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 2014.11.30
예배명 : 대강절 첫째 주일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내 귀에 들릴 때에
성경본문 : 누가복음 1:3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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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기가 많은 역사가들에게는 암흑시대로 불려지고 있지만 사실 그나름대로 왕성했던 분야도 있습니다. 많은 신학적 토론들이 이 시기에 진행이 되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다음과 같은 주제의 토론이었습니다. 아담의 죄와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토론이었습니다. 한 그룹은 주장합니다.
“아담이 죄를 짓지 않았으면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른 그룹은 주장합니다.
“아담이 죄를 짓지 않았어도 그리스도는 세상에 오셨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답은 후에 하늘나라 가서 주님께 여쭈어 보시기 바랍니다. John Shea라는 영성가는 주님은 인간들이 너무도 아름다워서아담이 죄를 짓지 않아도 주님은 오셨을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어떤 일어나지 않은 가정을 가지고 쓰여진 책이 아닙니다. 이미 일어난 일과 일어날 일에 대해서 쓰여진 책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가지고 일어나지 않은 것을 전제로 사고하며 추측한다는 것은 많은 경우는 무의미합니다. 그러니 더 이상 이 질문에 몰두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한편 저는 한 가지를 확신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담이 죄를 지었건 안 지었건 이 세상은 “Fine,”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은 변치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대강절 첫번째 주일예배로 드립니다. 대강절의 멧세지는 “Fine, no matter what”입니다. 이유는 그리스도가 오셨고 또 오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주는 멧세지입니다.
성경에 이 멧세지가 있음을 200년전 미국 어느 원주민이 선교사를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체로키 원주민인 Drowning Bear씨가 선교사를 통해서 성경말씀을 배운 후 말합니다.
“참 좋은 책이네요.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생각이 드네요. 백인들은 이런 좋은 책을 그토록 오래 가지고 있었는데 왜 더 나아지는 흔적이 없죠?”
아주 가시가 있는 표현입니다. 사실 우리가 대강절을 지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날로 더 나아지기 위함이 아닙니까? 그래서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 흠과 티가 없이 주님을 맞이하기 위함이 아닙니까? 완전치는 못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대강절을 지켜야 날로 더 나아지는 우리가 될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상고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세례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을 방문하는 이야기가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삶을 살펴보며 귀한 교훈을 나누고자 합니다. 결론을 먼저 말씀드리면 마리아와 엘리사벳 모두 듣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들음을 통하여 놀라운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 내용은 마리아가 세례요한의 어머니 사가랴의 집을 향하는 장면부터 시작합니다. 마리아가 갑자기 엘리사벳을 찾아오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본문 바로 전의 귀절을 보면, 마리아는 방금 천사에게 처녀의 몸으로 아들을 낳으리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아울러 천사를 통해 친족인 엘리사벳도 뒤늦게나마 아이를 배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닌 밤에 홍두깨죠, 마리아는 갑자기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갖게 되었는데 그 누구에게도 말을 할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벳이 아이를 낳을수 없었다가 뒤늦게 아이를 배었다는 소식을 듣자 자기와 이야기가 통할 것으로 생각이 되어서 엘리사벳에게 달려 온 것입니다.
그러면 이 때 엘리사벳이 마리아가 구주의 어머니가 된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을까요? 42, 43절 말씀입니다.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
얼뜻 읽으면 엘리사벳도 이미 자기의 친족인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육신의 어머니가 된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그렇다면 마리아가 엘리사벳에게 어떤 방법으로든지 미리 알려 주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처럼 이멜이나 전화가 있었던 시절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친척을 통해서 알려주었을리가 만무합니다. 마리아는 아무에게도 말한 사람이 없습니다. 말할수 있는 내용도 아닙니다. 문맥으로 봐도 마리아는 천사의 말을 듣자마자 곧 바로 달려 온 것입니다. 38절 마지막과 39절 상반절입니다.
