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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여기 있나이다

날짜 : 2015.01.18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내가 여기 있나이다
성경본문 : 사 6: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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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폴리네르라는 시인의 ‘벼랑 끝으로 오라’라는 시입니다.

“그가 말했다.
‘벼랑 끝으로 오라!’

그들이 대답했다.
‘우린 두렵습니다.’

그가 다시 말했다.
‘벼랑 끝으로 오라.’

그들이 왔다.
그는 그들을 밀어 버렸다.
그리하여 그들은 날았다.”

벼랑 끝에 서 있는 사람을 밀어내쳤을 때 도리어 그 사람들은 자신 안에 있는 놀라운 재능을 발견하게 되나 봅니다. 날수 있는 놀라운 자신을 발견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훨훨 날면서 벼랑 끝에 서길 잘했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벼랑 끝으로 오라고 할 때 갈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오늘 2015년 세번째 주일예배를 드립니다. 송구영신예배를 드린지 18일째 되는 날입니다. 송구 영신 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가는 길에 집사람과 이런 이야기를 주고 받았습니다.
“교우님들이 송구 영신 예배를 무척 중요시 여기나봐. 요즘 보면 항상 성탄 이브 예배 보다 많이들 오시거든.”
성탄 이브 예배는 7:30분에 시작하고 송구 영신 예배는 11:30분에 시작해서 자정을 넘기니 얼마나 피곤합니까? 그런데 최근 경향을 보면 송구 영신 예배에는 더 많은 교우들이 참석하십니다.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시인의 표현을 빌리면 아마 새 해에는 날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가 아닐까요? 물론 좋은 바램입니다. 하나님은 송구 영신 예배에 참석하신 분들의 마음의 소원을 다 기억하시고 또 이루어주실줄 압니다.
그런데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시인의 표현에 의하면 날기 위해서는 벼랑 끝으로 가야 합니다. 그런데 벼랑 끝에 가 선다는 것 쉬운 일이 아닐줄 압니다. 삶의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들에게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송구 영신 예배는 참석할수는 있어도 벼랑 끝에 가 설수 있는 분들은 극히 드물지 않을까요? 그러면 벼랑 끝에 가지 않고도 날을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의 내용은 위대한 선지자 이사야가 부름을 받는 이야기입니다. 이사야는 환상 중에 하늘 성전을 가득 메우고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본 사람은 죽을수 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아는 이사야는 고백합니다. 5절 말씀입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곧 이어 하나님 보좌를 섬기는 스랍 천사가 나타납니다. 제단에서 집은 핀 숯을 이사야의 입에 대면서 말합니다. 7절 말씀입니다.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이사야가 죄사함을 받았으니 목숨은 건졌습니다. 8절 말씀을 보면 곧 이어 이사야는 주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이에 죽음을 간신히 면한 이사야가 답합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아주 짧은 시간에 이루어지는 사건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벼랑으로 이사야를 보내실까요? 9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어떻게 생각하면 벼랑입니다. 그러나 저는 벼랑 보다는 다르게 생각하고 싶습니다. 계속 살펴 볼까요? 10절 말씀입니다.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성경 말씀 중에 종종 이해하기가 어려운 귀절들이 나옵니다. 대표적인 귀절 중 하나가 바로 9, 10절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예수님도 후에 인용합니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부르신 이유는 백성들로 하여금 더 하나님께 멀어지게 하기 위함으로 해석할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면에서는 그것이 사실이고 또 어떤 면에서는 사실이 아닙니다. 먼저 사실이 아닌 점을 설명해 드린다면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부르시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 멀어진 자들을 다시 돌아오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변함이 없는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사야를 부르신 이유는 하나님께 더 멀어지게 하기 위함이 아닌 것은 기정 사실입니다.
그러나 오늘 문맥을 보면 분명히 멀어지게 하기 위한 뜻이 담겨져 있음을 간과할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셨을까요?
어느 주석가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전도의 경험이 있으신 분들 많이 경험하셨을줄 압니다. 어떤 경우에는 전도를 하면 할수록 마음을 닫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아예 복음을 안 들었으면 그렇게 마음을 안 닫을텐데 복음을 들었기에 더 닫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복음을 많이 접한 사람이 도리어 복음 전도에 크게 방해가 된다는 것입니다.
최근 이 곳에서 유학생 목회에 관심이 많은 분과 대화를 나누었는데 요즘 유학생들중 많은 학생들이 복음에 마음의 문을 닫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유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 하나는 복음을 들었기에 더 문을 닫는 사람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문 말씀이 이해가 갑니다. 지금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말씀을 전하라고 하시지만 말씀을 전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더 멀어져 갈 것을 미리 경고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이 경고를 받은 이사야는 가만히 있을리가 없습니다. 11절 말씀입니다.
“내가 이르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이사야의 질문은 당연하죠. 말씀을 전하면 전할수록 하나님께 더 멀어지게 하는 이 고통의 시간을 언제까지 지속하시겠냐고 질문하는 것입니다. 이에 주께서 대답하십니다.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이사야는 황당한 답변을 받습니다. 복음을 거절해서 더욱 황폐해지고 더 황폐해질수가 없을 때까지라고 답변을 하십니다. 이사야는 아마 너무 황당하여 무어라 말할지를 잊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부르신 이유는 말씀을 전해서 더 이스라엘이 빨리 망하도록 하기 위함임이 드러난 것입니다. 자기로 인해서 더욱 망가지는 이스라엘을 보는 안타까운 운명의 선지자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요나처럼 도망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자기 입으로 고백한 것이 있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혼자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 때 왜 내가 그런 고백을 하였나…?” 그러나 가만히 보면 그것도 어쩔수 없는 고백이었습니다. 자기는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산 사람이 없는데 스랍 천사가 숯을 입술에 대어주어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것입니다. 그러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면 무슨 말은 못합니까? 그래서 고백했던 것입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얼떨결에 자기가 대답을 하였다고 해도 이사야는 자기가 보냄을 받아서 말씀을 전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 올 것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엉뚱하게 하나님은 반대의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사야는 슬픈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부르셨고 자기는 서원을 했으니 그대로 행해야 합니다. 아마 이사야의 마음은 참으로 참담했을줄 압니다. 이사야는 자기의 서원을 무를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대로 선지자로서 소명을 다하자니 자기로 인해 더욱 하나님께 멀어져 갈 사람들이 눈에 보입니다. 이 때 이사야는 어떤 결심을 하였을까요? 물론 성경에는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그래도 가장 가까이 추측할수 있는 자료는 이사야의 고백에서 밖에 찾을수 없습니다. 저는 이사야의 고백 안에서 실마리를 잡고자 합니다. 이사야는 참담한 가운데 생각했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지?” 그러면 그럴수록 이사야의 뇌리에는 자신의 고백이 자꾸 울려 퍼집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이사야는 무릎을 치면서 일어납니다. “‘여기’를 사랑하는 선지자가 되어야지.”
사실 선지자는 바로 ‘여기’를 사랑하여야 하지 않습니까? 생각해 보십시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어디론가 보냅니다. 보내어진 곳에 가면 그 곳은 ‘저기’가 아닙니다. 그곳은 ‘여기’가 됩니다. 이사야는 자기의 고백 안에 자기의 사명을 새롭게 깨닫게 되지 않았을까요? 이사야는 자기로 인해서 자기가 보내어 진 곳이 더욱 황폐해 갈지라도 바로 자기가 서 있는 황폐한 ‘여기’를 사랑하기로 결단했을 것입니다. 이 때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자기를 부르신 하나님의 음성이 새로이 들립니다. 13절 말씀입니다.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 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
물론 처음에는 남은 십분의 일도 마저 황폐하게 될 것이라는 비보를 듣습니다. 그러나 곧이어 희망의 멧세지가 들려 옵니다.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나무들마다 특징이 있지만 밤나무와 상수리나무의 특징은 제 아무리 짤려도 그루터기만 있다면 새로이 가지가 솟아나옵니다.
이사야가 보내진 ‘여기’라는 현장의 마지막은 새 싹이 돋아나오는 현장이라는 것입니다. 그 후 이사야는 자기가 보내진 현장 곧 ‘여기’를 사랑하며 충성된 선지자가 되어 갑니다. 하나님께서 어디로 보내시던 자기가 있는 ‘여기’를 사랑하는 사람이 됩니다.

