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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아버지 다윗을 위하여

날짜 : 2014.03.09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네 아버지 다윗을 위하여
성경본문 : 열왕기상 3:4-15, 1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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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주 전 ‘새 일을 행하리라’라는 제목으로 설교 말씀을 전했습니다. 설교 마지막에 정호승 시인의 ‘봄 길’이라는 시를 소개해 드렸습니다. 다시 한번 첫 부분만 소개해드립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 가는 사람이 있다

오늘 사순절 첫째 주일 예배를 드리는데 ‘봄 길’이라는 시를 다시 한번 소개해 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순절을 영어로 ‘lent’라고 하죠. Lent의 어원은 lengthening입니다. 곧 길어진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 summer time이 시작되었는데 그 이유는 낮시간이 길어지기 때문이 아닙니까? 사실 사순절 기간에는 낮 시간이 길어집니다. 그래서 lent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낮 시간이 길어진다는 것은 곧 봄이 온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까? 봄과 함께 생각하지 않을수 없는 것은 바로 ‘봄길’이 아니겠습니까?
사실 lent 곧 사순절은 십자가의 길을 생각하는 절기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가기 위해 절제와 구제와 기도를 하는 절기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십자가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 바로 온 세상을 위한 봄길이 되지 않을까요?

교우 여러분,
우리 모두 이번 사순절을 통하여 주님을 닮아 세상을 위한 따뜻한 봄길이 되어 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올 해 사순절은 이스라엘의 왕들의 삶을 살펴 보면서 봄길이 되는 삶이 어떤 삶인지 살펴 보고자 합니다. 오늘은 다윗 왕의 아들 솔로몬 왕의 삶을 상고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이스라엘 왕들의 이야기가 기록된 책이 성경에 두 책이 있습니다. 열왕기상하와 역대상하입니다. 두 성경을 합하면 한글 성경으로 200페이지가 넘습니다. 상당히 많은 부분을 차지합니다. 그런데 열왕기상하 다음으로 역대상하가 뒤 쫓아 옵니다. 구약 창세기부터 시작하여 신약 요한게시록까지 통독을 하려고 하면 가장 힘든 부분이 이 부분일줄 압니다. 겨우 열왕기상하를 인내를 갖고 읽었는데 또 다시 같은 내용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역대상하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처럼 두 비슷한 책을 연거푸 읽게 하시나요? 이 시간 두 성경책에 대해서 자세히 비교 설명해 드릴수는 없습니다. 한 두 가지만 말씀드리면 열왕기상하는 바벨론 포로 생활시 이스라엘 왕국의 역사를 기록한 책입니다. 반면 역대상하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 온 후에 이스라엘 왕국의 역사 특히 남왕국의 역사를 기록한 책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 생활을 70년 하지 않습니까? 열왕기상하는 바벨론 포로시 바벨론에서, 역대상하는 포로 생활을 마치고 돌아 와서 쓴 책입니다. 한국 역사와 비교한다면 일제시대에 조선왕국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책이 바로 열왕기상하일줄 압니다. 반면 해방후 조선왕국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책이 역대상하라고 생각하면 좋을 듯합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이처럼 두 가지 역사서를 성경에 넣으셨는지 이해가 될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두 가지 perspective로 보시길 원하신 것 같습니다.
자 일제시대시 한국 역사를 기록하는 역사가의 바람은 무엇이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속히 해방될수 있을까라는 바람이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 바람을 안고 한국역사를 분석하면서 기록하고 있는 것이고, 해방 후에 기록하는 역사가의 바람은 어떻게 하면 속히 나라가 옛 영화를 회복하고 더 나아가서 세계역사에 공헌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역사를 기록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두 역사가의 관점은 다를수밖에 없습니다.

