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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의 제단

날짜 : 2013.01.20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증거의 제단
성경본문 : 여호수아 22:10-12, 21-29, 34

http://kcbostonmedia.cponsolny.com/Sermon_video_master/Sermon_20130120.wmv

하나님이 어느 현자에게 천사를 보내어 메시지를 전해 주었습니다.
“넌 바르게 살아왔다. 기특해서 너의 소원을 들어주려고 한다. 백만 년을 살고 싶다면 그렇게 해 주마. 아니 수백만 년이라도 좋다. 너는 얼마나 오래 살고 싶으냐?”
“80 년입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현자가 대답하였습니다. 옆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제자들이 의아해 하며 현자에게 말했습니다.
“스승님, 만일 스승님께서 백만 년을 사신다면 많은 사람들이 수세기에 걸쳐 선생님의 지혜로 도움을 받게 됩니다. 그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자 스승이 말합니다.
“내가 백만 년을 산다면, 사람들은 지혜를 기르는 일보다 생명을 연장하는 일에 더 관심을 가질 것이다.”

짧은 이야기이지만 생각하여야 할 많은 내용이 담겨 있는 이야기입니다. 특히 새해의 흥분이 아직 가라앉지 않은 우리들에게 많은 도전을 주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새해 세 번째 주일 예배로 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는 인사를 나누면서 3주를 지내왔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무조건 복을 뿌리면서 그리고 복을 무조건 받으면서 3주를 지내지 않았나 생각하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구하는 복이 어떤 복이어야 할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합니다.
장수와 재물의 복도 소중합니다. 그러나 그것 보다 더 가치가 있는 복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상고하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은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을 점령한 후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잘 이해하시려면 이스라엘의 12지파에 대해서 아셔야 합니다. 야곱의 아들이 12명이었는데 야곱의 아들로 인해서 이스라엘에는 12지파가 생깁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 땅을 12지파가 분배해서 차지합니다. 그러면 잠깐 지도를 볼까요?

(스크린1 & 2)

두 번째 지도를 보면서 잠시 이스라엘 역사를 살펴보겠습니다. 지금 지도를 보면 요단강 동쪽에 위에서부터 므낫세, 갓, 르우벤으로 분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곧 두 지파 반은 요단강 서쪽 가나안 땅에 정착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선택이었고 모세가 허락해 준 것입니다.

왜 두 지파 반은 요단강 동편에 살게 되었는지 살펴보면…, 이는 민수기에 잘 나타나 있는데, 모세의 영도로 이제 가나안 땅 앞에 왔을 때 두 지파가 모세에게 나아옵니다. 자기네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살지 않고 요단강 동쪽에서 살겠다고 합니다. 두 지파의 이름이 갓과 르우벤입니다. 그 이유는 자기네 지파는 육축이 많은데 요단강 동쪽이 육축을 기르기에 좋은 땅이라는 것입니다. 나중에 므낫세 지파가 여기에 동참합니다. 므낫세의 절반은 요단강 동쪽에 절반은 요단강 서쪽에 땅을 차지합니다. 나머지 9지파는 요단강 서쪽의 땅을 분배 받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가나안 땅을 점령하였습니다. 물론 가나안 점령은 여호수아의 지도하에 이루어졌습니다. 승리를 한 후 두 지파 반은 요단강 동쪽으로 건너오게 되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새로운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새 해를 시작하게 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모두 희망과 기대에 가득 넘치고 있을 때입니다. 이것이 본문 말씀의 배경입니다. 10절 말씀입니다.
“르우벤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가 가나안 땅 요단 언덕 가에 이르자 거기서 요단 가에 제단을 쌓았는데 보기에 큰 제단이었더라.”

10절에는 갓 자손은 언급이 안 되었지만 실상 갓 자손도 함께 제단을 쌓았습니다. 두 지파 반이 가나안 땅을 점령하고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큰 제단을 쌓았습니다.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전에 세 지파(앞으로는 세 지파라고 하겠습니다)가 모여 단을 쌓은 것입니다. 그 후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12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이를 듣자 곧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서 그들과 싸우러 가려 하니라.”

