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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날짜 : 2013.12.30
예배명 : 송년주일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성경본문 : 창세기 13:1-15

http://kcbostonmedia.cponsolny.com/Sermon_video_master/Sermon_20131229.wmv

제가 설교 서두에 한 이야기를 나누곤 하는데 오늘은 올해 어느 설교에서 함께 나눈 이야기를 말씀드리면서 서론을 대신하려고 합니다. 언제 어느 설교시간에 드린 말씀인지 생각해 보셔도 좋겠습니다. 한국에서 나온 천주교 잡지에서 읽은 글입니다.

“인사동에 갔다가 화실 문이 잠겨 있어서 점심만 먹고 되돌아왔습니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데 택시를 기다려도 모두 빈 택시가 없습니다. 그런데 마침 내 앞에서 내리는 손님이 있었습니다. 나는 잽싸게 앞자리에 올라탔습니다. 내가 기사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했더니 기사는 방금 내린 손님이 조금 더 가서 내려야 하지만 내가 서 있는 것을 보고 저 손님을 모시고 가라고 했답니다. 얼굴도 모르지만 그 마음에 고마움을 거듭 표하면서 즐겁게 사무실까지 왔습니다. 요금을 내려고 미터기를 보니 미터기가 0입니다. 기사에게 지적을 했더니 자기도 깜박했답니다. 기사도 그 사람의 행위에 감동을 받아 미터기를 돌리는 것을 잊었던 것입니다. 늘 타고 다니는 요금을 달라고 해서 그 금액을 드렸습니다.”

손님의 작은 행위가 운전기사와 이 글의 저자의 마음에 큰 감동을 준 이야기입니다. 혹시 언제 제가 이 이야기를 소개해드렸는지 기억이 나시는지요? 힌트를 하나 드리면 오늘 송년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올해 저희 교회에 처음 나오시기 시작하신 분들은 생소한 이야기가 될 줄 압니다. 바로 이 이야기를 저는 신년예배 시 말씀드렸습니다.

올해 저희 교회 표어가 ‘빛으로 소금으로’이었는데 표어는 이렇게 지었지만 더 강조를 하려고 애쓴 것은 ‘소금’이었습니다.

저의 이메일을 받아 보신 분들은 이메일 마지막에 ‘소금의 맛’이라고 추신을 붙인 것을 보았을 줄 압니다. 표어는 ‘빛으로 소금으로’이지만 소금을 더 강조하려고 애썼습니다. 그 이유는 저희 교회가 60주년을 맞이한 해이었는데 이민 교회로서 60주년을 맞이한 그 자체가 이미 빛의 직분을 감당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진정 이 사회가 필요한 것은 빛 보다는 소금이 더 필요하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빛도 소중하지만 소금이 사라질 때 빛은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방금 소개한 이 이야기를 신년예배 설교 마지막에 말씀드렸는데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바로 소금의 직분을 잘 감당하고 있는 대표적인 분이라고 생각되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많은 분들의 수고로 올해 저희 교회는 60주년을 뜻 깊게 보냈습니다. 교회적으로 빛의 역할을 잘 감당하는 한 해였습니다. 아울러 저는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모든 교우님들이 삶에서 처음 말씀드린 분처럼 소금의 직분을 잘 감당하게 되기를 바라면서 1년을 지냈습니다.

오늘 송년주일을 맞이하여 남은 며칠을 1년간 각자가 소금의 직분을 얼마나 잘 감당하였는지 되돌아보면서 새해를 맞이하는 준비를 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성경의 인물 중 소금의 맛을 마음껏 발휘한 사람으로 아브라함을 꼽고 싶습니다. 아브라함은 많은 재산을 갖고 있었습니다. 2절 말씀을 보면,
“아브람에게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더라.”

부자일수록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쉽지 않은데 아브람은 부자이면서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독실한 사람이었습니다. 4절 말씀입니다.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아브람은 재산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한 사람이었습니다. 목회자들 사이에 이런 말이 회자합니다.
‘재산이 많으면 신앙이 없고, 재산이 없으면 신앙이 깊다.’

