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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강의 하나님이…

날짜 : 2013.04.28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평강의 하나님이…
성경본문 : 빌립보서 4:8-9

http://kcbostonmedia.cponsolny.com/Sermon_video_master/Sermon_20130428.wmv


요즘도 너무나 잘 사용되고 있는 항생제 페니실린을 발명하게 된 이야기가 있습니다. 페니실린을 발명한 알렉산더 플레밍의 연구실은 매우 열악하고 협소했습니다. 창문의 유리창은 깨져서 바람과 먼지가 들어왔습니다. 그는 이 연구실에서 곰팡이에 대한 연구에 몰두했습니다. 어느 날 그는 깨진 창문을 통해 날아온 곰팡이 포자(spore)를 현미경으로 관찰한 후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 곰팡이에 페니실린의 원료가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그 곰팡이균을 가지고 페니실린을 만들었습니다.

몇 년 후 한 친구가 플레밍의 연구실을 방문하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이렇게 형편없는 연구실에서 페니실린을 만들다니…. 만약 자네에게 좋은 환경이 주어졌다면 더 엄청난 발견들을 했을 텐데….”
그러자 플레밍은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이 열악한 연구실이 페니실린을 발견하게 해주었다네. 창문 틈으로 날아온 먼지가 바로 페니실린의 재료가 되었다네. 중요한 것은 환경이 아니라 강인한 의지라네.”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요즘 많은 분들이 환경 탓을 합니다. 아니면 운이 안 따른다고 합니다. 과연 우리 인생이 환경과 운에 좌우할까요? 플레밍도 자신의 강인함이 페니실린을 발명하게 했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강인함이 역사의 큰 자취를 남기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강인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사도바울처럼 강인한 사람도 인류 역사상 찾아보기 드물다고 생각합니다. 사도바울은 툭하면 감옥에 들어가곤 하였습니다. 도리어 감옥 안에서 세계역사에 길이 남을 편지를 기록하곤 하였습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이 어떻게 강인한 사람이 되었는지 그의 편지를 통해 살펴볼까요?

먼저 강인한 의지의 사람이었던 사도바울의 권면에 귀를 기울여 보고자 합니다.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강인한 의지의 사람이었던 사도바울의 권면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이것들을 생각하라.”

참되고 경건하며 옳고 정결하고 사랑 받을만하고 칭찬 받을 만한 것들을 늘 생각하는 자들이 바로 강인한 사람들이 되어 간다는 뜻일 줄 압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역사를 바꾸는 사람들이 되지 않을까요?

얼마 전 오사마 빈 라딘을 사살한 Navy Seal을 아실 줄 압니다. Navy SEAL출신의 군인이 다음과 같이 NAVY SEAL에 대한 글을 써서 Wall Street Journal에 기고하였습니다.

“훈령의 가장 큰 고비는 지옥주간(Hell Week)이다. 끊임없는 테스트와 훈련으로 군인들은 이 일 주일간 두 시간 내지 다섯 시간 밖에 자지 못한다.
그러면 누가 이 훈련을 통과할까? 아니 끝까지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은 누굴까? 첫 번째로 역도를 많이 들어서 팔뚝이 두꺼운 사람들이다. 두 번째로는 몸에 문신을 하고 자기는 강인한 자라고 내 보이는 사람들이다. 세 번째로는 늘 응원을 받으면서 운동을 했던 운동선수들이다. 한 마디로 이들은 남들에게 보이기를 좋아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다 실패를 한다.
반면 누가 이 지옥 훈련을 통과하나? 처음에 뛰다가 넘어지고 턱걸이도 제대로 못하는 약해 보이는 사람들이다. 마르고 키도 작아 이를 덜덜 떨면서 늘 바다만 바라보던 사람들이 해낸다.”

곧 Navy Seal도 바로 체격이나 어떤 환경이 아니라 강인한 의지의 사람들이 될 수 있다고 그는 글을 쓰고 있습니다. 마지막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지옥훈련을 통과한 사람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어떠한 고통 가운데서도 자기의 일이 큰 어려움에 봉착했을지라도 이들은 자기들의 고통에서 벗어 나와 이런 질문들을 한다. 나는 어떻게 내 전우를 도울 수 있을까? 그들은 육체적 힘 보다 더 큰 힘을 소유하고 있다. 그들의 마음은 커서 이웃을 생각한다. 더 큰 목적을 바라본다.”

사도바울의 말씀이 정말 진리인 것을 Navy Seal들이 증명하고 있다고 봅니다. 사도바울은 지금 빌립보 교인들에게 이 세상의 역사를 뒤바꿀 강인한 의지의 사람이 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멀리 있지 않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날 필요도 없습니다. 많은 학식이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육체적으로 최상급이 되지 않아도 됩니다. 나이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생각을 바꾸면 됩니다. 좋은 생각으로 우리들의 삶을 채우면 됩니다. 언젠가 역사를 뒤바꾸고 있을 것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저희 교회가 60주년이 됨과 아울러 저도 얼마 전 60세를 맞이했습니다. 많은 분들로부터 축하를 받았습니다. 제가 필라델피아에서 전도사로 섬기고 있던 교회 담임 목사님도 60세가 되셨는데 생일을 지키지 않으셨습니다. 왜 안 지키냐고 여쭈었더니, 이제는 60이 환갑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말씀을 들은 지 20년이 넘었습니다.

