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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하늘 문이 열리고…

날짜 : 2013.06.16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보라 하늘 문이 열리고…
성경본문 : 사도행전 7:54-8:1a

http://kcbostonmedia.cponsolny.com/Sermon_video_master/Sermon_20130616.wmv

얼마 전에 Helen Roseveare라는 콩고에서 선교를 하신 영국의 처녀 의사를 소개해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이 분에 대해서 두 가지 이야기를 말씀드렸었습니다. 한 가지 이야기만 다시 한 번 말씀드리면, 하루는 별거 아닌 것 가지고 콩고인 스태프에게 화를 내었더니 이 스태프는 선교사님에게 자기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그렇게 화를 내느냐고 따졌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에 선교사님은 무릎을 꿇으면서 용서를 빌었습니다. 겸손의 모범을 보여주신 선교사님이라고 소개해 드렸었습니다.

이 분에 대한 말씀드리지 않은 한 가지 이야기가 더 있습니다. 헬렌 선교사님은 당신의 기도 습관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저에게는 이 이야기가 더 깊게 저의 뇌리에 남아 있습니다. 헬렌 선교사님은 힘들고 지칠 때 이렇게 기도한다고 합니다.
“아멘.” “아멘.”
아무 내용도 없다고 합니다. 단지 “아멘” 한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심한 고통 중에 있을 때는 기도 내용도 생각이 안 나곤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혜가 떠올랐습니다. 어느 날 자신은 무엇이라고 기도드릴지 몰라도 주님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자기를 위해서 끝없이 기도하시고 계시다는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힘들 때마다 그는 그저 “아멘” “아멘”만 한다는 것입니다. 곧 주님의 기도의 내용에 “아멘”으로 응답한다는 것입니다. 아주 지혜로운 분이십니다. 어떻게 보면 이 보다 더 좋은 기도가 없다고 봅니다.

교우 여러분, 때로는 뭐라고 기도해야 할지 모를 때가 종종 있지 않습니까? 헬렌 선교사님을 따라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아멘.” 주님은 언제나 우리를 위해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중보의 기도를 해 주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구하지 알지 못할 때 성령과 더불어 주님은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십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어쩌면 이것이 우리 기독교인들이 누리는 최고의 축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정말 우리 주님은 감사하신 분입니다. 이 땅 위에 계실 때부터 늘 기도하셨는데 십자가를 지신 후 하늘나라에 가셔서도 늘 기도해 주시니 말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하늘나라에서 기도만 하실까요? 다른 것은 안 하실까요? 본문 말씀을 통해서 주님의 또 다른 모습을 살펴볼까요?

오늘 본문 말씀은 스데반이 순교하는 장면입니다. 이 말씀의 배경은…, 스데반이 붙잡힌 후 대제사장과 많은 사람들 앞에서 당신이 믿는 바를 고백합니다. 어떻게 보면 설교를 했습니다.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있는데 사람들은 마음에 찔림을 받습니다. 54, 55절 말씀입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스데반은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앉아만 계신 분이 아니라 때로는 서시기도 하십니다. 하여튼 서신 주님의 모습을 보고 스데반이 말합니다. 56절 말씀입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인자는 예수님을 가리켜서 하는 말입니다. 스데반도 깜짝 놀랐던 것 같습니다. 갑자기 하늘이 열리고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서신 모습을 보았던 것입니다. 보통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저 자기만 보고 큰 위로를 받으면서 말없이 죽어 갈 수도 있는데…, 너무도 엄청난 장면을 본 것입니다. 예수님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계신 모습을 본 것입니다. 이에 자기도 모르게 입에서 함성이 터져 나온 것입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이를 듣고 사람들이 가만히 있었을까요? 57, 58절 말씀을 보면,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 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사람들은 스데반에게 달려들고 돌을 던집니다. 스데반은 사울이 지켜보는 가운데 순교하게 됩니다.

순교는 했지만 사실 주님은 당신의 놀라운 비밀을 스데반을 통해서 보여주었습니다. 아니 스데반을 통해서 우리 모두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당신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만 계신 분이 아니심을 보여주었습니다. 때로는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시는 분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사실 많은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이 장면을 보면서 이렇게 해석합니다. 예수님은 스데반의 순교 앞에서 일어나셨다 해석을 합니다. 그 말의 뜻은 ‘예수님은 순교하는 장면을 볼 때마다 항상 일어나신다.’라는 의미가 내포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도 가능합니다. “예수님은 순교자를 대하실 때만 일어나시는가? 순교의 장면 말고도 또 일어나실 때가 있으신가?” “순교의 십자가가 아닌 다른 십자가를 질 때 주님은 어떻게 행동하시는가?” 우문인 것 같지만 한번쯤 생각해 보는 것도 신앙생활에 큰 유익이 될 줄 압니다.

