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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를 입은 자

날짜 : 2015.02.08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은혜를 입은 자
성경본문 : 창 6:5-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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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눈이 많이 오는데, 한 동안 눈이 안 와서 올 겨울은 무사히 넘기나 생각들 하셨을줄 압니다. 밀렸던 눈까지 더해서 갑자기 눈이 많이 내리고 있습니다. 사실 비가 많이 오면 더 오늘 설교가 가깝게 느껴질수 있었는데, 눈 대신 비가 많이 내린다고 생각하고 오늘 말씀을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어느 날 여류시인 라헬 바른하겐이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무엇을 하십니까?”
시인은 대답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요. 저는 삶이 비처럼 제게 내리도록 둡니다.”

아주 재미있으면서도 많은 것이 담겨져 있는 표현입니다.
“삶이 비처럼 제게 내리도록 둡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입니다. 방과 후에 소낙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학교에서 집까지 걸어서 30분 거리였는데 항상 걸어 다녔습니다. 소낙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며 학교 정문 옆 수위실 앞에서 비를 피하고 있었습니다. 10분이 지나도 비가 그칠 낌새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친구가 소나기를 맞으면서 운동장을 지나 수위실 쪽으로 걸어 오고 있었습니다. 그 것이 너무도 멋있어 보였습니다. 사실 그 친구는 부잣집 자녀였습니다. 그 때 한국에서 2층집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부잣집 친구니 옷이 젖는 것도 별로 문제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순간 부잣집이건 아니건 소나기를 맞으면서 걸어 오는 모습이 너무 좋아 보여서 저도 무작정 수위실을 나서서 친구의 소낙비 친구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그 친구의 이름도 기억이 안 나고 초등학교 졸업 후 만나 본 기억도 없습니다만, 가끔 비가 올 때면 생각나는 저의 비 친구가 되었습니다. 저는 비 친구 덕분에 바른하겐의 표현이 쉽게 가슴에 와 닿습니다.
“삶이 비처럼 제게 내리도록 둡니다.”

수위실 안에서 비를 바라 볼 때 비는 저의 삶의 방해거리였습니다. 그런데 친구를 따라 비에 저를 맡기고 나니 저는 그 순간부터 비의 축복을 만끽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집이 부자였다면 그 후도 종종 소낙비를 맞았을텐데 별로 그 후로는 기억이 없습니다. 그러나 삶이 비처럼 제게 내리도록 두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잘 알게 되었습니다.

