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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의 지혜

날짜 : 2014.03.16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노인의 지혜
성경본문 : 열왕기상 12:1-11,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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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중국 춘추시대 때 제나라에 관중이라는 지혜로운 신하가 있었습니다.
어느 해 봄, 환공 왕은 관중을 데리고 이웃 나라를 공격합니다. 그런데 전쟁이 길어지는 바람에 추운 겨울이 되어서야 끝이 나게 됩니다. 병사들은 오랫동안 전쟁터에서 싸움을 한 탓에 몹시 지친 상태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추운 겨울이어서 모두가 기진 맥진해 있었습니다. 그렇게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서인지 그들은 자기 고향으로 가던 중에 그만 길을 잃고 맙니다. 병사들은 물론이고 우두머리 장군들도 우왕좌왕하며 갈피를 잡지 못했습니다.
그때 관중이 앞으로 나서며 장군들에게 계책을 내놓았습니다.
“지금처럼 어려운 상황에 놓였을 때는 늙은 말의 지혜를 빌려 보는게 좋을 것 같군요.”
“늙은 말이라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힘도 못 쓰는 늙은 말을 가지고 뭘 하겠다는 겁니까?”
장군들은 관중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고 오히려 면박을 줍니다. 힘없는 늙은 말이 잃어버린 길을 찾아 줄 리가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관중은 장군들의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들을 모두 둘러 본 뒤에 한 마리를 선택했습니다. 헌데 관중이 선택한 말은 너무 늙어 힘도 없고, 생김새도 형편없어 평소에 구박만 받던 말이었습니다. 장군들이 또 관중을 조롱합니다.
“젊고 튼튼한 말을 타고 빨리 여기저기 길을 찾아봐야지, 저 따위 늙은 말을 갖고 장난할 시간이 어디 있소?”
그래도 관중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관중은 늙은 말을 대열의 맨 앞에 세웠습니다. 그리고 늙은 말의 귀에 대고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어서 길을 찾아보아라. 너는 반드시 길을 찾아낼거야. 그래서 너를 조롱하는 저 장군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 주어라.”
늙은 말은 관중의 이야기를 알아듣기라도 한 듯 하얗게 쌓인 눈을 헤치며 이곳저곳에 코를 들이밀며 길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하기를 두어 시간. 늙은 말은 마침내 길을 찾은 듯 한 방향으로 곧장 나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관중은 손뼉을 탁 치며 기뻐합니다.
“옳거니, 이제야 길을 찾은 모양이로군.” 관중은 곧 병사들에게 명령했습니다.
“저 늙은 말의 뒤를 따르라!”
병사들은 물론이고 장군들도 고집을 꺾고 늙은 말이 가는 대로 따라 갔습니다. 그렇게 얼마쯤을 가다 보니 고향으로 가는 길이 보였습니다. 병사들은 일제히 만세를 부르고 늙은 말과 관중을 무시하던 장군들도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얼뜻 읽으면 늙은 말이 군대를 구원한 것처럼 들려집니다만 사실 그 군대를 구원한 사람은 바로 신하 관중인 것 같습니다. 신하 관중이 늙은 말의 지혜를 인정했기에 그 군대는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지난 주 말씀드린대로 올해 사순절에는, 이스라엘의 왕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들의 모습 특히 우리들의 죄성을 새롭게 발견하며 그래서 회개의 열매를 맺는 사순절이 되길 원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지난 주에는 솔로몬의 이야기를 통해 많은 도전을 받았습니다.
다시 간단히 말씀드리면, 솔로몬은 놀라운 기도 응답을 받았습니다. 원하는 지혜를 얻었고 그에 더해서 하나님께서 부귀 영화를 더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받은 축복을 감당치 못하고 도리어 많은 여인을 거느리게 되고 마음으로 하나님을 떠납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라를 갈라서 신하에게 주시겠다고 솔로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의 아버지 다윗 때문에 다음 대에 가서 나라를 갈라 신하에게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하신 하나님의 진노는 분명 이루어질까요? 아니면 진노를 거두실까요? 결과를 모른다고 생각하고 함께 말씀을 살펴 보시겠습니다.
드디어 솔로몬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누가 왕위에 오를까요? 1절 말씀입니다.
“르호보암이 세겜으로 갔으니 이는 온 이스라엘이 그를 왕으로 삼고자 하여 세겜에 이르렀음이더라.” 이스라엘 백성은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을 왕으로 삼기 위해 세겜에 모였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아니지만 11장에 보면 아히야라는 선지자가 나타나 솔로몬의 신하 여로보암에게 나라를 찢어 왕이 될 것을 이미 알려 주었습니다. 이제 솔로몬이 죽자 무리와 함께 여로보암이 왕이 방금 된 르호보암에게 말합니다. 4절 말씀입니다.
