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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우시는 하나님

날짜 : 2013.04.21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채우시는 하나님
성경본문 : 빌립보서 4:10-20

http://kcbostonmedia.cponsolny.com/Sermon_video_master/Sermon_20130421.wmv

1978년도에 새로운 교황이 탄생되었습니다. John Paul I세 교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교황은 가장 짧게 교황 직에 봉직하셨습니다. 33일 만에 소천 하셨습니다. 33일간 곧 약 한 달 만에 하나님 품에 안기게 된 것입니다.

교황의 서거 후 어느 성당의 신부님이 주일학교 어린이들에게 미사 시간에 John Paul I세 교황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교황은 잔잔한 미소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 말해 주었습니다. 그 후 성경공부 시간에 교황에 대해서 글을 쓰게 하였습니다. 다니엘이라는 아이가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1세는 대단히 훌륭한 분이셨다. 그분은 우리 교회에 웃음을 처음으로 수입하신 분이셨다.”

이 어린이에게는 성당은 언제나 심각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곤 했는데 드디어 웃음꽃이 피게 하신 첫 교황의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33일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이처럼 큰 영향을 교회에 줄 수 있는 시간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 글은 많은 도전을 우리에게 줍니다. 나는 과연 우리가 사는 이 땅에 어떤 자취를 남기고 있는가 새롭게 생각하게 합니다.

사실 지난주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할수록 마음이 아파 옵니다. 특히 19살 26살의 청년들이 남긴 자취를 생각하면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정말 우리 모두 좋은 자취를 남겨야 하지 않을까요?

Craig Groeschel이라는 목사님이 그의 책 ‘Altar Ego’(‘자기’라는 제단)에서 자신의 옛 모습은 ‘구두쇠’이였다고 고백합니다. 얼마나 구두쇠였냐 하면, 자동차 개스비를 안 쓰려고 언제나 친구들 차만 타고 다니려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친구들의 생일은 잊어버리려고 애를 썼다고 합니다. 이러한 모습을 너무도 잘 알았는지 친구들은 소문을 내기를 Craig는 여자 친구를 사귀어도 Valentine’s Day 직전까지만 사귄다는 소문이 날 정도였다고 합니다. 본인도 고백하기를 아마 두세 번을 그렇게 했을 거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베푸는 사람’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의 주위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을 남기시고 계십니까? 웃음을 남기는 사람, 구두쇠, 베푸는 사람…?

물론 웃음과 함께 베푸는 사람이 되시길 원하실 줄 압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본문을 상고하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1절 말씀입니다.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빌립보서는 감옥에서 쓴 편지입니다. 배경을 간단히 소개해 드리면 바울이 지금 로마에 갇혀 있습니다. 갇힌 가운데 빌립보 교인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사실 빌립보 교회는 사도바울이 세운 교회였습니다. 사도바울이 세운 빌립보 교회이니 교인들은 늘 바울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에 에바브로디도를 통해서 바울에게 생필품들을 보내었습니다. 이 귀한 사랑의 선물을 받고 기뻐하면서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이것이 빌립보서입니다. 사도바울은 편지를 마감하면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신은 지금 크게 기뻐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빌립보 교인들은 이 편지를 읽으면서 좀 놀랬을 것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감옥 안에서 괴로워하고 있는 바울의 모습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크게 기뻐하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빌립보 교우들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자기들이 보낸 선물들이 많아 받자인데…, 이 작은 선물을 가지고 크게 기뻐하는 바울의 모습을 너무 놀라워했을 것입니다. 교인들은 의아한 가운데 편지를 계속 읽어 내려갑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수 있느니라.”

아니나 다를까 사도바울은 별로 자기들의 선물에 큰 감동을 받지 않은 느낌을 줍니다. 어떻게 보면 선물을 보낸 사람들의 기분을 확 상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없어도 자신은 잘 산다고 말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배불러도 좋고 배고파도 좋다고 고백합니다. 빌립보 교우들은 ‘그러면 그렇지’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자기들 선물 몇 봉지에 좋았다 싫었다 할 사람이 아닌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반은 실망한 마음으로 계속 편지를 읽어 내려갑니다. 14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예하였으니 잘하였도다.”

빌립보 교인들이 정신이 번쩍 뜨입니다. 사도바울은 진짜 기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가 분명해졌습니다. 자기들의 작은 선물이 바로 그의 괴로움에 함께 참여한 것으로 사도바울은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크게 기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그들의 선물을 통해서 자기는 홀로가 아닌 것을 느낀 것입니다. 빌립보 교인들과 하나가 된 것을 느낀 것입니다.