한편 어떤 분은 저에게 이렇게 반문하실지 모릅니다.
“목사님, 아직도 진짜 인생을 모르시는군요. 인생의 쓴 맛을 보고 나면 그런 표현 쉽지 않습니다.”
맞습니다. 인생을 살아 본 사람이라면 쉽게 이런 표현을 할수 없습니다. 그런데 인생을 호되게 살아 본 사람들이 이런 표현을 한다면 거기에는 깊은 그 무엇이 있지 않을까요?
이런 표현을 할수 있었던 사람 중 한 사람이 오늘 본문 말씀의 주인공 노아였을줄 압니다. 노아는 인생을 호되게 살아 본 사람입니다. 창세기 기자는 노아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8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그런데 제가 노아가 호된 인생을 살았다고 했는데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노아는 은혜를 입었다고 창세기 기자는 말합니다. 그러면 노아의 삶이 어떠했는지 먼저 살펴 봐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당시 상황을 잘 알아야 합니다. 5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제가 더 말씀 안 드려도 감이 잡히실줄 압니다. 사실 아담의 죄 이후 사람은 더욱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을 보시고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시기에 이르렀습니다. 7절 말씀입니다.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면 노아는 이러한 때 어떤 삶을 살고 있었을까요? 9절 말씀입니다.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노아는 대단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등지고 살고 있는데 혼자서만 하나님과 동행을 하였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래서 저는 노아가 호된 삶을 살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요즘 기독교인들이 많이 줄었다고 하지만 노아 시대와는 비교도 안 될정도로 많습니다. 노아는 자기와 자기 가족뿐이었습니다. 노아 시대에 노아처럼 살고 싶은 기독교인들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곧 노아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는 가운데 혼자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예배드리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노아에게 어느 날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14, 15절 말씀입니다.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네가 만들 방주는 이러하니 그 길이는 삼백 규빗, 너비는 오십 규빗, 높이는 삼십 규빗이라.”
갑자기 방주를 만들라고 하니 노아는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큰 방주를 무엇에 쓰시려나 궁금한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17절 말씀입니다.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모든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것들이 다 죽으리라.” 노아는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모든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한다는 말씀에 정신을 잃었을 것입니다. 이제야 방주를 만들라고 하신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홍수로 멸절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18절과 20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가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하게 하라.”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완전히 멸절시키시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가족을 인류를 대표해서 살리시고 아울러 모든 가축과 동물들을 둘 씩 보전하게 하십니다. 새로운 시작을 계획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22절 말씀입니다.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오늘 본문 마지막 7:1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우리 인간으로서 받을수 있는 최고의 칭찬인 것 같습니다. 우리 각자에게 하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하시고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결국 노아는 큰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노아가 받은 은혜는 첫번째로는 홍수에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새롭게 시작하게 하는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한 가지 궁금한 생각이 듭니다. 노아가 당대에 완전한 자요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하였는데 어떤 모습이었을까 궁금한 생각이 듭니다. 이 당시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눈에 보이게 나타나셨을까요? 그럴리 없습니다.
사실 말씀드린대로 그 당시 아무도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그 삶이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아무도 믿지 않는데 혼자서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것은 놀라운 모습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믿지 않는데서 혼자 믿을수 있는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요?
저는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노아에게는 특별한 믿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주변에 되어지는 것을 보면 분명히 하나님께서 살아계신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한 환경에서도 그는 하나님은 은혜를 내리시되 비처럼 내리시는 분이심을 믿는 믿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만이 호된 삶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누릴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런 노래를 불렀을 것입니다.
“은혜가 비처럼 내리도록 둡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노아의 모습이었을줄 압니다. 그는 어떠한 어려운 삶조차도 아니 어려움이 비처럼 쏟아져도 바로 은혜의 소낙비를 이기지 못함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어려운 삶 안에 도리어 은혜의 소낙비가 매일 쏟아져 내리고 있음을 믿고 체험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혼자서 하나님을 믿을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노아이기에 창세기 기자는 노아를 의인이라고 불렀을 것입니다.
의인은 바로 행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은혜에 자신을 맡기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축복인 것입니다. 노아는 은혜에 자기의 삶을 맡긴 것입니다. 이러한 노아에게 하나님은 방주를 지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기억하십시다. 은혜의 삶에 자신을 맡긴 자에게 방주를 지으라는 행함의 명령을 하신 것입니다.
이에 노아는 방주를 지시한대로 지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마 이 때 자신의 특유의 멋진 모습이 또 다시 하나님께 보여진 것 같습니다.
못을 하나 하나 박을 때마다 비처럼 내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노래하면서 방주를 지었을 것입니다. 방주 구석 구석마다 믿음의 노래가 담겨져 있었을 것입니다. 의인 노아는 그냥 방주를 만든 것이 아니라 비처럼 내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생각하면서 만든 것입니다. 노래를 부르면서 말입니다.
“은혜가 비처럼 내리도록 둡니다.” 이 모든 것을 보신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저희 교회 장로님이셨다가 한국에 오래 전에 나가신 이일영 장로님이 계십니다. 이 장로님께서 군의관으로 계셨을 때 월남전에 참전하셨다고 합니다. 비만 오면 전투를 안 했는지 비 오는 날은 잠 자는 날이었다고 합니다.
그것까지는 좋은데, 귀국 후에도 비만 오면 어디서든지 졸음이 쏟아진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아마 요즘도 그러실줄 압니다. 이 장로님의 모습을 생각하니 저에게 노아의 모습이 새롭게 떠 올랐습니다.
노아는 자기가 만든 방주에서 150일 빗소리를 듣습니다. 비가 그친 후 150일을 또 기다립니다. 물이 빠질 때까지…. 노아는 빗소리를 들으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아무리 하나님께 순종한다고는 하지만, 방주에서 150일을 빗소리를 들으면서 지낸다는 것 어떻게 보면 무시무시한 일입니다. 그러나 모든 삶을 은혜의 소낙비로 생각하고 있는 그에게는 빗소리도 바로 은혜의 노래로 들렸을 것입니다. 그는 빗소리를 들으면서 콧노래를 불렀을 것입니다.
“은혜가 비처럼 내리도록 둡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은 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눈 사이로 빗소리가 들려 옵니다. 지금도 은혜가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아니 매일 내리고 있습니다. 우리 귀에 들리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도 노래를 부릅시다.
“은혜가 비처럼 내리도록 둡니다.” 이 노래로 인해 고난의 비는 은혜의 비로 바뀌어지지 않을까요? 이 노래를 부르는 자들과 더불어 하나님은 세상을 새롭게 만드십니다. 이 노래를 부르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방주를 지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방주로 인해 새로운 역사의 장이 펼쳐집니다.

