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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백성을 위로하라

날짜 : 2014.08.10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내 백성을 위로하라
성경본문 : 이사야 40:1-2

http://kcbostonmedia.cponsolny.com/Sermon_video_master/Sermon_20140810.wmv

8/15 광복의 날이 있기까지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바로 히로시마 원자탄 투하였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부인하지 못 할 줄 압니다. 원자탄을 투하한 비행기 ‘에놀라 게이’ 승무원 중, 마지막 생존자였던 군인이 지난 7월 28일 향년 93세로 사망했다고 합니다. 그 당시 판커크 중위였습니다.
사실 그는 참상을 목격한 후 반핵주의자로 변했습니다. 2005년 AP통신 인터뷰에서 “전쟁과 원자폭탄으론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8/15 광복은 좋은데 원자병에 걸려 고생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한편으로는 마음이 아파 오는 것도 사실입니다.
광복을 맞이한지 거의 70년이 되어 갑니다. 원자탄 투하가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에 대한 논쟁은 주님 오실 때까지도 그치지 않을줄 압니다. 물론 우리 대한민국을 위해서는 어쩔수 없는 것이었음은 부인하기 어려울줄 압니다.
오늘 보여드리지는 않았지만, 일본군인들이 독립군들의 머리를 잘라서 높이 매달고 있는 장면이나 성노예로 끌려가서 온갖 추행을 당하면서 죽어간 여인들의 사진들을 보면 반핵주의자가 되고 싶어도 다시금 주먹을 불끈 쥐게 하곤 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핵폭탄이 아니었더라면 얼마나 많은 여인들이 더 희생을 당하였을까 생각을 안 할수가 없으니 말입니다.
금주 설교 준비를 하면서 일제 시대의 동영상을 여러 편 보았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저의 마음 속 깊은 곳이 아문 것 같았지만 사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깊은 상처가 있음을 부인할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처와 아픔 가운데 있는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오늘 어떤 말씀을 해주실까요?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위로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어떤 분들은 질문하실지 모릅니다.
“우리 마음에 아직도 상처가 남아 있는데 어떻게 남을 위로한다 말입니까?”

오늘 본문 말씀은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주신 말씀이라고 많은 주석가들은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바로 그 다음 절을 보면 쉽게 알수 있습니다.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죄 값을 치루고 있을 때, 아직 죄 값이 다 치루지도 않았는데, 이미 다 치룬 것으로 간주하고 백성들을 위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게 무슨 소리야?” 하면서 고개가 갸우뚱하게 되는데, 사실 이 말씀에 대해서 크게 두 가지 해석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어제 BNI 모금만찬이 있었는데 잠시 여러분들을 평신도 신학원으로 초대합니다. 제가 미국에서 두 신학교에서 공부했습니다. Westminster 와 Princeton신학교입니다. 두 학교가 이사야서를 보는 관점이 판이하게 다릅니다.
웨스트민스터에서는 이사야서가 66장으로 되어 있는데 한 저자가 썼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프린스톤에서는 3저자가 기록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만 아시는 거죠…. 신학적으로는 둘 다 장단점이 다 있습니다. 특히 40장을 보는 관점이 다릅니다.
프린스톤에서는 39장까지는 포로 전 시대에 쓰여졌고 40장부터는 포로시대에 쓰여졌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반면 웨스트민스터는 40장도 포로 전시대에 한 이사야가 썼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용적으로 볼 때 프린스톤의 해석이 더 합리적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39장에는 히스기야왕의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보면 39장과 40장은 100년 이상의 차이가 있습니다. 이로 인해 두 저자가 썼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주 합리적입니다.
그런데 내용을 잘 살피면 더 합리적인 것을 알수가 있습니다. 왜 히스기야를 언급하다가 갑자기 포로시대로 넘어가는지 이유가 있습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한 마디로 우리가 좋은 왕으로 생각하는 히스기야의 죄 때문에 바벨론 포로가 되었습니다.
39장의 이야기를 잠시 소개해 드리면, 히스기야가 병이 들었다가 기적처럼 낫게 된 것을 바벨론 왕이 전해 들었습니다. 이에 바벨론 왕이 축하의 선물과 함께 축하의 글을 보냅니다. 강대국 바벨론 왕으로부터 선물을 받은 히스기야 왕이 그만 흥분합니다.
그래서 자기 궁중의 소유와 전 국내의 소유를 모두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 히스기야왕에게 말씀하십니다. 39:5절 말씀입니다.
“보라 날이 이르리니 네 집에 있는 모든 소유와 네 조상들이 오늘까지 쌓아 둔 것이 모두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남을 것이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사실 이스라엘 민족 특히 남왕국이 바벨론으로 잡혀 가게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히스기야 때문입니다. 히스기야가 훌륭한 왕 중에 한 사람이지만 큰 잘못을 했습니다.
아담 때문에 죄가 세상에 들어 온 것처럼 히스기야 때문에 바벨론 포로가 된 것입니다. 이유는 바벨론왕의 사자에게 자기가 소유한 모든 귀한 것을 내 보여주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노하시고 바로 잘난척을 한 바벨론에게 보여준 모든 것을 빼앗기게 하십니다. 빼앗길뿐 아니라 포로가 되게 하십니다.
여기에 귀한 교훈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잘난척을 하면 우리의 자랑거리가 이웃에게 옮겨갈수 있다는 교훈이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생각하기로 하고….
히스시야가 죄를 지은지 이제 100년이 지났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포로 생활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제2 이사야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곧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 백성들에게, 포로 생활을 하게된 이유는 히스기야에게 있지만, 그 기한이 다 찾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백성들이 위로를 받습니다. 은혜롭죠. 이것이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반면 웨스트민스터는 어떻게 생각할까요?
히스기야가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갈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아직 포로로 끌려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미 소문이 쫙 퍼졌습니다. 히스기야의 죄로 인해 바벨론 포로가 될 것이라는 것을…. 그러니 이미 그들은 두려움에 사로 잡힙니다. 그래서 포로가 되지도 않았는데 포로가 될 기색도 안 보이는데 그들은 위로가 필요했습니다. 이에 그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이것도 은혜롭죠.

