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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종교개혁 (사도행전 3:1-10) 10/20/2016

 

지난주 청년부 헌신예배로 드렸었습니다. 예배 후에 보니 청년 아닌 분들이 더 은혜를 받은 것 같았습니다. 한 분은 청년 시절에 이 설교를 들었었으면 좋았겠다고 말씀하신 분이 있는가 하면 한 분은 나이로는 청년 시절을 지났지만 자기도 청년이라고 하면서 말씀에 감사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분에게 시간이 없어서 다 못 말씀드렸는데 실상은 모든 사람이 청년이라고 말씀 드리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다음의 이야기가 이를 증명합니다.

 

오래전 전라남도 해남 땅끝마을에 지지리 가난한 젊은 소년이 있었습니다. 공부가 무척하고 싶었으나 소작을 하거나 나무를 팔아 근근히 살아가는 아버지의 수입으로는 학교에 가기가 어려웠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와 함께 다니는 교회에서 기도하던 중 하나님께 떼쓰는 기도문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 전상서,

하나님, 저는 공부하고 싶습니다.

굶어도, 머슴살이도 좋으니 제게 공부할 길을 열어 주십시오.’

 

소년은 봉투 앞면에 ‘하나님 전상서’라 쓴 후 뒷면에 자기 이름과 주소를 적어 우체통에 넣었습니다. 소년의 편지를 발견한 우체부는 고민 끝에 하나님 전상서라 했으니 교회에 가져다 주었습니다. 집배원이 전달한 편지는 해남읍교회 이준묵 목사의 손에 전해졌습니다. 함석헌 선생의 제자로서 계몽운동에 앞장서던 이 목사는 그 편지를 읽고 큰 감동을 받습니다.

이 목사님은 소년을 불러 교회에서 운영하는 보육원에서 일을 돕게하며 학교를 보내 주었습니다. 소년은 후에 한신대를 거쳐 스위스 바젤대학교로 유학을 하며 박사 학위를 받아 모교에서 교수를 거쳐 총장이 되었습니다. 바로 한신대 오영식 총장입니다. 이 준묵 목사님의 사랑으로 인해서 오영식 소년은 총장이 된 것입니다. 이준묵 목사님은 이처럼 많은 훌륭한 일을 하신 분으로 현재까지 많은 분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한편 이 목사님께서 은퇴 후 나이 80이 되었을 때 워싱턴 D. C.를 방문했습니다. 거기서 평생을 한국에서 선교하셨던 유화례 선교사를 만납니다. 이 분은 스미스 칼리지 출신으로 일제시대에 한국 여성 교육에 헌신적으로 섬기신 선교사님이십니다. 수피아 여학교 교장으로 섬기셨습니다. 이 분과 이 목사님은 한국에서 깊은 교제를 나눴던 사이입니다. 98세가 된 유화례 선교사님이 이 목사님에게 묻습니다.

“이 목사, 올해 나이가 몇이요?”

“예, 제가 올해 80입니다.”

“아 그래 아직 어린애구나.”

나이 80이 어린애랍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청년이라는 뜻이 아닐까요? 98세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유화례 선교사님은 98세의 나이에 청년의 정기를 갖고 계셨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평생 청년의 정기를 갖고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이 나옵니다. 누구인지 살펴 볼까요? 1절 말씀입니다.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제 구 시 기도 시간은 요즘식으로 하면 오후3시인데 사실 예수 믿는 자들을 위해서 정해진 기도시간은 아닙니다. 이것은 유대교에서 행해지는 매일의 기도 시간 중 하나입니다. 유대교는 하루에 두 번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오전 9시와 오후 3시.

오늘 종교 개혁주일예배를 드리는데 이는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의 부활 승천을 체험하였고 성령 강림을 받았지만 그대로 유대 전통을 따르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의 참 의미를 오늘 본문 말씀이 일깨워주는 것 같습니다.

정말 유대교에서 예수교로 바뀌는 것보다 더 큰 개혁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초대교회 교인들은 외형적인 개혁은 중요시 여기지 않은 것 같습니다. 유대교와 예수교로 따로 구별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속으로는 당연히 자기들이 유대교를 잇는 자들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유대교적 종교 행사에 큰 의미를 두고 따라 간 것입니다. 곧 하루 아침에 자기들끼리 따로 예배를 드리고자 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들은 여느 때처럼 유대교 전통을 따라서 하루 두 차례 씩 성전에 가서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계속 말씀을 살펴 보겠습니다. 2절 말씀입니다.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분을 사람들이 늘 메고 온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시간적으로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가는 바로 그 시간에 함께 메고 온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추측할수 있는 것은 이 친구들은 오후 세 시에 많은 사람들이 제사를 드리러 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중에 베드로와 요한이 속해 있었습니다.