“천사가 떠나가니라. 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골로 가서…”
그렇다면 분명히 엘리사벳도 미리 알고 있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요? 44절 말씀입니다.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마리아의 문안하는 소리를 들음과 동시에 뱃속에 아이인 세례요한이 뛰놀았습니다. 아울러 41절 말씀을 보면,
“엘리사벳이 마리아가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세 사건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문안 소리를 듣습니다. 동시에 아기도 뱃속에서 듣고 뛰어 놉니다. 아울러 성령의 충만함이 엘리사벳에게 임합니다. 그 순간 엘리사벳은 마리아가 구주의 어머니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성령 충만은 하나님의 영역이지만 듣는 것은 인간의 영역입니다. 저자 누가는 은연 중 들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바로 다음 절인 45절 말씀을 보면 저자 누가는 들음을 얼마나 강조하고 있는지를 알수 있습니다.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왜 엘리사벳이 이런 표현을 했을까요? 물론 이는 마리아를 높이는 말씀입니다. 마리아도 듣는 귀가 있었던 여인이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듣는 귀가 있는 마리아를 하나님께서 택하셨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고 말할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벳이 이 말을 한 다른 숨은 뜻이 있습니다. 아니 가정적 아픔이 었었습니다. 벙어리 남편과 지난 5개월을 살고 있었습니다. 앞으로 5개월을 더 참고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갑자기 말 못하게 된 배우자와 사는 것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것도 나이들어서 입덧도 무지 심한데 말입니다.
남편이 벙어리가 된 이유가 있죠. 천사의 말을 듣고 믿지 못해서 고생한 사람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아버지인 제사장 사가랴가 제사의 직무를 보고 있는데 천사가 나타나서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에 사가랴가 자기도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아서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 후 10개월간 사가랴는 벙어리가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머거리가 된 사가랴를 인간적으로 벙어리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엘리사벳은 누구보다도 들을줄 아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뼈저리게 체험한 것입니다. 그 후 엘리사벳은 결심했을 것입니다. 자기는 들을줄 아는 자가 되리라.
그러던 차인데 마리아가 나타납니다. 마리아는 듣는 자였음을 금방 느낍니다. 그래서 그는 마리아에게 이렇게 외쳤던 것입니다.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세 사람의 들을줄 아는 사람이 나옵니다. 엘리사벳, 마리아 그리고 엘리사벳의 몸 안에 있는 세례 요한. 이 모든 것을 통해서 누가는 대강절은 들을줄 아는 자들에게 찾아 옴을 알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듣는 자들에게는 놀라운 일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반면 듣는 것을 거부하는 자는 벙어리가 됩니다.
Communication에 대해서 이런 자료가 나와 있습니다. 일반 사람들이 인간의 모든 행위 중에 제일 많이 하는 것이 듣는 것이라고 합니다. 보통 70%의 시간을 소통에 사용하는데, 그중 9%는 글 쓰는데 사용합니다. 그리고 읽는데 16%, 말하는데 30%, 나머지 45%가 듣는데 사용한다고 합니다. 물론 개인차이는 꽤 있겠죠.
우리가 깨어 있는 시간의 70%를 소통에 사용하는데 그 중에 거의 절반인 45%를 듣는데 사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들의 행위의 거의 35%가 듣는데 사용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 삶은 정말로 기적으로 가득차야 할줄 압니다. 듣는 자에게 기적이 임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렇습니까?
영어로 ‘듣다’의 단어가 두 가지이죠. 하나는 hear, 또 하나는 listen. communication전공자들은 이 두 단어를 다르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Hear는 그야말로 소리를 귀로 듣는 것입니다. 그런데 listen은 귀로 들으면서 그 안에 담긴 뜻을 느끼는 것을 말한다고 합니다.
저희 가족이 작년에 한국에 갔을 때 저녁 시간에 한 방에서 TV를 보게 되었습니다. 재미있는 순서가 진행이 되고 있었는데 방송국에서 주파수를 보내면서 소리를 듣느냐는 것을 테스트하는 프로였습니다.
어린 사람일수록 낮고 높은 것을 듣고 나이가 들을수록 들을수 있는 폭이 작아지는 것을 보여주는 프로였습니다.
어느 데시벨이 되니 저는 안 들리기 시작했고 집사람과 준석이는 들을수 있었습니다. 더 낮아지니 집사람도 듣지 못했고 준석이만 들을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hearing입니다. 이것은 다행히 대강절과 상관이 없습니다.
대강절과 상관있는 것은 listening입니다. 영어 단어 listen에는 두 내용이 포함이 되어 있는데 첫번째로는 ‘hear’(듣다)입니다. 아울러 또 다른 의미가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to wait in suspense.” 한국말로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가슴이 두근 거리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곧 thrill을 느끼면서 한쪽으로는 기대감을 가지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대강절의 들음입니다.
