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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아픔

날짜 : 2013.05.12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어머니의 아픔
성경본문 : 요한복음 19:23-27

http://kcbostonmedia.cponsolny.com/Sermon_video_master/Sermon_20130512.wmv

정호승 시인의 ‘북의 어머니’라는 글입니다. 어느 재미교포가 북한에 사시는 노모를 찾은 이야기를 아름답게 펼쳐가고 있습니다. 어머니 주일에 적합하기에 먼저 들려드리겠습니다.

그는 43년 만에 고향땅 북한을 찾았다. 재미교포로서의 공식 일정을 모두 끝내고 곧장 고향 마을을 찾아 나섰다. 길도 옛길이 아니고 마을 이름도 옛 이름이 아니었으나 어릴 때의 기억을 더듬어 마침내 한 집을 찾아내었다.
초가지붕이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뀐 것 말고는 안채와 사랑채가 있던 자리와 뒷간과 광이 있던 자리까지 예전과 꼭 같았다. 심지어 뒤꼍에 살구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것까지 그대로였다.
그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성큼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마루에 초라한 할머니 한 분이 꼬부리고 앉아 졸고 있었다.

“할머니, 혹시 43년 전에 이 집에 살던 사람을 아세요?”
그는 가만히 노파에게 다가가 물었다.
노파는 꿈이라도 꾸는지 눈도 뜨지 않고 한동안 말이 없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내가 50년 전부터 여기서 살았는데…….”
“네? 50년전부터요?”

놀란 그는 주름투성이인 노파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한 번도 본적이 없는 낯선 얼굴이었다. 노파는 이빨이 몽땅 빠지고 하얗게 센 머리가 북데기처럼 엉켜 있었으며, 눈마저 짓물러 눈곱으로 덮여 있었다. 그러나 그는 헛일 삼아 다시 물어보았다.

“그러면 할머니, 6/25 나기 전에 이 집에 살던 기영이라고 아세요?”
“기영이?”
노파의 얼굴에 환히 반가운 기운이 스치더니 이내 눈물이 고였다.
“우리 아들인데 죽었어.”
“아니 그러면 저의 어머니세요? 어머니, 제가 기영인데요.”
“뭐라고?”
노파는 귀가 어두워 잘못 알아들었는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남에 갔는데 죽었어. 한 번만이라도 만나봤으면 좋겠어.”
“어머니, 제가 이남에 갔던 기영이에요. 고개를 들어보세요.”

그제야 노파가 번쩍 고개를 들고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눈에 불꽃을 일으키며 벌떡 일어나 다짜고짜로 그의 양복저고리를 벗겨 내렸다.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는지 젊은이 못지않은 힘으로 와이셔츠마저 벗겨 내렸다. 그리고는 “아이고. 기영아!” 하고 그의 등에 얼굴을 대고 울기 시작했다.

“아이고, 이거 꿈인가 생신가? 네가 정말 기영이구나! 등에 큰곰자리가 있는 걸 보니 틀림없는 기영이구나!” “아이고. 내 아들아! 내가 너를 낳았을 때 이 큰곰자리를 보고 우리 집에 인물 났다고, 네 아버지가 그리 좋아하셨는데…….”

노파는 그의 등을 쓰다듬으면서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그제야 그도 “어머니!”하고 노파를 부둥켜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꿈에 그리던 젊은 어머니의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는 어머니를 쳐다보고 또 쳐다보았다.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해버린 어머니의 모습에 눈물이 더욱 쏟아졌다.

(중략)

노파는 연신 꿈만 같다면서 몇 번씩이나 자기의 손등을 꼬집어보면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러나 그는 이런저런 사정상 단 하룻밤도 어머니와 지내지 못하고 그곳을 떠나야만 했다. 매달리며 우는 어머니에게 몇 달 후에 꼭 다시 찾아오겠다는 약속만을 남기고 그곳을 떠났다.

그 뒤, 그가 다른 나라에 들렀다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오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와 있었다. 가만히 날짜를 따져보니 자기가 찾아갔던 바로 그 다음날이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이었다.

죽었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행여나 하며 아들을 그리워 한 마음이 어머니를 43년이나 버티게 했던 것 같습니다. 이제 그리고 그리던 아들을 본 후 원 없이 세상을 떠나신 것 같습니다. 평범해 보이는 이야기이지만 우리 모두 깊은 어머니의 아픔의 모습을 느끼게 합니다.

정호승 시인은 모든 어머니에게는 이처럼 아픔의 바다가 있음을 짧은 이야기를 통해서 알려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아픔의 모습이 나옵니다. 아들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실 때 어머니 마리아는 십자가 옆에 서 있었습니다. 23절 말씀입니다.