그럼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추측해 볼수도 있겠습니다. 이 사람들이 앉은뱅이를 성전 문에 놓고 어디를 가서 무엇을 했을까요? 확실하진 않지만 이들도 유대인일테고 그러면 이들도 제사를 지내러 성전에 오는 길이었을줄 압니다. 기왕 자기들도 제사를 드리러 와야 하는데 이 때 많은 사람들이 성전으로 오니 늘 같은 시간에 함께 데리고 온 것 같습니다. 자기들은 예배를 드리고 친구 앉은뱅이는 구걸을 하고…. 일석이조입니다. 하여튼 그들은 앉은뱅이를 성전 문에 앉히면서 이렇게 기도했을 겁니다.

“우리는 오늘도 친구를 데려 왔습니다. 오늘도 많은 착한 자들을 보내주소서.” 그리고 그들은 제사를 드리기 위해 성전 안에 들어갔을 것입니다.

이제 앉은뱅이는 여느 때처럼 혼자 남게 되었습니다. 3절 말씀입니다.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성전으로 들어가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많은 사람들은 앉은뱅이를 못 본척하며 딴짓을 하면서 지나갑니다. 그러나 자기가 있는 데도 상관치 않고 성전문으로 걷고 있는 두 사람이 눈에 보입니다. 그래서 작은 희망이 생깁니다. 용기를 내서 그들에게 구걸합니다. 4절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얼떨결에 앉은뱅이는 두 사람을 바라 봅니다. 6, 7절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은과 금을 기대했는데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생전 처음 듣는 말을 합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앉은뱅이는 잠시 어리벙벙해 합니다. 순간 누군가가 자기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킵니다. 갑자기 발과 발목에 힘이 생깁니다.

 

자, 그럼 여기에서 두 가지 손을 잠시 비교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친구들의 손과 베드로와 요한의 손을 비교해 봅니다. 친구들의 손은 앉은뱅이를 성전문에 앉혀 놓는 손입니다. 물론 이 손도 자비의 손입니다. 제사를 드리러 오는 길에 앉은뱅이를 데리고 와서 매일 성전에 앉히니 그들의 손도 자비의 손입니다.

두 사도들의 손은 어떻습니까? 이들의 손도 자비의 손입니다. 그런데 사도들의 손은 자비의 손일뿐 아니라 능력의 손이었습니다. 앉은뱅이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에 힘이 생겼습니다.

사실 앉은뱅이와 친구들도 오랜 동안 함께 지내다 보니 지체가 되었었습니다. 친구들은 앉은뱅이의 발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반면 사도들은 앉은뱅이의 오른손을 붙잡음으로 인해 또한 한 지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하나님의 능력을 나누는 지체가 된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가 되는 지체가 된 것입니다.

 

오늘 종교개혁 주일을 맞아 전 세계 개신교 교회들이 같은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말은 달라도 문화는 달라도 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한 지체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 아닐까요?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해 전세계가 하나가 되어 주님을 높이는 예배를 드리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처럼 최초의 종교개혁은 형식을 뒤집어 엎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해 한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최초의 종교개혁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계속 살펴 볼까요? 8절 말씀입니다.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 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아주 깊은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걷고 뛰고 하는 모습입니다. 정말로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생전 처음으로 걷고 뛰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큰 축복이 있었습니다.

아마 앉은뱅이는 이 두번째 축복을 더 기다리고 기다렸을지 모릅니다.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 가면서….” 사도들과 함께 성전에 들어 가는 것이 뛰고 걷는 것보다 훨씬 더 소중한 축복이었습니다.

사실 앉은뱅이가 성전에 들어 갈수 없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앉은뱅이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장애인들은 성전에 들어 올수 없었습니다. 문둥병자들처럼…. 곧 앉은 뱅이가 걷기를 간절히 사모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걷기를 바란 것이고 또 하나는 성전에 들어가길 바랬습니다.

그런데 이제 엄연히 성전에 들어갈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누구와 함께 들어 갑니까? 두 사도와 함께 성전에 들어갑니다. 두 사도와 함께 어깨동무를 하면서 성전으로 들어 간 것입니다. 이 때 세 사람은 춤을 추지 않았을까요? 어깨 동무 춤을….

성전 안에서 두 사도와 어깨 동무 춤을 추고 있는 앉은뱅이를 보면서 백성들은 눈이 휘둥그레 졌을 것입니다. 9, 10절 말씀입니다.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생각해 보십시다. 이제 앉은뱅이가 두 사도와 함께 어깨동무 춤을 성전 안에서 추고 있다면 성전 안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제사장이 집례하는 예배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면 종교개혁은 자연히 따라 오는 것입니다.

종교 개혁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 종종 예수님께서 성전을 청결케 하신 이야기를 언급하곤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예수님이니 할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그 누구도 성전을 뒤 엎은 사람은 없습니다. 사도바울도…. 단지 우리는 예수님의 능력을 힘 입어 춤을 춤으로 주님의 성전 청결을 완성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이 모든 것의 시작이 무엇이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해 능력이 임한 것을 믿는 거입니다. 이 능력에 대한 확신을 가진 자들이 바로 청년입니다.