“왕의 아버지가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니 왕은 이제 왕의 아버지가 우리에게 시킨 고역과 메운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왕을 섬기겠나이다.” 이에 르호보암이 3일 후에 다시 오라고 하며 보냅니다. 아주 지혜롭게 처리한 것 같습니다. 금방 생각난대로 말하는 것이 아니고 3일 후에 오라고 하니 지혜롭게 처신한 것입니다.
르호보암은 먼저 아버지를 모셨던 노인들에게 지혜를 구했습니다. 노인들이 대답합니다. 7절 말씀입니다.
“왕이 만일 오늘 이 백성을 섬기는 자가 되어 그들을 섬기고 좋은 말로 대답하여 이르시면 그들이 영원히 왕의 종이 되리이다 하나.” 노인들은 섬기는 자가 되라고 충고한 것입니다.
그런데 르호보암은 노인들의 충고는 거들 떠 보지도 않습니다. 처음 말씀드린 관중은 늙은 말의 지혜를 사용하여 곤경에 처한 군대를 구했는데 르호보암은 노인들의 충고를 듣는척하더니 금방 자기와 함께 자란 젊은이들에게 달려가 충고를 구합니다. 섬기는 왕이 되라는 충고가 몹시도 못마땅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 젊은이들은 어떻게 하라고 충고할까요? 이렇게 말하라고 합니다. 11절 말씀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무거운 멍에를 메게 하였으나 이제 나는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할지라 내 아버지는 채찍으로 너희를 징계하였으나 나는 전갈 채찍으로 너희를 징계하리라 하소서.”
노인과 젊은이들은 정반대의 충고를 하고 있습니다. 3일 후가 되었습니다. 여로보암과 이스라엘 백성이 르호보암을 찾아 왔습니다. 르호보암은 누구의 충고를 들었을까요? 친구들 곧 젊은이들의 충고를 따라 똑 같이 말합니다.
“내 아버지는 채찍으로 너희를 징계하였으나 나는 전갈 채찍으로 너희를 징계하리라.” 그 결과가 어떻게 될까요? 19, 20절 말씀입니다.
“이에 이스라엘이 다윗의 집을 배반하여 오늘까지 이르렀더라. 온 이스라엘이 여로보암이 돌아왔다 함을 듣고 사람을 보내 그를 공회로 청하여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으니 유다 지파 외에는 다윗의 집을 따르는 자가 없으니라.”
완전히 두 나라로 갈라집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르호보암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갈이 되어 갔습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만일 르호보암이 노인들의 말을 들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에 대해 두 가지 반응이 나올줄 압니다. 한 가지는, ‘그럴수가 없다. 이미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죄로 인해 이스라엘을 두 짝 나도록 작정하셨으니….’ 르호보암이 노인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었다고 생각할수 있습니다. 이미 솔로몬의 죄로 인해서 생긴 하나님의 진노는 인간의 어떤 노력으로도 바꿀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작정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라고 생각하면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좀 아쉽습니다. 솔로몬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에서 전혀 빠져 나올 길이 없다고 하면 좀 아쉽습니다.
두번째 반응은 이렇게 생각할수 있습니다. 솔로몬의 죄로 인해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고 진노의 계획을 가지고 계셔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 곧 백성들을 섬기면 하나님의 진노의 계획이 취소 될수 있다고 노인들은 생각했다고 볼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읽으면 또 그럴듯합니다. 노인들은 르호보암의 섬김의 행위가 반쪽 날 나라를 구할 것을 지금 말하고 있는듯합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이것은 증명이 되지 않았습니다. 증명될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은 르호보암이 노인의 충고를 들었어야 했습니다. 그랬으면 르호보암의 섬김의 행위가 반쪽 날 나라를 구할수 있었는지 알수 있었는데 유감스럽게도 증명할 길이 없습니다.
지난 주 인간 역사를 보는 눈은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럴수가 있나”와 “그럴수도 있지.” 이 두 가지 관점에서 보지 않으면 우리는 왜곡된 역사관을 갖게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 오늘 르호보암의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역사를 보는 어떤 도전을 주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계획 앞에 인간의 삶은 어떤 효과가 있는지 깊은 질문을 갖게 해 줍니다.
여기서 한 가지 가정을 해 보고 싶습니다. 만일 노인의 지혜를 따랐는데도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지 못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러면 노인의 지혜는 헛 것인가요? 르호보암이 노인의 지혜를 따르지 않은 것이 도리어 노인들의 체면을 살려준 것일까요? 노인의 지혜를 다시 한번 봉독해 드립니다.