사실 구약의 원어인 히브리어는 때로는 미래도 과거형으로 기록되곤 했습니다.
곧 프린스톤 쪽에서는 제2이사야가 나타나서 포로 중에 있는 자들을 위로하고 있는 반면 또 웨스트민스터에서는 앞으로 닥칠 포로 생활을 내다 보면서 위로를 하고 있는 하나님의 모습이 소개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두 학교에서 공부한 저는 참으로 행복합니다. 두 가지 해석 다 모두 좋습니다. 그런데 두 해석 모두 공통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바벨론으로 이미 끌려 갔던 아직 끌려가기 전이던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이 되셔서 죄를 지은 이스라엘 민족을 찾아 오십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히스기야의 죄가 제아무리 커도 상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보다 크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무한한 하나님의 자비를 느낄수 있습니다.

다음 주는 전교인 수양회입니다만, 제가 본 교회 목회를 시작한 지 거의 20년간 매해 수양회를 해 왔는데 그 중 기억에 남는 강사분들이 계십니다. 작년도 오신 젊은 강사님이신 이상현 목사님이 그 중 한 분이십니다. 시간마다 늘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잘 되고 있습니다.”
그 짧은 말 안에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대한 확신과 함께 이웃에게는 큰 위로가 되는 힘을 느끼게 됩니다.
“잘 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잘 되고 있습니다”의 관점으로 살펴 보면 더 실감을 느끼게 됩니다. 현재 고난 중에 있던 앞으로 올 고난으로 인해 두려움 가운데 있던 모두가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모두에게 위로의 말을 해야 합니다.
물론 깊은 슬픔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가서 큰 소리로 “잘 되고 있습니다” 말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겉으로는 함께 슬퍼하지만 속으로는 외치는 것입니다.
“잘 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비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자비의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것이 잘 될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온 세계는 이 음성을 듣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잘 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누가 “잘 되고 있습니다”를 외칠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누구를 통해서 위로를 하게 하시나요? 본문에 나오는 ‘너희’는 누구일까요?
확실한 것이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과 대화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를 체험한 자들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대화를 하는 삶을 산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를 체험하셨습니까? 광복주일을 맞이한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같은 말씀을 하실줄 압니다.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미국 해군병원에 몸이 좋지 않은 아이를 데리고 온 부모가 있었습니다. 의사가 검진을 해보니 간에 종양이 생겼습니다. 굉장히 심각한 병이었습니다. 그래서 의사가 고민을 하고 어떻게 하면 아이를 살릴까 걱정을 하다가 그는 결국 공격적인 화학요법을 처방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그만 발작을 일으키더니 죽고 말았습니다. 의사는 망연자실했습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부모를 보니까 사람들이 좀 달랐습니다. 뭔가 평안한 마음을 유지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나중에 의대생들에게 자기의 케이스를 가지고 연구 발표를 할 강의 시간이 있었는데, 그 강의를 준비하느라고 자기가 아이에게 처방한 약의 분량을 다시 계산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된일인지 아이에게 처방한 약이 적정선을 열배나 넘는 약을 처방하고 만 것입니다. 자기가 그런 실수를 하고 만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아이는 이 의사가 죽인 것입니다. 의사가 부모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의사가 자기의 잘못을 솔직하게 고백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무 말하지 않고 듣던 부모는 나중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 아이를 구해 보려고 정말 정성을 다하신 선생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죽은 아이는 지금 예수님과 함께 천국에 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지요….”