이들은 이웃과 하나님의 능력을 나눕니다. 약한 자를 일으킵니다. 그래서 한 지체가 됩니다. 결국 함께 어깨동무 춤을 추는 자들이 됩니다. 이처럼 복음이 들어 가는 곳에는 청춘이 살아납니다.

 

교우 여러분,

종교개혁은 외형이 바뀌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한 능력이 임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은 말씀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임합니다. 주님의 보혈로 인해 죄사함을 받았다는 확신과 더불어 승리의 확신을 안고 사는 자들에게 임합니다. 이들이 참 종교개혁자들입니다.

 

종교 개혁의 다섯 가지 주제가 되는 말이 있습니다.

오직 말씀, 오직 그리스도,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하나님께 영광

 

제일 먼저가 말씀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은혜를 받습니다. 죄사함의 은혜를 받습니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이 생깁니다. 승리의 확신이 생깁니다. 그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니 항상 청년일수밖에….

참 종교개혁자는 매일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자들입니다. 98세가 넘을지라도…. 늘 새로운 어깨동무춤을 만들어 갑니다. 늘 새로운 파트너를 만들어 갑니다.

 

제가 존경하는 어느 목사님이 계십니다. 아직도 그 분의 말씀이 늘 저의 뇌리에 남아 있는 것이 있습니다. 당신의 나이는 항상 32 살이라고 말씀하시곤 하셨습니다. 이유는 주님께서 33살에 돌아가셨으니 자기가 감히 어떻게 주님 보다 나이가 더 많다고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32살이라고 말씀하시곤 하셨습니다. 항상 청년이라는 것입니다. 좀 억지가 섞여 있죠.

그런데 우리가 진짜 평생 청년인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청년 예수의 능력을 선물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처음 소개해 드린 이준묵 목사님에게 “아직 어린애네” 말씀하신 유화례 선교사님은 뉴욕 주에서 태어나 스미스 칼리지에서 수학을 전공하고 고등학교 수학 교사가 되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때는 적십자 요원으로 활동을 합니다. 주님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기로 결심한 후에는 미국 장로교 선교사가 되어 조선에 오게 되었습니다. 1927년 수피아여학교 음악교사가 된 이후 교장까지 역임을 합니다.

그뿐 아니라 여수 애양원에 머물며 나병 환자들에게 복음도 전하고 나병 환자의 자녀를 양녀 삼아 이름을 진주라 하고 키웁니다. 여러 군데를 전도하러 다니는데 YWCA를 운영하고 성경학교를 세우고 때로는 교도소까지 다니면서 전도를 합니다.

그가 이렇게 동분서주 뛰어 다니면서 복음을 위하여 살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복음이 주는 축복 때문이었습니다. 복음이 들어 가는 자들은 영원한 청년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받은 자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항상 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98세가 되었을 때 한국에서 온 80세 된 제자 이준묵 목사님에게 “아직도 어린애네” 말씀하실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이들어서도 이준묵 목사님과 어깨동무 춤을 추고 계신 것입니다.

이 귀한 축복에 우리 모두 초대를 받았습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World Bank총재로 계시는 김용박사님을 모두들 잘 아실줄 압니다. 자랑스런 한국인입니다. 김 총재께서 오늘의 자신이 되게 한 계기가 있다고 합니다. John Sloan Dickey라는 한 때 다트머스 총장이셨던 분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총장 취임식에서 디키 총장은 다음과 같이 연설하였다고 합니다.

“학생 여러분, 2 가지만 기억해 주십시오. 첫째는 세상의 문제는 바로 여러분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세상에 불가능한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열정과 끈기만 있다면 처음에는 불가능해 보였던 일들도 가능해집니다. 세상이 정의 내린 삶에 만족하지 마세요. 당신의 노력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음을 의심하지 마세요.”

김용 박사는 디키 총장의 ‘세상의 문제가 바로 나의 문제’라는 가르침에 큰 영향을 받습니다. 그는 의사로서 세계 어느 곳이나 빈곤 때문에 병약한 자들을 찾아 뛰어 다니는 삶을 삽니다. 하바드 대학 교수로서…. 이 모든 것을 인정받아 World Bank 총재가 된 것입니다.

디키 총장 한 마디에 평생 청년처럼 온 세계를 뛰어 다니는 김 박사님의 모습이 자랑스럽습니다.

재밌는 사진을 한 장 보았습니다. 다트머스 대학교 총장 시절 교수단과 어깨동무를 하고 춤추는 사진을 보았습니다. 청년 김용 총장이셨습니다.

교우 여러분,

그러나 우리에게는 더 놀라운 능력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에는 놀라운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죄를 사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오늘 괴로워 하고 있는 죄를 사하실 능력이 있습니다. 아울러 약한자를 강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 능력은 우리를 평생 쫓아 올 것입니다. 우리가 늘 말씀 앞에 선다면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World Bank총재보다 더 큰 일을 하도록 불리움을 받았습니다. 더 놀라운 어깨춤을 추도록 불림을 받았습니다. 이놀라운 능력으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다. 어깨동무 춤을 추면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 뛰어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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