대강절의 들음은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적 기대감을 안고 듣는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적 기대감을 안고 들을 때 대충 들을수가 있을까요? 혼을 다하여 듣는 것이 아닐까요? 그 때 기적은 나타나지 않을까요?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과학의 천재 아인슈타인이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나는 한번도 이성적인 사고를 통해 무언가를 발견한 적이 없다.” 이성적인 사고는 hearing에 가깝습니다. 세상의 모든 자료를 모아서 결론을 내리는 것이 이성적인 사고가 할수 있는 최상의 것입니다. 물론 학교에서 좋은 성적은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을 발견하거나 발명하지 못합니다. Listen을 할줄 아는 사람들이 공헌을 합니다. 발견을 하거나 발명을 합니다. 아인슈타인은 hearing을 못해서 학교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listening을 통해서 큰 공헌을 한 것입니다.
얼마전 인도자 교육에서 노회 소식지에 나온 이야기를 나눈적이 있습니다. Gil Stafford라는 분이 listening이 신앙생활에 얼마나 소중한지에 대한 글을 썼습니다. 그 분의 동생이 신체 장애인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 화상을 입어서 말하는 부위도 많이 손상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기적적으로 59세까지 살고 있습니다.
동생과 생활할 때 가장 지금까지 가장 큰 과제가 그의 말을 알아 듣는 것입니다. 때로는 동생의 말을 아직도 잘 알아듣지 못할 때가 종종 있다고 합니다. 동생은 역정을 내기 일보 직전에 이릅니다.
그러면 언니는 또 말한다고 합니다. “I am ready to listen.” 언니는 혼을 다해서 듣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많은 소리들이 들립니다. 특히 벼라별 소문도 많습니다. 인터넷으로 인해 더 요란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마십시요. listener들은 모든 소리를 걸러냅니다. 모든 소리 안에서 조용하게 들리는 멧세지만을 듣습니다.
“Fine, no matter what.”
대강절의 들음은 복잡한 많은 소리를 들으면서 잘 들리지 않는 아기 예수를 향하여 외치는 것이 아닐까요?
“I am ready to listen.”
이것은 또한 엘리사벳의 고백이 아니었을까요?
처음에 Bear라는 원주민이 왜 그렇게 좋은 책을 갖고 있는데도 좋아지지 않느냐고 핀잔을 주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listening대신에 hearing을 많이 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세상 이야기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짐을 믿고 들을 때 listening을 하는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의 기적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이번 대강절 기간 아기 예수의 음성을 들으십시다. 복잡한 세상 가운데서 아기 예수에게 말하십시다. “I am ready to listen.”
처음에는 쉽지 않을줄 압니다. 그러나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그 앞에 서 있으십니다. 언젠가 들릴 것입니다. 아기 예수는 말씀하십니다.
“Fine, no matter what.”
아기 예수의 이 음성을 듣는 자들이 하는 모든 행위에는 놀라운 기적이 펼쳐질 것입니다. 기적의 주인공이신 아기 예수는 오셨고 함께 계시고 또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오시는 소리를 들으십시다.
말씀을 거둡니다.
사막에 사는 수도사가 제자에게 사막에 꽂아 있는 막대기에 물을 매일 주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물의 근원이 멀리 있어서 밤마다 멀리 물을 길으러 갔다 오곤 하였습니다. 3년이 흘렀습니다. 3년동안 물을 준 것입니다. 어느날 막대기에 꽃이 피었습니다. 수도승들이 모여서 막대기 주위에서 축제를 벌였습니다. 막대기를 생각해서 ‘순종의 열매’라는 축제를 벌인 것입니다.
제자는 엉뚱한 수도사의 말을 그냥 받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생각하면서 들었습니다. 받았습니다.
사실 나이 많은 엘리사벳이 아기를 가진다는 것도 마른 막대기가 꽃이 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마리아가 구주의 어머니가 된다는 것도 기적의 꽃이 피는 것이 아닐까요?
마리아와 엘리사벳도 마른 막대기에 물을 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듣는 자들이었습니다. 드디어 그들의 삶 속에 기적의 꽃이 핀 것입니다. 그들 스스로가 막대기였던 것입니다.
우리도 기적의 사람들이 될수 있습니다. 복잡한 세상의 소리를 뒤로 하고 말구유 앞에 서십시다. 그리고 외치십시다.
“I am ready to listen.”
이 때 세상은 너무도 아름답게 보일 것입니다. 온통 기적의 꽃밭으로 보일 것입니다. 기적의 꽃이 언제 어디서 필지는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피고야 할 것입니다. 꽃이 피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물을 주십시다. 우리 세대가 아니면 다음세대에도 이어지게 하십시다. 우리는 아인슈타인보다 더 위대한 일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 일은 듣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하나님께 맡기십시다.
듣고 마른 막대기에 물을 주곤 했던 엘리사벳은 외칩니다.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