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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싸인

날짜 : 2014.11.09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희망의 싸인
성경본문 : 열왕기하 25:2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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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에서 감옥 살이를 13년간 했던 구엔 반 투안이라는 추기경이 있습니다. 그는 1975년부터 독방에 갇혀서 9년을 지내고 도합 13년을 감옥에서 보냈습니다. 그 후 석방된 후 로마에서 지내게 됩니다.
어느 날 교황이 투안 추기경을 부르더니-이 때는 아직 추기경이 되지 않았을 때입니다. 대주교일 때입니다. –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삼천년기 첫 해에는 베트남 사람이 로마 교황청에서 첫 피정 강론을 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력으로는 서기2000년이 삼천년기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2000년이 시작하기 얼마전에 교황이 대주교에게 한 마디로 첫 해 설교를 하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얼마나 영광된 일입니까? 2000년도 첫 설교를 교황이 하여야 하는데 베트남에서 대주교에게 부탁을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교황은 강렬한 눈빛을 발하면서 대주교에게 말합니다.
“마음에 둔 특별한 주제가 있습니까?”
“교황님, 너무나 뜻밖의 일이어서 어리둥절합니다만 희망에 대해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주교님의 체험을 증언해 주십시요.”
대주교는 교황의 뜻을 받들어 피정 강론을 삼천년기 첫 피정 강론을 하게됩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저는 큰 도전을 받았습니다. 교황이 “마음에 둔 특별한 주제가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희망’이라는 주제를 금방 대답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특별한 주제가 있느냐는 질문에 ‘희망’이라고 대답한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생각이 듭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열왕기하 마지막부분입니다. 본문 말씀을 통하여 이 시대에 사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희망의 사람의 모습은 어떤 모습인지 살펴 보고자 합니다.
오늘 방대한 열왕기상하의 제일 마지막 네 절을 오늘 본문 말씀으로 삼았는데 이 마지막 절에 저자의 마음 속 깊이 담겨져 있는 이스라엘의 희망을 느낄수 있습니다. 짧으니 다시 한번 봉독해 드릴까요?
“유다의 왕 여호야긴이 사로잡혀 간 지 삼십칠 년 곧 바벨론의 왕 에윌므로닥이 즉위한 원년 십이월 그 달 이십칠일에 유다의 왕 여호야긴을 옥에서 내놓아 그 머리를 들게 하고 그에게 좋게 말하고 그의 지위를 바벨론에 그와 함께 있는 모든 왕의 지위보다 높이고 그 죄수의 의복을 벗게 하고 그의 일평생에 항상 왕의 앞에서 양식을 먹게 하였고 그가 쓸 것은 날마다 왕에게서 받는 양이 있어서 종신토록 끊이지 아니하였더라.”
어떻게 희망을 느끼십니까?
제가 여러분들의 마음을 감히 읽을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대부분이 이렇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희망’보다는 ‘불행중 다행’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하게 느껴지실줄 압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간 왕이 나중에는 그래도 죄수의 옷을 벗고 바벨론 왕과 더불어 양식을 먹게 되었으니 여호야긴은 불행중 다행이었다고 생각이 드실줄 압니다.
사실 신약에는 곳곳에 주님의 부활의 이야기가 담겨져 있는데 ‘희망’ 하면 주님의 부활 정도는 되어야지 어디 이 정도 가지고 명함을 내 놓을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의 역사를 이해하게 되면 이 이야기 안에 담겨진 깊은 희망의 멧세지를 보게 될줄 압니다.

일단 본문 말씀으로 들어 가 보면, 열와기상하 전체 배경은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과정이고 그 중에 오늘 본문 말씀에는 여호야긴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특혜를 받은 이야기가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주인공은 여호야긴왕입니다. 열왕기하 마지막에 여호야긴왕의 이야기가 나오니 여호야긴이 이스라엘 정확히는 남왕국 유다의 마지막 왕인 것 같이 보이는데 실상 여호야긴이 남왕국의 마지막 왕이 아닙니다.
남왕국의 마지막 네 왕을 소개해 드리면,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 순입니다. 그렇다면 시드기야가 제일 마지막 왕입니다. 시드기야 때 남왕국은 멸망합니다. 그러면 왜 시드기야가 제일 마지막에 기록되어야지 여호야긴의 이야기로 열왕기하가 마치나요? 이들의 족보를 여호아하스를 중심으로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스크린으로 다시 보겠습니다.
여호아하스가 아버지인데 여호아하스가 애굽으로 잡혀 가면서 아들인 여호야김이 왕이 됩니다. 여호야김이 죄로 인해 죽은 후 손자인 여호야긴이 왕이 됩니다. 여호야긴은 왕이 된지 석달만에 바벨론으로 잡혀 갑니다. 그러나 아직 남왕국이 완전히 멸망한 것은 아닙니다. 여호야긴이 잡혀 간 후 여호야긴의 삼촌 곧 여호아하스의 아들인 시드기야가 왕이 됩니다. 시드기야 때 남왕국이 완전히 멸망합니다. 곧 이 시드기야가 남왕국의 마지막 왕이 된 것입니다.
곧 조카인 여호야긴이 먼저 잡혀 가고 후에 시드기야도 잡혀감으로 완전히 멸망하게 된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오늘 본문 말씀 바로 전까지 기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자는 제일 마지막에 여호야긴의 석방의 이야기로 역사책을 마치고 있습니다.
이유는, 저자는 여호야긴의 석방의 이야기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희망의 싸인을 본 것입니다. 여호야긴이 회개해서 하나님께서 석방시킨 것도 아닙니다. 그냥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왕의 마음을 움직여서 여호야긴을 석방시킨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전혀 자랑할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저자의 눈에는 이 사건이 희망의 싸인으로 보여진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책 제일 마지막에 자랑스럽게 이 이야기를 적어 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대단치 않은 일을 희망의 싸인으로 삼는 것을 볼 때 그는 원래 희망의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 저자에 대해서 점점 더 궁금해 집니다. 어떻게 이 저자는 여호야긴의 석방의 사건을 희망의 싸인으로 볼수 있게 되었는가 생각을 안해 볼수가 없습니다.