그런데 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분명 예외가 있습니다. 바로 아브라함이 예외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재산이 많으면서 신앙이 깊은 모습의 표본이십니다. 이 모습이 계속되는 이야기 중에 나타납니다.
사실 아브라함은 혼자가 아니라 조카 롯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아마 서로 나그네 길에 큰 힘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롯도 갈수록 재산이 늘고 있었습니다. 6절 말씀입니다.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

아브라함도 많은 목자를 거느렸고 롯도 거느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서로 다투기 시작합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유명한 말을 합니다. 8, 9절 말씀입니다.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이것은 바로 네가 1등이 되라 나는 2등이 되리라 하는 말과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소금의 맛을 낸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내가 삼촌이니 네가 떠나라.” 아니면 이 때 이미 아브라함이 더 부자였음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5절에 보면,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라고 표현되어 있지 아브라함처럼 풍부하였다고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아브라함은 롯에게 소유가 적은 네가 양보하라고 말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도 아니라면 목자들끼리 씨름을 해서 진 사람이 여기에서 쫓겨나는 것으로 하자라고 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요즘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이 아닙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은 말합니다.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부자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는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최근에 Texas주 지방법원에서 affluenza defense라는 케이스가 있었습니다. 16살 난 소년이 친구들과 상점에서 술을 훔쳐서 먹고 운전하던 중 취중 운전으로 네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케이스였습니다.
그런데 이 소년은 부잣집 아들이었습니다. 부자인 부모가 돈 문제로 싸우다가 이혼까지 했습니다. 부모는 아들을 위해 비싼 변호사를 사고 또 심리학자를 증인으로 내 세웠습니다. 심리학자는 이 소년은 ‘부’의 희생자라고 변호를 합니다. 그래서 ‘affluenza’ 환자라고 변호를 했습니다.

(스크린)
(Affluence(부)+Influenza(독감)=Affluenza)

영어로 affluence가 ‘부’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Affluence와 influenza를 합쳐서 affluenza라는 단어를 만든 것입니다.
재판관은 변호인의 변호를 합당하다고 인정하여 소년에게 10년간의 집행유예만 선고하였습니다. 저는 재판관의 선고에 대해서 말씀드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부’가 무서운 것인지를 잘 말해주는 이야기입니다. ‘부’는 누구나 다 ‘affluenza’를 걸리게 합니다. 그런데 affluenza에 걸렸어야 하는 아브라함의 입에서 놀라운 고백이 나온 것입니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오늘의 부자들이 아브라함과 같기만 하면 세상은 정말로 살기 좋은 세상이 될 것 같습니다. 하여튼 그 결과 어떻게 됩니까? 롯은 먼저 땅을 차지합니다. 자기의 목자들과 기름진 땅으로 향합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 곳은 소돔 땅이었습니다.

반면 아브라함은 롯이 택하지 않은 땅으로 향합니다. 롯에게 양보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14, 15절 말씀입니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아브라함의 양보는 몇 가지 축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첫째로는 평화를 가져다주었습니다. 더 이상 아브라함의 목자와 롯의 목자가 다투지 않게 되었습니다. 서로를 축복하며 더 나은 삶을 향하여 평화로이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안타까운 이야기이지만 요즘 한국에서는 이런 이야기가 나돈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고모부’ 라는 말이 나돈다고 합니다. 북한 정세를 잘 아시는 분들은 무슨 내용인지 금방 이해하실 줄 압니다.

두 번째로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축복, 특히 땅의 축복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처음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을 때 두 가지 약속을 하셨습니다. 하나는 자손의 약속이고 두 번째는 땅의 약속을 하셨습니다. 자손의 약속은 오랜 세월 후 이삭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땅의 약속은 오래지 않아 이루어집니다. 언제 이루어지는지 다시 봉독해 드릴까요?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바로 아브라함의 이 고백 후에 이루어집니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리라.”

세 번째로 이 고백은 후에 롯을 구하게 됩니다. 롯이 사실 소돔 땅을 택하는데 소돔 땅은 기름지니 이 민족 저 민족이 호시탐탐 노리는 곳이었습니다. 후에 소돔 땅이 어느 민족에 점령당하니 아브라함이 가서 구해줍니다.

아브라함은 끝까지 롯을 사랑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계기가 됩니다. 서로 다투고 헤어졌던 두 목자들이 감격의 재회를 하였으리라 생각해도 무리는 아닙니다. 결국 평화의 삶이 무엇인지 실감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 놀라운 축복의 시작이 어디로부터였다고요?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이것이 바로 소금의 맛이 아닐까요?