두 가지 관점 하니 생각나는 한국 말이 있습니다.
“이럴 수가 있나.”
“그럴 수도 있지.”
비관적 관점으로 볼 때 우리는 개탄하게 됩니다. “이럴 수가 있나.”그러나 낙관적 관점으로 볼 때 우리는 또 이렇게 말하게 됩니다. “그럴 수도 있지.” 우리 자신을 보는 눈이나 이웃을 보는 눈이나 세계 역사를 보는 눈은 한 가지로 고착되면 안 됩니다. 두 가지가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성경도 이렇게 조화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두 가지 perspective로 기록된 것을 쉽게 알수 있는 예가 바로 솔로몬 왕입니다. 두 성경의 저자는 솔로몬의 삶은 어쩌면 전혀 다른 두 사람처럼 기록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말씀 중 첫번째 말씀인 열왕기상3: 4-15절에는 솔로몬이 천번 제사를 드려서 기도제목이 응답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지혜를 구했는데 부귀 영화까지 받게 되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두 성경책 모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역대상하에도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물론 기록을 자세히 살펴 보면 조금 다른 점을 보게 됩니다만, 하여튼 전체적으로는 같은 내용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반면 오늘 두 번째 본문 말씀인 11:9-13절 말씀 곧 솔로몬이 마음으로 하나님을 떠난 이야기는 열왕기상하에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역대상하에는 기록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음에 시간을 내셔서 한번 열왕기 상하와 역대상하를 비교해서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전체를 다 읽고 비교하다간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될터이니, 솔로몬의 이야기만 골라서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열왕기상하를 읽으실 때는 주먹을 불끈쥐게 됩니다. “아니 이럴수가 있어.” 분통이 터집니다. 특히 오늘 두 번째 본문 말씀 전에 있는 11:3절을 보시면 울화가 치밀어 올지 모릅니다.
“왕은 후궁이 칠백 명이요 첩이 삼백 명이라 그의 여인들이 왕의 마음을 돌아서게 하였더라.” 백제 의자왕과 비슷했던 왕입니다.
그러나 역대상하를 읽으실 때는 최고의 왕이라고 극찬을 하게 될줄 압니다. 사실 역대상하를 보시면 전혀 그의 흠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아주 신경을 곤두세우고 읽으면 그의 흠의 그림자를 찾을 정도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 perspective로 이스라엘의 역사 특히 왕들의 이야기를 보게 하실까요? 물론 역사학적으로는 쓰여진 배경이 달라서 그렇다고 설명할수는 있습니다. 그렇게만 설명한다면 오늘 이시대에 사는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은 좀 약해질수가 있습니다. 더 큰 목적이 있다고 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역사를 비관적 관점에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아울러 낙관적 관점에서도 볼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인간 안에 깊이 내재해 있는 죄성을 볼줄 알아야 합니다. 아울러 때로는 죄성을 보는 눈을 버릴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두 눈을 주신 이유가 있을줄 압니다. 두 눈으로 보아야지 입체적으로 볼수 있게 되지 않습니까? 한 눈으로만 본다면 거리감각을 잃을뿐더러 입체감을 전혀 보지 못하지 않습니까?
역사를 보는 눈도 두 가지 눈이 필요합니다. 비관적 관점에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낙관적 관점에서 볼줄 알아야 합니다.
지난 수요일 곧 재의 수요일부터 사순절이 시작되었는데 사순절은 어느 관점에서 자신을 살피고 이웃을 보는 절기일까요? 물론 비관적 관점입니다. 사순절은 우리 안에 깊게 내재해 있는 죄성을 살피는 절기입니다.
내 안에 숨겨진 그동안 늘 바뻐서 간과하고 지냈던 죄성을 깨닫고 회개하는 절기입니다. 그 죄성으로 인해서 자신이 알게 모르게 고통을 받았고 자신뿐 아니라 가족이 해를 받았고, 가족을 넘어서 이웃이, 각자가 속한 공동체가 넓게 나아가서는 인류 공동체에게 피해를 주곤 했던 죄성을 회개하는 절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순절은 역대상하 보다는 열왕기상하를 더 가까이 하는 절기라고 생각됩니다. 우리 자신을 향해 “이럴 수가 있나” 개탄해 하는 절기입니다. 아울러 겸손한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럴 수가 있나” 통탄해 하는 절기입니다.
재의 수요일 예배시 이마에 시꺼먼 재로 십자가의 안수를 받지 않았습니까? 사순절이 끝나기 전에 우리 안에 그동안 발견하지 못했던 시꺼먼 죄를 발견하시게 되기 바랍니다. 사순절은 시꺼먼 재로 시작됩니다. 마칠 때는 시꺼먼 죄로 인한 아픔으로 마치십시다. “이럴 수가 있나.” 그 때 우리는 새로운 눈으로 우리의 삶을 볼수 있게 됩니다. “그럴수도 있지.”
말씀드린대로 올 해 사순절은 이스라엘의 왕들의 죄를 통하여 우리들의 시꺼먼 죄를 찾아 보고자 합니다. 그러면 오늘 남은 시간 열왕기상하에 나타난 솔로몬의 모습이 어떤 모습인지 다시 살펴 보고자 합니다.