인생을 사는데 두 가지 모습이 있습니다. 하나는 순례자의 삶입니다. 또 하나는 피난민의 삶입니다. 우리는 이 둘 중에 하나입니다.
2015년도를 우리는 순례자로 살던지 피난민으로 살던지 할 것입니다. 순례자는 하늘나라를 목표로 향하여 살아 갑니다. 그런데 하늘나라로 가는 동력은 바로 여기를 사랑함으로 얻습니다. ‘여기’의 삶을 사랑하면 할수록 하늘나라로 향하는 순례의 길이 아름답게 가꾸어집니다.
피난민은 여기가 싫어서 여기를 떠나는 사람들입니다. 피난민은 ‘여기’가 아닌 곳을 찾아 항상 떠납니다. 떠나려 합니다. 그런데 가는 곳마다 ‘여기’가 됩니다. 그래서 항상 목표 없이 어디론가 떠나려고만 하는 사람들이 피난민입니다.
피난민이 순례자가 되기 위한 첫번째 조건이 있습니다. 물론 목표를 하늘나라로 삼아야 겠죠. 그런데 그것 보다 더 중요한 조건이 있는 것 같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있는 여기를 사랑할 때 도리어 하늘 나라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목표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들이 가는 곳마다 새로운 꽃이 피기 시작합니다. 그루터기에서 새 가지가 피어 오릅니다.

