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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고에서 오시는 이

날짜 : 2012.12.02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상고에서 오시는 이
성경본문 : 미가 1:8, 5:2-4

http://kcbostonmedia.cponsolny.com/Sermon_video_master/Sermon_20121202.wmv

안도현 시인의 ‘고래를 기다리며’라는 시입니다. 일부만 소개해 드립니다.

고래를 기다리며
나 장생포 바다에 있었지요
누군가 고래는 이제 돌아오지 않는다, 했지요
설혹 돌아온다고 해도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고요,
나는 서러워져서 방파제 끝에 앉아
바다만 바라보았지요
기다리는 것은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다리고, 기다리다 지치는 게 삶이라고
알면서도 기다렸지요.
…….

시인에게는 죄송하지만, 저는 이 시가 뜻하는 숨은 뜻보다는, 한 문장이 인상 깊게 남아서 이 시를 소개해드립니다.
“기다리는 것은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다리고, 기다리다 지치는 게 삶이라고
알면서도 기다렸지요.”

저는 고래구경을 딱 한번 나갔었는데 고래구경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백두산 천지도 대여섯 번은 가야 한번 본다고 하던데 저는 한번 가서 보고 돌아왔습니다. 아마 저는 기다리지 않았었나 보죠. 기다리는 것은 오지 않는다고 시인은 말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오늘 대강절 첫 번째 주일 예배를 드립니다. 대강절은 한 마디로 기다림의 절기입니다. 먼저 메시아의 탄생을 기다리고 기다렸던 이스라엘 민족의 멋진 모습을 축하하며 닮아가려는 절기입니다. 아울러 이제는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모하며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곧 기다림의 사람이 되는 것이 바로 대강절입니다. 이번 대강절 기간 기다림의 축복을 마음껏 누리시기 바랍니다. 본문 말씀을 상고하며 참 기다림의 축복이 무엇인지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기록한 미가는 남왕국의 요담과 아하스 그리고 히스기야 왕 시대에 활동한 예언자입니다. 이 세 왕들은 웃시야왕의 후손들입니다. 웃시야 왕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강성한 나라가 되었었습니다. 그런데 요담을 거쳐 아하스에 이르면서 나라는 부패하여지고 상대적으로 약해지기 시작합니다.
나라가 잘 살다가 못 살게 될 때가 제일 어렵지 않습니까? 바로 이때가 이러한 때입니다. 부자들은 돈의 맛을 보았기에 돈을 놓치기 싫어합니다. 그런데 나라는 갈수록 가난해집니다. 이 때 사람들은 누구를 기다리겠습니까? 자기들을 잘 살게 했던 웃시야왕과 같은 사람을 기다립니다.
바로 요즘의 미국과 비슷한 현상입니다. 미국은 잘 살던 나라의 영화를 맛보았었습니다. 제가 미국에 왔을 때, 30년 전에 왔습니다만, 누님 집에 잠시 머물렀습니다. 가구를 장만하러 나갔는데 누이가 하는 말이, 몇 년 전만 해도 가구는 길거리에 널려져 있어서 한국에서 온 사람들은 살 필요가 없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물론 저희는 살수밖에 없었고요. 그 이후로 미국은 경제적으로 계속 내리막길이 되었습니다.

하여튼 약해져 가고 있는 나라에 살면서 이스라엘 민족은 훌륭한 왕을 기다렸습니다. 웃시야와 같은 왕을 기다렸습니다. 경제 강국을 일으킬 왕을 기다렸습니다. 미국도 한국도 늘 경제를 일으킬 대통령을 찾고 있는 것과 유사합니다.
이런 왕을 기다리는 것은 좋은데 동반되는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다. 부자들은 권력층과 짜고 더욱 부패해집니다. 덩달아 종교인들도 타락합니다. 고기 맛을 봤으니 고기는 놓치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고기 생산량은 현격히 줄었습니다. 결국은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면서 부자는 자기의 부를 계속 유지하려고 합니다. 물질이 우상이 되어 갑니다.

이것이 바로 현재의 미국의 모습이고, 한국도 미국을 닮아 가는 것은 시간 문제일줄 압니다. 그러므로 미가의 예언은 오늘 우리들을 향한 예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아니 우리들을 향한 미가의 예언을 들어 볼까요? 1:8절 말씀입니다.