오늘 두 가지 본문의 말씀은 솔로몬의 다른 두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3장에 나오는 솔로몬의 모습을 살펴 보면, 왕이 되자마자 기브온 산당에 가서 일 천번 번제를 드립니다. 하루에 10번씩 드렸다고 해도 100일은 드려야 합니다. 참 훌륭한 모습입니다. 우리가 본 받아야 할 모습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합니다.
잘 아시는대로 솔로몬은 나라를 잘 다스리고 특히 재판을 잘 할수 있도록 지혜를 구합니다. 하나님은 좋아하셨고 하나님은 지혜뿐 아니라 부귀와 영광도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십니다. 그런데 한 가지 조건을 부칩니다. 14절 말씀입니다.
“네가 만일 네 아버지 다윗이 행함 같이 내 길로 행하며 내 법도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또 네 날을 길게 하리라.”
제가 신학교 다닐 때 이스라엘에 가서 한 달간 머무르면서 공부를 했습니다.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것이 있습니다. 유적지마다 팻말과 그 당시 왕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누구 이름이 가장 많이 기록이 되어 있었겠습니까? 솔로몬입니다. 다윗의 이름은 참 찾기 어렵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북 이스라엘의 악한 왕 아합입니다. 오늘 아합 이야기는 할수는 없고, 하여튼 솔로몬이 부귀 영화를 누린 것은 오늘도 유적지를 통해서 쉽게 알수 있습니다.

그런데 두번째 본문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많은 회의를 가져오게 합니다. 11장 9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솔로몬이 마음을 돌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므로 여호와께서 그에게 진노하시니라.” 솔로몬이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지혜를 구해서 지혜를 주시고 부귀 영화까지 주신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그로인한 하나님의 진노는 11절 후반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게 이러한 일이 있었고 또 네가 내 언약과 내가 네게 명령한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반드시 이 나라를 네게서 빼앗아 네 신하에게 주리라.”