열왕기상하의 저자는 누구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신학자들이 거의 모두 동의하는 것은 쓰여진 시대는 바벨론 포로시대라는 점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70년간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지 않습니까? 그 때 지은 역사책이라고 모든 신학자들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생각해 보십시요. 포로 생활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절망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이 역사서를 쓸수 있었을까요?
6/25 전쟁이 한창일 때 누가 한국의 역사책을 쓰고 있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요. 주위 사람들이 정신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어서 속히 살아날 궁리나 해야지 무슨 사치스런 짓이야.” 핀잔을 받았을 것입니다. 오직 희망이 살아 있는 사람만 그러한 환경에서 역사를 뒤돌아 볼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열왕기서 저자의 가슴 속에 깊이 내재해 있는 희망이 그로 하여금 역사서를 쓰게 했을 것입니다. 물론 그 희망의 원천은 성령 하나님이었을 것입니다.
절망적 상황 가운데서 그는 성령 하나님으로 인해 희망을 갖고 있었고 그 희망이 이 방대한 역사서를 쓰게 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당신이 본 이스라엘을 위한 희망의 싸인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여호야긴의 이야기가 ‘불행 중 다행’의 싸인으로 보이겠지만 희망의 사람이었던 저자에게는 그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희망의 싸인이었던 것입니다.

제가 교회를 오가는 길에 가끔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리를 저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아주 열심히 걷곤 하십니다. 얼굴 표정도 보면 언제나 밝고 환합니다. 멀리서부터 그 분이 보이면 제 마음도 어느덧 힘이 나곤 합니다. 그는 저에게 희망의 싸인이 어느덧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아마 열왕기서 저자도 여호야긴을 생각할 때마다 힘이 절로 나곤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러면 이 역사책을 읽으면서 바벨론 포로로 잡혀 간 이스라엘 민족들은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이스라엘에 희망이 있음을 느꼈을줄 압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런 공로도 없는 여호야긴을 높이시는데 언젠가 아무 공로도 없는 이스라엘 민족을 높이실 것이라는 희망을 품게 되었을 것입니다. 민족을 향한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되었을줄 압니다.

여기에 중요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하찮게 지나갈수 있는 사건 안에서 희망의 싸인을 보았기에 많은 사람들이 민족적 희망을 새롭게 가질수 있게 된 것입니다.
희망의 싸인이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쩌면 더 중요한 것은 하찮은 것 안에서 희망의 싸인을 보는 것일 줄 압니다. 희망의 싸인을 볼 때 희망은 날개를 피기 시작하니 말입니다.

교우 여러분,
하찮게 지나갈수 있는 것 안에 희망의 싸인을 보는 것은 너무도 소중합니다. 이런 사람들로 인해서 희망은 날개를 피기 시작합니다.

결론적으로 저자가 보았던 희망의 싸인은 여호야긴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아무리 죄를 지었어도 그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여호야긴의 죄를 본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삶을 온 천하에 자랑하게 된 것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어떻습니까? 악인들을 희망의 싸인으로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고개를 돌립니다. 그래서 기가 막힌 희망의 싸인을 놓치곤 합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넬슨 만델라는 장장 28년간을 감옥에서 지냈습니다. 그의 석방은 오늘까지 희망의 싸인으로 길이 빛나고 있습니다. 정말로 위대한 분이십니다.
그런데 열왕기 기자는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가고 있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독재자가 있었다고 가정하십시다. 그 독재자가 독재로 인해서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대통령의 특별 사면으로 풀려 났습니다. 독재자를 통해 희망의 싸인으로 삼는 자들을 통해 희망은 날개를 피기 시작합니다.
바로 열왕기 기자가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여호야긴이 바로 이스라엘 민족에게 필요한 희망의 싸인이 되었다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저자는 하찮은 여호야긴의 삶에서 희망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손길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하나님의 손길은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저자는 이미 십자가의 사랑을 본 것입니다. 아무 공로없는 여호야긴에게 베푸시는 십자가의 사랑을 본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희망의 싸인이 된 것입니다. 그가 본 희망은 무섭게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퍼져 나갔습니다. 이제는 이 책을 읽는 모든 사람들에게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제가 이런 설교를 드리는 것입니다.

