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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티

날짜 : 2015.01.25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거룩한 티
성경본문 : 마 7:1-6

http://kcbostonmedia.cponsolny.com/Sermon_video_master/Sermon_20150125.wmv

이외수 작가의 사랑에 관한 글입니다.
“사랑을 달콤하다고 표현하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다.
그대가 만약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자신을 백미터 선수에 비유하지 말고 마라톤 선수에 비유하라. 마라톤의 골인지점은 아주 멀리에 위치해 있다. 그러므로 초반부터 사력을 다해 달리는 어리석음을 삼가라. 그건 백미터 선수에 해당하는 제비족들이나 즐겨 쓰는 수법이다.
그러나 그대가 아무리 적절한 힘의 안배를 유지하면서 달려도 골인지점을 통과하기 전까지는 계속적으로 고통이 증대된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따라서 계속적으로 증대되는 고통을 감내하지 못한다면 아직은 선수로서의 기본정신이 결여되어 있는 수준임을 명심하라.
진정한 마라톤 선수는 달리는 도중에 절망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의 절교선언이나 배신행위에 개의치 말라. 사랑은 그대 자신이 하는 것이다. 진정한 마라톤 선수는 발부리에 음료수 컵 따위가 채이거나 눈앞에 오르막 따위가 보인다고 기권을 선언하지 않는다. 그대도 완주하라.
그러나 마라톤에서의 골인지점은 정해져 있지만 사랑에서의 골인지점은 정해져 있지 않다. 경우에 따라서는 한평생을 달려도 골인지점에 도달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다. 사랑은 그대의 한평생을 아무 조건 없이 희생하는 것이다. 그러기에는 자신의 인생이 너무 아깝고 억울하다면 역시 진정한 사랑을 탐내기에는 자격미달이다.
차라리 사랑을 탐내지 말고 사탕을 탐내도록 하라.”

오늘 말씀 서두에 이 글을 소개해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제가 신년예배시 올해 저희 교회 표어를 말씀드렸습니다. “내 제자인줄 알리라.”
그런데 편의상 짧게 표어를 정하였지만 사실 표어가 담겨 있는 요한복음 13:34, 35절 전체가 표어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교우 여러분,
올해 서로 사랑하여 모든 사람이 우리가 주님의 제자인 줄 알게 하십시다. 작년 저희 교회 표어가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이었는데,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우리는 그보다 큰 일을 하는 놀라운 체험을 계속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백미터 달리기 사랑은 잘 해냅니다. 그러나 사랑의 본질은 마라톤입니다. 종종 우리는 사랑의 마라톤에서 포기하고자 할 때가 생깁니다. 이것을 우리보다 주님께서 더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의 마라톤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고 계셨습니다. 1, 2절 말씀입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사랑의 마라톤의 가장 큰 적은 바로 비판인 것 같습니다. 비판은 또 다른 비판을 낳습니다. 곧 비판은 바로 비판한 사람에게로 찾아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내가 누구를 비판하면 나의 비판을 받은 사람은 어떤 경로로 해서든지 비판으로 갚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무엇일까요? 사랑의 관계가 흔들리게 됩니다. 그보다 큰 일을 할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두 나의 비판만큼은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비판만큼은 왜 정당하다고 생각하게 되죠? 3절 말씀입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우리가 이웃을 비판하게 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남의 눈 속에 티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는 눈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주님은 과장을 해도 좀 심하게 과장하신 것 같습니다. 남의 눈의 티를 볼수 있는 사람이 어떻게 자기 눈에 있는 들보를 느끼지 못합니까? 눈에 티가 들어 가서 고생하신 분들 많이 계실줄 압니다.

제가 군복무를 할 때 중장비를 많이 다루는 공병여단에서 군의관으로 근무를 하였습니다. 종종 눈에 뭐가 들어 갔다고 하면서 의무실로 찾아 옵니다. 그 때만 하더라도 한국이 가난하였기에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지 않고 용접을 하곤 한 것 같습니다. 쇳가루가 잘못 튀어서 눈에 끼여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처음 보면 잘 눈에 안 띄입니다. 돋보기로 보면 눈에 박혀 있는 작은 쇳가루가 보입니다. 눈에 국소마취를 하고 소금물을 쏘면 빠지곤 했습니다. 그렇게 작은 것이 눈에 박혀도 못 견디고 군인들이 의무실을 찾곤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눈에 들보가 들어 있는데도 깨닫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과장이 아닐까요?