이런 분들의 이야기는 쉽게 찾을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분이 언젠가 소개해드렸던 작고하신 장영희 교수님이죠. 어릴 때부터 소아마비라서 세상에서 사랑을 받지 못합니다. 원하는 학교에 가기도 너무 어렵습니다. 이 때 어떤 결심을 합니까?
“세상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나를 세상을 짝사랑하리라.”
그 후로 자기를 받아주지 않는 세상을 짝사랑하기 시작합니다. 미국에서 영문학 박사가 되어서 서강대 교수가 됩니다.
장 교수님은 바로 ‘여기’를 사랑했던 사람입니다.

그뿐입니까? 대한민국 축구 대표 선수였던 박지성 선수가 자서전을 펴냈습니다. 자서전 제목은 <나를 버리다 - 더 큰 나를 위해> 입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합니다.
“스스로 준비를 마쳤다고 해서 세상이 기회의 문을 선뜻 열어 주지 않는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결정되는 일들 속에서 날 지키기 위한 확실한 한 가지는 내가 발 딛고 있는 곳에 대한 확신과 애정이었다.”
박지성 선수가 기독교인임을 잘 아실줄 압니다. 박지성 선수가 그처럼 훌륭한 선수가 될수 있었던 것은 믿음 안에서 바로 자기가 서 있는 여기에 대한 확신과 애정이 있었던 것임을 쉽게 알수 있습니다.

한 사람만 더 소개해 드릴까요? 최근 한국에서 오신 분들은 잘 아실줄 압니다. 총각네 야채 가게의 대표 이영석 씨가 아버지의 사업이 무너지만서 가난에 쪼달립니다. 세상에 대한 원망과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조금씩 비뚤어져 갔습니다. 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군인이나 경찰관이 되겠다는 현실적인 꿈을 가집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시련이 찾아옵니다. 고3때 자신이 선천성 척추 기형임을 알게 됩니다. 경찰이나 군인이 될수도 없었습니다. 절망한 이 때 담임 선생님이 찾아 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어떤 말을 해도 너는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영석아, 세상은 너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니 네가 세상을 받아들여라.”
그 후 세상에 마음을 열었고 대학을 졸업하고 끝내 남들이 생각하지도 못했던 총각네 야채가가를 열어 큰 기업의 대표가 됩니다.
자기를 받아드리지 않는 ‘여기’를 사랑한 결과가 아닐까요?

교우 여러분,
벼랑까지 가지 않아도 됩니다. 저도 벼랑을 싫어합니다. 저도 저희집 지붕이 낮지만 겁이 나서 올라가지 못합니다. 저도 벼랑과는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벼랑에 겁 없이 설수 있는 사람을 찾고 계시지 않습니다. 이사야의 고백을 하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자기가 있는 ‘여기’를 사랑하는 자를 찾고 계십니다. 그 여기가 황폐한 곳일지라도 우리가 있기에 더 황폐해질수밖에 없는 곳일지라도 바로 자기가 서 있는 곳을 사랑하는 자를 찾고 계십니다.
여기를 사랑하는 자를 저기로 보내십니다. 그들은 저기를 다시 여기로 생각하여 그곳을 사랑합니다. 이런 자를 하나님은 찾고 계십니다.
사실 예수님도 이 땅에 계실 때 그가 거하는 곳이 어떻게 보면 더 황폐해 갔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은 더 악해져 갔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그가 계신 곳을 사랑하셨습니다. 여기를 사랑하시기에 끝내 십자가에서 외치신 것이 아닐까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한편 예수님의 이 고백을 듣는 사람들은 주님처럼 ‘여기’를 사랑하는 자가 되어 갑니다. 이사야처럼 죄 씻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죄 씻김을 받으셨습니까? 우리가 있는 ‘여기’를 사랑하십시다. 자꾸 사회 경제적으로는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얼마나 더 어려워질지 알수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 때문에 더 어려워질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여기’를 사랑하십시다.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는 ‘여기’를 사랑하십시다. 언젠가 그루터기에서 새로운 가지가 피어날 것입니다. 우리가 있는 곳에서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께 고백하십시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말씀을 거둡니다.
안토니오 반데라스라는 분이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스페인 시인이 말했다.
‘길은 없다. 당신이 걸어가며 만드는 것이 길이다.”

언제 길이 만들어질까요? 자기가 처한 ‘여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길이 만들어지지 않을까요? ‘여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저기’로 가는 길이 열리지 않을까요?

교우 여러분,
2015년도 각자를 위한 아름다운 길을 만드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멀리 보고 걸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각자가 처한 곳을 사랑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이런 분들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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