갑자기 내전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제단을 쌓았는데 내전을 불러일으키다니 이게 웬일입니까? 함께 가나안 땅을 점령하였는데 이제는 3지파와 9지파가 싸우게 생겼습니다. 그 이유는 세 지파가 제단을 쌓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나머지 9지파는 세 지파가 단을 쌓는다고 하니 세 지파가 다른 신을 섬기기로 작정하였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에 세 지파가 변호합니다. 24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목적이 있어서 주의하고 이같이 하였노라 곧 생각하기를 후일에 너희의 자손이 우리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희 르우벤 자손 갓 자손아 여호와께서 우리와 너희 사이에 요단으로 경계를 삼으셨나니 너희는 여호와께 받은 분깃이 없느니라 하여 너희의 자손이 우리 자손에게 여호와 경외하기를 그치게 할까 하여 우리가 말하기를 우리가 이제 한 제단 쌓기를 준비하자 하였노니 이는 번제를 위함도 아니요 다른 제사를 위함도 아니라.”

세 지파는 자기들의 후손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언젠가 오랜 후에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9지파가 자기들의 자손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고 여기게 될 것을 대비해서 단을 쌓았다는 것입니다. 34절 말씀을 보면 이 제단의 이름을 ‘엣’이라고 합니다. ‘엣’의 뜻은 ‘증거’입니다. 곧 증거의 제단을 세운 것입니다.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이 그 제단을 엣이라 불렀으니 우리 사이에 이 제단은 여호와께서 하나님이 되시는 증거라 함이었더라.”

곧 가나안 땅에는 두 가지 제단이 생깁니다. 새 삶을 시작하는 이들에게는 두 제단이 생긴 것입니다. 하나는 여호와의 법궤가 있는 제단입니다. 처음에는 실로에 생기지만 후에 예루살렘으로 옮겨집니다. 또 하나의 제단이 있습니다. ‘엣’ 제단, 증거의 제단이 생깁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두 제단의 축복을 받으면서 새로운 삶의 장을 열게 된 것입니다. 법궤가 있는 제단을 통해서 하나님의 무한한 축복을 받습니다. 아울러 ‘엣’의 제단을 통해서 그들은 늘 한 피 한 민족임을 결단하는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교우여러분, 계사년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두 가지 축복의 제단이 있습니다. 하나는 예루살렘의 제단입니다. 이 제단은 예수님의 보혈로 완성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보혈을 통하여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무궁무진한 축복, 영원한 생명의 축복을 끝없이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축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한 가지 축복의 제단이 또 있습니다. ‘증거의 제단’입니다. 이 제단은 온 인류가 하나 됨을 증언하는 제단입니다. 아니 하나 됨을 지키겠다는 결단의 제단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우리에게는 두 제단이 있습니다. 변하지 않는 제단, 변하는 제단. 변하지 않는 제단은 주님의 보혈로 이루어진 제단입니다. 변하는 제단은 우리가 세워가는 증거의 제단입니다. 온 인류가 하나 됨을 증거하는 엣의 제단입니다. 엣의 제단에는 우리들의 결단이 서려져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그동안 늘 예루살렘 제단만 소중히 여기는 우리가 아니었던가요? 올해는 소홀히 했던 ‘엣’ 제단을 견고히 쌓아 올리십시다. 그 때 온전한 축복을 누립니다. 엣 제단을 세우는 것이 우리가 살아야 하는 지혜로운 삶일 줄 압니다. 장수의 축복보다도 더 소중한 축복이 아닐까요?

사실 요즘은 그 어느 때 보다 ‘엣’제단이 소중해 짐을 느끼게 됩니다. 점점 하나가 되기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도 있겠지만 이를 부채질하는 많은 요소가 있습니다. 사회적 경제적 여건들이 많이 엉켜 있습니다. 인터넷으로 예배를 보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 같은데 대표적인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일줄 압니다.