한 사냥꾼이 30마리의 사냥개를 풀어 토끼를 잡으러 나갔습니다. 광활한 들판에서 30마리의 사냥개들은 한 마리의 토끼를 쫓아 마구 달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시점이 지나자 29마리의 사냥개가 헉헉대고 쓰러지기 시작했습니다. 단 한 마리의 사냥개만이 이미 숲속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는 토끼를 쫓아 열심히 뛰어갈 뿐이었습니다. 왜 한 마리의 사냥개만이 혼자서 열심히 뛰어갔을까요?
사실 포기해버린 29마리의 사냥개들은 토끼를 직접 보고 달린게 아니었습니다. 앞의 사냥개를 쫓아 덩달아 뛰었을 뿐이었습니다. 맨 먼저 달렸던 사냥개만 토끼를 직접 봤기 때문에 그 토끼를 잡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끝까지 달릴 수 있었습니다. 토끼는 바로 희망의 싸인입니다.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자들에게는 삶의 곳곳에서 희망의 싸인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끝까지 달립니다.

교우 여러분,
주안에서 신체적으로 어려움을 안고 열심히 걷는 사람이 우리들의 희망의 싸인이 된다면, 철없는 저희 주일 학교 어린이들이 우리들의 희망의 싸인이 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사춘기 중고등부 자녀들이 희망의 싸인입니다. 학교 공부에 힘들어 하는 청년들이 우리들의 희망의 싸인입니다. 다음 주일에 헌신 예배를 드리는 누구 보다도 더 많은 도전 앞에 서 있는 부부청년부원들이 우리들의 희망의 싸인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말없이 교회를 사랑하시는 상록회 어르신들도 우리들의 희망의 싸인입니다. 두팔을 걷어 부치고 겸손히 섬기시는 여선교회 회원들이 뜨거운 열정을 안고 섬기시는 남선교회 회원들이 우리들의 희망의 싸인입니다. 우리는 모두 서로 서로에게 희망의 싸인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이니 말입니다. 이것을 함께 인정하십시다. 고백하십시다. 희망은 날개를 피기 시작할 것입니다.
저희 교회 첨탑에 있는 십자가는 브루클라인 주민들을 위한 희망의 싸인이 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예수 믿는 우리에게는 온 세상은 바로 희망 그 자체입니다. 그러니 희망의 싸인이 되십시다.

말씀을 거둡니다.
제가 군의관으로 군복무를 하고 있을 때입니다. 저희 옆에 공수부대가 있었는데 어느 주일 저녁 예배에는 공수부대 목사님이 오셔서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 목사님의 복장은 저와 크게 다른게 한 가지 있었습니다. 왼쪽 가슴에 공수부대를 상징하는 낙하산 마크가 부착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늘에서 뛰어 내린 군인들만 부치는 마크입니다. 이 목사님도 다른 군인처럼 비행기에서 뛰어 내렸던 분입니다.
훈련이 얼마나 어려웠던 것을 간증하셨습니다. 하늘에서 점프하는 것 외에 가장 어려웠던 것 중 하나는 완전군장을 하고 장거리를 뛰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것을 많은 목사님들이 해내지 못해서 공수부대 군목이 되지 못하는데 아무도 못해내면 공수부대는 군목 없는 부대가 되고야 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합니까? 끝까지 뛰어야지 공수부대원들이 주일마다 예배를 드릴수 있으니…. 선배 목사님이 옆에서 같이 뛰셨다고 합니다. 물론 선배 목사님은 이미 훈련을 마치셨으니 완전군장을 안 하고 뜁니다. 옆에서 뛰시면서 계속 응원을 해주셨다고 합니다.
“끝까지 가셔야 합니다. 힘을 내세요. 군인들을 위해서…. 주님을 위해서….”
그 응원에 힘입어 끝까지 뛰셨고 자랑스런 공수마크를 달고 공수부대원들을 섬기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가 끝까지 뛸수 있었던 것은 목표가 보였기 때문입니다. 희망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부대원들을 예수 믿게 하는 축복의 삶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공수부대의 희망의 싸인이 되신 것입니다.
우리 함께 희망을 안고 끝까지 달리십시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여호야긴을 옥에서 내놓아 그 머리를 들게 하고…. 그가 쓸 것은 날마다 왕에게서 받는 양이 있어서 종신토록 끊이지 아니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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