선물을 받은적이 있는데, 이 분 가족이 노래를 좋아하는 가족이라, 그 가족과 함께 받은 선물로 뮤지칼을 관람할 정도로 가깝게 지냈습니다.

그런데 이 지역 목회가 잘 안 되서 멀리 캐나다 시골 백인 교회로 목회지를 옮겨서 떠나셨습니다. 말씀드린대로 노래를 좋아하신 분인데 어느 날 저에게 많은 CD패키지를 보내 오셨습니다. 저에게 하나를 선물로 드리지만 나머지는 교인들에게 팔아 달라는 편지와 함께…. 일단 CD를 들어 보았습니다. 본인의 노래를 CD로 만든 것입니다.

물론 저보다는 노래를 훨씬 잘 하시지만 저희 교인들 수준이 있는데 어떻게 내어 놓습니까? 귀가 발달될 만큼 발달되어 있는데…. 하여튼 한 두 달 후에 이곳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점심을 대접하면서 솔직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점심은 잘 드셨지만 그 후로는 연락이 없습니다.

요즘은 종종 후회가 듭니다. “뮤지칼을 부부 동반으로 네 명이 갔었는데 그 값에 반의 반만으로도 충분했을텐데, 내 돈으로 몇 장이라도 살걸…. 나는 끝까지 사랑하지 못했구나….”

끝까지 사랑하지 못한 결과 전에 함께 지냈던 시간도 다 물거품으로 사라진 느낌입니다. 이후로 제가 느낀 것은 사랑은 80%도 아니요 90%도 아니요 99%도 아닙니다. 사랑은 100%입니다. 99%라면 이미 사랑이 아닌 계산인 것입니다. 사랑은 끝까지 가는 것입니다. 처음 소개해드린 숫컷 황새가 “이 정도는 됐으니 이제는 안 찾아 갈꺼야” 하고 안 찾아 간다면 그것이 사랑인가요? 99%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런데 때로는 120% 130%의 사랑을 선호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6절 말씀입니다.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역시 베드로 답습니다. 그러면서 8절에 보면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말합니다. 이에 주님께서 말씀하시길,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주님은 베드로의 발을 씻어주지 않으면 인격적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아둔한 베드로는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만 할수 있는 말을 또 합니다. 9절 말씀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

저 같았으면 머리를 쥐어 박았을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가만히 있는데 자기는 목욕까지 시켜 달라고 하니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사실 저 같으면 머리를 쥐어 박았을 거라고 제가 자신 있게 말씀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실 제 친구 목사는 너무해도 보통 너무한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제가 마음이 좋다선 치더라도 어떻게 자기의 CD를 팔아준단 말입니까? 120% 130%의 사랑을 요구한 것입니다. 저는 이것은 아니다 하고 젊잖게 점심은 대접했지만 더 이상 가진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쥐어 박진 않습니다. 도리어 타이르십니다. 10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주님께서 타이르신 반면에 저는 그렇지 못하는 이유를 저는 잘 압니다. 주님은 이미 조만간 흘리실 당신의 보혈로 베드로와 인격적 관계를 갖고 있었습니다. 인격적 관계를 갖고 있었기에 엉뚱한 요구를 하는 베드로를 타이를수 있으셨습니다.

그러면 이 때 이처럼 타이르시면서 주님이 마음이 상하셨을까요? 아니면 덤덤하셨을까요? “내가 너를 수제자로 삼다니 후회가 된다” 생각하셨을까요? 결과적으로는 계속 수제자로 삼으신 것을 보니 별로 마음이 상하신 것 같지 않습니다. 아니 도리어 이를 계기로 더욱 수제자로 삼기로 작정하셨을지도 모릅니다. 그 다음 주님의 말씀을 보면 짐작할수 있습니다. 10절 하반절 이하 말씀입니다.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하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주님은 은근히 베드로와 가롯 유다를 비교하십니다. 베드로는 솔직히 자신의 마음을 내 뱉는 자였습니다. 가롯 유다는 자기의 속 마음을 내 놓지 않는 자였습니다. 주님께서 발을 씻기실 때 자신의 마음을 숨기고 씻김을 받은 자였습니다. 주님은 당연히 베드로를 좋아 하셨습니다. 주님은 솔직하게 자기의 속 마음을 다 내어 놓는 베드로를 좋아하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미 인격적 관계가 맺어져 있는데 속 마음을 다 내 놓을수록 더 그 관계는 더 돈독해지지 않겠습니까? 속 마음을 말했을 때 관계가  깨진다면 인격적 관계가 성립되어 있는 것은 아니죠. 주님은 아마 120, 130% 요구하는 베드로가 더 마음에 들었을지 모릅니다.

 

어느 목사님의 설교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들었습니다.

