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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늙어 백발이 될 때에도

날짜 : 2013.08.04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내가 늙어 백발이 될 때에도
성경본문 : 시편 71:17-24

http://kcbostonmedia.cponsolny.com/Sermon_video_master/Sermon_20130804.wmv

오래 전 중국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먼저 소개해 드립니다. 이 이야기 안에는 고사성어가 나옵니다
전한 시대 무제왕 시절입니다. 소무라는 장군이 포로 교환차 사절단을 이끌고 이웃 나라인 흉노의 땅에 들어갔습니다. 흉노의 우두머리인 선우는 그를 붙잡았고 만일 항복하면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 주겠다고 설득합니다. 소무 장군은 대답합니다.
“죽어도 그리는 하지 못한다.”
“그럼 어쩔 수가 없구나. 그렇다면 숫양이 새끼를 낳으면 너를 풀어주겠노라.”
숫양이 새끼를 낳을수가 있겠습니까? 결국 소무는 북해변으로 추방되어 들쥐와 풀뿌리로 간신히 목숨을 유지하며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고국의 친구인 이릉 장군이 찾아왔습니다.
이릉 장군 역시 흉노와 싸우다가 포로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끝까지 항복하지 않은 소무 장군과는 달리 이릉장군은 선우의 빈객으로 후대를 받아 항복한 장군 곧 항장이 되었습니다. 이 사실이 부끄러워 감히 소무를 찾지 못하다가 선우의 부탁으로 먼 길을 달려 온 것입니다. 이릉은 주연을 베풀어 소무를 위로하면서 말합니다.
“이보게, 이만 돌아가세나. 선우가 자네를 데려오면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네. 이제 그만 고생하고 나와 함께 돌아가세. 어차피 ‘인생은 아침 이슬과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소무는 친구인 이릉의 제안 또한 거절합니다. 소무의 굳은 충심을 확인한 이릉은 고개를 숙이며 혼자 돌아갔습니다.
(슬라이드)
[인생조로(人生朝露)]
이릉이 소무를 회유하기 위해 고사성어를 사용합니다. 인생조로(人生朝露). ‘인생’은 다 아시겠고, ‘조’는 아침 朝, ‘로’는 이슬 露. 곧 이릉이 말합니다.
“인생은 아침 이슬과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인생조로’에 대한 두 사람의 입장이 나옵니다. 이릉은, 인생은 이슬과 같은 것이니 대충 적당히 좋은게 좋은거라고 하면서 살아가자라는 입장입니다. 반면 소무의 입장은 달랐습니다. ‘인생은 이슬과 같은 것, 짧은 인생 부끄럽지 않게 아름답게 살아가자’라는 입장입니다. 두 사람 다 ‘인생조로’를 인정합니다. 그러나 다르게 반응합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인생조로라는 사실 앞에서 어떻게 반응하시고 계십니까? 이릉과 같이요? 아니면 소무와 같이요? 아니면 인생조로를 인정하시지 않나요…?
참고로, 그 후 소무는 무제의 아들인 소제가 파견한 특사의 지혜로운 행동으로 인해 다시 고국 땅을 밟게 되었습니다. 실로 가슴 벅찬 19년 만의 귀국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시편 71편의 저자도 사실 인생조로라는 사실 앞에서 자신의 지혜를 시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분의 지혜를 살펴 보면서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시편의 저자는 누구인지 확실치는 않습니다. 주석가들은 공통적으로 나이가 지긋하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곧 인생조로라는 사실을 뼈 속 깊이 체험하고 있는 분입니다. 17절 말씀을 보면 알수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어려서부터 교훈하셨으므로 내가 지금까지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하였나이다.”
시인은 어려서부터 직접 간접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이제 중년이 넘어서까지 주님께서 행한 기이한 일들을 늘 전하곤 하였습니다. 이처럼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교훈을 받고 또한 주님께서 행하신 기이한 일들을 늘 전했으니 아마 그의 장래는 보장이 되었을줄 압니다. 18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발이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주의 능력을 장래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저를 버리지 마소서.”
일견해 읽으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합니다. 17절과는 반대의 분위기입니다. 17절에서는 하나님을 인생 깊은 곳에서 만나서 그 하나님을 자랑해 온 것처럼 보입니다. 18절에서는 하나님은 언젠가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서려 보입니다. 특히 백발이 되었다고 이제 쓸모 없다고 버리지 말아달라고 묘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시인이 말하는 ‘버리지 마소서’의 뜻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버리지 말라고 18절에 두번씩이나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9절에도 비슷한 고백을 합니다.
“늙을 때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 힘이 쇠약할 때에 나를 떠나지 마소서.”
두 가지로 생각할수 있습니다. 하나는 그동안 많은 원수들에게서 곤란을 많이 당했습니다. 원수들에게 내 주지 말아 달라는 부탁이 분명히 서려 있습니다. 특히 9절의 내용은 그 면이 강합니다. 그런데 그것만이라고 생각하면 뭔가 부족한 것 같습니다. 18절에서는 좀더 높은 차원의 고백을 하고 있지 않나 생각케 됩니다.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주의 능력을 장래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저를 버리지 마소서.”
