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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양을 알고

날짜 : 2015.03.08
예배명 : 사순절셋째주일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나는 내 양을 알고
성경본문 : 요 10:1-15

http://kcbostonmedia.cponsolny.com/Sermon_video_master/Sermon_20150308.wmv

노부부가 필라델피아 작은 호텔에 유숙하러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 지역에서 큰 회의가 열리고 있어서 방이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호텔 종업원은 어쩔 수 없이 가여운 노부부에게 자기의 방을 사용하도록 권하였습니다. 노부부는 감사히 받아드렸습니다. 다음 날 아침 호텔을 떠나면서 노부부는 종업원에게 말합니다.
“당신은 호텔 주인이 될 사람이네요. 언젠가 내가 당신을 위해 호텔을 하나 지어드릴지도 몰라요.”
2년이 지났습니다. 종업원인 George Boldt 씨는 어느날 편지를 받습니다. 뉴욕행 왕복표였습니다. 종업원은 뉴욕을 방문하여 노부부를 찾아 갑니다. 노부부는 Fifth Ave.와 34가 코너로 종업원을 데리고 갑니다. 그리고 큰 건물을 가리키면서 말합니다.
“이 건물이 당신이 운영할 호텔이에요. 내가 당신을 위해 지었어요.”
그의 이름은 William Waldorf Astor이고 세계적인 Astoria 호텔이 이렇게 해서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놀라운 메시지가 담겨져 있습니다. 노부부를 가엽게 여겼을 때 놀라운 축복을 받았을 뿐 아니라 세계적인 호텔을 만들어 가는 역사적인 일에 크게 공헌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야릇한 생각이 들게도 됩니다. 얼마나 운이 좋은 종업원이었는가. 천만명 중 한 명이 얻을까 말까하는 운이 튼 종업원이라는 생각이 들게도 됩니다. 아니면 이런 생각도 들지 모르겠습니다. “그 종업원은 정말로 운이 좋은데 그것도 그 때니까 가능하지 이제는 그런 일은 절대로 기대할 수 없어….” 정말 그럴까요?

저는 확신합니다. 이번 사순절을 은혜 중에 잘 지내는 분들은 Boldt씨가 받은 축복보다 더 큰 축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사순절을 지킬 필요가 있을까요?
오늘 사순절 세 번째 주일 예배로 드립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상고하면서 우리에게 임할 사순절의 축복을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여느 때처럼 아주 깊은 진리를 쉬운 이야기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1, 2절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양을 찾는 두 그룹이 있습니다. 하나는 절도며 강도요, 또 하나는 목자입니다. 두 그룹의 공통점이 있고 또 차이점이 있습니다. 공통점은 둘 다 양을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차이점은 찾는 방법이 다릅니다. 절도와 강도는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담을 넘어 들어 갑니다. 반면 목자는 문으로 들어갑니다. 아주 큰 차이점입니다.

신명기 28:6 절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이 말씀의 뜻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때 복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 목을 주시느냐 하면 문을 들어오고 나가고 할 때 복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곧 문은 축복의 문입니다.
본인이 자기의 집 문을 들락날락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웃이 그 집 문을 들락날락할 때마다 복이 임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손님 대접할 때 천사를 대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곧 문은 축복을 불러 옵니다. 이웃이 문으로 들어 올 때 이웃은 천사가 되는 복을 누리는 것이고 집 주인은 그로 인해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강도는 담으로 넘어 오고 목자는 왜 문으로 들어 오는지 이해가 갑니다. 목자는 복된 분이시기에 문으로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습니다. 양들은 근시입니다. 멀리 못 봅니다. 지금 문으로 누가 들어오고 있는지 담을 넘어 누가 들어오고 있는지 겨우 알 수 있겠지만 들어 온 후에는 구분할 능력이 없습니다. 근시이기 때문에… 그러면 양들은 어떻게 강도와 목자를 구분할 수 있을까요? 3절 말씀입니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양이 눈이 나빠서 목자의 얼굴을 멀리서 보고 구별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문지기가 문을 열었을 때 들어오는 목자는 멀리서 구분합니다. 곧 잘 보이지는 않지만 목자의 모습을 씨루엣 정도로 보게 됩니다. 이 때 목자가 자기의 이름을 부를 때 양은 목자의 음성을 처음 듣게 되고 이 음성의 소유자가 자기의 목자임을 알게 됩니다. 이처럼 양은 목자의 얼굴은 구별할 능력이 없지만 다행히 귀가 밝기에 목자를 알아 볼 수 있습니다.
곧 양은 축복의 문을 통해 들어 온 목자의 얼굴은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축복의 문을 통해 들어 오자마자 이름을 불러주는 음성을 듣게 됩니다. 이 때 양은 자기의 이름을 알게 되고, 아울러 자기의 이름을 불러주는 따뜻한 목자의 음성을 기억하게 됩니다.