가까이 있는 Walden Pond를 한번쯤은 가 보셨을줄 압니다. Walden Pond가 유명한 이유는 사상가인 David Thoreau가 문명에서 벗어나서 작은 집을 손수 짓고 산 곳이기에 더 유명해진 것 같습니다.
그가 만든 캐빈은 150 sq feet의 작은 집입니다. 약 200년 전이긴 하지만 자료비는 고작 $28.12였습니다. 현재 가격으로는 $600 이라고 합니다. $600 가지고 손수 집을 지은 초라한 집입니다. 그러나 그 집에서 세계 역사를 뒤흔드는 사상이 나왔습니다.
Thoreau가 지은 책 중에 Civil Disobedience라는 책이 있습니다. 선한 양심을 가지고 정부에 불복종해도 된다는 내용의 책입니다. 이 책에 큰 영향을 받은 사람이 마틴 루터 킹 목사입니다. 킹목사님이 오늘날 미국에 흑인 대통령을 만들게 하는 기반을 닦았다고 모두 믿고 있는데 실상 킹 목사님은 바로 Walden pond의 주인공 Thoreau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Thoreau는 비록 작은 집을 지은 자이지만 그는 거대한 역사의 흐름을 뒤바꾸어 놓았던 것입니다. 노아가 방주를 지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멸망에서 구하는 위대한 역사적 일에 동참했듯이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만든 방주는 어떨까요? Thoreau보다 더 잘 만들수 있을까요? 사실 우리는 방주를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실상 이 방주는 예수님께서 완성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어떤 고난도 참으시고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셨기에 방주는 완성이 되었습니다. 오늘도 전 세계에는 이 구원의 방주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보스톤을 비롯하여 중남미에서 유럽에 이르기까지…. 삶의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노아의 노래를 부르는 자들을 당신의 방주에 태워 그들에게 보내지 않으실까요?
교우 여러분,
예수 안에서 우리는 모두 은혜를 입은 자들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방주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가는 곳이 방주가 있는 곳입니다. 주님께서 지으신 방주를 타고 홍수 한 가운데서 허우적 거리는 형제 자매들에게 향하십시다.
이 노래를 부르며,
“은혜가 비처럼 내리도록 둡니다.”
이 노래를 부를 때 방주가 열리지 않을까요?

말씀을 거둡니다.
예수 전도단의 창시자 로렌 커닝햄 목사님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한 목사님이 복음을 전하다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감옥 안에는 아주 포악한 살인자가 있었는데 간수들조차 두려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감옥에서는 하루 12시간씩 노동하도록 규정되어 있는데 목사님은 금식하며 그를 위해 기도하는 것만이 그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서 고된 일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교도소 음식마저 거절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곯아 떨어졌을 때 그 살인자의 구원을 위해 기도드렸습니다.
얼마 후에 살인자는 그의 마음을 주님께 드립니다. 그의 변화가 너무나 엄청났기에 소문은 교도소 전체로 퍼져나갔습니다. 마침내 교도소 소장이 목사님을 불러 그에게 어떻게 했는지 묻습니다. 이에 목사님은 하나님께서 하셨다고만 답합니다.
소장은 다른 죄수도 변화시킬수 있도록 쉬운 일을 준다고 약속합니다. 그 후 가장 악명 높은 교도소로 보내졌는데, 만약 그곳에서 그와 같은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면 그를 일찍 석방시켜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두번째 감옥에서도 시작되었는데 아내에게 아픔을 줄 수밖에 없는 편지를 쓰기에 이릅니다. 편지에서 그는 아내에게 그의 결정에 대해서 이해해 줄 것을 간청합니다. 그때 그는 그 교도소에서의 사역을 계속하기 위해 가석방을 거절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감옥소에서 은혜가 비처럼 내리는 것을 체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감옥을 떠나길 거부한 것입니다. 감옥 안에서 그는 계속 노래하길 원한 것입니다.
“은혜가 비처럼 내리도록 둡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은혜를 입은 자들입니다. 물론 갈수록 세상은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홍수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갈수록 많아집니다. 우리가 탄 방주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방주 안에서 노래를 부르십시다. 방주의 문이 열릴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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