“이러므로 내가 애통하며 애곡하고 벌거벗은 몸으로 행하며 들개 같이 애곡하고 타조 같이 애통하리니.”

미가는 이스라엘 민족의 모습이 너무 안타까워 애통하고 애곡할 뿐 아니라 벌거벗은 몸으로 행하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미가의 벌거벗은 몸을 보면서 이스라엘 민족은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사실 미가의 이 모습을 보면서 이스라엘 민족이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미가는 이스라엘 민족의 뇌리에 이 메시지를 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웃시야 왕을 기다리는 자들아, 공수래 공수거, 벌거벗은 모습으로 왔다가 벌거벗은 모습으로 갈 텐데, 물질에 매여서 살 바에야 왜 사냐? 물질 때문에 형제자매를 착취하고 권력자들에게 아부하고 종교를 타락시키면서까지 살 필요가 있는가?”

하여튼 미가의 모습을 보면서 이스라엘 민족은 두 가지 반응을 했을 줄 압니다. 한 그룹은, “정말 할 일 없는 사람이네. 이 좋은 세상에 살면서 왜 저렇게 애통해하면서 살아야 해” 그리고는 신경을 완전히 끊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한 그룹은, “우리가 잘 못되어도 무척 잘 못 된 것 같아. 그렇지 않으면 미가 선지자가 저렇게까지 할리가 없는데. 우리가 더 이상 이렇게 살면 안 되지. 우리는 무엇엔가 심각하게 중독이 되어 있어.”
그러면서 이들은 큰 고민에 빠집니다. 어떻게 이 세상 중독에서 헤어 나올 길이 없는가? 고심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생각이 뼛속 깊이 스며들어 있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미가는 이제 놀라운 선언을 합니다. 5:2절 말씀입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큰 고민에 잠겼던 사람들은 깊은 깨달음을 받습니다. 자기들은 지금까지 이 땅의 왕, 자기들의 경제문제를 해결해 줄 세상의 왕을 기다리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웃시야와 같은 왕을 기다리고 있는 자기들의 모습을 일깨워준 것입니다. 자기들이 기다려야 할 왕은 상고에서 오시는 왕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를 깨달은 자들에게 미가는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줍니다. 3, 4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여인이 해산하기까지 그들을 붙여 두시겠고 그 후에는 그의 형제 가운데에 남은 자가 이스라엘 자손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목축하니 그들이 거주할 것이라 이제 그가 창대하여 땅 끝까지 미치리라.”
미가는 상고에서 오시는 이를 소개해 주면서 이 분은 웃시야 왕이 이룩한 그 나라 보다 비교도 안 되는 강성한 나라를 일으킬 것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메시지를 듣고 깊은 고민에 잠겼던 이스라엘 민족은 또 다른 생각에 잠기게 됩니다. 상고에서 오시는 이가 누구신지, 그리고 그가 일으킬 강성한 나라는 어떠한 나라인지 깊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이제 이스라엘 민족은 갈림길에 서게 됩니다. 웃시야냐, 상고에서 오시는 왕이냐? 한 그룹은 웃시야를 기다리는 사람, 한 그룹은 상고에서 오시는 이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되어 갑니다. 웃시야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미가는 그들의 삶의 남은 것은 공수래공수거임을 보여주었습니다. 반면 상고에서 오시는 왕을 기다리는 자들에게는 땅 끝까지 미칠 창대한 나라를 보여줍니다. 그러면 창대한 나라에 속한 자들의 삶은 어떤 삶일까요?

Lisa Lickona라는 천주교인이 대강절 묵상의 글을 썼습니다. 제목은 ‘Worth the trouble.’ 저는 이렇게 저렇게 궁리하다가 다음과 같이 번역해 보았습니다. ‘고난 그 이상의 삶.’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2년 전에 여덟 번째 자녀를 낳았습니다. 자녀의 이름은 Genevieve입니다. 아이는 3개월 반 일찍 태어났습니다. 몸무게는 one pound가 조금 넘습니다. 원래 정상은 6pound이상이 아닙니까? Down Syndrome의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태어나면서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살았다는 증거였습니다.
곧바로 중환자실로 입원합니다. 사실 그 곳에서 평생을 삽니다.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아이의 옆을 지나면서 다른 눈길로 아이를 바라보곤 합니다. ‘이렇게 살 바에야…’ 라는 표정을 짓습니다. 아이가 받는 고난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지나치곤 합니다.
엄마는 반면 매일 아이를 방문합니다. 방문할 때마다 아이를 가슴에 꼭 껴안아 줍니다. 간혹 병원 사람들의 생각이 스며들어 오곤 합니다. ‘이렇게 살 바에야….’ 그러나 그럴 때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고백이 생각이 났다고 합니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마리아처럼 엄마는 이 아이가 어떻게 되던 주님의 뜻에 맡기는 고백을 한 것입니다. 아이는 고귀한 존재라고 생각하면서 안고 또 안아 줍니다. 그러면 이 아이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석 달 만에 하나님 품에 안깁니다. 묵상의 글을 다음과 같이 마칩니다.