그러니 이제는 안심입니다. 목자의 모습은 기억에 없어도 목자의 음성은 알게 되었습니다. 자기의 이름을 부르는 그 음성을…. 4,5 절 말씀입니다.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갑자기 어디선가 자기의 이름을 부르는 음성이 들려 옵니다. 자기의 이름은 이름이지만 음성이 다릅니다. 양들은 어떻게 할가요? 따라 갈까요? 더 이상 따라가지 않습니다. 이미 양들은 목자와 강도를 구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목자의 음성과 강도의 음성이 다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목자와 강도의 차이점과 공통점이 또 다시 드러납니다. 공통점은 둘 다 양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차이점은 음성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음성이 다르기에 양들은 목자에게로만 달려 가는 것입니다. 이 목자는 축복의 문으로 들어오신 분입니다.

그러면 당신의 음성을 듣고 따라오는 양들에게 목자는 무어라고 말씀하실까요? 7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목자는 스스로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스스로 문이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9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문을 들락날락하면 어떻게 되는지 10절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님을 문으로 삼고 들락날락하는 자들은 놀라운 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너무나도 확신에 차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주님은 신명기의 말씀을 완성시키는 것입니다.

카잔차키스의 ‘미칼레스 대장’이라는 소설에 나오는 한 장면입니다. 젊은 용사가 불사신 같다고 생각하는 백발의 노인을 찾아옵니다.

“’어르신.’ 젊은 용사는 노인의 손을 잡으며 말합니다. ‘어르신은 거대한 상수리나무처럼 사셨다고 들었습니다. 폭풍으로 숨 쉬며 백년 간이나 괴로워하시고, 이기고 싸우고 일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르신, 백 년을 살아보니 인생이라는 게 어떤 것 같습니까?’
‘시원한 물 한 사발 같네.’ 노인이 대답했습니다.
‘아직도 목이 마르십니까?’
백발의 노인은 팔을 쳐들었습니다. 넓은 저고리 소매가 스르르 내려 앉으며 깡마르고 주름진 팔이 어깨까지 드러났습니다. 노인은 큰 소리로 마치 저주라도 내리듯 호령합니다.
‘갈증을 다 채운 자에게 화 있을진저!’”

저는 노인의 모습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봅니다. 예수님은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되는 삶을 살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사실 예수님은 예수님이시니 젊잖게 말씀하신 것뿐인줄 압니다. 예수님의 속 마음은 노인과 같았을 것입니다.
“갈증을 다 채운 자에게 화 있을진저!”
모든 인간에게는 최고를 향한 갈증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자들만이 양의 문을 들락날락하게 되지 않을까요? 그래서 생명을 얻고 더 얻는 삶을 살게 되지 않을까요?

교우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이 땅에 목자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스스로 양의 문이 되셨습니다. 양의 문을 들락날락하는 자들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양의 문을 들락날락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궁금해 집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을 통과해서 들락날락한다는 것인데 어떤 것일까요? 그렇다고 너무 어렵게 생각하실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예수님을 맛보는 것일줄 압니다. 예수님을 맛보다 보면 양들은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목자와 강도와의 큰 차이를 볼 수 있습니다. 강도는 양을 잡아 자기 배를 채우기 원합니다. 목자는 어떻습니까? 11절 말씀입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예수님은 양들을 위해 당신이 잡혀 먹히는 곧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을 맛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구멍이 뻥 뚫리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양의 문이 되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구멍이 뻥 뚫리신 예수님을 맛 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사순절을 지키는 것입니다. 사순절 기간 기도와 절제 그리고 구제를 하는 이유는 우리를 위하여 구멍이 뻥 뚫리신 예수님을 맛 보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맛 보면 맛 볼 수록 우리는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되어 갑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복의 근원으로서 문으로 들어 오셨고 손수 문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우리를 위하여 구멍이 뻥 뚫리신 예수님을 맛보지 않게 되면 어떻게 되죠? 12, 13절 말씀입니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어느덧 삯꾼과 목자를 구분하지 못하게 됩니다. 구분을 못하면 어떻게 되죠?