지난주 보스턴 마라톤에 상상하기 어려운 사건이 터졌습니다. 아무런 방어도 할 수 없는 사람들 사이에 폭탄을 설치하고 폭발시키는 생각하기도 어려운 사건이 생겼습니다.

그 후 저는 전국에 퍼져 있는 많은 저희 교단 목사님들로부터 전화 내지 이메일을 받았습니다. 저와 저희 교회는 직접 피해는 받지 않았어도 저의 마음속에는 깊은 감격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아, 서로 바쁘게 지내며 남의 일 인 것처럼 살고 있지만 우리는 하나이구나.’ 느끼게 되었습니다. 직접 피해를 받지 않은 제가 이런 느낌을 받았는데 직접 간접으로 피해를 본 분들은 이런 작은 관심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겠나 생각해 보았습니다.

TV 뉴스를 통해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Victoria라는 여인이 파편을 맞고 쓰러져 있는데 옆에 Tyler라는 사람이 서 있었습니다. 전혀 알지도 못하는 두 사람이지만, Tyler는 Victoria의 눈에서 공포를 보았다고 합니다. Tyler는 쓰러진 여인에게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여인은 “Victoria”라고 대답합니다. Tyler는 자기의 이름을 알려주고는 “You’re gonna be OK”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Victoria가 병원에서 기력을 회복하면서 Tyler를 찾았습니다. 자신의 은인이라고 말하면서…. Tyler는 별로 한 것은 없습니다. 이름을 묻고는 “You‘re gonna be OK”한 것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큰 힘이 되었다고 합니다. 심한 고통 가운데서 하나가 되는 축복을 누린 것입니다. 고통은 이처럼 인간들을 하나로 묶는 놀라운 마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계속해서 사도바울은 자신의 기쁨의 이유를 표현합니다. 15, 16절 말씀입니다.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번뿐 아니라 두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사도바울은 궁핍에도 능히 자족하는 법을 배웠다고는 하지만 한편 선물을 받은 것은 그의 뼈속 깊이 스며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깊은 감사와 감격의 근원이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그의 뼛속의 세포는 바뀔지라도 이 사실은 변하지 않고 영원한 세포가 되서 남아 있던 것 같습니다. 이번에 또 선물을 받으니 그 기억이 다시 되살아났습니다.

올해 저희 교회가 60주년을 지내고 있습니다만 정확히 10년 전입니다. 50주년을 저희 교회가 첫 희년으로 지켰습니다. 첫 희년 행사를 아주 훌륭하게 마쳤습니다. 마지막 행사가 있었습니다.
첫 희년 행사에 참석해 주신 이 지역 목회자들에게 보스턴 다운타운에서 하는 뮤지컬에 초대를 했습니다. 저희 교회가 자주 어머니 교회라고 표현을 하는데 어머니 교회답게 이곳에서 수고하시는 목사님들 특히 행사에 참석하신 분들을 초대한 것입니다.

10년이 지났는데도 그 때 이야기를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너무 감사했다고…. 많은 목사님들이 보스턴에 와서 처음 그런 문화생활을 했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들이 그 뮤지컬 때문에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들의 삶의 아픔에 함께 동참해 주었다는 것이 더 큰 감사의 제목으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보이는 사도바울의 모습을 한번 정리해 볼까요? 사도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런데 크게 기뻐하고 있습니다. 기뻐하는 이유는 선물 그 자체가 아니라 선물로 인해서 빌립보 교우들과 하나가 된 것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요한 바오로1세 교황이 교회에 처음으로 웃음을 수입한 사람이라면 사도바울은 처음으로 감옥에 기쁨을 수입한 사람이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곧 사도바울은 고난 가운데서 이웃과 하나 됨을 통해서 최고의 기쁨을 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많은 분들이 기쁜 삶을 사시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참 기쁨은 주 안에서 이웃과 하나 됨을 통해서 찾아옵니다. 언제 하나가 된다고요? 우리의 고통과 이웃의 선물이 우리를 하나가 되는 기쁨을 선사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고통이 사라질 때 기쁨이 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착각입니다. 진정한 기쁨은 고통 가운데 임합니다. 고통 가운데서만 우리는 이웃과 하나가 될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께서는 사도바울을 감옥에 갇히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분들은 질문하실지 모릅니다.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은 모두 이웃과 하나 되는 기쁨을 누리는가?’