“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아들 예수는 옷을 다 빼앗긴 채 십자가에 달려 있습니다. 아들의 모습을 보며 마리아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십자가에 올라가서 자기 옷으로 아들을 가리고 싶지 않았을까요?

마리아는 자기 눈앞에서 펼쳐지는 장면을 보면서 자기는 아무런 힘도 없음을 철저히 통감했을 것입니다. 자신의 무력함에 심히 괴로워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어머니들이 갖고 있는 아픔이 아니겠습니까?

저의 친구가 딸이 둘이 있습니다. 두 딸 모두 열심히 공부를 하였는데 딸 하나는 공부한 대로 좋은 성적을 얻어서 늘 원하는 대로 학교에 진학을 했습니다. 다른 딸 하나도 공부는 열심히 하지만 언니만큼 성적이 안 나왔습니다.

아버지는 아무 말을 안 하는데 엄마는 둘째 딸 때문에 마음이 아프다고 하는 말을 종종 합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원하는 성적을 얻지 못하는 딸 옆에서 자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해서 아파하고 있는 엄마의 모습이었습니다.

사실 이것은 빙산의 일각이죠. 자녀들의 모든 삶 구석구석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으로 아파하고 있는 분이 바로 어머니들이 아닐까요?

조금 전에 말씀드린 노파의 경우도 비슷합니다. 남한으로 내려간 아들을 찾고 싶어도 찾을 수 없습니다. 자신의 무력함을 안고 평생 고통 가운데 지냈을 것입니다.

곧 모든 어머니들은 마리아처럼 자녀가 십자가에 죽어 가는 것을 보며 자신의 무능함을 느끼며 발을 동동 구르는 아픔을 소유하지 않으실까요? 곧 모든 어머니들은 마리아의 아픔을 지니고 평생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마리아의 아픔은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네 명의 군인들은 아들의 겉옷을 나누어 가졌습니다. 아마도 십자가 형틀에는 네 명의 군인이 지켜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속옷은 호지 않고 한 조각이었기에 군인들은 제비를 뽑아서 속옷을 나눠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마리아는 어떤 생각에 잠겼을까요?

3년 전에 집을 나간 아들이었으니 그 때 입고 있던 옷이 어머니 마리아가 만들어준 옷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아닐 것입니다. 남이 만들어 준 옷이라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마리아는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습니까? 남이 만들어 준 옷을 입고 다니다가 군인들에게 붙잡혀서 십자가에 달린 모습을 보면서….
마리아의 마음에는 이런 생각이 들었을 줄 압니다. “이번에 기적적으로 살아나기만 하면 정말로 최고의 옷감으로 최고의 정성을 들여서 만들어 줄 텐데….”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아들을 위해 만들어준 옷이 생각이 났을 것입니다. “또 다시 옷을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끝없이 생각이 이어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이상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마리아는 깊은 마음의 상처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자기 안에 있는 숨은 능력마저 보여줄 수 없는 아픔을 느낍니다.

얼마 전에 아일랜드의 한 성녀에 관한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St. Brigid인데, 실제 존재했는지 안했는지는 알 수는 없습니다만 그의 관한 많은 전설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대표적인 이야기는 그는 기적의 능력을 소유하였는데 치유와 정의를 이루는데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비와 바람도 잠잠케 한 능력의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한편 가난한 사람을 보면 주지 않고는 못 베기는 성인이었는데 자기 아버지의 재산을 훔쳐서라도 가난한 사람을 후하게 베푸는 성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성녀에 대해 글을 쓴 사람의 의도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 성녀는 바로 모든 여인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여인들은 초능력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분에 넘치게 베푸는 존재 아니 위인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저는 의과대학 다닐 때 배운 것이 생각이 났습니다. 어머니가 아무리 빈혈이라도 아이는 빈혈로 태어나지 않습니다. 어머니는 자기의 모든 것을 주고 또 주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아니 위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일랜드의 전설이 말하고 있고 의학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마리아의 두 번째 아픔은 무엇이겠습니까? 자기 안에 있는 이 초능력을 마음껏 줄 수 없는 것이 그의 아픔이었습니다. 자신이 빈혈이 되면서까지 아들에게 줄 수 있는 기회를 잃은 아픔이었습니다.