그리고는 고소하겠다고 협박하지도 않았고 의사를 붙들고 아들 살려 내라고 소동을 벌리지도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부부…
이 부부를 보고 이 의사가 감탄한 것입니다. 아니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의사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으로 다시 태어나는 자기 자신을 체험을 합니다. 이 의사의 이름은 잭 템플턴이라는 사람입니다.
프린스톤 신학교에 그를 기념하는 템플턴 홀이 있습니다. 그는 템플턴 재단을 만듭니다. 미국에서는 세번째로 큰 자선단체가 됩니다.

템플턴이 그처럼 훌륭한 일을 많이 하게 된 이유는 이름 모를 부모로 인해서 상상할수 없는 위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자녀를 잃은 어느 부부의 위로가 그로 하여금 놀라운 일을 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 부모가 먼저 위로를 받아야 할 사람이 아니었습니까? 그러나 그는 도리어 위로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유는 하나님과 대화를 하는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무한하신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아는 자들이었습니다. 아울러 후에 그 부모도 템플턴이 그처럼 큰 일을 하는 것을 보고 넘치는 위로를 받게 되지 않았 을까요?
위로는 더 큰 위로를 낳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자유한 자들의 삶이 아닐까요? 왜냐하면 우리는 위로를 통해 위로의 하나님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해방입니다.

교우 여러분,
히로시마에 핵폭탄이 떨어지지 않았더라면 그 후 세계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지 우리는 알수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핵폭탄은 떨어졌습니다. 우리나라는 해방이 되었습니다. 해방의 축복을 우리에게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우리로 하여금 위로자가 되기 위함이 아닐까요? 우리의 위로는 사랑의 원자탄의 위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위로자가 되십시다. 이를 위해 우리에게 해방의 축복, 자유의 축복이 주어졌습니다. 우리에게 더 놀라운 위로가 임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보여 주십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자비하심을 보여 주십시다. 주님이 그 어떠한 죄도 감당하셨습니다. 그러니 십자가 앞에서는 모든 것이 잘 되는 일만 남아 있습니다.
“잘 되고 있습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교수직을 사임하고 정신박약아들의 위로자가 되었던 헨리 나우웬이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합니다.
“그동안 나는 올라가는 길만 추구하였다. 어려서 천재소리 듣고, 교수가 되어 존경받고, 책을 내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나는 오로지 성공만을 위해 살았다. 그러나 어느 날 정신박약아인 한 소년을 만났을 때 이런 인간의 고통에도 하나님은 동참하시며, 낮은 자리에도 계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오르막길에서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았지만 내리막길에서 진정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낮은 데로 내려가 이웃을 위로할 때 진정 하나님을 만날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장애인들을 향하여 외친 것입니다.
“잘 되고 있습니다.”
그 외침을 통하여 그는 위로의 하나님을 매번 만나게 된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가 위로할 때 우리는 위로의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이 때 우리는 진정 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해방의 축제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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