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안내
주보
주보 모음
설교 영상
설교 원고
찬양
실시간 예배
2015년 이전 설교

대강절의 하모니

날짜 : 2012.12.09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대강절의 하모니
성경본문 : 마태복음 1:1-17

http://kcbostonmedia.cponsolny.com/Sermon_video_master/Sermon_20121209.wmv

셀마라는 부인은 남편을 따라 사막에 주둔한 육군부대에 살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남편은 사막으로 군사훈련을 떠났고 육군기지의 작은 막사에는 셀마 혼자 남게 되었습니다. 섭씨 40도를 육박하는 살인적인 더위는 선인장의 그늘에서조차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주위에는 온통 영어를 못하는 멕시코인과 인디언들뿐이라 말동무도 없었습니다. 셀마는 너무나 괴로워 부모님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집에 가고 싶다는 편지를 썼습니다. 이에 부모님은 두 줄의 답장을 보내왔습니다.

“두 사람이 감옥 창살 너머로 바깥을 바라보았다. 한 사람은 진흙투성이의 땅을 보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밤하늘의 별을 보고 있었다.”

셀마는 이 편지를 몇 번이고 다시 읽어보았고 자기도 모르게 부끄러워졌습니다. 그때부터 셀마는 사막에서 별을 찾기로 결심합니다. 사막은 변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 곳에 사는 인디언들도 변한 것이 없습니다. 다만 조그마한 생각의 차이로 너무나도 열악했던 곳이 셀마의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고 흥미진진한 모험의 장소가 된 것입니다.
셀마는 새로운 세계를 발견한 것에 대해 흥분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셀마는 그것들을 글로 썼고 얼마 뒤 ‘시티 오브 조이’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사는 사막은 ‘슬픔의 도시’에서 ‘기쁨의 도시’가 되었다는 의미인줄 압니다.

오늘 대강절 두 번째 주일 예배로 드립니다. 지난주에는 한 개의 촛불을 켰고 오늘은 두 개의 촛불을 키고 예배를 드립니다. 다음 주에는 세 개 그리고 네 번째 촛불이 켜짐과 아울러 우리는 아기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예배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성탄주일에는 가운데 있는 하얀 촛불을 키고 예배를 드립니다. 하얀 촛불은 바로 아기 예수를 상징합니다.
이 아기 예수의 촛불이 우리들의 마음에 켜질 때 우리는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지 않을까요? 우리가 사는 곳은 ‘시티 오브 조이’가 되지 않을까요? 그러면 아기 예수의 빛을 마음에 소유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아니 어떤 사람들이 아기예수의 빛을 마음에 소유하게 될까요?

오늘 본문 말씀은 너무도 잘 아시는 예수님의 족보입니다. 실상 우리가 잘은 알지만 사실 거의 설교 본문으로는 사용되지 않는 본문입니다. 저도 처음 이 본문으로 설교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제일 많이 나오는 단어는 ‘낳고’입니다. 누가 누구를 낳고 낳고 낳고…. 몇 번 ‘낳고’라는 단어가 나오겠습니까? 직접 세지 않아도 대충 빠르게 알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17절을 보면 됩니다.
곧 세 시기로 나누었는데 각 시기마다 14대로 이어집니다. 그러니 14 X 3하니 42대가 됩니다. 곧 ‘낳고’라는 단어도 42번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낳고’라는 표현을 했지만 좀 더 그 뜻을 풀이하면 ‘낳은 후 늙고 그리고 죽었다’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2절을 그렇게 해서 읽어드릴까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늙은 후 죽었고 이삭은 야곱을 낳은 후 늙고 그리고 죽었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은 후 늙고 그리고 죽었고.”

저의 집에 충주 이씨 가문 족보가 있습니다. 제가 충주 이씨 입니다. 이번에 한번 족보를 펴 보았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족보에는 사망한 날짜는 기록이 되어 있지 않더군요. 단지 태어난 날만 기록이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저희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모두 태어난 날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족보는 태어난 것만 기록됩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태어났다는 것 안에 ‘늙고 죽었다’라는 뜻은 다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족보는 그것을 전제로 해서 기록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42번 ‘낳고’가 연이어 나오지만 사실 42번 ‘낳은 후 늙고 죽었다’ 연이어 기록이 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이렇게 보면 족보는 별로 느낌이 안 좋습니다. ‘낳고 늙고 죽었다’의 메시지를 은연 중 우리에게 주는 것이 바로 족보인 것 같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을 기록한 마태도 이러한 메시지를 주려고 복음서 처음에 이 족보를 기록했을까요?
사실 마태가 이 족보를 마태복음 제일 앞에 넣은 이유는 우리가 잘 압니다. 16절 때문입니다.