후대에게 멋진 모범을 보이는 노인이 되게 해달라는 마음의 소원이 엿보입니다. 곧 버림받는 것은 더 이상 주의 능력을 전하지 못하게 되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버리실 때 더 이상 주의 힘을 전하지 못 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슬과 같이 사라지지만 마지막 사라질 때까지 최선의 삶을 사는 자가 되어 달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니 그에게는 최선의 노후를 사는 것은 바로 후대에게 주의 능력을, 장래의 모든 사람에게 당신이 받은 교훈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저는 이 시인의 모습을 이렇게 정리하고 싶습니다. 시인은 중년을 넘어서서 노년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제 마음의 가장 큰 소원이 있습니다. 최고의 노년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이 마음을 받아 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만일 안 받아주시면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인에게서 배울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는 노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노년을 물질과 건강으로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노년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바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인생조로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자기라는 이슬이 땅 위에서 사라지기 전에 하루라도 주님의 기이한 이적을 전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인생조로입니다. 노년을 준비하십시요. 노년에 최고의 삶을 살 것을 준비하십시요. 시인은 ‘나’라는 이슬이 사라지기 전에 하나님의 기이함을 전하고 또 전하는 자가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세기적인 정신의학자인 Carl Jung은 다음과 같은 표현을 했습니다.
“늙어서 죽음을 목표로 삼고 준비하지 못하는 것이나 젊어서 미래에 대한 상상을 억압하는 것은 둘 다 신경증에 속한다.”
신경증은 일명 노이로제라고 알려져 있습니다만, 칼 융은 젊은이들이 미래에 대한 상상력을 잃고 사는 것이 바로 정신병중 하나인 노이로제 환자라고 생각합니다. 아울러 나이들어 죽음을 생각하며 살지 않는 것도 똑 같은 노이로제 환자라는 것입니다.
이를 한 마디로 말한다면 인생조로를 인정하지 않고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사는 것이 바로 노이로제 환자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제가 아는 분이 한 분 있습니다. 나이는 65세가 좀 넘으신 분이십니다. 이 분이 운동을 좋아하시는데, 은퇴 후 운동을 더 열심히 하시고 계십니다. 하루는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얼마 전에 웃통을 벗고 사진을 한 장 찍었지. 앞으로 일년 후에 또 찍어서 비교해 볼거야.” Fitness club에 가입해서 열심히 운동을 하신다는 말을 계속하셨습니다. 얼마 전에 만나서 한번 질문해 보았습니다.
“운동하는거 잘 되세요?” 대답하시는 말씀이…,
“운동을 열심히 했는데 어느날 갑자기 어깨에 뭐가 뿔룩 튀어 나오더군. 의사에게 갔더니 나이에 비해서 운동을 심하게 한 결과라고 운동을 심하게 하지 말래.”
더 안타까운 사실은 더 이상 운동은 해서는 안 되는데 fitness club은 2년짜리를 끊어 놓은 것입니다. 겨우 겨우 반쯤 할인해서 refund를 받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인생조로. 우리는 이슬처럼 사라질텐데 거기에 맞게 노년을 준비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몇 년전에 일본을 방문했을 때입니다. 콘퍼런스가 어느 호텔에서 열리고 있었는데 콘퍼런스룸의 스크린에서 사꾸라 꽃잎이 지는 장면이 계속 비쳐지고 있었습니다. 후에 알게 되었는데, 일본을 상징하는 꽃이 사꾸라(벚꽃)라는 것은 잘 아실줄 압니다.
그런데 벚꽃이 활짝 핀 것이 일본인을 상징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활짝 핀 꽃 잎이 바람에 흩날리며 떨어지는 모습이 바로 일본인을 상징하는 모습이라고 알게 되었습니다. 활짝 피는 것 누구나 다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의 매력은 활짝 핀 후 바람에 흩날리며 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후 저는 일본인들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일본 그 작은 나라 사람들이 세계 최강 국가 중 하나가 된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활짝 핀 벚꽃보다는 벚꽃의 최후에 더 강한 매력을 느끼는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지는 벚꽃의 모습에서 위대한 힘을 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실 일본인들이 예수님만 잘 믿으면 얼마나 위대한 민족이 될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시인도 인생의 마지막에 더 놀라운 삶이 기다리고 있음을 잘 알았던 것 같습니다. 21절 말씀입니다.
“나를 더욱 창대하게 하시고 돌이키사 나를 위로하소서.”
시인은 알았던 것입니다. 두 가지를, 첫째는 인생조로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가장 찬란한 시간은 아직 오지 않은 것을 알았습니다. 황혼의 태양이 가장 찬란하듯이 말입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아마 이렇게 응답하시지 않으셨을까요?
“맞다. 노년이 가장 위대한 시절이다. 지는 해가 가장 찬란하듯 말이다. 그러나 지는 해이기에 위로가 또 필요하지.”