마리아의 아픔은 상반되는 것 같지만 묘하게 연결이 됩니다. 첫 번째로는 사회적으로 너무도 연약한 자신을 느낍니다. 아무런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아픔입니다. 두 번째 아픔은 마리아는 능력이 있지만 그 능력을 발휘할 기회가 오지 않습니다. 자신 안에 있는 무한한 사랑의 열정을 발휘할 수가 없는 아픔입니다.
곧 없어서 아프고 있어서 아픈 것이 마리아의 아픔입니다.

그러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어머니의 이런 아픔을 모를 리가 있었겠습니까? 온 인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시면서도 예수님은 당신의 육신의 어머니의 아픔을 너무도 잘 아셨을 줄 압니다.
어머니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이 아픔을 잘 알기에 십자가 위에서 말씀하십니다. 먼저 마리아에게 말씀하십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마리아는 몇 년 만에 들어보는 아들의 목소리에 온 몸에 전율이 올랐을지 모릅니다. 마리아는 귀를 기울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더 이상 당신을 향해서는 아무 말을 하지 않습니다. 대신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말합니다. 사랑하시는 제자는 바로 요한복음의 저자인 자기를 말합니다. 27절 말씀입니다.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예수님께서 왜 요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아마도 주님은 어머니 마리아의 아픔을 너무도 잘 아셨을 줄 압니다. 요한에게 당신 대신 당신의 어머니의 아픔을 위로해 달라고 부탁하신 것이 아닐까요?

사실 예수님의 생애가 기록된 4복음서 중에 오직 요한복음만 이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요한만이 이 장면을 기록했을까요?

한 가지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자기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모셨음을 알려주고 싶었을지 모릅니다. 정말로 자기를 알려주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다른 어떤 숨은 의도가 있었는지 몰라도 결과적으로 알려진 것은 마리아는 아들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는 장면을 직접 보았던 사실이 온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일 줄 압니다.

후에 요한이 어떻게 마리아를 위로하였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요한이 이 이야기를 요한복음에 기록한 의도는 자기를 나타내기 위함 보다는 더 큰 숨은 뜻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요한은 마리아의 얼굴에서 어머니의 위대한 모습을 보았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얼굴과 가장 비슷한 얼굴을 마리아의 얼굴에서 보았을지 모릅니다.
그렇지 않고는 요한이 이 장면을 기록했을 리가 없습니다. 온 인류를 위하여 온 인류를 마음속으로 그리며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님의 얼굴과 가장 비슷한 얼굴은 바로 아들에 대한 위대한 사랑을 안고 괴로워하는 어머니의 얼굴임을 요한은 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과감히 이 장면을 기록해 놓았을 것입니다. 곧 모든 어머니들의 아픔은 인류를 구원하는 십자가의 아픔과 함께 이 세상이 꼭 필요한 위대한 아픔임을 알려주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 이야기를 통해 각자 처한 곳에서 위대한 아픔의 소유자인 어머니들을 경외할 것을 요한은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어머니는 물론 이거나와 모든 어머니들에게 말입니다. 곧 요한은 십자가 밑에서 두 가지 큰 선물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는 가시 면류관을 쓰신 주님의 모습입니다. 또 하나는 어머니의 아픔 가운데 있는 마리아의 얼굴입니다. 어머니들의 위대한 아픔을 보는 자들이 이 땅위에서 최고의 삶을 누리게 되지 않을까요? 그래서 주님은 요한에게 말씀하신 것이 아닐까요?

“보라. 네 어머니라.”

말씀을 거둡니다. 어머니의 아픔을 통해 최고의 시인이 된 류시화 시인이 있습니다. 그의 ‘어머니’라는 시의 일부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시가 될 첫 음절, 첫 단어를
당신에게서 배웠다

…중략…

내 시는 아직도
어린 시절 집 뒤에 일군 당신의 텃밭에서 온다
때로 우수에 잠겨 당신이 바라보던 무꽃에서 오고
비만 오면 쓰러져 운다면서
당신이 일으켜 세우던 해바라기에서 오고
내가 집을 떠날 때
당신의 눈이 던지던 슬픔의 그물에서 온다
당신은 날개를 준 것만이 아니라
채색된 날개를 주었다
더 아름답게 날 수 있도록

…하략…

어머니의 아픔을 보아 온 류시화 시인은 어느새 새가 되어 날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두 가지 아픔은 아픔 그 자체로 그치지 않습니다. 어머니의 아픔을 기억하는 자들을 날게 합니다. 이 세상에서 꿋꿋이 승리하게 합니다.

어머니의 자녀된 교우 여러분, 모두 승리하십시오.
십자가 옆에 서 계신 마리아가 바로 우리 어머니이십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보라 네 어머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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