이 현상이 악화되다 못해 이제는 가장 중요한 가정에 까지 이런 현상이 일고 있습니다. 이를 알리는 한 가지 통계자료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요즘 통계를 보면 혼자 사는 사람들의 숫자가 계속 많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1인 가구의 폭발적 증가는 엄연한 현실이자 확정된 미래라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미국의 1인 가구는 이미 전체 가구의 28%를 넘어섰고 일본은 31%, 스웨덴은 47%에 달한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도 25%를 돌파했으며(2010년 통계청) 2035년이면 34%에 이를 전망이라고 합니다.
1인 가구가 잘 못된 것은 아닙니다. 어쩔 수 없는 사회현상입니다. 1인 가구가 점점 많아지면서 생기는 어쩔 수 없는 현상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조선일보에서는 최근에 ‘독거노인’에 대해서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독거노인.’ 옛날에는 없었던 단어인 것 같습니다. 그러면 스크린으로 한글과 한자로 살펴볼까요?

(스크린3: 독거노인 獨居老人)

그런데 조선일보에서 독거노인에 대해 관심을 갖기 오래 전에 일본 NHK 방송에서는 독거노인들에 대해서 취재를 하였고 방송뿐 아니라 책까지 펴냈습니다. 책 제목은 ‘무연사회(無緣社會).’ 스크린으로 한번 볼까요?

(스크린4)

인연 ‘연’자 입니다. 곧 인연이 없는 사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NHK에서 조사한 결과 일본에 독거노인으로 살다가 혼자 죽는(이것을 ‘무연사’라고 표현합니다) 무연사가 3만2천명이라고 합니다. 혼자서 죽은 후 후에 발견이 되는 경우입니다. 이것을 방영한 후에 30, 40대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보내왔다고 합니다.

‘미래의 내 모습이네.’
‘무연사 예비군이네.’
‘무연사. 20년 후의 자신.’

왜 이런 고백들을 할 수밖에 없을까요? 물론 사회학적으로 말하면 가장 큰 이유는 핵가족이겠죠. 그 다음 이유는 가정에 속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현상 때문이고요. 신년예배시 말씀드린 대로 미혼모의 자녀들이 많아지는 것도 큰 이유일줄 압니다. 이런 현상은 미국이나 일본이나 한국이나 다 같이 일어나고 있는 줄 압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제라도 자녀들을 많이 낳는 운동을 벌여야 하나요? 물론 가능하신 분들은 그렇게라도 하셔야죠. 아니면 포스트모더니즘의 문제점을 잘 파악해서 이에 대비해야겠죠. 그러나 이보다 제일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함께 엣 제단을 세우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아주 빠르게 무연사회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가까이 오는 무연사회를 생각하면서 두 가지로 반응할 수가 있습니다.

“미래의 내 모습이네.’

이러한 생각과 함께 더욱 절망적이 되어 갈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혜로운 생각이 아닙니다. 지혜로운 자들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NHK기자가 어느 독거노인이 자주 가는 공원에 추운 밤에 찾아 갔습니다. 그 남성은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습니다.
“누군가의 목소리가요, 듣고 싶어집니다.”
그러면서 라디오를 꺼내고 있었습니다.
“라디오만이 제 친구입니다.”

지혜로운 자들은 바로 지금을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기회로 삼는 것입니다. 가족을 넘어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많은 사람과 기가 막힌 만남을 엮어 가는 기회로 삼는 것입니다. 곧 증거의 제단을 쌓는 것입니다.
이 독거노인은 라디오를 친구로 삼고 지내고 있습니다. 이 분이 자기를 찾아오는 사람을 마다할리가 있겠습니까? 자기를 위하여 엣 제단을 쌓는 자를 귀찮아할까요?

그런데 엣 제단의 신비함은 엣 제단을 쌓은 사람들만이 체험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저와 가깝게 지내는 목사님이 계신데 갑자기 테네시를 다녀오셨습니다. 이유인즉 당신이 존경하는 신학교 스승의 장례예배에 참석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저도 미국에서 신학교를 졸업했지만 저는 지금까지 그렇게 가깝게 지내는 교수님이 있지 않습니다.