“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예수님이 나셨다는 것으로 족보가 끝납니다. 예수님은 태어나시기는 하셨지만 자녀를 낳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족보의 하이라이트는 16절입니다. 첫 번째로는 예수님이 나신 것이 기록되어 있으니 하이라이트가 됩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이 자녀를 낳고 늙고 죽었다는 기록이 안 나와 있습니다.
곧 예수님의 탄생으로 인해서 42대에 걸쳐 이어 오던 ‘낳고 늙고 죽었다’의 슬픔의 행렬이 멈추었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이들의 족보는 뒤바뀌어졌다고 표현하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곧 예수님으로 인해 그들의 족보를 보는 해석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예수님의 조상들은 예수님으로 인해 더 이상 낳고 늙고 죽은 자가 아닙니다. 그들은 산 자가 되었습니다. 곧 ‘산 자’의 족보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전 세계 역사는 산 역사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이 떠오릅니다. 이들 모두 예수님 탄생 전에 산 사람들인데 이들은 이 땅에 실제로 살 때는 ‘산 역사’의 주인공들이 아니었는가? 단지 예수님의 탄생이 이루어진 순간 ‘산 역사’의 주인공들이 되었는가?
물론 그들은 이 땅에서 살 때부터 ‘산 역사’의 주인공이었습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을 기다린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기다린 그들은 특별한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결국 특별한 족보에 속한 자들이 되어 간 것입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면서 산 이들은 바로 늙고 죽는 삶의 바퀴를 넘어서 산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만이 예수님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후손들에게 기다림의 선물을 이어주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믿음의 바톤을 들고 열심히 달린 후 그 다음 주자에게 넘기고 넘기면서 주어진 경주를 잘 마치었습니다. 그들의 손에 쥐었던 바톤은 아기 예수를 기다리는 기다림의 바톤이었습니다.

신영복 교수님이 삼세대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사는 사람들이 깊은 역사의식을 갖게 된다고 말합니다. 아주 의미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사실을 알았던지 예수님의 조상들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아버지와 어머니가 아들과 딸들에게 바톤을 물려주었습니다.

한편 그들이 기다림의 바톤을 들었기에 그들의 삶이 더 편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도 똑 같은 인생의 길을 거쳤습니다. 때로는 험한 광야의 길을 걸었습니다. 단지 삶의 바퀴를 넘어서 살았던 것입니다. 아기 예수를 기다리며 진흙더미 보다는 별을 바라본 사람들입니다. 아니 아기 예수를 기다리기에 그럴 수 있지 않았을까요?
확실한 것은 예수님의 오심으로 인해서 그들의 기다림은 역사 속에 밝히 빛을 발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대강절의 기다림도 세상 속에 빛이 되어 가고 있음을 아십니까? 우리 모두에게도 기다림의 바톤이 들려져 있습니다.

Origen이라는 유명한 초대교회 교부가 있습니다. Origen은 아주 흥미로운 관찰을 했습니다. 인생이 하나님을 향하는 단계를 42개로 나누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42개의 근거를 성경 두 군데에서 찾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오늘 본문 말씀처럼 마태복음에 나온 예수님의 족보입니다. 42개의 단계를 거쳐서 예수님께 도달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구약 민수기 33장에 나오는데 이스라엘 민족이 40년간 광야 생활할 때 광야에서 진을 친 곳 이름이 나옵니다. 진 친 곳이 42군데입니다.
오리진에 의하면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에서 42번 움직이면서 끝내 가나안 땅에 이르게 되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광야 곳곳에서 시험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한 군데도 불필요한 곳은 없었습니다. 모든 시험을 이기면서 가나안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물론 지기도 하였죠. 좀 더 정확한 표현은 시험에 지면 또 일어나고, 지면 또 일어나고 하면서 40년을 걸었습니다. 42번 캠프를 치면서….

그런데 말이 캠프지 사실은 감옥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불과 구름이 움직이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었으니 말입니다.
곧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에서 42개의 감옥을 지나간 것입니다. 한편 42개의 감옥 안에서 42개의 승리와 희망이 탄생되곤 합니다. 온전한 승리와 희망이 생겨나면 다음 캠프로 움직입니다. 새로운 감옥을 맞이한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일 년 가까운 시간 안에 또 다른 승리와 희망이 탄생됩니다. 42개의 승리와 희망이 탄생되었을 때 그들은 어느덧 가나안 땅에 들어 간 것입니다.
42세대를 이어 온 사람들과 42 캠프, 우연일까요? 42사람과 42 감옥 우연일까요? 이것이 주는 교훈이 무엇일까요?
각 세대는 자기의 캠프가 있지 않을까요? 자기의 감옥이 있지 않을까요? 이 전통은 바로 희망을 만드는 공장이 아닐까요? 그 감옥에서 희망의 꽃을 피우는 것이 바로 우리 각자의 사명이 아닐까요? 이것이 바로 다시 오실 예수를 기다리는 삶이 아닐까요? 아니 우리 각자는 우리의 캠프가 있고 우리가 불러야 할 희망의 노래가 있습니다.