클린턴 대통령이 옥스퍼드 대학에 있을 때 어느 파티에서 Jeffrey Stamp라는 대학원생을 만났습니다. 클린턴은 즉시 까만 주소록을 꺼내들고 물었습니다.
“옥스퍼드에서 무슨 공부를 하십니까?”
“나는 Pembroke college 풀브라이트 장학생이요.” 클린턴은 주소록에 ‘펨브룩’이라고 적은 후에 그의 학부와 전공에 대해서도 물었습니다. 의아해진 제프리는 왜 그런 것을 적는 거냐고 반문했습니다.
“나는 정치에 뜻이 있어 아칸소 주지사에 출마할 계획입니다. 그래서 만나는 사람마다 모두 알아두려는 것입니다.”
사실 클린턴은 조지타운 대학에 다닐 때부터 밤마다 그날 만난 사람들의 이름과 기억해야 할 사실들을 적어 놓는 습관이 있었다고 합니다.

오해 마십시오. 제가 클린톤은 삯꾼으로 비유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클린턴은 자신의 미래를 위하여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후에 클린턴을 만났을 때 클린턴이 자기의 이름을 기억하고 잇었다면 얼마나 신나겠습니까? 그런데 아무리 이름을 기억했다고 해도 누구를 위해서…?

목자와 삯꾼을 어떻게 정의를 내려야 할 지 분명해진 것 같습니다. 목자는 생명을 얻게 하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면 삯꾼은…? 양을 해치는 자? 삯꾼은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양을 이용하는 자들입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양들을 망치지 않습니다. 양들이 망하면 자기의 이름도 손해를 보니 말입니다. 양들로 하여금 이름을 불러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게 하는 자들이 21세기의 삯꾼인 것 같습니다. 삯꾼에게는 이런 심정이 없습니다.
“갈증을 다 채운 자에게 화 있을 진저!”
삯꾼은 이름을 불러줌으로 양들의 갈증을 마비시킵니다.
사실 갈증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갈증 대문에 우리는 dehydration이 되지 않습니다. 갈증이 오면 물을 마시니 말입니다. 그런데 갈증이 마비되었을 때는 dehydration이 와도 알지 못합니다. 위험한 지경에 이릅니다.
곧 삯꾼은 자기의 갈증만을 끝없이 채워가는 자들이 아닐까요? 순진한 양들은 거기에 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종종 삯꾼들이 담을 넘어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사회 생활을 하다보면 어느덧 우리는 삭꾼과 목자를 구분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염려 마십시다. 계속 목자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14, 15절 말씀입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예수님을 계속 알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시는 예수님을 더욱 깊게 알아갈 때 우리는 결코 삯꾼에 속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더욱 알아가기 위하여 사순절을 지키는 것입니다. 사순절 기간, 다시 말씀드립니다. 기도와 절제 그리고 구제를 통하여 예수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아갈 때 우리는 쥐덫에 걸리지 않을 뿐더러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William Waldorf Ator씨가 Boldt씨를 위해서 세계적인 Astoria호텔을 지어 주셨는데 참 목자되신 주님은 더 크고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시지 않으실까요?
이러한 기대를 안고 남은 사순절 양의 문 되신 주님을 들어오고 나오는 삶을 사십시다.
주님의 가슴 속에 울리는 음성을 느끼십시다.
“갈증을 다 채운 자에게 화 있을진저!”

말씀을 거둡니다.
성 프란시스가 성 프란시스가 되는 유명한 사건이 있습니다. 뻥 뚫린 주님의 문을 들어간 첫번째 관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프란시스는 원래 나병 환자에 대해 큰 두려움이 많았다고 합니다. 어느 날 말을 타고 가는데 길에서 나병환자를 만납니다. 프란시스는 순간 놀랍니다. 그러나 곧 이어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을 생각하면서 말에서 내려 나병 환자에게 키스를 합니다. 나병 환자가 돈을 달라고 하기에 돈까지 건네 줍니다. 곧바로 말에 올라 탔습니다.
순간 주위를 살펴 보는데 나병 환자는 온데 간데 사라져 버렸습니다. 구제를 통하여 그는 양의 문에 들어간 것입니다. 뻥 뚫린 구멍으로, 그리하여 당신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풍성한 삶에 초대를 받게 된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주님의 초대에 응하십시다. 양의 문이 활짝 열려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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