정말 솔로몬의 이야기를 읽으면 절로 소리가 터져 나오지 않습니까?
“이럴수가 있나!” 나라를 신하에게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정말로 분통이 터집니다. 계속해서 12, 13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네 아버지 다윗을 위하여 네 세대에는 이 일을 행하지 아니하고 네 아들의 손에서 빼앗으려니와, 오직 내가 이 나라를 다 빼앗지 아니하고 내 종 다윗과 내가 택한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네 아들에게 주리라 하셨더라.”
솔로몬의 죄가 자기 나라를 두 짝 나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솔로몬은 처음에는 어떤 솔로몬이었습니까? 왕이 된 후 천 번 제사를 드린 사람입니다. 그리고 나라를 잘 다스리게 해 달라고 지혜를 구한 왕이었습니다. 그것이 너무 예뻐 보여서 하나님은 부귀 영화까지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어디에서부터 문제가 시작되었습니까? 다시 한번 봉독해 드립니다. 3:14절 말씀입니다.
“네가 만일 네 아버지 다윗이 행함 같이 내 길로 행하며 내 법도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또 네 날을 길게 하리라.” 하나님께서 미리 경고하신 것입니다. 그는 그 경고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하게 한 가장 큰 원인이 무엇이었겠습니까? 놀라지 마십시요. 기도의 응답이었습니다. 기도의 응답으로 얻은 지혜가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하게 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머리에서 떠오르는 지혜만을 의존한 것입니다. 자기 지혜로 어려운 일이 착착 해결되니 더 하나님 말씀에 겸손히 귀를 기우리지 않게 된 것 같습니다. 결국 수많은 여인을 주변에 둡니다.

교우 여러분,
정말로 섬뜩하지 않습니까? 기도의 응답이 결과적으로는 이스라엘 나라를 둘로 갈라지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 아닐까요? 우리는 이 땅에서 잘 살기 위해서 아니 이 땅에서 맡은바 직분을 잘 감당키 위해서 지혜를 구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응답 받으면서 이것 저것 잘 되기 시작합니다. 그 때 우리는 어느덧 지혜를 더 의지합니다. 말씀에 소홀히 하게 됩니다.
솔로몬의 모습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우리들 모두에게는 솔로문의 죄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인을 많이 두는 죄성이 아닙니다. 우리들 속 깊은 마음에는 세상적 지혜를 더 사랑합니다. 한편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 하고자 하는 죄성이 있습니다. 이것이 가장 위험한 죄성입니다. 세상적 지혜를 하나님의 말씀 보다 앞서게 하는 죄성입니다. 이것은 솔로몬의 죄성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의 죄성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서 유독 눈에 띄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시 한번 11장 12, 13절 봉독해 드릴까요?
“그러나 네 아버지 다윗을 위하여 네 세대에는 이 일을 행하지 아니하고 네 아들의 손에서 빼앗으려니와, 오직 내가 이 나라를 다 빼앗지 아니하고 내 종 다윗과 내가 택한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네 아들에게 주리라 하셨더라.”
다윗 때문에 신하에게 나라를 다 빼앗기지 않을 것을 약속하십니다. 다윗 때문에 나라를 빼앗기는 것이 연기될 뿐 아니라 완전히 다 빼앗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편 더 눈에 띄는 표현이 있습니다. 13절에 보면 ‘내 종 다윗과’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에게는 ‘종’이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다윗에게는 ‘종’이라고 부르십니다. 왜 그럴까요?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한 사람입니다. 다윗의 유명한 노래가 있죠?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시 119:105)
솔로몬은 기도의 응답도 받았고 부귀 영화도 받았지만 ‘종’이라는 칭호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에게는 ‘종’이라는 칭호를 붙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기도 응답 받는 사람이 종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의 ‘종’입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이 ‘기도 응답’에 더 많이 가까이 가 있습니까? ‘말씀 순종’에 더 많이 가 있습니까? ‘기도 응답’에 더 가까이 가 있다면 솔로몬의 우를 범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속 마음은 늘 이렇게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응답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
이럴수가 있습니까? 그런데 이것이 우리 모습입니다.