“왕이 만일 오늘 이 백성을 섬기는 자가 되어 그들을 섬기고 좋은 말로 대답하여 이르시면 그들이 영원히 왕의 종이 되리이다.”
노인들은 분명히 왕이 섬기는 자가 되면 백성은 떠나지 않을뿐더러 도리어 전보다 더 충성된 종이 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노인의 지혜가 어떠한 결과를 가져 왔을지 알수 없는 것은 큰 유감입니다. 그러나 노인들도 그냥 생각 없이 이런 말을 하진 않았을 줄 압니다. 확신 없이 왕에게 감히 이런 충고를 하진 않았을줄 압니다. 만일 왕이 노인들의 지혜를 따랐는데 그래도 나라가 갈라졌다면 아마 노인들은 더 이상 세상 사람들이 되지 못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노인들은 깊은 확신이 있었습니다. 저는 노인들의 확신은 다음과 같았다고 생각합니다.
왕의 섬김은 나라를 하나되게 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만일 그래도 나라가 갈라진다고 해도 그것을 막을수는 없다고 해도 왕의 섬김의 삶은 놀라운 힘이 있음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갈라짐의 아픔을 이기고도 남는 일들이 펼쳐질 것을 확신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인간의 섬김의 위대한 힘을 알고 있던 분들입니다.
저는 노인들의 지혜의 위대함이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위대하심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의 거대함을 물론 잘 아는 분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못지 않게 그들은 인간의 섬김도 위대한 일을 창조함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을 모르고서는 감히 왕에게 섬김의 왕이 되라고 충고했을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르호보암의 죄가 좀 더 명확해졌습니다. 그는 인간의 섬김의 위대함을 거부한 사람입니다. 인간의 섬김을 하찮게 여긴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모욕일뿐더러 자신에 대한 모욕이요 하나님께 대한 중대한 죄입니다.
오래 전 저희 가정이 섬김의 위대한 세계를 체험한 적이 있습니다. 저희가 필라델피아에서 신학교 학생인 시절이었습니다. 재정적으로 여유가 없이 지내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만, 제가 한국에서부터 늘 도와주던 형제가 있었습니다. 미국으로 오면서 더 이상 도울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연락을 받게 되었습니다. 저희도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매달 얼마씩을 도와주게 되었습니다. 그 때는 은행에 가서 oversea draft라는 수표를 끊어서 보내야만 했던 때입니다. Wire가 없었던 때입니다.
매달 한 은행에 가서 수표를 사곤 했습니다. 막 필라델피아에 왔는데 저희 집사람은 아직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몇 달 직장을 찾고 있었습니다. 정말로 남을 도와줄 형편이 전혀 아닌 때였습니다. 어느 날 은행에서 수표를 끊는데 지점장이 저에게 묻는 것입니다.
“한국 사람이 필요한데 누구 소개시켜 주세요.”
당연히 저는 집사람을 소개시켜드렸고, 우수한 성적으로 은행원이 될수 있었습니다. 저희가 형제에게 보내는 액수보다 훨씬 많은 액수를 받게 되었습니다.
노인들은 이와 비슷한 경험을 수없이 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섬김은 국경을 넘는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가는 힘이 있음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후에 나라가 갈라지던 안 갈라지던 섬김의 왕이 되라고 충고하였던 것입니다. 나라가 3분 5열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섬기는 왕만 있으면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수 있었습니다. 나라가 크냐 작으냐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섬기는 왕을 그들은 모시고 싶었던 것입니다. 섬김으로 보이지 않는 위대한 나라를 창조하는 왕을 모시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르호보함은 이해가 갑니다.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섬김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신하가 왕에게 하는 행위가 섬김입니다. 그런데 지금 노인들은 르호보암에게 거꾸로 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평생 왕이 되려는 것ㅇ르 꿈꿔왔는데 말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르호보암은 노인들의 말을 들을리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왕이 섬김을 받기를 거부하고 도리어 신하들을 왕처럼 섬긴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정말로 놀라운 일들이 펼쳐지지 않았을까요?
그렇다면 르호보암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는 죄가 있습니다. 그것은 섬김을 거부함으로 위대한 나라를 창조하지 못하게 된 것이 그의 죄입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죠. 그러나 만일 그가 왕으로 신하들을 섬겼다면 놀라운 역사가 벌어졌을 것입니다. 이것을 거부한 것이 바로 그의 죄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섬김에 대해서 동물들이 더 잘 이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미국 동부에 돌고래 치유의 집이 있다고 합니다. 스즈키 히데코라는 일본인이 그곳을 방문했었습니다. 소박한 원장님이 먼저 입을 엽니다.