저도 생일을 안 치루면 환갑이 안 될 줄 알고 애써 피하려고 했지만 실패한 것 같습니다. 1, 2부 예배 후에 여러분의 사랑을 듬뿍 받았습니다. 제가 받은 카드를 저의 서재 책장에 세워 놓았습니다. 공교롭게도 두 분의 카드가 같은 카드였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 내용이 저의 뇌리에 아주 강하게 들어 왔습니다.
“You are Sixty.”
그 한 마디 말에 많은 메시지가 담겨져 있음을 느끼곤 합니다. 아니 그 날 저의 심리상태에 따라서 여러모로 다르게 들려옴을 느껴 보았습니다.

어떤 때는 “너는 아직 60밖에 안 됐어, 좋지.”로 들려옵니다. 어떤 때는 “너는 벌써 60이 됐어, 어떡하니”로 들려옵니다. 어쩌면 저에게 이 두 생각이 들게 하시려고 두 분에게서 같은 카드를 받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면서 종종 자동차의 odometer가 생각납니다. Odometer에 마일리지가 계속 쌓이지 않습니까? 일본차들은 10만 단위까지 있지만 미국 차들은 대개 만 단위까지 있지 않습니까? 저도 미국 와서 중고차를 몇 대 타 봐서 자주 odometer가 만 단위를 넘어서 10만 단위로 넘어가곤 했습니다.

99,999마일이었다가 1마일이 더 해지면 어떻게 됩니까? 대부분의 미국 차들은 순식간에 0이 됩니다. 새 차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아무도 속지는 않죠. 한 번은 10만이 넘은 차를 garage에 맡겼었습니다. 찾을 때 거기 마일리지를 mechanic이 적어 놓았습니다. 몇 백마일밖에 odometer에 기록이 안 되었는데 그 mechanic은 당연히 10만이 넘은 차로 적어 놓더라고요.

하여튼 “You are Sixty”라는 카드를 보면서 드는 생각은 10만 마일이 넘어서 다시 0마일로부터 시작하고 있는 차와 같은 생각이 들곤 합니다.
“너도 벌써 60이 됐어”라는 느낌이 드는 날은 마치 10만 마일이 넘은 것이 들킨 기분입니다. 반면 “너는 아직 60밖에 안 됐어”라는 느낌이 드는 날은 믿거나 말거나 새 차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런데 “너도 벌써 60이 됐어” 라는 생각과 “너는 아직 60밖에 안 됐어”라는 생각은 비슷한 생각 같지만 저의 삶에는 큰 차이를 가져다줍니다. 이 작은 생각의 차이가 언젠가 하나님 앞에 서 있을 때는 너무도 다른 삶의 결과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하면서 삽니다.

사실 사도바울이 빌립보서를 쓸 때 나이가 약 60세가 되었을 때입니다. 적게 보면 58세 많게 보면 60세 입니다. 나이 60에 감옥에 갇혀 있는 사도바울입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기력이 쇠해서 편지도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이 편지를 쓸 수 있었다는 것은 그처럼 강인한 의지의 사람이었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얼마나 의지의 사람이었음이 오늘 본문은 아니지만 빌립보서 3: 12-14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사도바울은 마치 새 차인 양 앞으로 열심히 달릴 생각에 꿈이 부풀어 있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강인한 의지의 사나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감옥 안에서도 강인한 의지를 가지고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절망하기 쉬운 감옥 안에서 사도바울은 참되며 경건하며 옳으며 정결하며 사랑 받을 만하며 칭잔 받을 만한 것들을 생각하면서 지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의 모습입니다. 사실 사도바울도 인간인지라 때로는 낙망했을 것입니다. 지칠 때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럴 때마다 이길 수 있는 비결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좋은 생각을 찾아내곤 하였습니다. 그의 머리에 좋은 생각으로 가득 메우곤 했습니다. 이 좋은 생각들이 그로 하여금 강인한 자가 되게 하였습니다. 강인한 자가 되었기에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모습에 너무나도 만족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모습을 소개한 다음에 곧이어 말씀하십니다. 9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사도바울은 처한 환경이 어떻던 좋은 생각과 함께 강인한 사람이 되어 갔으며 늘 평강의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체험한 것입니다. 그는 인류 역사에 독보적인 자취를 남기는 자가 되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아름다운 생각의 사람들이 바로 강인한 사람들이요 진정한 청년들입니다. 이들의 생각은 한 토리도 역사에 그냥 지나치지 않습니다. 반듯이 자취를 남기고야 맙니다.