“우리나라 교계와 학계에서 치유상담학으로 아주 독보적인 사역을 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정태기 교수님이신데 그는 섬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많은 상처를 받고 자랐습니다. 세월이 흘러 그는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을 갔습니다. 그는 미국에서 상담치유 공부를 하면서 6년 동안 아주 힘든 나날을 보냈습니다.
어느 날 연구실을 찾아갔을 때, 그 지도교수가 이런 말을했다고 합니다
“태기! 나는 더 이상 자네를 지도할 수 없네. 자네 고국으로 돌아가게!”
그 순간 그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심한 배신감에 치를 떨었습니다.
“어떻게 해 온 공부인데 …” 지난 6년 동안의 수고가 허무하게 되었습니다.
분노에 떨면서 그 교수의 연구실 문을 나오면서 문을 세차게 닫았습니다.
얼마나 세차게 닫았든지 폭탄터지는 소리가 났습니다.
그리고 계단의 난간을 붙들고는 한없이 울었답니다.
바로 그때 누군가가 등 뒤에서 다정하게 어깨를 감싸안는 손길이 있더랍니다.
뒤돌아 보니 방금 자기에게 그런 엄청난 선언을 했던 자기 지도교수더랍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 태기, 자네 이제 나와 함께 공부할 자세가 보이네”
정태기 교수가 참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착실히 할 때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고 이제 불손한 반응을 보이니까 다시 하자 그러고… 뭐가 뭔지 알수 없었습니다.
그때 다시 그 지도교수가 말을 하더랍니다
“자네가 미국에 온 것은 상담기술을 배우러 온 것도 아니고 치유를 배우러 온 줄로 아네. 나는 그 동안 진실을 끄집어 내려고 많이 애써보았지만 자네는 꼼짝도 않더군. 하지만 자네는 내가 자네 속을 건드리는 것을 알곤 나를 미워하기 시작했네. 그런데도 자네는 나를 볼 때마다 공손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네. 마음속엔 도리질을 하면서도….
6년 동안 계속해서 겉다르고 속다르게 행동하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의 아픔을 치유할 수 있겠나? 그런데 오늘 비록 부정적이기는 하지만 처음으로 자네는 겉과 속이 일치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네. 이제 치유학을 공부할 수 있는 자세가 된걸세“
교수님은 정태기 학생의 그 모습 그대로를 보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 후에만이 인격적인 관계가 성립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발 씻음이 아닐까요?

 

저는 친구 목사가 무리한 것을 요구했을 때, 아니 그 본색을 드러냈을 때, 이건 아니다 생각한 것입니다. 발을 씻기지 않은 것입니다. 인격적 관계를 포기한 것입니다. 만일 제가 끝까지 사랑했으면 지금은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한 생각도 종종 듭니다.

물론 발을 씻어주는 것은 무조건 요구를 들어주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수제자로 삼으셨습니다. 베드로와 더 깊은 인격적 관계를 갖게 된 것입니다.

주님은 바로 이 인격적 관계를 위하여 세상에 오신 것임을 다음에 말씀에서 피력하십니다. 14, 15절 말씀입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주님은 가롯 유다의 발도 씻기셨습니다. 베드로의 발도 씻기셨습니다. 모두를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사랑을 서로 서로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120%를 원하던 130%를 원하던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분 그대로를 보고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인해 이루어진 인격적 관계를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덧입게 되고 우리의 이웃도 그리스도의 인격을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살아 있는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는 올해 63주년을 맞이합니다. 저는 벌써 22년째 목회를 하고 있고, 많은 분들이 저희 교회에서 10년 내지 그 이상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계십니다. 오래 지나다 보면 좋은 점도 있지만 보지 않을 것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참 신앙의 꽃은 언제 피어날까요? 보지 못할 것을 보았을 때부터가 아닐까요? 그 때가 끝이 아닙니다. 그 때가 시작입니다. 그 때 우리는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님을 본받게 되지 않을까요? 그 때 정녕 우리는 서로 발을 씻기는 자들이 되는 것이 아닐까요? 그 때 비로서 살아있는 그리스도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이 세대는 어느 때보다 살아 있는 그리스도가 필요한 세대입니다. 서로를 위한 살아있는 그리스도가 되십니다. 주님을 본받아 끝까지 사랑하는 자가 되십시다. 주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사실 말씀 준비를 하면서 제가 친구 목사의 발을 씻겨 주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아마도 백인 목회를 하면서 힘들 때마다 노래를 부르면서 더 멋진 목회자가 되어가지 않았을까요? 멋진 성악가가 되었을지도 누가 압니까? 지금 얼마나 멋진 삶을 살게 되었을지…?

그런데 어느 책을 읽다가 에디스 쉐퍼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현실 생활에서 중요한 일은 북 치고 꽹과리 치며 다가오지 않는다. 당신이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 당신이 지금 읽고 있는 책이 당신 생애에 가장 중요한 일이다.”

 

교우 여러분,

바로 오늘 만나고 있는 그 분을 끝까지 사랑하십시다. 90%도 아니고 99%도 아니고 100% 사랑하십니다. 100% 사랑하는 것은 이웃의 발을 씻는 것입니다. 엄청난 것을 요구할 때 그 요구를 다 들어 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모습 그대로 그를 받아주는 것입니다. 이 때 우리는 21세기의 살아 있는 그리스도가 될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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