“돌고래는 아주 현명합니다. 이 ‘돌고래 치유의 집’엔 온갖 어린이들이 옵니다. 돌고래들은 지금 가장 도움이 필요한 어린이를 정확하게 알아냅니다. 어린이들의 목소리를 듣는 일도 없고 얼굴 표정을 보지도 않고 다리를 만져 보지도 않는데 그것을 정확하게 알아냅니다.”
히데코씨는 그곳에 머무는 동안 놀라운 일을 목격합니다. 커다란 심리적 문제를 안고 있는 다섯살쯤 되는 아이가 돌고래 집에 찾아 왔습니다. 아무런 표정도 없는 얼굴과 멍한 눈은 마치 달밤에 유령이 비틀비틀 모래밭을 헤매는 듯 보였습니다. 원장님은 아이를 돌고래가 오는 물가로 데리고 갔습니다. 돌고래 한 마리가 그 아이를 향해 갔습니다. 돌고래는 귀여운 눈으로 올려다보면서 그 아이의 발끝을 쿡쿡 찔러 보기도 하고 그 아이 앞에서 공중회전을 해 보이기도 했습니다.돌고래는 아이의 바지를 건드린다든가 또는 ‘어서 타!’ 하고 말하듯 발끝에 등을 갖다 대곤 했습니다. 사흘이 지나고 나흘 째가 되었습니다. 아이는 눈을 처음으로 돌고래에 돌려 돌고래를 쳐다 보기 시작했습니다.유령 같은 아이가 차츰 생기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꼭 한 주간이 지났을 때입니다. 돌고래가 오자 아이는 바닷물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아이가 뛰어든 바다의 얕은 여울에 대여섯 마리의 돌고래들이 자태를 드러내며 아이에 맞춰 천천히 천천히 아이 곁에 붙어 바다 멀리로 나아갔습니다. 아이는 한 마리의 꼬리지느러미를 잡고 헤엄치기 시작합니다. 지치면 등에 올라 탑니다.
그 사건 이후로 말을 잃어버리고 있던 그 아이가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긴 깊네. 하지만 난 더 멀리 헤엄쳐 갈 수 있단다.”
치유된 아이는 해안으로 돌아오자 말합니다.
“멀리 바다 위에서 보니까 하늘이 끝없고 파랬어요. 사람들이 아주 작게 보였다고요.”
사람보다 훨씬 난 동물이 돌고래인 것 같습니다. 아마 천국에 동물들도 들어 간다면 모든 돌고래는 다 들어 갈 것 같습니다. 돌고래는 정말로 노인의 지혜를 소유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돌고래는 왜 그 아이를 그렇게 섬겼을까요? 저는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마 돌고래의 눈에는 그 아이는 왕으로 보였을 것 같습니다. 그의 본질은 왕인데 왕답지 않은 고통 가운데 있으니 돌고래는 그 아이를 섬기지 않았을까요? 돌고래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섬겼을 것입니다. 온 힘을 다해 섬깁니다.
교우 여러분,
이웃을 왕으로 모시는 것이 바로 섬김입니다. 이것이 바로 노인의 지혜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 노인의 지혜를 삶에서 완성하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주님은 모든 사람을 왕으로 모셨습니다. 기쁘게 왕으로 모셨습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스크린에 보시면 유명한 ‘기도하는 손’ 그림을 보실수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배경 이야기를 아실줄 압니다. 형제를 위해서 광산에서 일하다가 더 이상 자신의 꿈을 펼치지 못하게 된 다른 형제의 손입니다. 다시 한번 간단히 소개해드립니다.
독일 어느 마을에 가난한 가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자녀 수는 무려 18명. 그러나 자녀들은 가난한 가운데서도 꿈을 잃지 않았습니다. 두 형제는 어느 날 밤 약속을 합니다. 동전을 던져서 누가 먼저 공부를 하고 다른 사람은 4년간 일하면서 도와주고 그 후에는 일한 사람이 공부를 하도록 약속을 합니다.
가까운 마을에 광산이 있어서 한 형제가 먼저 광산에서 일하기 시작합니다. 4년 후 광산에서 일한 형제가 공부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손은 굳어져서 더 이상 예술 공부를 할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의 손을 보면서 눈물의 그림을 그리게 됩니다.
저 손은 섬김의 손입니다. 돌고래도 사람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을 왕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웃을 왕으로 모십시다. 섬기는 축복을 누리십시다. 그 때 우리들의 손은 주님의 손을 닮은 왕의 손이 될 것입니다.
이번 사순절 기간 위대한 섬김의 나라를 체험하십시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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