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안내
주보
주보 모음
설교 영상
설교 원고
찬양
실시간 예배
2015년 이전 설교

평화의 나라

날짜 : 2013.10.06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평화의 나라
성경본문 : 이사야 11:6-9

http://kcbostonmedia.cponsolny.com/Sermon_video_master/Sermon_20131006.wmv

성 프란시스가 굽비오라는 마을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 마을에는 밤마다 늑대가 나타나서 마을의 가축뿐 아니라 사람까지 해치고 있었습니다. 점점 사람들은 마을을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프란시스는 무척 안 된 생각이 들어서 본인이 직접 늑대를 만나기로 결심합니다. 많은 사람이 말리지만 몇 명의 용감한 사람들과 어느 날 밤 마을 입구로 향했습니다. 동행한 사람들은 금방 두려움이 몰려와 더 이상 나가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프란시스와 한 친구만이 마을입구로 향했습니다. 늑대가 갑자기 숲에서 나와 프란시스에게 입을 벌리고 달려옵니다. 그 때 프란시스는 십자가를 그었습니다. 순간 하나님의 능력이 늑대를 진정시키더니 천천히 입을 다물고 걸어옵니다. 이 때 프란시스가 외칩니다.

“형제 늑대여, 나에게 오라. 주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아무도 해치지 말라.”

순간 늑대는 머리를 숙이더니 프란시스의 발 앞에 양처럼 무릎을 꿇습니다. 프란시스는 계속 말합니다.

“나는 네가 이 굽비오 마을 사람들과 평화의 조약을 맺기를 원한다. 그들은 너를 해치지 않을 것이고 너도 그들을 해치면 안 된다. 지난 일들은 다 용서 받았다.”

늑대도 동의한다는 표시로 몸을 움직이고 머리를 끄덕입니다. 그리고는 함께 마을로 들어옵니다. 마을 사람들에게 프란시스는 설교를 하고 늑대와의 화평을 권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늑대와의 화평을 약속하면서 앞으로는 늑대에게 먹을 것을 줄 것을 약속합니다.

그 후로 마을 사람들은 약속을 지킵니다. 늑대는 그 후 2년을 사람들과 더불어 생활을 합니다. 매일 이 집 저 집 앞에 놓여 있는 음식을 먹습니다. 개들도 늑대에게 짖지 않습니다. 늑대는 나이 들어 평화로이 숨을 거둡니다.

정말로 믿기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실화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요?

오늘 세계 평화 주일로 지킵니다. 저희 교회는 정의 평화 환경 주일로 지킵니다. 성만찬을 거행했습니다. 평화 주일을 맞이하여 성만찬에 참여한 우리들에게 프란시스의 이야기는 많은 도전을 줍니다.

프란시스가 주는 도전은 다시 말씀드리면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너는 주님을 의지하고 있느냐?’ 또 하나는 ‘이웃이 배부르냐?’입니다. 프란시스는 주님을 의지해서 십자가를 늑대를 향하여 그었고, 배고픈 늑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프란시스가 주는 도전은 아주 성서적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살펴보면 바로 이 두 가지 도전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그야말로 놀라운 평화의 나라가 그려져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첫 세 절을 봉독해 드립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제가 중고등학교 때 어느 설교에서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서 들어 보신 분 계실 줄 압니다. ‘평화’라는 주제로 그림 그리기 대회가 열렸습니다. 마지막에 두 그림이 결선에 올랐습니다. 한 그림은 평화로운 초원에서 소와 양들이 평화롭게 풀을 뜯어 먹고 있는 장면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다른 그림은 바닷가 절벽에서 비바람이 치는데 새 둥지에 어미 새가 새끼 새들을 품고 있는 장면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결국 어느 그림이 선발되었겠습니까? 당연히 두 번째 그림이 선발되었습니다. 폭풍우 가운데서도 어미 새가 새끼 새를 품고 있는 장면이 참 평화의 모습이라고 생각되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오늘 본문 말씀의 이 장면을 누군가가 그려서 제출했더라면 당연히 최고상은 이 장면을 그린 사람에게 돌아갔을 줄 압니다.