사실 우리가 너무 많은 시간을 세상 생각에 젖어서 삽니다. 그것도 염려와 불만 가운데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염려와 불만 가운데 사는 것이 정상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 우리들의 삶인 것 같습니다.

이러한 세상 생각에서 잠시 머리를 돌려서 눈을 하늘로 돌려 보는 것 얼마나 소중하겠습니까? 우리의 생각이 맞던 그르던 하늘에 계신 주님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우리들의 삶을 더욱 기름지게 하고도 남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기왕 조금 빗나갔으니 염려가 얼마나 무서운지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아주 먼 옛날에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이 있었습니다. 괴물은 노파로 변장하여 개울가에 앉아 있다가 건장한 남자가 오면 업어서 개울을 건너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대부분의 착한 남자들은 노파의 부탁에 선뜻 응합니다. 그런데 노파는 개울을 다 건너고 나서도 내려올 생각은 않고 마을까지 업어 달라고 합니다. 마음씨 착한 남자들은 할머니가 오죽 힘들면 부탁하랴 싶어 구슬땀을 흘리며 업고 갑니다. 하지만 노파는 마을에 당도해서는 다른 곳으로 데려가 달라고 합니다. 지친 남자가 더 이상은 움직일 수 없으니 내려오라고 하자 노파는 엄청난 힘으로 남자의 목을 조르며 이렇게 협박합니다. “나를 내려놓으면 네 목을 졸라 죽여 버리겠어.” 남자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노파를 어깨에 짊어진 채 며칠 이고 계속 걷습니다. 너무 지쳐서 노파를 내려놓으려 하면 그때마다 노파는 남자의 목을 더욱 조를 뿐입니다. 그러다가 남자가 완전히 탈진하여 쓰러지면 괴물은 비로소 내려와 그의 심장을 파먹습니다.
이 괴물이 바로 우리의 생각을 파먹곤 하는 ‘걱정’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이 걱정이라는 괴물의 꾀에 넘어가지 않을까요? 비록 어리석어 보이지만 하루에도 몇 차례 하늘 위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닐까요? 하늘에 계신 주님은 지금은 무얼 하시나 상상해 보시는 분들이 아닐까요? 지금은 앉아 계시는가, 서 계시는가? 내가 어려움 가운데 있을 때나 십자가를 질 때 주님은 서계시는가? 주님을 상상하노라면 어느덧 걱정의 요괴는 사라지지 않을까요?

어느 분이 재미있는 표현을 했습니다. ‘어둠 속에 빛이 임하면, 어둠은 빛 보다 더 빨리 도망간다.’ 저는 이렇게 바꿔 보고 싶습니다. ‘하늘나라의 주님을 상상하면 걱정의 요괴는 우리의 상상보다 더 빨리 사라진다.’

그런데 사실 하루에도 몇 차례 주님의 모습을 상상하는 사람은 걱정에서 해방되는 것뿐이 아닙니다. 놀라운 삶을 영위하게 될 줄 압니다. 이런 맥락에서 저는 스데반의 모습을 이렇게 상상해 봅니다.

스데반은 늘 하늘에 계신 주님을 상상하곤 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주님을 보기를 그토록 원했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스데반은 걱정이 그를 침범할 틈이 없었습니다.

그뿐이겠습니까? 스데반도 자주 자주 “아멘” “아멘” 하며 지냈을 것입니다. 어려운 일이 닥치면 늘 혼자서 “아멘, 아멘” 외치는 모습을 보면서 주님은 너무도 감격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스스로 기도하신 내용을 즉시로 응답해 주시곤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니 스데반은 매일 아침을 큰 기대를 안고 시작하곤 했을 것입니다. 어제의 “아멘, 아멘”의 응답이 바로 오늘 임할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 하루를 시작하곤 합니다. 오늘은 바로 어제의 기도의 응답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놀라운 축복의 삶을 살고 있는데 어느덧 스데반이 순교를 맞이하는 순간이 닥아 왔습니다. 주님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셨습니다. 그리고는 당신을 그토록 생각하면서 지내온 스데반에게 주님은 귀한 선물을 주시기로 결심을 하십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 남들이 누리지 못하는 선물을 주시기 원하신 것입니다. 땅에서 하늘에 계신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시기 원하셨습니다. 곧 하늘 문을 활짝 열어주십니다.

스데반은 육신의 몸을 입고 남들이 보지 못하는 세계를 보게 된 것입니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세계를 보게 된 것입니다. “아멘, 아멘”의 파워가 이처럼 놀랍습니다.