미국의 역사에서 소금의 맛을 내신 분이 있습니다. 1969 7월 20일 미국은 두 우주인 Neil Armstrong과 Buzz Aldrin을 달에 보내는데 성공합니다. 그런데 NASA당국은 두 사람 중 누가 먼저 달에 첫 발을 내딛는 자가 될 것은 정해 놓지 않았습니다.
우주선이 드디어 달에 도착했습니다. 우주선 구조상 한 사람씩 내리게 되어 있었습니다. 만일 두 사람이 자기가 인류역사상 최초로 달을 밟는 사람이 되겠다고 치고 박고 싸웠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에서가 태어날 때 야곱이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고 태어났다고 하는데 정말 두 우주인이 그랬더라면 어떠했겠습니까? 미국은 큰 망신살을 뻗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올드린이 암스트롱에게 먼저 양보를 했습니다. 암스트롱은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또 양보합니다. 이 때 올드린이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걱정하지 말게. 자네는 최초로 달에 착륙한 지구인이 될 테지만, 나는 최초로 달에서 지구로 돌아가는 지구인이 될 걸세.”
올드린은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리라” 말한 것입니다. 올드린은 이 말을 하면서 새로운 지평이 보이는 것을 체험한 것입니다. 자기는 최초로 달에서 지구로 돌아가는 지구인이라는 새로운 사실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소금의 맛을 내는 삶이 아닐까요? 소금이 있는 곳에는 평화가 임합니다. 왜냐하면 땅이 넓어지기 때문입니다. 아니 새로운 지평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요즘 왜 그렇게 살기가 어렵다고 생각들 하죠? 땅이 좁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좁은 땅을 부자들이 다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모두 1등이 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1등만 땅을 차지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2등이 되려고 하는 사람들을 통해 땅은 넓어집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가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리라’ 말할 때마다 땅은 넓어집니다. 그리고 그 땅은 썩지 않습니다. 우리는 소금의 맛을 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의 삶은 어떤 삶이었습니까? 주님은 2등도 아닙니다. 세상의 꼴찌가 되기 위해 오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가복음 10:45)

주님은 소금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이 땅은 썩지 않습니다. 결코 썩지 않습니다.

교우 여러분, 일 년간 수고 많으셨습니다. 특히 행사를 훌륭하게 치르느라 고생도 많으셨습니다. 이처럼 훌륭하게 행사를 치를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숨은 곳에서 소금의 맛을 내신 분들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Affluenza의 전염병이 창궐한 세상에서 소금으로 세상을 보전하십니다. 세상을 축복하십시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리라.”

말씀을 거둡니다. 저희 교회가 주최한 행사는 아니었지만 저희 교회가 작은 소금의 맛을 낸 음악회가 얼마 전 ECC Chapel에서 열렸습니다.
New England지역에 많은 교회가 있는데 목회자 가족 중 음악인들이 모여서 음악회를 열었습니다. 이 지역에 있는 교회가 대개 규모가 작아서 목회에 많은 어려움들을 겪고 있습니다. 작은 교회를 섬기느라 음악전공을 마음껏 발휘할 기회도 사모님들에게 주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음악을 전공하신 사모님들과 함께 젊은 목회자들이 약 3개월 동안 연습을 열심히 해서 아름다운 음악회를 열었습니다.
이 지역 목회자 가족들과 함께 출연자들의 교우와 친지들이 와서 관객석을 가득 메웠습니다. 어느 목사님은 당신의 사모가 7년 만에 음악회를 갖게 되어서 너무 감회가 깊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저희 교회는 장소만 제공해 드렸지만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된 것은 수년 동안 어려운 건축을 끝까지 인내하시면서 동참해 주신 모든 교우님들 덕분이고 바로 직접 간접으로 소금의 맛을 내신 분들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신년예배시 소금의 맛을 내는 것은 바로 이웃의 등을 살짝 밀어주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여러분들이 이곳 목회자 가정의 등을 살짝 밀어주신 것이고 그로인해서 뉴잉글랜드 땅은 더 넓어진 것입니다. 평화가 깃들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축복된 한 해를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아울러 아브라함의 고백을 가슴에 안고 벅찬 새해를 맞이할 준비를 하십시다. 아브라함의 고백을 하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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