제가 뱀띠이긴 하지만 아니 그래서 그런지 뱀을 좋아하려고 애를 씁니다. 지난 주 산책을 하는데 갑자기 길에 검은 줄이 놓여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섬뜩했습니다. garden snake가 길을 건너다가 차에 치여서 죽어 있었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장사를 지내 줘야죠. 나뭇가지를 주어다가 옆에 잔디 위에 잘 갖다 놓았습니다. 제가 뱀띠이긴 해도 그렇게 기분이 좋지는 않았습니다. 또 그러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죽은 뱀을 옮겨 놓는 것도 기분이 별로인데,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는 평화의 나라가 올 것을 이사야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지금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던 평화의 나라를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평화의 나라는 상상 속에 나라가 아니라 언젠가 실현되고 마는 나라임을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평화의 나라는 언제 임한다고 이사야는 확신하고 있나요? 6절 말씀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 때에 이리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그 때’가 언제일까요? ‘그 때’는 바로 오늘 본문 말씀 전 구절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1절 말씀입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이새는 다윗의 아버지이죠. 곧 다윗의 자손이 나타나실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다윗의 자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과 더불어 이 놀라운 평화의 나라는 도래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성 프란시스는 믿었을까요? 안 믿었을까요? 당연히 그는 믿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글자 그대로 믿었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평화의 나라가 이미 와 있음을 믿었습니다. 상상의 세계로 와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와 있음을 믿었습니다. 그는 이 세계를 매일 체험하였습니다.

그런데 늑대가 나타난다는 소문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늑대를 만나러 나갔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평화의 나라가 도래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의지해서 늑대를 향하여 십자가를 그은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이처럼 놀라운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늑대와도 형제와 자매가 될 수 있는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러한 축복을 누리지 못할까요? 왜 동물들은 사람만 보면 놀라 달아나기 바쁜가요? 어떻게 하면 우리도 성 프란시스처럼 평화의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제일 중요한 것은, 말씀드린 것처럼, 믿어야 합니다. 평화의 나라가 이미 임한 것을…. 곧 이사야의 예언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믿는 자들은 늘 이러한 세계를 상상하며 삽니다. 꿈꾸며 삽니다. 이 놀라운 나라를 꿈꾸며 몸소 평화의 삶을 실천합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은 평화의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한편 오늘 본문 말씀에는 은연 중 평화의 삶을 실천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장면을 보면 모두가 만족해하고 있습니다. 이리도 어린 양도 표범도 어린 염소도 송아지도 어린 사자도 모두 만족함 가운데 있습니다. 모두 배부른 모습입니다. 그러기에 서로가 평화스럽게 지내고 있습니다.

프란시스가 늑대를 형제라고 부른 후에 먹을 것을 매일 교대로 놓아 주라고 명령한 이유가 있습니다. 늑대와 평화의 삶을 유지하려면 늑대를 배고프지 않게 하여야 함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긋는 것으로 끝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이웃의 배고픔을 느끼고 배부르게 해 주는 것이 평화의 삶의 실천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참 평화는 오지 않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보여주신 삶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살과 피로 사람들의 영적 배고픔을 채우신 분이십니다. 아울러 육적인 배고픔을 채우시게 하시려고 오병이어의 역사도 베푸신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저는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싶습니다. 왜 성 프란시스는 늑대도 두려워하지 않고 찾아 갈수 있었을까요? 그는 그 평화의 세계를 믿었기에 배고픈 사람들을 찾아다닙니다. 주위의 사람들을 배부르게 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 가운데서 주님의 임재를 늘 체험합니다. 늑대도 두려워하지 않고 찾아 갑니다. 늑대의 문제도 배고픔의 문제였음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희 교회는 올해 초에 곳곳에 security camera를 설치했습니다. 가끔 불청객이 오곤 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언젠가 전시회도 열 겸 해서 설치했습니다.
한두 달 전에 어느 불청객이 들어 왔었습니다. Security camera를 통해 불청객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무엇인가 손에 들고 나가는 장면이 찍혔습니다. 다행히 값나가는 것은 아니었던 거 같습니다.

그런데 왜 그 사람이 그것을 들고 나갔을까요? 배고프기 때문이 아닐까요?
짐승이 사나와 지는 이유는 배고프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사나와 지는 이유도 배고프기 때문입니다. 그 때 평화는 깨집니다. 어떤 분은 인간의 욕심 때문이라고 표현할지 모르겠습니다. 인간의 욕심도 배고픔의 한 현상이 아닐까요?