물론 그런 거 같지 않습니다. 고통 중에 더욱 외로운 길을 가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악의 길로 빠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번에 테러를 일으킨 두 청년도 이와 같은 케이스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고통 중에 이웃과 하나가 되고 기쁨의 사람이 되어 갈수 있을까요? 사도바울에게서 그 비결을 찾아 봐야겠습니다. 17, 18절 말씀입니다.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함이라.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바로 풍성, 풍부, 풍족입니다. 사도바울의 특징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감옥 속에서 도리어 풍성 풍부 풍족의 삶을 살았던 것 같습니다. 참 신기하죠? 감옥은 도리어 빈곤과 부족으로 넘치는 곳인데 바울을 풍성 풍부 풍족의 삶을 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그는 그럴수 있었을까요? 감옥에서 정말로 풍족한 삶을 누렸을까요? 19절 말씀입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결국 사도바울이 감옥에서도 풍성한 삶의 자세를 놓치지 않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확신이었습니다. 모든 것에서 풍성하신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모든 것이 부족한 감옥에서도 자족하면서 지낼 수 있었습니다. 아니 도리어 감옥이 주는 고통으로 인해 온 인류와 하나가 되는 놀라운 축복을 누리었던 것입니다. 고통이 사도바울의 삶에는 설 자리가 없었습니다. 고통도 그의 삶을 더 놀라운 풍성함으로 이끌어 갔던 것입니다. 결국 감옥은 기쁨의 장소가 되었고 온 이웃을 위하여 풍성한 주님의 축복을 기원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 각자에게도 감옥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감옥이 우리를 좌절시키려고 하지 않습니까?

월남 이상재 선생이 감옥에서 나오는 제자들이 와서 물었습니다. “감옥에서 고생하셨습니다.” 대답하시길, “저희가 사는 세상도 다 감옥이네.”

교우 여러분, 하나님은 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풍성케 하십니다. 어떤 상황에 있던 우리에게는 참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필요합니다. 이 확신이 있을 때 우리는 온 인류와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특히 고난 가운데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왜 시기하고 다투고 심지어 싸웁니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풍성함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풍성함을 믿는다면 이웃이 밭을 사도 배가 아프지 않습니다. 이웃 자녀가 잘 되도 시기가 생기지 않습니다. 풍성한 축복의 하나님께서 나에게도 더 큰 밭을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많은 죄의 근원은 하나님의 풍성함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테러의 시작도 하나님의 풍성함을 믿지 않는데서 비롯됩니다.

반면 채우시는 하나님을 믿을 때 고난도 축복이 됩니다. 더 이상 구두쇠의 삶을 살지 않게 됩니다. 도리어 ‘베푸는 사람’이 되어 갑니다. 기쁨의 사람이 되어 갑니다. 웃음의 사람이 되어 갑니다.

이 세상을 축복으로 채우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당신의 모든 것을 주신 것입니다. 곧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채우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은 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확신을 꼭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당대에 안 채워지면 후대에 이르러서 꼭 채워주십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수도사 안토니 드멜로가 지은 이야기입니다.

제자: 깨달음이란 무엇입니까?
스승: 보는 것이네.
제자: 무엇을요?
스승: 성공의 공허함을, 명예의 허망함을, 인간 노력의 허무함을.
제자: 그것은 깨달음이 아니라 비관이고 절망이네요.
스승: 아니지. 그것은 푸르른 창공으로 비상하는 독수리의 자유스러움이고 신명남이지.

제가 조금 각색해 보았습니다.

제자: 그것은 깨달음이 아니라 비관이고 절망이네요.
스승: 이 세 가지만 보면 절망이지 한 가지를 더 보아야 하지. 하나님은 채우시는 하나님이심을…. 그 때 우리는 푸르른 창공으로 비상하는 독수리가 되는 거야.

드멜로의 지혜가 깊게 담긴 이야기입니다. 결국 성공의 공허함, 명예의 허망함, 인간 노력의 허무함을 본 사람들이 마지막에 보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풍성함을 보게 되지 않을까요? 채우시는 하나님을 보게 되지 않을까요? 그 때 푸르른 창공으로 비상하는 독수리의 자유스러움을 만끽하게 되지 않을까요?

채우시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독수리의 자유로움을 만끽하면 살게 되어 있습니다. 진정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들이 됩니다.

교우 여러분, 채우시는 하나님에 대한 놀라운 확신을 안고 독수리처럼 비상하는 삶을 사십시다. 사도바울은 선포합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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