교우 여러분,
사순절에는 많은 분들이 절제의 훈련을 하는 줄로 압니다. 어떤 분들은 커피나 와인등 먹을 것으로 하시는데 최근에 보니 콤퓨터나 스마트폰을 하시는 분들이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세상 지혜가 우리로 하여금 말씀으로부터 더 멀어지게 하고 있는 좋은 예가 있습니다. 콤퓨터입니다. 콤퓨터가 발달되지 않았을 때는 성경 귀절을 찾기 위해서 성경을 샅샅이 뒤지곤 했습니다.
예를 들어 방금 말씀드린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를 찾기 위해서는 시편을 다 읽어 내려가야만 했습니다. 요즘은 어떻습니까? 구글로 몇 자만 넣어도 금방 찾아 냅니다.
저는 설교 준비를 하다 보면 유혹이 있습니다. 물론 콤퓨터로 준비를 하니 본문 말씀을 copy한 후 필요한 부분에 paste를 해도 됩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말씀과 점점 멀어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매번 손으로 다시 콤퓨터에 쳐 넣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 이번 설교를 하면서 이 말씀을 세번 타이프를 쳤습니다.
올해도 신임제직교육이 시작되었습니다. 올해는 제가 특별한 과제를 드렸습니다. 9월에 안수를 받게 되는데, 각자가 원하는 성경을 골라서 25-30장까지 손으로 쓰는 과제를 드렸습니다. 너무 과제가 쉬운가요?
세상 지혜는 어떻게 하던 우리를 말씀에서 멀어지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마음도 그것을 좋아 합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말씀을 더욱 가까이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윗처럼 ‘종’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우 여러분,
이번 사순절 우리 안에 있는 깊은 죄성을 함께 발견해 나가십시다. 솔로몬을 닮아가려는 우리들의 모습을 찾아 내십시다. 그리고는 스스로를 향하여 외치십시다.
“이럴수가 있나.”
그리고는 종 다윗을 닮아 가십시다. 다 함께 외치십시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 세상을 위한 봄길이 될 것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금번 발간된 사순절 묵상집 오늘의 글을 보면 정말로 다윗처럼 말씀대로 산 사람의 이야기가 소개되어져 있습니다. 간단히 다시 소개해드리면 대 부호의 아들로 William Borden은 태어납니다. 어릴 때 세계 여행을 하면서 결단합니다. 예일대학을 다니면서 시작한 아침기도와 성경공부 모임은 1300명중 1000명이 참여하는 모임으로 발전시킵니다. 좋은 직장에서 오는 모든 love call을 뒤로하고 신학교를 가고 중국 북부지역에 거주하는 이슬람권에 가서 선교사가 됩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사역을 시작한지 넉 달도 안되서 뇌막염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25살이었습니다.

그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믿음을 떠나서는 그의 삶을 설명할 길이 없다.”
기도응답의 관점으로 본다면 그의 삶을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 순종의 관점에서 본다면 저는 이렇게 그의 묘비에 적어 놓고 싶습니다.
“주의 말씀을 빛으로 삼은 하나님의 종 여기에 잠들다.”
제가 좋아하는 찬송가 중 하나가 잠시 후 부를 9장입니다. “하늘에 가득 찬 영광의 하나님.” 그 중 가장 좋아하는 가사는 마지막 절 가사입니다.
“주 앞에 나올 때 우리 마음 기쁘고 그 말씀 힘 되어 새 희망이 솟는다. 고난도 슬픔도 이기게 하시옵고 영원에 잇대어 살아가게 하소서.”
특별히 마지막 소절입니다.
“영원에 잇대어 살아가게 하소서.”
말씀따라 사는 삶은 영원에 잇대어 사는 삶입니다. 반면 재능과 세상 지혜로 사는 삶은 순간에 잇대어 사는 삶입니다. 솔로몬은 순간에 잇대어 사는 삶을 살았고 다윗은 영원에 잇대는 삶을 살았습니다.

교우 여러분,
순간에 잇대어 살던 삶에서 영원에 잇대어 사는 삶으로 옮겨 가십시다. 그 때 우리는 매 순간 세상을 위해서도 봄길의 삶을 살게 되지 않을까요?
사순절 기간 십자가의 주님을 묵상하십시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는 바로 우리가 말씀대로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종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네가 만일 네 아버지 다윗이 행함 같이 내 길로 행하며 내 법도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또 네 날을 길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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