그러니 우리는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들의 생각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들의 생각은 놀라운 결정체가 되어서 우리들의 미래의 골목 골목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미래의 우리들의 삶의 골목 골목에서 하나님의 평강이라는 풍선을 손에 들고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제가 한 두 번 소개해 드렸던 군사정권시대에 정치범으로 수감되어 20년 감옥 생활을 하신 신영복 교수님이 계십니다. 매일 하루 휴지조각을 두 장 공급받았다고 합니다. 두 휴지조각에 그는 편지를 쓰곤 했습니다. 곧 두 휴지 조각에 좋은 생각을 늘 기록하였던 것입니다.

그 편지들이 책자로 발간되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남게 되었습니다. 주로 아버님과 어머니에게 제일 많이 썼습니다. 가끔 동생에게 편지를 썼는데, 한 번은 ‘아름다운 여자’라는 제목으로 편지를 썼습니다. 편지를 쓸 때 신 교수님은 나이가 35살이 되었을 때였습니다. 동생에게 아름다운 여자를 만나 결혼하라는 의미로 쓴 것 같습니다.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옵니다.

美=羊+大

“‘미’(美)자는 ‘양’(羊) ‘대’(大)의 만남으로서 양이 크다는 뜻이다. 우리 선조들은 큼직한 양을 보고 느낀 감정을 그렇게 나타낸 것이다. 양이 커서 생활의 풍족해질 때의 그 푼푼한 마음이 곧 미였고 아름다움이었다.”

신 교수님의 해석에 의하면 아름다울 ‘미’는 생활 속에 가득 넘치는 풍족한 마음으로 표현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한편 이것은 한자 ‘美’의 풀이이고, 한글 ‘아름다움’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아름답다’는 ‘알만 하다’의 뜻이다.”

아름다움을 알기 위해서 높은 지식과 고매한 인격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알만하고 느낄만한 것이 바로 아름다운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아주 깊은 통찰력이 있는 해석입니다. 이를 감옥에서 휴지에 적어서 동생에게 보냈습니다. 이 아름다운 편지가 이제는 책이 되어서 자취가 남게 된 것입니다.

이 글을 읽고 저도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생활 속에 있는 흔한 것들, 모두가 알만한 것들이 바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곧 우리들의 삶에 주변에는 아름다운 것들로 꽉 차있습니다. 우리가 좋은 것을 찾고자 하면 언제나 아름다운 것들은 숨어 있다가 나타납니다. 신 교수님은 20년간의 감옥 생활에서 매일 아름다운 것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에 좋은 생각으로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 교수님의 책을 보면 기독교인의 흔적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아름다운 삶을 살았습니다. 분명 아름다운 글을 쓰신 분입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차이를 찾아내는 데는 별로 어렵지 않았습니다. 한자 풀이로 찾아 볼 수 있었습니다. 신 교수님이 말씀하신대로 ‘美’는 ‘羊’과 ‘大’가 합한 것입니다. 신 교수님은 ‘큰 양’으로부터 받는 혜택이 아름다움이라고 해석하십니다. 저도 거기까지 동의합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羊’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크심을 보는 것이 바로 아름다움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도바울은 바로 예수님의 크심을 통해 아름다움의 절정을 체험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잡힌바 된 바로 그 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고 표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기독교인들이 아닌 분들도 아름다움을 느낍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위대하심을 알지 못하기에 그들의 아름다움은 한계가 있습니다. 총체적 아름다움을 보지 못합니다. 기독교인들은 예수님 안에서 세상의 온갖 아름다움을 누리는 분들입니다. 온갖 아름다움이 주님에게서 나오고 주님을 위해 있고 주님을 향하여 존재함을 아는 분들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에게는 아름다움이란 명사가 아닙니다. 동사입니다. 계속 아름다워지는 것이 진정한 아름다움입니다. 계속 주님의 아름다움이 더욱 크게 우리를 주관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기에 기독교인들이야말로 강인한 삶을 살게 됩니다. 커지는 주님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혀 있으니 말입니다. 이들이 곧 평강의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이처럼 놀라운 평강의 하나님을 만나시기 원하십니까? 주님 안에서 사도바울의 권면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말씀을 거둡니다. T.D. Jakes 목사님이 재미있는 표현을 하였습니다. 자신은 메뚜기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런데 이 메뚜기가 성령의 바람을 타면 독수리보다 더 높이 더 빠르게 날아간다고 합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들의 좋은 생각도 메뚜기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아무리 좋은 생각을 많이 해도 놀라운 일이 생기지 않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보잘 것 없는 메뚜기 같은 생각이 성령의 바람을 타면 놀랍게 변신합니다. 놀라운 자취를 남기게 됩니다.

우리들의 생각을 소중히 여기십시다. 주님 안에서 온갖 아름다운 것을 생각하십시다. 성령의 바람에 우리들의 생각을 맡기십시다. 그리스도의 위대한 나라에 작은 재료가 되어갈 것입니다. 평강의 하나님은 우리들의 아름다운 생각을 찾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생각이 있는 곳에 평강의 하나님은 성령의 바람이 되셔서 찾아오십니다. 우리들의 생각으로 그리스도의 위대함을 드높이는 놀라운 작품을 만드십니다.

사도바울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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