교우 여러분, “아멘, 아멘”의 삶을 사시면 됩니다. 그리고 매일 아침 오늘이 바로 기도 응답의 날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하늘문이 열리는 것조차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스데반의 축복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땅에서 하늘문이 열리는 것을 본 스데반은 더 큰 선물을 받습니다. 이제는 하늘나라에 가서 새로운 선물을 받게 됩니다. 무슨 선물일까요?

순교한 후 놀라운 일이 땅 아래서 벌어지는 것을 하늘에서 내려다보았을 것입니다. 8:1절 말씀입니다.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후에 사울이 어떻게 되죠? 회심한 후 바울이 되어 갑니다. ‘사울’의 뜻은 ‘큰 자’라는 뜻입니다. 반면 ‘바울’은 ‘작은 자’라는 뜻입니다. 스스로 큰 자라고 생각했던 사울이 작은 자 바울이 되어 간 것입니다. 하늘 위에 계신 주님의 모습을 그토록 사모했던 스데반의 삶을 통해서 사울은 바울이 되어 간 것이 아닐까요?

곧 스데반은 하늘나라에서 자기를 죽이는데 앞장섰던 사울이 바울이 되어 가는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야말로 최고의 선물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 땅에서 받은 축복보다 더 큰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상상해 본 스데반의 생애입니다.

그런데 스데반을 스데반이 되게 한 것은 하나님 우편에 계신 주님을 상상하는데서 시작된 것이 아닐까요?

교우 여러분, 이 세상 살아가면서 생각해야 할 일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염려 근심 불안 불만거리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우리가 하루에 6만 가지 생각을 한다고 합니다. 6만 가지 생각 중에 조금만이라도 하늘에 계신 주님을 생각하면서 ‘아멘’ 할 수 있다면 우리들의 삶은 얼마나 달라질까요?
걱정에서 해방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들로 인하여 사울이 바울이 되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들의 믿음의 선조들은 우리 모두 스데반과 같은 축복을 누리게 되길 원한 것 같습니다. 믿음의 선조들이 작성한 사도신경을 보면 그들의 꿈과 기대를 눈여겨 볼수 있습니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아나시고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음의 선배들은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아울러 또 상상하기 원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을 기억하고 또 기억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주님을 사모해야 합니다. 하지만 십자가만 기억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십자가를 지신 주님께서 이제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심을 상상하여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아멘” 할뿐 아니라.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주님을 상상하며 “아멘”해야 합니다. 이 때 온전한 신앙인이 되어 갑니다.

지난번 60주년 기념 부흥 사경회를 통하여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주제는 “변화의 바람이 불어 올 때”이었습니다. 제목부터 많은 관심을 끌게 했습니다. 저는 특히 첫날의 메시지가 강하게 아직까지 남아 있습니다.

변화를 위한 변화를 추구하지 말고 변화의 바람이 불어 올 때 도리어 변화하지 않는 주님을 만나는 것이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사명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교우 여러분, 이 세상에 제 아무리 변화의 바람이 불어와도 하늘나라에는 변화의 바람이 불지 않습니다. 도리어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주님은 동일하십니다. 주님은 언제나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주님은 때로는 우리를 위하여 벌떡 일어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아멘” “아멘” 하면서 하늘나라에 계신 변하지 않으시는 주님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 때 하늘의 문이 열릴 것입니다. 변화의 바람이 불어오는 이 세상은 하늘 문 저편에 계신 변하지 않는 분을 뵙게 될 것입니다.

스데반에게 놀라운 선물을 예비해 두신 주님께서 하늘나라에 계신 주님을 상상하며 그리워하는 우리들에게 놀라운 선물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영원토록 변하지 않는 선물을 주실 것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영국의 저술가 사무엘 스마일스가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생각을 심으면 행동을 낳는다.
행동을 심으면 습관을 낳는다.
습관을 심으면 성격을 낳는다.
성격을 심으면 운명을 낳는다.”

모든 것의 시작은 생각입니다. 생각이 행동을 행동이 습관을 습관이 성격을 성격이 운명을 낳습니다.
우리들의 생각을 하늘나라에 심으십시다. 하늘나라에서 주님은 지금 무얼 하시나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다.

교우 여러분, 주님은 우리를 위해 앉아도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서 계시기도 합니다. 상상을 통하여 하늘문 너머에 계신 변하지 않으시는 주님을 사모하십시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지십시다. 그 때 주님은 우리를 보시며 어떤 모습을 취하실까요? 언젠가 하늘 문이 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스데반은 고백합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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