이것이 우리 인생의 paradox(역설)인 것 같습니다. 우리의 노년은 위대합니다. 황혼의 빛이 이를 증명합니다. 그러나 이슬의 마지막 빛입니다. 그러므로 위로가 필요합니다.
그러니 노년을 준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노년을 준비한다는 것은 인생의 창대케 됨이 아직 남아 있음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아울러 이슬이 사라질 시간이 닥아 왔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역설적인 현실을 받아드리고 준비하는 자들이 참으로 최고의 노년을 맞이하게 될 줄 압니다.

다음 귀절들을 보면 그는 최고의 노년을 맞이하고 있음을 쉽게 알수 있습니다. 23절 말씀입니다.
“내가 주를 찬양할 때에 나의 입술이 기뻐 외치며 주께서 속량하신 내 영혼이 즐거워하리이다.”
찬양으로 노년을 멋지게 보내고 있습니다. 더 이상 젊고 건강해지기를 바라는 기도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인생조로의 짧은 시간 동안 함께 하신 하나님께 찬양을 드림으로 황혼을 더욱 황홀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24절 말씀입니다.
“나의 혀도 종일토록 주의 의를 작은 소리로 읊조리오리니 나를 모해하려 하던 자들이 수치와 무안을 당함이니이다.”

시인은 작은 소리로 읊조린다고 했습니다. 그 뜻은 아무도 그 소리를 듣지 못해도 좋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들으면 좋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침묵으로 하나님과 대화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 지는 태양은 놀라운 광채를 발하게 될 것을 시인은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침묵으로 하나님과 대화하면서 이슬과 같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최고의 광채를 발하게 되는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자기 후손들에게 남기는 최고의 선물임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침묵 가운데 들려오는 멧세지가 가장 powerful하지 않은가요? 이런 사람들에게 젊은이들은 와서 귀를 기울이지 않을까요? 침묵의 사람이야말로 세상을 든든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아닐까요?

웬만해서는 제가 교우님들의 성함을 설교시 말씀드리지 않는데 오늘은 한 분의 성함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다행히 멀리 이사 가신 분입니다.
약 10년간 저희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셨던 정용국 집사님이 계십니다. 이 분에 대해서 아직까지 인상 깊게 남아 있는 모습이 있습니다.
2002년도에 집사회장으로 섬기셨습니다. 이 해 처음으로 한국문화축제를 시행했습니다. 첫번째 시도니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회의를 할 때마다 저마다 자기의 의견이 분분해서 배가 산으로 가기 일보직전일 때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정 집사님은 회의 시작 기도만 하시고 회의 중에는 한 마디도 안 하셨습니다. 이 당시 거의 70에 가까이 되셨는데 늘 권사님의 도움으로 회의 때마다 푸짐하게 음식을 차려 오십니다.
그러나 회의 석상에서는 그 누구의 의견도 끝까지 들어주십니다. 당신의 의견은 하나도 말 안 하시면서….
한국문화축제는 성황리에 마쳤습니다. 저는 아직도 그 때 첫번째 축제가 성황리에 마칠수 있는 가장 큰 이유를 정 집사님의 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혼자서 하나님께 읊조리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그의 바램대로 멋진 축제가 이루어졌고 그래서 올해 60주년을 맞이하여 다시 그 축제를 시행하게 된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는 아마 이런 기도를 하시지 않았을까요?
“나를 더욱 창대하게 하시고 돌이키사 나를 위로하소서.”

말씀을 거둡니다.
괴테가 노년에 이런 글을 썼습니다.
“자네 귀에 조용히 들려줄 말이 있네. 나는 이렇게 나이들고도 좋은 생각들이 떠올라서 요즘 아주 행복하다네. 이 생각들을 좇고 또 실천에 옮기기 위해 생을 반복해도 좋을 만큼 소중한 생각들이네.”

노인분들에게는 이처럼 소중하고 좋은 생각이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속으로 중얼거립니다. 그 때 그들은 광채가 납니다.
젊은 교우 여러분,
어르신들이 몰라서 침묵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너무 많이 아시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그들의 광채를 보면서 여러분의 노년을 준비하세요. 인생은 이슬과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마지막 순간에 최고의 빛을 발하시는 이슬이 되십시다.

시인은 고백합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발이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주의 능력을 장래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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