오리진에 의하면 하나님을 향한 단계가 42개가 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우리들의 각자의 인생의 캠프도 42개가 되지는 않을까요? 좋게 말해서 캠프고 무겁게 말하면 감옥. 그러나 그 감옥에서 멋진 희망을 주님과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 주님을 기다리는 자들에게 주신 특권이 아닐까요?
우리들의 인생을 다 마쳤을 때 42개의 희망의 노래를 작곡 작사를 한 사람들이 진정 역사를 산 사람들이 아닐까요? ‘산 역사’의 주인공들이 아닐까요?

Karen Zielinski라는 분이 Multiple sclerosis라는 불치병에 걸렸습니다. 신경계를 망가뜨리는 무서운 병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늘 희망을 잃지 않고 사는 분이십니다. 자기 침실에 한 구석을 기도의 장소로 삼았습니다. 그 곳 이름을 ‘Sacred place’라고 부릅니다.

그 곳 탁자에는 세상을 떠나신 아버님이 간직했던 기도목록노트와 어머니의 기도목록노트가 놓여 있습니다. 한편 자기의 의자 옆에 할머니의 의자도 놓여 있다고 합니다. 할머니와 어머니와 아버지의 존재를 느끼면서 아침마다 기도를 드립니다.
그리고는 몸은 불편하지만 힘든 몸을 이끌고 일을 갑니다. 아침에 드린 기도덕분에 순간순간 평화를 누립니다. 놀라운 확신이 몰려옵니다. all will be well.

그는 35년 동안 기도를 드렸습니다. 질병의 완치를 위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매일 매일 계속 드립니다. 아울러 언젠가 MS가 이 땅에서 치유되는 날을 위해 기도를 드립니다. 그는 확신합니다. 언젠가는 MS치료법이 완성되는 날이 올 것을…. 무엇보다도 기도드리는 한 자신은 살아 있음을…. 그는 그 날을 바라보며 매일 자신의 침실 안에 ‘성스러운 곳’에서 기도드립니다. 기쁨과 희망을 가지고…. 그러기에 그는 오늘도 산 사람의 삶을 살아갑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도 각자의 성스러운 곳에서 주님을 기다리며 기도드리십시다. 희망의 노래의 주인공이 되십시다. 42명 중 한 사람이 되십시다. 42개의 희망의 노래가 하모니가 되어 온 천지를 울리고 있습니다.

Denise Levatov라는 시인의 시입니다.

어떻게 희망을 버립니까?
새 싹이 노래하는데

어떻게 실패를 생각합니까?
이제 막 시작했는데

……

너무나 많은 것이 담겨져 있네요,
꽃 피우길 기다리며
새 싹 안에.

아기 예수를 기다리는 자들은 이러한 눈으로 세상을 보지 않을까요? 그래서 그들은 춤을 춥니다. 사랑합니다. 노래합니다.
“너무나 많은 것이 담겨져 있네요,
새 싹 안에, 꽃 피우길 기다리며.”

성경은 말씀합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고 늙어 죽었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This entry was posted in 2015년 이전 설교. Bookmark the permalink.
No. Title Writer Date
291 아이의 손에 이끌리어 admin 2015.05.03
290 안식의 기쁨 admin 2015.04.26
289 나를 만져보라 admin 2015.04.12
288 갈릴리로 가라 admin 2015.04.05
287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주옵소서 admin 2015.03.29
286 그를 기억하리라 admin 2015.03.15
285 나는 내 양을 알고 admin 2015.03.08
284 나의 친구라 admin 2015.03.01
283 은혜를 입은 자 admin 2015.02.08
282 푯대를 향하여 달려 가노라 admin 2015.02.01
< Prev 1 2 3 4 5 6 7 8 9 10 30 ... Next > 


The Korean Church of Boston (PCUSA) 32 Harvard St. Brookline, MA 02445
교회 : (617) 739 - 2663, (617) 277 - 8097 / Fax : (617) 739 - 1366 / 담임 목사 : 이영길 목사 (781) 467 - 0002
  Powered by The Korean Church of Bost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