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 2014.09.07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또 풍부하리니
성경본문 : 빌립보서 4: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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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정권 시대때 군부 독재에 저항하다가 두 차례나 옥살이를 하신이건범 씨가 감옥 생활에서 배운 지혜와 이야기들을 모아 책을 발간했습니다. ‘내 청춘의 감옥’이라는 책입니다.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옵니다.
“두 달 전인가, 집에서 아들 녀석이 이어폰 잭에 붙어 있는 플라스틱 지지대를 자르려 했는데, 마땅한 도구가 없었다. 요즘 집에다 톱을 갖춰 놓고 사는 사람이 없듯, 우리 집에도 톱이 없다. 칼로는 좀 어렵게도 하거니와 자칫하면 손을 베일 위험도 있었다. 이때 내가 사용한 게 바로 실로 꼰 끈이었다. 집에 있는 아무 실이나 가지고 새끼 꼬듯 꼬면 그 끈의 외형은 드릴 날처럼 되는데, 그 홈 파임의 차이 때문에 끊는 기능을 갖게 된다. 특히 플라스틱을 곱게 자르는 데에는 그만이다. 자를 물건이 두툼하다면, 그때는 역시 시간을 이용하면 된다. 느긋한 마음으로….”
아버지는 감옥 생활에서 배운 생활의 지혜를 가지고 아들의 눈을 똥그랗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아들에게 아버지는 말합니다.
“아빠가 배워야할 모든 것은 감옥에서 배웠지….”
이 아버지의 말이 생각나게 하는 책이 있죠. Robert Fulghum 이라는 분이 ‘내가 배워야할 모든 것을 유치원에서 배웠지’(All I really need to know I learned in Kindergarten) 라는 유명한 책을 쓰지 않았습니까?
반면 이건범씨는 인생에서 배워야할 모든 것을 감옥에서 배웠다고 고백합니다.
지난주 설교를 들으신 분들은 내용을 다 기억은 못해도 한 가지는 기억하실줄 압니다. 떠남의 위대함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떠남과 정반대의 인물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이건범씨는 감옥에서 도리어 배워야 할 모든 것을 배운 사람입니다.
지난주는 떠나는 사람을 소개해 드렸고 오늘은 떠날수 없는 사람을 소개해드립니다. 그런데 이 두 부류의 사람 모두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서는 필요한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떠날 수 없었던 대표적인 인물들을 먼저 소개해드리면 가장 눈에 띄는 분은 남아공화국 대통령을 지냈던 Mandela대통령이 생각이 납니다. 27년간 감옥생활을 하였습니다.
힛틀러 정권에 저항하다 감옥에 갇힌 본회퍼 목사는 옥중에서 편지를 썼는데 후에 옥중서한이라는 책으로 출판되어서 최고의 저서가 되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주기철 목사님, 신영복 교수님 같은 분들의 삶도 기리 기억되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면 한 가지 궁금한 생각이 듭니다. 떠나는 사람들과 떠날수 없는 사람들이 정반대의 삶의 현장에 있지만 왜 같은 결과를 가져다 주는지 궁금해집니다. 아마 이들 안에 무언가 큰 공통점이 있지 않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의 주인공인 사도바울은 한 때는 떠남의 사람이었고 지금은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입니다. 사도바울의 삶을 살펴 보면서 떠남의 사람과 갇힌 사람 모두가 가지고 있는 역사를 이끄는 위대한 사람들의 특징을 찾아 보고자 합니다.
오늘의 짧은 본문 말씀 가운데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있습니다. 7절밖에 안 되지만 세번씩이나 나옵니다.
17절을 보면,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함이라.”
18절을 보면,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19절을 보면,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풍성’, ‘풍부’, ‘풍성’ 세번에 걸쳐서 반복되어 나옵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은 어떤 상황에 처해 있기에 이런 ‘풍성’이란 표현을 세차례나 연거푸 하고 있나요? 14절 말씀을 보면,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바울은 지금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감옥에 갇힌 바울에게 빌립보 교인들은 사랑의 선물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지금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고마움의 표시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빌립보 교회는 이번뿐 아니라 전에도 사랑의 선물을 보낸적이 있습니다. 16절 말씀입니다.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사도바울은 이번에 감옥에서 빌립보 교인들로부터 사랑의 선물을 받고 나니 전에도 사랑의 선물을 받은 것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씩이나…. 그 다음 표현이 흥미를 자아내게 합니다.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함이라.”
어떻게 보면 엉뚱한 표현입니다. 사실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자기에게 선물을 보낸 자들에게 감사의 표시를 확실히 하고 겸손히 편지를 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냄새는 전혀 안 납니다. 도리어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함이라.”