지난번 쉐마의 밤 때 말씀드렸습니다만, 요즘 애국자는 일거리를 만들어 주는 사람이라고 생각됩니다. 일거리를 만들어 줄 때 배고픔이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까? 일거리를 만들어 줄만한 여건이 못 되면 적은 액수라도 투자하는 것도 배고픈 자들을 돕는 것이고 바로 평화의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저희 교회 어느 분이 뉴욕에 계실 때 남편이 회사를 차렸었는데 어떤 이유인지 회사가 문을 닫게 되었었다는 이야기를 오래 전에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좀 지혜롭게 회사를 차리시지…” 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요즘 같으면 저는 달리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오래 회사가 못 갔었을 지라도 “훌륭한 분이시구나, 평화의 사람이구나.” 생각합니다. 일거리를 잠시라도 이웃에게 주는 분이 바로 평화의 사람이지 않을까요?

그러나 일거리를 창출하지 않을지라도 평화의 사람이 되는 방법은 많이 있습니다. 이웃을 배부르게 하는 방법은 딱 월급을 주는 일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사업을 곧 시작했거나 사업이 잘 안 되는 가게를 방문하는 것도 모두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그것이 어려우면 주머니에 1불짜리를 많이 가지고 다니시다가 기회만 되면 팁을 주는 것도 좋은 방법일줄 압니다.

보스턴에는 예술인들이 많습니다. 따라서 음악회나 미술전람회가 많은 편입니다. 예술인들을 위해 크게 희사할 수 있으면 아주 좋습니다. 그러나 희사할 형편이 안 되신다면 티켓 정도를 구입해서 관람하는 일 이것도 평화의 사람이 될 수 있는 쉬운 길이 아닐까요?

오늘 저희 교회는 세계 성찬 주일뿐 아니라 정의 평화 환경 주일로 지킵니다. 환경을 염두에 두시고 휴지 한 장도 Recycle통에 넣는 것도 평화의 사람이 되는 길 일줄 압니다. 플라스틱 병을 하나라도 덜 사용한다면 한 마리의 동물을 살리는 위대한 평화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닐까요?

이러한 사람들이 많아질 때 우리는 주님의 이 놀라운 평화의 나라를 이 땅 위에서부터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다 함께 이사야의 노래를 부르게 되지 않을까요?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주님의 놀라운 평화의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도래했습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미국의 석유왕 록펠러가 공황 가운데서 도리어 더 큰 부자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 이유는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 투자를 하는데 그것이 더 큰 부가 되어 돌아오곤 했습니다.
계속 공황이 깊어가자 보좌관이 한 아이디어를 제안합니다. 거리에 나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5센트 씩 나누어 주라는 제안을 합니다. 보좌관의 제안을 받아 처음 5센트씩 나누어줍니다. 나중에는 십 센트씩 나누어줍니다.

사람들이 그의 돈을 받는 이유는 돈 버는 천재가 주는 돈을 받으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즐겁게 받아 갑니다. 그는 돈을 주면서 축복해 주었다고 합니다.
“주께서 당신을 축복하시길.”

우리는 록펠러와 같은 부자는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딸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며 이웃을 축복할 때 평화의 나라가 임하지 않을까요?

교우 여러분, 그 어느 때 보다 물질의 분배가 정의롭지 못한 사회에 우리가 삽니다. 환경은 계속 피폐해지고 있습니다. 이럴 때 평화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평화의 나라는 이미 도래해 있습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나라로 들어가십시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This entry was posted in 2015년 이전 설교. Bookmark the permalink.
No. Title Writer Date
241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admin 2013.12.30
240 아기를 보리니… admin 2013.12.22
239 안나의 기다림 admin 2013.12.08
238 시므온의 기다림 admin 2013.12.02
237 You will laugh admin 2013.11.10
236 The Blessing of Melchizedek admin 2013.11.03
235 Like Dew, Your Youth admin 2013.10.20
234 He sees all life admin 2013.10.13
233 평화의 나라 admin 2013.10.06
232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admin 2013.09.29
< Prev ... 1 2 3 4 5 6 7 8 9 10 30 ... Next > 


The Korean Church of Boston (PCUSA) 32 Harvard St. Brookline, MA 02445
교회 : (617) 739 - 2663, (617) 277 - 8097 / Fax : (617) 739 - 1366 / 담임 목사 : 이영길 목사 (781) 467 - 0002
  Powered by The Korean Church of Bost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