목사님은 거의 고학하다시피 신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이 스승님이 큰 힘이 되어주신 분이시라고 합니다. Thanksgiving weekend에 모두 기숙사를 나가야 하는데 갈 데가 없는 것을 아시는 교수님은 목사님을 자기 집에서 지내게 하셨습니다.
어느 때인가 한국에 급히 나가야하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비행기 표를 살 형편이 되지 못했습니다. 교수님께서 자기의 mileage로 표를 사 주셨는데, 교수님이 테네시에서 애틀랜타까지는 함께 비행기를 타야지만 마일리지로 표가 나왔습니다. 교수님은 그렇게까지 하시면서 표를 사 주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늘 감사하다고 말하니 그 때마다 교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곤 하셨다 합니다.

“Thank you for coming into my life.”

나의 삶에 들어와 줘서 도리어 고맙다고 말씀하시곤 하셨다고 합니다. 이번에 교수님 장례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비행기 표를 끊으니 그 교수님의 제자분이 당신의 집에서 묵으라고 해서 그 교수님댁에 묵게 되었다고 합니다. 목사님을 위해 마련된 방 침대 옆에 한 카드가 놓여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의 삶에 오셨다가 말없이 사라집니다. 어떤 사람은 좀 오래 머물다가 아름다운 자취를 남긴 후 떠납니다. 이 모든 분들을 통해 저희의 삶은 달라집니다.”

이분의 글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Thank you for coming into my life.”

이것이 바로 엣 제단에 쓰여진 글귀가 아닐까요?

올 해 저희는 창립 60주년을 지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60년 전에는 독거노인이라는 말이 없었습니다. 무연사회라는 말도 없었습니다. 이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엣’의 제단이 소중해진 시대가 되었습니다.
저희 교회에서는 60주년인 만큼 50주년처럼 몇 가지 행사를 할 예정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10년 전보다 더 무연사회가 되었습니다. 행사보다 더 중요한 소명을 주셨습니다. 각자가 소금의 맛을 내야 합니다. 소금으로 무연사회를 유연사회로 바꾸어야 합니다.

교우 여러분, 올 한 해 장수보다 더 지혜로운 삶을 사십시다. 이를 위해 두 가지를 부탁드립니다. 여러분 보시기에 무연사회에 사신다고 생각되는 분들을 위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관계를 갖게 되시기 바랍니다. 그를 위해 엣 제단을 쌓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Thank you for coming into my life.”

저희 교회의 모토 중에 하나가 B40입니다. 부르클라인 주민들을 섬기는 결단이 서려 있는 모토입니다. 브루크라인도 개인주의의 극치를 다투는 곳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곳에 엣 제단을 세우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브루클라인이 유연사회가 되도록 함께 꿈꾸십시다. 서로 몰랐던 주민들이 주안에서 교제하게 되며 서로를 알아가는 그래서 서로를 포옹하는 놀라운 역사를 기대하면서 60주년을 주님께 드리십시다. 올해 저희 교회 한국문화축제의 주제가 ‘포옹’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마더테레사 수녀에게 한 기자가 찾아가 질문을 던졌습니다.
“수녀님은 새벽마다 기도를 올리신다고 들었습니다. 하나님께 무슨 기도를 하십니까?”
그 질문에 수녀는 조용히 머리를 숙이며 대답했습니다.
“저는 듣습니다.”
기자가 의아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수녀님이 들으실 때, 하나님은 무어라고 말씀하십니까?”
“그분도 들으십니다.”

여기서 대화는 멈추었습니다. 저는 이 글을 읽고 혼자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과연 하나님은 무엇을 들으시는가? 금방 떠오른 생각이 있었습니다.
수녀님 안에 남아 있는 가난한 자들의 음성이지 않았을까요? 수녀님이 봉사하고 있는 거리의 버림받은 가난한 사람들의 음성이지 않았을까요? ‘엣’의 제단을 통해 들은 음성이 보혈의 제단을 통하여 새벽마다 하나님께 전달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엣의 제단과 보혈의 제단은 마더 테레사를 통해 이처럼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 것입니다.
이 두 제단의 축복을 올 한 해 마음껏 누리십시다.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이 그 제단을 엣이라 불렀으니 우리 사이에 이 제단은 여호와께서 하나님이 되시는 증거라 함이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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