어떻게 보면 오만한 느낌마저 듭니다.
제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입니다. 워싱톤 DC근교에 있는 어느 교회를 다니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신학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신학교에 간다고 하니 제가 다니던 교회에서 장학금을 첫해 학기초에 보내주셨습니다. 저는 감사의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두번째 해에도 또 장학금을 보내주셨습니다. 또 감사의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세번째 해가 되었습니다. 저는 은근히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학기초가 지나도 오지 않습니다. 아는 분을 통해서 알아 보았습니다.
세번째 해는 저는 장학금 대상에서 제외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후에 알게 된 것은 어떤 분은 3년 계속 받았는데, 저와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저는 감사의 편지를 짧게 쓴 반면에 그 분은 장문의 감사의 편지를 쓰곤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의 편지의 길이를 보아서 누가 더 절실히 필요한지를 평가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저보다도 훨씬 감사의 편지를 짧게 쓴 셈입니다. 아니 감사의 글은 전혀 없습니다. 도리어 예상치 못한 표현을 합니다.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이 글을 읽고 빌립보 교인들은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풍부하다고 하니 더 이상 선물을 보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까요?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사도바울이 감옥 밖에 자유인으로 있다면 더 이상 선물을 보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지금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하다고 고백함을 듣고 크게 감탄했을 것입니다.
그는 어떤 사람이기에 감옥에서도 이런 고백을 할수 있나? 그들은 상상해보았을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작은 선물을 가지고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작은 선물 안에 담겨 있는 풍성한 세계를 볼줄 아는 분이었습니다. 아니 풍성한 세계를 만드는 분이었습니다.
이건범씨가 실 하나로 톱을 상상하며 만들었듯이, 사도바울은 작은 선물로 무진장한 창조와 선물의 세계를 만들어갔던 분이었습니다. 왜 그럴 수 있었을까요?
사도바울의 뼈 속 깊이 숨겨진 법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풍성의 법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 나라가 있는 곳에는 오직 풍성의 원칙만이 적용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를 가두고 있는 감옥도 사도바울 가슴 깊숙히 자리 잡고 있는 이 풍성의 원칙을 이기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이기지 못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세계를 이 세상 감옥도 가둘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고백한 것입니다.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감옥에서 사도바울은 도리어 풍성 위에 풍성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처음 소개해 드린 이건범 씨의 다른 이야기 하나를 더 소개해 드리면, 감옥은 1.4평의 좁은 공간인데, 그 공간 안에 아무 것도 없고 변기만 덜렁 있다고 합니다.
이건범씨는 원래 사회학을 공부한 사람인데 사실 그는 좁은 감옥 안에 여러 가지 가구를 손수 만들어 넣었습니다. 그런데 금방 벽에 부딪힙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장롱을 만들었는데 감옥에서 나무를 구할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의 꿈을 멈추게 할 수 없었습니다.
한 가지 아이디어가 생겼습니다. 나무에서 종이가 생산된다는 것에 착안했습니다. 종이를 여러 장 붙이면 나무처럼 된다는 생각을 해냈습니다. 종이를 여러 장 붙여서 나무를 만들고 그 나무들로 장롱을 만들어 갑니다. 책상도 만들고 선반도 만들어서 1.4 평의 감옥을 호텔로 만들었다고 자부합니다.
이건범씨가 기독교인인지 아닌지는 저는 모릅니다. 책에는 하나님에 대한 언급은 전혀 나오지 않는 것을 보아서 아마 기독교인이 아닐 확률이 더 높습니다.
확실한 것은 그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감옥 안에서 이처럼 풍성한 삶으로 살아가는 지혜를 개발해 낸 것입니다.
이처럼 작은 곳에 갇힌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풍성은 더욱 꽃이 피나 봅니다. 그런데 기독교인과 비 기독교인의 차이는 분명히 있습니다. 19절의 말씀을 통하여 사도바울은 풍성의 신학을 완성시키고 있습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사도바울은 감옥안에서 풍성한 삶을 누리고 있을 뿐 아니라 감옥 밖에 있는 교우님들의 삶도 풍성할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의 풍성한 삶은 감옥을 넘어서 이웃에게 흘러 들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얼마 전에 어느 교우님댁을 방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래 된 교우님이라서 심방을 여러 차례 갔던 집입니다. 집 가까이 가니 교우님께서 길에 나와 계셨습니다. 저를 위해 비어 놓은 파킹장을 안내해 주시는구나 생각을 했는데, 파킹을 하고 나니 뒷뜰로 오라는 것입니다.