“She was worth all the trouble.” 조금 의역합니다.
“이 아이는 고난 그 이상의 존재였습니다.”

One pound가 조금 넘는 아기를 보는 두 눈을 생각하게 됩니다. 한 눈은 ‘이렇게 살 바에야….’ 또 한 눈은 ‘고난 그 이상의 존재였습니다.’
물론 어머니였기에 아기를 보는 눈이 달랐을 줄 압니다. 피가 섞여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원인이야 어떻든 엄마의 아이를 보는 눈은 우리에게 큰 도전을 줍니다.
상고에서 오시는 이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이 엄마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축복을 누리지 않았을까요? 모든 사람들을 상고에서 온 사람으로 보게 되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서로에게 고백합니다. “당신은 고난 그 이상의 존재입니다.”

경제 강국을 일으킬 왕을 기다리고 있을 때는 가난한 사람들이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들을 착취했습니다. 그들을 향해 ‘저렇게 살 바에야’ 하면서 비웃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상고에서 오시는 이를 사모하였더니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모든 사람을 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 그토록 멸시했던 가난한 사람들을 향하여 생전 처음 놀라운 고백을 하게 됩니다. “당신은 고난 그 이상의 존재입니다.” 곧 그들은 상고에서 오시는 이를 사모하는 자체가 놀라운 축복임을 체험한 것입니다. 주님의 나라가 점점 창대해짐을 체험합니다. 곧 그들의 기다림은 즉시로 응답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결단했을 것입니다. 이 분을 사모하는 것을 방해하는 어떤 것도 끊을 것을….
이스라엘 민족은 그들을 방해하는 것들을 어떤 방법으로 끊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알 필요도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 때는 지금보다 훨씬 쉬웠을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대강절을 맞이하여 우리도 상고에서 오시는 이를 사모하고 기다려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도 그동안 웃시야 왕만을 기다리지 않았습니까? 경제강국을 회복시킬 사람을…. 그러면 그럴수록 우리가 사는 세상은 더 작아지곤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상고에서 오시는 이를 기다리는 삶은 어떤 모습일까요? 마음으로만 상고한다고 생각하면 될까요?

독일의 기자 Christoph Koch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이 40 일간 인터넷과 스마트폰 없이 생활한 다음에 ‘아날로그로 살아보기’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는 인터넷 금단 기간 동안의 십계명을 만들었습니다. 몇 가지만 소개해 드리면,
*집 안과 주머니 속에 인터넷을 소지하지 말 것
*내 이웃의 인터넷이나 아이폰, 또는 불랙베리를 탐내지 말 것
*궁금하다면 신문을 읽거나 TV 또는 라디오를 이용할 것
* 내 이웃이 인터넷에서 출력한 내용을 읽지 말 것

이제 첫날이 되었습니다. 어느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야 하는데 전화번호는 당연히 휴대전화에 저장되어 있었습니다. 유일하게 기억하는 전화번호는 아버지의 집 전화번호 하나뿐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전에 아버지 집에 오랫동안 살았기 때문입니다. 휴대전화를 켜서 전화번호만 알아낼까 생각도 했지만 규칙은 규칙입니다. 결국 전화국에 유선전화를 걸어서 전화번호를 알아냈습니다.
점심시간이 되었습니다. 점심을 먹기 위해 집 근처 피자집에 갔습니다. 휴대전화 없이 그런 곳에 간 건 수 년 만에 처음입니다. 그래서 마치 발가벗은 것 같은 느낌을 느꼈다고 합니다. 피자를 기다리면서 앉아 있는 동안 네트워크 접속 중독증의 뚜렷한 증상이 나타났습니다. 소외에 대한 불안. 이 느낌은 세상이 자기 없이도 잘만 돌아갈 거라는 그리고 그것보다 더욱 큰 불안은 마치 자기가 아예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잘만 굴러갈 거란 두려움이 엄습했다고 합니다.
한편 다리는 ‘유령진동’을 느끼고 있었는데 유령진동이란 휴대전화가 들어 있던 허벅지 부분에서 부르르 떨리는 진동을 온몸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전화기를 갖고 있지 않은데 말입니다.