사실 남의 눈의 티를 보면서 자기 눈의 들보를 보지 못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가능하다면 이것은 기적입니다. 그런데 기적은 가능합니다. 이 기적을 행할수 있는 자가 있습니다. 사탄의 뜻 중 하나가 비판자(accuser)입니다.
곧 사탄은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자기의 들보는 보지 못하게 하고 남의 티를 보게 하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제가 신년주일설교시 사랑의 본질이 두 가지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첫번째 본질은 사랑은 서로 속해 있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두번째 본질은 서로가 서로의 영광을 위하여 존재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속해 있고 서로의 영광을 위할 때 모든 사람들이 우리가 주님의 제자인 줄 알게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때 우리는 작년도 우리 교회 표어인 그보다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사탄도 이것을 잘 알기에 사탄은 사랑의 본질을 파괴하길 원합니다. 특별히 서로 속해 있다는 이 놀라운 축복을 깨뜨리기 원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사탄의 책략에 넘어 가지 않고 서로 속하는 사랑의 삶을 잘 영위할까요? 5절 말씀입니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빼는 것이 무엇일까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웃의 티가 보일 때마다 사탄이 속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닐까요? 그럴 때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요?
더 이상 형제의 눈 속에 티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원래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때로는 그 티가 더 우리에게 유익이 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일단 무릎을 꿇게 했다는 것이 유익이죠. 그러므로 형제의 티는 거룩한 티입니다. 우리를 겸손히 무릎을 꿇게 하고 아울러 서로 더 뜨거운 사랑의 여정을 약속하기 때문입니다.

이웃의 티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할 때는 우리는 사랑의 마라톤의 한 고비를 넘어 더 멋지게 달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로 무릎은 축복과 같은 어원을 갖고 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무릎을 꿇을 때 복이 찾아온다고 믿었습니다. 곧 이웃의 티를 보았을 때 우리는 둘 중의 하나를 하게 됩니다. 비판으로 응할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 무릎을 꿇을수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후자를 택하십시다. 이웃의 티가 보일 때마다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으십시다. 놀라운 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웃의 티가 어떻게 더 멋지게 달리게 할수 있을까요?

이웃의 티로 인해 더 멋지게 달릴수 있음을 Richard Rohr라는 신학자가 잘 설파해주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모습을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은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온갖 죄와 허물을 다 한 몸에 받으신 후 그 모든 것을 인류를 위한 약으로 바꾸셨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전선줄의 변압기의 예를 들어서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고압선이 와서 변압기에 들어와 작은 voltage가 되어서 각 가정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곧 온갖 비판이 예수님의 몸에 와 닿는 순간 도리어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전류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말로 모든 비판은 유용한 전력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보면 마지막 절이 이해가 갑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비판도 거룩한 것이 되었습니다. 예수 믿는 자들에게는…. 그런데 이 거룩한 비판이 개에게 곧 택함 받지 않은 자들에게 던져질 때 싸움이 일어 난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이러니칼합니까? 그렇다고 이웃을 비판하라는 뜻으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결코 아닙니다.
사실 이 말씀은 여러모로 해석이 되고 있는 말씀입니다. 비판의 주제를 이어서 이 말씀을 해석하면 바로 믿는 자들에게는 어떤 것도 거룩한 것으로 변한다는 뜻이 있다고 생각해도 무관하다고 봅니다.
고압선을 통해 들어 온 전류가 변압기를 거쳐 각기 가정으로 전달되어 귀하게 쓰여지는 것을 볼 때 변압기가 얼마나 즐겁겠습니까? 이 변압기는 바로 주님이고 이제는 주님보다 더 큰 일을 하도록 맡김을 받은 우리들이 아니겠습니까? 변압기이신 주님은 온통 죄와 비판의 전류를 몸으로 받으신 후 아름다운 전류로 바꾸어서 우리들에게 보내셨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예수님처럼 변압기가 되었습니다. 비판이라는 고압선이 우리에게로 종종 찾아 옵니다. 우리라는 변압기를 통해서 아름다운 전류가 되어 이웃에게 보내진다고 생각해 보셨습니까?