여러번 가 보았지만 뒷뜰은 처음이었습니다. 집들이 가까이 붙어 있는 동네라서 뒷뜰도 작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따라 들어 갔습니다.
제 생각대로 뒷뜰은 넓지는 않았습니다. 담으로 둘러 싸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담은 초록색 넝쿨더미로 가득 덮여 있었습니다. 담을 따라서 온갖 과일과 채소들을 심어 놓은 것입니다. 교우님이 말합니다.
“목사님, 도마도도 있구요. 딸기도 있구요. 고분자도 있구요. 마음껏 따서 드세요.”
뒷뜰로 들어오는 입구에는 포도나무 열매가 주렁주렁 맺혀 있고, 호박은 담장을 넘어 이웃집까지 주렁주렁 매달려 있고…, 채소와 과일뿐 아니라 사이 좋게 예쁜 꽃까지 심어 놓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가 다녀 본 어느 집 보다도 뒷뜰은 작았습니다. 그러나 풍성 그 자체였습니다. 저는 아마 에덴 동산이 바로 이러하지 않았을까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작은 뜰을 넘어서 이웃에게 까지 하나님의 풍성의 선물이 나눠지는 것을 보면서 바로 하나님의 풍성한 세계를 막을수 있는 것이 이 세상에는 하나도 없음을 느껴 보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크리스챤들의 삶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보면 작은 뜰이 작은 감옥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풍성한 세계에 새롭게 눈을 띄게 하는 곳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도리어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께 대한 놀라운 확신이 꽃을 피우게 되는 삶의 첫 은혜의 현장일지 모르겠습니다. 다시 말씀 드려서,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고백하게 하는 축복의 장소가 되는 것 같습니다.
곧 작은 공간은 하나님을 삶에서 새로이 만나 고백하는 축복의 현장이 되는 것 같습니다.
사도바울은 그 어느 때 보다도 감옥에서 자신을 많이 축복했으며 이웃을 많이 축복했습니다. 그리하여 풍성의 신학을 완성시킨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지난 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떠나는 자들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아울러 갇힌 자들을 통하여 역사하십니다. 그런데 이들의 공통점은 풍성의 신학입니다. 풍성의 신학은 떠나는 자들을 통해서 꽃이 피었습니다. 아울러 갇힌 자들을 통해서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풍성의 하나님, 아니 어느 신학자는 과장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낭비의 하나님이시다.
우리 하나님은 떠나는 사람이든 갇힌 사람이든 이러한 고백을 하는 자들을 사랑하시고 이러한 고백을 하는 자들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교우 여러분,
우리에게 주어진 좁은 공간 안에서도 고백하십시다.
우리의 좁은 공간을 넘어 우리들의 풍부함의 축복은 날개를 달고 꼭 필요한 이웃에게 전달될 것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정말로 좁은 공간에서 사셨던 분이 있습니다.
눈깜빡이는 시인 미즈노 겐지라는 일본인이 있습니다. 어릴 때 홍역을 앓아 전신마비가 됩니다. 눈만 깜빡일수가 있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주신 성경을 읽고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그리고 많은 시를 지읍니다. 그런데 말도 할수 없고 글도 쓸수 없지만 시를 쓸수 있었습니다.
어머니와 눈을 깜빡이면서 시를 씁니다. 일본어로 오십음도가 있다고 합니다. 곧 알파벳이 50개라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어머니가 abcd… 하나 하나 말할 때 자기가 원하는 알파벳이 나오면 눈을 깜빡입니다. 예를 들어 boy하면 처음 b 할 때 눈을 깜빡입니다. 그 다음에는 o, 그 다음에는 y. 그렇게 해서 시를 지었습니다. 하나만 소개해 드립니다.
<삶>
하나님의 크신 손 안에서
달팽이는 달팽이답게 가고
닭장들꽃은 닭장들꽃답게 피고
청개구리는 청개구리답게 울고
하나님의 크신 손 안에서
나는 나답게 산다
이 분이 이런 시를 쓰면서 살수 있던 이유는,
‘나는 나답게 산다’ 고백할 수 있었던 이유는,
매일 매일을 이렇게 외쳤기 때문일줄 압니다.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하리니…”
교우 여러분,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넓은 집 넓은 공간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어떠한 삶의 환경에 있던지 풍성한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 구석 구석은 하나님의 풍성의 원칙으로 가득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이러한 고백을 하며 사는 것입니다.
“또 풍부하리니…”
참 자신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이 고백과 함께 이웃을 향하여 사도바울의 고백을 하십시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