이렇게 시작한 인터넷 금기는 차차 익숙해집니다. 원래 30일을 계획했지만 30일이 지난 후 10일을 더 해보기로 결단합니다. 왜냐하면 30일을 해 보니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이제는 살만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40일을 마치게 됩니다. 사순절을 지킨 것입니다.
드디어 41일째가 되었습니다. 인터넷을 키고 휴대전화를 킵니다. 메일이 1024통이 도착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1024개의 메일을 다 본 후 크게 실망합니다. 그 많은 메일 중에서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혹은 자기에게 의미 있는 메일은 단 한 통도 발견하지 못하였다고 고백합니다.
물론 기자가 인터넷을 금기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이메일을 끊었었습니다. 그래도 40일간 1천여 개의 메일을 받았습니다. 그 중에 하나도 쓸모 있는 이메일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 중 많이 차지하고 있는 것은 역시, 광고! 그는 인터넷의 실체를 보게 된 것입니다.
한편 45일째 날입니다. 인터넷으로 다시 돌아 온지 5일째 놀랍게 변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자기가 도서관에서 책을 뒤적이고 있었습니다. 인터넷 금기의 한 좋은 열매였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그는 결국 인터넷 안식일을 책정합니다. 매주 토요일은 인터넷에서 자기를 멀리합니다.

지난주는 김정수 목사님의 산티아고 순례 여정을 통해서 세상의 시간에서 잠시 벗어나는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많은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김 목사님처럼 산티아고 순례 여정을 떠날 수 있는 분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거의 없다고 생각해도 과언이 아닐 줄 압니다.
오늘은 인터넷에서 해방된 삶을 한 달간 산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 드렸습니다. 사실 Christoph Koch는 종교적인 뜻을 가지고 인터넷 금기를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분의 경험이 대강절을 맞이한 우리들에게 한 도전을 줍니다.

교우여러분, 이 광고 폭탄을 거부할 때 진정 우리는 상고에서 오신 이를 더 가까이 만나게 되지 않을까요? 그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향해서 보는 눈이 새로워지고 이웃을 보는 눈이 새로워지지 않을까요?
대강절 기간 1주일에 하루쯤 아니 하루 중 몇 시간이라도 인터넷 안식일을 정하는 것은 좋은 착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니면 각자의 맞는 방법으로 상고에서 오시는 이를 만나시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것이 참으로 상고에서 오시는 이를 기다리는 삶이 아닐까요?
이 때 어떤 어려움에 처해도 우리 자신을 향하여 ‘고난보다 귀한 존재’라는 생각을 하게 될 줄로 압니다. 이웃을 향해서도 같은 생각을 하게 될 줄로 압니다. 왜냐하면 상고에서 오신 이께서 우리를 그러한 눈으로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모두 주님과 더불어 상고에서 온 사람이 되어가지 않을까요?

교우 여러분, 우리들의 기다림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모하는 바로 그 주님께서 지금 우리를 변화시키고 계십니다. 주님은 당신을 기다리는 자를 간절히 기다리십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이번 대강절에 시인 John Donne의 시가 우리를 도전합니다. (신성 시편 14)

내 심장을 두드리소서, 신이시여
날 데려가 가두소서.
당신이 날 사로잡지 않으신다면
결코 자유로울 수 없고
당신이 날 겁탈하지 않으신다면
결코 순수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John Donne과 같은 고백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러한 고백 없이 과연 상고에서 오신 이를 사모할 수 있을까요? 만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겁탈할 기회를 드려야 할 줄 압니다. 상고에서 오신 이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닮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향하여 외칠 것입니다. “고난 그 이상의 존재입니다.” 이웃을 향하여 말할 것입니다. “당신은 고난 그 이상의 존재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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