저는 이 변압기의 비유를 읽자마자 너무 저의 마음에 들었습니다. 변압기는 두 전선이 있습니다. 하나는 들어오는 고압선 하나는 나가는, 이런 표현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있다고 하십시다, 저압선.
그런데 만일 나가는 저압선이 없다면 이 변압기는 어떻게 될까요? 터지지 않을까요? 아니면 들어 온 전류를 또 다시 고압선으로 내보내느라 모진 싸움을 하지 않을까요? 변압기가 변압기의 기능을 잘 할수 있는 이유는 들어 오는 고압선과 내 보내는 저압선이 있어서가 아닐까요?

우리의 공동체 생활에서 고압선만 있을 때 문제가 됩니다. 고압선과 함께 꼭 필요한 것은 이웃을 향한 저압선입니다. 이웃을 향한 저압선이 있는 분들에게는 고압선으로 전류가 제 아무리 많이 들어와도 문제가 없습니다. 더 신납니다. 더 많은 전류를 자기가 사랑하는 자들에게 보낼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외수 작가의 생각이 맞는 것 같지만 맞지 않습니다. 사랑은 힘든 마라톤이 아닙니다. 즐거운 마라톤입니다. 언제 힘들어지느냐 이웃으로 향하는 저압선이 없을 때 힘들어집니다. 받아들이는 고압선만 갖고 있을 때 너무나 힘든 여정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압선이 있을 때는 제 아무리 큰 전류가 들어와도 신이 납니다. 인생은 즐거운 마라톤이 되어 갑니다.

저압선은 서로 서로 속해 있는 자들을 연결해 주고 있는 사랑의 줄입니다. 이 사랑의 줄을 통해 이웃에게 전류가 흘러 갈 때 이웃은 영광의 빛을 발하게 됩니다.
여러 개의 저압선을 소유한 자들로 인해 세상은 밝아집니다.
안도현 시인은 저압선을 소유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대에게 가고 싶다’라는 시를 통해 저압선을 소유한 자의 모습을 느낄수 있습니다. 마지막 소절만 소개해 드립니다.

“그대에게 가고 싶다
우리가 함께 만들어야 할 신천지
우리가 더불어 세워야 할 나라
사시사철 푸른 풀밭으로 불러다오
나도 한 마리 튼튼하고 착한 양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찾아가고 싶은 그대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어떠한 비판도 도리어 거룩한 티가 되어가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웃을 향하여 더 힘차게 사랑의 걸음을 내디디지 않을까요?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되지 않을까요?

말씀을 거둡니다.
최근 저의 마음에 생긴 그대가 있습니다. 최근에 생긴 프랑스 파리 테러 사건을 잘 아실줄 압니다. 프랑스로 이민간 사람들의 자녀들이 끔찍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계속 뉴우스를 살펴 보게 되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프랑스에 사는 이민자들 특히 모슬림들이 저의 마음에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한인들은 미국에 와서 정착하며 많은 분들이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는 반면 아랍지역에서 이민 온 모슬림들은 많은 경우 게토에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백인사회에 끼어들지 못합니다. 수많은 벽을 느끼고 무서운 테러단에 가입하는 자들이 늘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 저의 마음이 가는 이유가 있습니다. 작년도 저희 교회 중고등부 학생들이 교사들과 같이 첫번째 단기 선교를 다녀 온 이유도 있습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을 아시고 먼저 저희 단기 선교단을 보내신 것 아닌가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제가 당장 프랑스로 달려가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저의 마음 속에 하나의 작은 사랑의 저압선이 프랑스로 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고압선에서 전류가 들어 올 때 필요한 저압선 중에 하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저압선들을 통하여 이웃에게 속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느덧 저는 그들에게 속한 자가 된 것이 아닐까요?

교우 여러분,
때로는 비판이 때로는 이웃의 티가 우리를 괴롭힙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으십시다. 이웃의 비판은 변압이 되어 우리의 저압선을 타고 이웃을 빛나게 할 것입니다. 그 때 모든 사람들은 우리가 주님의 제자인 줄 알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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